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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은 중독이다. 적당한 의심은 관심이지만, 지나치면 이성조차 마음을 통제하지 못한다. 더구나 당사자는 알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착각과 이에 뒤따르는 쓰디쓴 고통을 맛보게 된다. 그 당사자가 바로 나다.
나와 유미는 사귄 지 두 달밖에 안 된 새콤달콤한 관계다. 4월의 따뜻한 봄날에 나는 가까운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분홍색 벚꽃이 부드럽게 내리는 배경 아래 벤치에 앉은 여자를 보았다. 새카만 긴 생머리에 뚜렷한 이목구비, 머리색에 대비되는 노란색 쉬폰 블라우스에 허벅지가 드러난 짧은 점박이 치마를 입은 그녀는 아름다웠다. 아니,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판타스틱하고 고저스하고 내추럴하고 매그니~피센트하게 아름다웠다. 그렇다, 나는 1초, 아니 수백 초분의 일의 미세한 순간에 그녀에게 반하고 만 것이다. 지금 그녀를 놓친다는 것은 내 인생의 최고의 실수가 될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빠졌기에 서슴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고백했다. 다행히 그녀는 연인이 없었고 만남을 승낙했다. 그날로부터 우리의 사랑은 가속도가 붙어 실제 시간보다 더 빨리 사랑 시간이 흘렀다. 실제로 두 달이지만 남들이 보면 2년이나 사귄 커플로 착각할 정도다. 나는 1학년 고등학생이고 유미도 똑같은 고등학생으로 나는 A고등학교를 그녀는 같은 동의 B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평일은 수업으로 바쁘지만, 주말은 데이트를 즐긴다. 데이트 비용은 부모님에게 손 벌릴 수 없어서 휴일 (데이트 안하는 주말도 포함) 마다 알바로 벌고 있다.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초콜릿 케이크 값도 알바비에 포함된다.
“쩡, 먹다 말고 무슨 생각해?”
“응? 아무것도.”
“칫! 나를 옆에 두고 다른 여자 생각한 거 아니냐?”
“나한테 유 말고 없어.”
내 본명은 쩡이 아니라 정우다. 유는 유미.
“나도 쩡 밖에 없어.”
짧은 문장이지만 국어사전 절반을 넘는 분량을 함축했다. 케이크의 달달한 초콜릿 맛을 음미하며 아름다운 유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 너희 가족에 대해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네. 지금 물어도 될까?”
순간 유미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갑게 굳더니 금세 풀려 나에게 말했다.
“우리 가족은 평범해서 말할 게 별로 없는데…….”
“난 유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그래, 두 달이나 사귀었는데 유한데 동생이 있는지 누나가 있는지도 모른다니 좀 그렇잖아. 응?”
사람이 사생활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잘 안다. 그것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거리 한복판에서 벌거벗은 듯한 부끄러움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괴롭더라도 나는 유미의 본연의 모습을 알고 싶다. 서로 깊게 알고 싶어 하는 마음도 사랑이니까.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유미는 이내 작은 입을 열었다.
“우리 집은 나하고 부모님하고 삼촌이 계셔.”
“무슨 일을 하시는데?”
“아빠는 쥐꼬리 같은 월급을 받는 회사원, 엄마는 주부시고 삼촌은 백수야.”
“삼촌은 눈치 보면서 살겠는데?”
삼촌이 직업이 없으리란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데 딱 맞춰서 웃을 뻔했다.
“삼촌이 집안에 있어서 다행이야. 아니면 삼촌이 맡은 집안일을 내가 해야 하니까.” 문득 드라마에서 볼법한 가정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런데 유미에게 남을 이용하는 그런 모습이 있었다니 조금은 놀랐다. 의외로 여왕벌 기질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IT 쪽에서 일해서 아빠보다 기계에 빠삭해. 돈 내고 as 기사를 부를 필요가 없지.”
“그래서 요전에 내가 컴퓨터 고쳐준다고 말했을 때 거절했구나.”
“삼촌은 컴퓨터도 조립하는데 뭐.”
그렇게 실력이 좋으신데 왜 직장에서 나간 거지? 지각을 많이 하셨나.
“빨리 아빠가 승진하셔야 내 용돈이 늘어날 텐데. 그래야 쩡이랑 더 많이 놀지.”
“용돈이 늘어나면 뭐하냐. 너 옷 사는 돈만 아꼈어도 우리 롯데월드에서 놀 수 있었을걸?”
딱 일주일 전이 약속의 날이었다. 언제 유미가 가고 싶다고 했는데 롯데월드에서 마침 무슨 행사를 하고 있어서 티켓을 할인하고 있었다. 절호의 기회를 잡아 티켓을 할인하는 마지막 날을 목표로 둘이서 열심히 돈 모아 가자고 했는데 유미가 신상 옷의 마력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의 약속을 깨버렸다. 나는 화가 나서 “우리에게 더 이상 롯데월드는 없다. 물론 에버랜드도” 라고 선언해 유미를 일시적 코마상태로 만든 적이 있었다.
“쩡이여, 롯데월드 금지령을 해제에 주소서. 이번에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게.”
유미의 엉덩이에 보이지 않는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너무 귀엽지만, 손날로 공기를 가르며 딱 잘라 거절했다.
“어차피 금지령을 해제해봤자 또 할인행사 안 해주면 그만이야.”
“역시 그때 롯데월드랑 옷가게가 손을 잡고 있었던 거야.”
나는 웃으면서 유미의 머리를 살짝 때렸다.
내 가족은 한정식 전문점을 하고 있다. 그것도 동네 5000원짜리 백반이나 파는 곳이 아닌 0이 미친 듯이 붙어있는 고급식당이라 정문을 바라볼 때마다 어깨를 짓누르는 위압을 느낀다. 내가 야심을 가졌다면 오히려 어깨가 가벼워서 날개 달렸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음식집 대를 이을 생각이 없다. 애초에 관심이 전혀 없다. 나 아니면 다른 친척이 알아서 이어가겠지. 음식점보다는 컴퓨터에 관심이 많아서 IT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 요즘 추세에 맞게 스마트폰 게임 회사도 생각하고 있다. 나는 유미와의 데이트를 마치고 지친 몸과 지친 지갑과 함께 오후 6시에 집에 돌아왔다. 부모님과 누나는 가장 바쁜 시간이라 집 안에 아무도 없었다. 아싸 하고 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켜려는데 문득 노래방에서 가사랑 바꿔 잊은 어떤 할 일이 떠올렸다. 머리가 “이보게, 너는 컴퓨터 켤 때가 아니야.” 라고 말하는 듯하다. 분명 밖에 나가기 전에 엄마가 술 배달을 시켰었다. 가족은 일로 바빠서 식당 밖에 못 나가서 주말에는 바깥일을 종종 나에게 맡기시곤 하셨다. 우리 식당은 단골에게 서비스로 과일주를 담가 무료로 제공한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4개의 페트병 안에 담긴 투명한 소주에 사과나 배 같은 과일이 두둥실 떠 있다. 빨리 갔다 와서 게임을 하기로 하고 방에서 검정색 가방을 들고 나와 EBS 교재 대신 과일주를 조심스레 넣고 지퍼를 닫았다.
묵직한 가방과 함께 엄마가 써주신 약도와 지도 앱을 활용해 3곳에 무사히 배달을 마쳤다. 3곳은 내가 잘 아는 집이라 안에서 여러 가지를 먹고 잡담도 좀 하고 나왔다. 술 배달이 인간관계를 거미줄 치듯이 넓히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어느새 묵직했던 가방에 술 1병이 남았고 마지막 장소는 약도를 보아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아마도 새롭게 단골 리스트에 오른 집인가 보다. 단풍 사거리에서 직진하다 소방서 있는 곳에서 방향을 꺾어 거대한 은행빌딩 옆에 찾는 아파트가 있다. 은행빌딩이 하도 커서 몸집이 비실하게 느껴지는 ㅇㅇ아파트 103동 1107호 곁에 서서 눅눅한 습기를 느끼며 페인트가 벗겨진 문을 바라보았다. 약도에 적힌 주소를 다시 확인하고 벨을 누르니 매미 소리 같이 쩌렁쩌렁한 소리가 울렸다.
“혹시 사람 계십니까? 주옥정에서 왔는데요.”
말을 마치고 한 번 더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건가.
“아, 무슨 일입니까?”
응답은 문 안이 아닌 밖에 있었다. 고개를 돌려 계단을 바라보니 러닝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서른은 넘은 남자가 슬리퍼를 신은 채 내 곁으로 다가왔다. 여자로 의심할 만한 긴 장발에 덥수룩한 수염이 폐인의 이미지를 드러냈다. 그에게 풍겨온 진득한 담배냄새에 코를 막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저, 주옥정에서 과일주 배달 왔습니다.”
“아, 그 집이구나. 떡갈비가 그렇게 맛있었는데. 그런데 무슨 술이냐? 거기 가게는 배달도 하나 보네.”
그는 나를 상관하지 않고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물고 들이키고 뿌연 연기를 내뱉었다. 그러다 내 표정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느끼고 다른 손에 든 도자기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단골 분께 서비스 차원에 드리는 거예요.”
담배냄새를 참으며 낯간지러운 영업멘트를 날리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이번 일을 용돈에 가산점으로 적용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공짜 얘기에 자연스럽게 웃음 짓는 그는 빈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 너머에 지독한 진실이 있는지도 모르고 태연하게 발을 디뎠다.
“여기 냉장고에 넣어두렴, 너 중학생이냐?”
냉장고에 대부분을 차지한 8통의 우유 (요구르트를 만드시는 건가? 왜 이렇게 우유가 많은 거지?) 곁에 사이좋게 술을 놓았을 때 곁에서 물었다.
“저, 고등학생인데요.”
키가 좀 작다고 중학생으로 보다니, 나쁜 놈.
“식당 안에서 본 적은 없는데 직원 맞니?”
남자의 인상과는 달리 집 안이 굉장히 깔끔해서 놀랐다. 거실 바닥에 먼지 하나 없고 구석에 위치한 피아노 위에 악보가 각을 딱 맞춰서 쌓여있다. 더러워지면 얼른 닦아내기 쉽게 손이 닿는 위치에 티슈가 즐비하게 놓여 있다. 두루마리 휴지가 선반 위에 원기둥을 이루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구본도 우산도 탁상시계도 화분도 딸기 모양 쿠션도 모든 물건이 경계태세 경보를 받은 군인처럼 자기위치에서 무시무시한 질서를 만들어놓았다. 아마 아내분의 주부 내공이 만만치 않다고 예상한다. 어디를 갔는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직원은 아니고 사장님 아들이에요. 바쁘셔서 배달일은 저에게 맡기시거든요.”
“참한 아들이네. 그냥 가는 것보다 사과 깎아줄 테니까 먹고 가.”
“아니요, 괜찮습니다.”
사양에 ‘담배냄새 찌든 손으로 만진 사과는 됐어요.’ 라는 말을 함축했지만 남자는 못 알아먹었다.
“어허! 이 집에서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다.’ 라는 규칙이 있어서 외부인도 따라줘야 해.”
남자의 힘이 들어간 손을 따라 식탁 의자에 앉게 되어 하는 수 없이 호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투명한 유리접시에 담긴 사과를 포크에 찍어 먹으며 눈길이 자연스레 피아노와 소파 사이로 옮겨졌다. 응시하는 그것은 껍데기가 벗겨진 본체에 드러난 딱딱한 알맹이로 그냥 본체부품이라는 무식한 단어가 아닌 그래픽카드, 하드디스크, 메인보드, 파워 서플라이, RAM……. 인데 아니! 그래픽카드가 지포스 GTX 780이라니, 저런 거물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저기 컴퓨터 그래픽카드로 GTX 780 쓰시죠?”
“그래, 너 컴퓨터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보네? 하긴 요즘 남학생들이 고사양 게임을 많이 하니까 그래픽카드 이름 외우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본체를 열어 놓은 거 보니 직접 설치하시려나 보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IT 회사에서 일한 사람이라 그래픽카드 설치는 직접 해. 지금은 관뒀지만, 정확히 말해서 잘렸지…….”
남자의 얼굴이 급격히 우울해졌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 같은 표정이다. 왠지 나는 이 남자와 비슷한 사람을 알고 있는 느낌이다.
“……빨리 취직해서 유미에게 한 방 먹여야 할 텐데…….”
잠깐! 방금 푸념 속에 여자친구 이름이 들어있는데.
“혹시 유미라는 분은 손님 딸이신가요?”
푸념을 가로막고 그렇게 물었다. 설마 했는데 사람 잡는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 내 누나 딸인데. B고등학교 1학년. 유미 친구니?”
운명의 장난이 틀림없다. 마침 배달 간 집이 여자친구 집이라니. 거실에 사진이 걸려있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다. 저 남자가 유미가 말한 기계에 능숙한 삼촌이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둘러봤을 텐데, 특히 유미 방에 들어가 보고 싶다. 하지만 땡 잡은 기회를 다음에 노려야 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유미에게 아무 말도 안 하고 들어간 것 자체가 실례다. 너무 아쉽지만 유미를 생각해서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앗, 시간이 이렇게. 저 이만 가볼게요. 부모님이 일 마치면 빨리 집에 오라고 하셔서요.”
유미 삼촌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신속히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현관문으로 나섰다. 뒤따라 나오는 삼촌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고 빠르게 몸을 틀어 문손잡이에 손을 대려는데 삼촌이 나에게 말했다.
“벌써 가니? 너희 부모님에게 잘 받았다고 말씀드릴게. 아, 이름이 어떻게 되니?”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침이 꼴깍 소리 내며 목구멍으로 떨어지고 심장박동소리가 귓가를 시끄럽게 만든다. 내 두뇌가 고개를 돌리는 짧은 시간에 LTE-A 속도로 연산한다. 되도록 내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 했다. 이름을 밝혀도 좋은 것인가? 그가 아는 정보는 내가 한정식집 사장 아들이라는 것뿐 유미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유미가 먼저 삼촌에게 남자친구를 알려주었다면 남자친구가 그 사실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른다면 이름을 알려주어도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결론을 도출해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이런 논리는 너무 불확실하다. 그저 나의 예측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가명을 대기엔 껄끄러운 문제를 감수해야 한다. 언젠간 정식으로 여자친구 집에 방문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도 백수인 삼촌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백수생활을 몇 년을 더 지속할 수 있기에, 그때 정식이름을 댄다면 ‘왜 그때 이름을 숨겼니?’ 라고 물을 게 분명하다. 이 경우에 ‘여자친구에게 허락 없이 간 거라 집에 간 사실을 숨기려고 가명을 말했어요.’ 라고 방어를 하더라도 (아직 유미에게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유미에게 이상한 오해를 심어줄 가능성을 주게 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다. 이래나 저래나 다시 오게 될 때를 위해서 그냥 이름을 말해야겠다.
“김정우라고 합니다.”
결론에 따라 그렇게 말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삼촌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이 쾌활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정우 너 유미 남자친구 맞지? 언제 유미가 말해준 게 생각났다. 방금 모른다고 얼버무리려 했더니.”
이럴 수가! 유미는 이미 나를 소개한 모양이다. 삼촌은 손쉽게 나의 고민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렸다.
“유미가 참 사람을 잘 골랐네. 아니지, 네가 먼저 고백했다면서? 유미가 운이 좋았던 거네. 다시 들어와라. 이참에 누나한테도 소개해주게.”
거부하려는 의사를 알려야 하는데 삼촌이 내 말도 듣지 않고 현관에서 질질 끌어냈다. 나는 예전에 ‘놀이동산금지령’을 선포했을 때의 유미처럼 공황상태에 빠졌다. 결국, 유미는 운명의 힘을 빌려 손도 쓰지 않고 나에게 복수를 한 셈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떤 방 앞에 서서 삼촌이 뭐라고 지껄이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 대부분은 유미의 어떤 점이 좋니? 같은 시답지 않은 질문이었다.
“누나, 얘가 딸 남자친구래!”
뭐가 즐거운지 삼촌은 힘차게 말하며 문을 열었다. 한 벽을 차지한 장롱 곁에 바닥에 깔린 이불 위에 누운 여자가 있었다. 방금 삼촌이 누나라고 말한 걸로 보아 유미의 엄마인가보다. 그녀는 얼굴을 장롱을 향한 채 자고 있는데 유미랑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다. 유미가 40대쯤 됐을 때의 미래가 현실에서 실제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헤어스타일과 몸집만 달랐다. 항상 스트레이트를 유지하는 유미가 저런 파마를 한 적이 없다.
“에이, 모처럼 왔는데 자고 있네. 하는 수 없지.”
삼촌은 아쉬운 듯 풀죽어있고 반대로 나는 안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와서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저는 이만.”
이번엔 방해가 없었다. ‘이제 돌아가자!’ 라고 맘먹고 발길을 돌리면서 그것을 보았다. 약간 열린 장롱 틈에 약간의 햇빛이 비추었다. 그곳에 어둠이 잠들어 있고 어둠 속에 숨어있던 그것은 내가 봐선 안 될 것이었다. 하지만 보았다.
찢어진 포장지를 나온 하얀색의 기저귀를
“엄마, 삼촌 나 왔어.”
이 익숙한 목소리는 분명히 유미다. 하필이면 이때 오다니!
“무슨 신발이 또 있지. 어디서 많이 봤는데?”
네가 사준 거다. 이렇게 유미 목소리 감상할 시간이 아니다. 내 자취를 감출 방법이 두 가지뿐이다. 창문으로 뛰어내리던가 장롱 안에 숨던가. 목숨이 한 개이므로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어둠 속에 들어가 문을 꼭 닫고 아주 미세한 틈으로 밖을 관찰했다. 유미의 발소리는 멀어지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다가 멈추고 우리가 있는 방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든 그녀의 모습이 내 심장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괴성을 지를까 봐 두 손으로 입을 움켜쥐었다. 삼촌은 그녀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옷을 잘 바꿔왔겠지?”
“당연하지! 돌아가면서 옷의 유혹을 잔뜩 받았지만, 가까스로 뿌리치고 왔어. 난 이제 의지박약이 아니야. 근데 이 냄새는 담배?”
담배에서 악센트가 올라갔다. 삼촌은 사고를 저지른 어린이처럼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딱 한 개비 피웠다. 진짜야.”
내 기억으론 재떨이에 담긴 담배잔해가 수북했다. 유미는 이어서 흡연은 몸에 안 좋다. 자기 같은 청소년에게 영향이 크다 등 구구절절 연설하는데, 삼촌은 귓등으로 듣는지 연신 하품을 했다.
“삼촌은 정말 말을 안 들어.”
그렇게 푸념을 하며 유미는 비닐봉지에 든 물건을 꺼냈다. 그녀만큼이나 호리호리한 체구와 투명한 재질, 머리에 붙은 꼭지를 봐도 젖병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그녀가 왜 젖병을 들고 있는 거지? 기저귀는 또 뭐고?
“엄마는 벌써 잠드셨네. 뭘 했기에 피곤하시데?”
유미가 젖병을 들고 점점 내가 숨어있는 장롱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는 나는 공포에 휩싸여 그 상태로 얼어붙었다. 유미가 손잡이에 손을 대려 하자 삼촌이 빠르게 몸으로 문을 막았다.
“젖병은 네 방에 넣어 놔. 장롱 안은 꽉 찼거든.”
나이스 엉클! 나이스 타이밍!
“왜 장롱 안이 꽉 차? 아침에 정리해서 비워뒀는데. 비켜”
삼촌의 장벽은 몸집만큼이나 탄탄할 줄 알았는데 속은 실속이 없었다. 유미가 한쪽 팔을 잡고 옆으로 당기자 여자아이 하나를 못 이기고 종잇장처럼 팔락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안 돼, 유미야!”
패자의 절규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미는 서서히 문을 열었다. 틈이 벌어지며 들어오는 빛의 양이 절망적으로 늘었다. 나를 감춰주던 어둠은 빛에 못 이겨 휘발해버리고 유미의 시야에 나의 형체가 드러났다. 예상대로 눈이 엄청나게 커지면서 작은 어깨로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빠르게 젖병을 뒤로 숨겼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나는 절망을 감추고 거짓 웃음을 지었다.
“안녕, 유미야.”
“어, 어떻게 여기를…….”
“미안해! 어떻게 된 거냐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차가운 눈물. 유미의 눈가에 가득 찬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마음이 쓰라려 눈물을 피해 바닥을 내려다봤지만, 고인 물 자국이 눈물 대신 괴롭힌다. 아아 나는 유미를 울려버린 건가.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마음에 단단히 박아둔 단 한 가지 약속이 “유미를 울리지 말자.” 였는데 겨우 두 달을 버티고 무참히 깨버렸다. 내 운명을 저주한다.
“나가”
짧고 간결한 한마디. 그것은 한 발의 산탄같이 터지고 무수한 탄알을 흩날렸다. 모든 탄알이 나의 온몸에 적중했다. 여기에 더 있어선 안 돼. 쓸쓸히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지나쳐 방문 밖으로 나왔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잇달아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방 안은 유령이 지나간 발자국도 없었다.
스마트폰을 닳아질 때까지 만져서 비누로 만들 생각이 없는데 계속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지만, 나의 마음도 모르는지 더디게 지나갔다. 물끄러미 화면 상단을 응시하다가 뭔가 딱 뜨면 문자인가 싶어 긴장했지만 모두 앱 업데이트였다. ‘그럼 내가 먼저 문자를 보낼까?’ 하고 생각하면 그만두자는 생각이 잇따라 떠올라 서로 상쇄했다. 난 유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 내공 있는 연인은 제6 감각의 힘인가 영혼의 연결인가로 텔레파시가 가능하다던데 지금 당장 발휘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하는데 시간을 낭비하다 정신력이 다 한 듯 졸음이 몰려왔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지난 일이 꿈의 시나리오가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베갯머리 위에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에 아무 꿈도 안 꾸고 일어났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간다. 그날의 사건이 꿈이었다면 반에 들어와 자리에 앉은 이 시점에서 모두 잊었어야 한다. 하지만 굳이 기억하려 애를 쓰지 않아도 너무나도 생생히 기억난다. 상당한 양의 우유와 기저귀와 젖병, 그리고 눈물. 내가 모르는 사이에 각인된 네 가지 이미지가 생생하게 보인다. 우유와 기저귀와 젖병으로 연상되는 단어는 두 가지뿐이다. 아기와 어린 반려동물. 그런데 반려동물은 가능성이 적다. 유미는 어렸을 때 키우던 애완용 거북을 실수로 죽인 경험이 있어서 다시는 동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삼촌이 키우던 애를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라는 가설이 있다. 하지만 그는 흡연자이므로 어린 동물을 키우기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유리네 집에 아기가 있는 것인가? 생각해봐. 다른 사람에게 줄 선물일 수도 있잖아. 아니다, 분명 기저귀 포장지는 찢어져 있었다. 선물용은 아니다. 분명 유미의 집은 아기를 키우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단서가 부족해 아기의 정체를 생각하기가 어렵다. 삼촌의 아기일까? 유미의 동생일까? 다른 사람이 맡긴 걸까? 첫 번째와 두 번째 가설은 유미의 입으로 틀린 가설로 입증되었다. 어제 데이트를 떠올리면 카페에서 유미가 가족소개를 했을 때 엄마, 아빠, 삼촌만 소개했다. 아기가 가족이라면 굳이 자신에게 숨길 이유가 없다. 그럼 세 번째 가설을 검증해보자. 누군가 맡겼다면? 그렇다면 유미가 젖병을 숨기고 눈물을 흘린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 행동은 나의 무단침입 (실질적으로 무단은 아니지만) 보다 아기를 나에게 들켜서 한 것으로 해석해야 올바르다. 무단침입이 원인이었다면 젖병을 숨길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던졌을 테니까. 어째서 유미는 아기의 존재를 숨기려 했는가. 아기에게 장애가 있어서 남에게 알려지기를 꺼렸나? 이 가설을 검증하려면 직접 아기를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집에 다시 가려면 이번에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한 번 더 유미에게 걸리면 말 그대로 끝.
어둠이 깊게 내린 오후 10시의 하굣길에 나뭇잎 하나 흔들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윤동주가 느낀 기분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를 거의 학교에 보냈는데도 학교에서 한일이 거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친구가 나보고 멍 때리고 뭐하냐고 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호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오늘만 몰래 내지 않은 건데 배터리가 10% 안팎에서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10%가 될 때까지 유미에게 단 한 건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유미도 고등학생이니 폰을 수거하겠지만 나를 생각했다면 내지 않았을 것이다.) 유미의 마음속에 정우라는 남자는 이미 떠나버렸는지 그놈의 소식이 통 오지 않았다. 도대체 유미야, 너는 무슨 생각을 하니. 나는 어떻게 해야겠니. 생각과 함께 길을 걸었더니 발걸음을 빨리하지도 않았는데 일찍 집에 도착했다. 누나는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있고 아빠는 거실에서 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좋아하는 맥주 빈 병과 마른안주 조금 남은 접시를 들고 부엌으로 가시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오늘은 빨리 왔네? 평소에는 어디 오락실 갔다 와서 늦은 거야?”
엄마가 나를 보고 한 소리가 겨우 그거다.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한지 알아주셨으면.
“야구 끝났다. 너희 보고 싶은 거 봐라.”
술 들어가셔서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신 아빠는 그렇게 TV를 즐기는 타입이 아니다. 야구는 꼭 보지만 야구가 끝나면 펑퍼짐한 몸을 이끌고 그냥 안방으로 쌩 가버리신다. 결국, TV 앞에 빈 공석은 누나가 차지했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누나의 뒤태가 아빠와 비슷했다. 일주일 전에 뱃살 가지고 놀린 나에게 몰라보게 달라지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다이어트는 물 건너가 버린 모양이다. 리모컨을 사정없이 누르며 화면을 빠르게 넘기다가 어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소리만 들은 엄마가 혀를 찼다.
“세상에 요즘 어린 것들이 책임감도 없이 일을 저지른다니까.”
그 프로그램은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을 일주일 동안 촬영한 내용을 담았다. 이번 주 주인공은 싱글 맘이었다. 연예인 섭외를 받을만한 아리따운 미모의 여대학생 (하지만 유미가 더 예쁘다.) 에게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기가 있다. 앞머리가 휑한 게 머리는 덜 자란 귀여운 앤데 불쌍하게도 아빠가 없다. 남자는 자기 욕망을 채우고 대가를 치르지 않은 채 도망가버린 인간쓰레기다. 여대학생은 그저 자신의 실수를 탓하며 남자가 짊어야 했던 짐까지 혼자 짊어졌다. 그녀가 수업받는 동안은 부모님이 아기를 돌보다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 어수룩한 솜씨로 아기를 다루다가 잠을 재우면 다시 부모님에게 맡기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간다. 대학생이면 친구랑 같이 클럽이나 시내에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을 텐데 세 곳의 아르바이트로 놀 시간이 전혀 없다. 그래 봤자 마트에서 젖병 사고 기저귀 사고 옷 사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는다. 그나마 틈틈이 열심히 공부해서 탄 장학금으로 학비 걱정을 덜었다. 만약 장학금을 타지 못했다면 어쨌을까? 화면을 보는 내 마음도 싸해진다. 아기를 보는 여자의 혼탁한 눈에 앞으로 아기가 성장해서 겪게 될 고통이 비춰 보였다.
“내가 저 애 아빠를 만나면 당장 몽둥이로 패대기를 치란다. 정우야, 너도 잘 봤지? 여자친구를 사귀면 저렇게 문제 발생시키지 말고 정말 책임감 있게 신중히……. 정우야, 듣고 있니?”
엄마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두려움으로 요동치는 마음상태로는 일반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그녀를 무시하고 내 방에 들어가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까부터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고 고통에 시름 했다. 머리를 가득 채운 혼돈의 씨앗은 의심이었다. 의심은 중독이다. 적당한 의심은 관심이지만, 지나치면 이성조차 마음을 통제하지 못한다. 더구나 당사자는 알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착각과 이에 뒤따르는 쓰디쓴 고통을 맛보게 된다. 그 당사자가 바로 나다. 유미는 나에게 아기를 숨겼다. 그 아기가……. 유미의 아이라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나는 아기의 단서가 있어서 아기가 이미 바깥에 나왔다고 단정 지었는데 실제로는 유미의 뱃속에 있다면? 기저귀 포장지를 찢어놓은 건 품질 검사하려고 그랬다면? 나를 만나기 전에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어 아기가 생겼고 나와 사귀던 중에 몸에 이상을 느끼고 진단해 뜻밖의 결과를 듣게 된다. 임신이라는. 유미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결단을 내렸다. 아기를 지울 것인가 키울 것인가. 결국, 아기의 생명을 결정했다. 내가 받아들이어야 할 진실의 무게는 감당할만한 수준을 훌쩍 넘었다. 그리고 그것의 힘은 절대적으로 진리라고 믿었던 유미에 대한 사랑에 너무나도 간단히 균열을 일으켰다. 뇌리에 깊숙이 잠식한 과거의 망령은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정지된 기억 속에 들어와 유미의 몸에 달라붙었다. 연예를 시작하고 처음 내 손목을 잡은 그녀의 하얀 손이 병균을 진득진득하게 가진 듯이 더럽게 느껴지고 둘이 난간에 기대어 넘실대는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흘긋 쳐다본 분홍색 입술에서 나오는 따뜻한 입김은 공장 굴뚝에서 내뿜는 매연보다 지독했다. 미움으로 더러워진 이미지는 바닥 아래로 깊게 추락했다. 눈가에 휴대폰이 보인다. 마음을 바로잡고 어젯밤에 쉬지 못했던 폰을 들고 문자 버튼을 눌러 전달대상을 유미로 설정하고 문자를 적었다. 아주 짧게 ‘나에게 숨기지 마. 토요일 오전 10시 집에 찾아갈게.’ 라고 썼다. 내 마음을 모두 표현하기엔 너무나도 짧았지만 직접 만나서 전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집에 온다고 했으니 그녀는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와 유미의 결판을 짓는 문자를 전송했다. 예상대로 10분이 지나 폰이 울렸다. 앱 업데이트가 아니라 그토록 바라던 유미의 문자였다. 유미도 나처럼 짧은 글을 보냈다. ‘그래’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나랑 같은 생각이다. 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니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아기 머리 같은 보름달과 은은한 빛을 내는 별이 떠 있었다. 그걸 보니 강원도에 계시는 할아버지가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유달리 세상이 평화스러웠다고. 평화스러운 밤하늘이 앞으로 일어날 참혹한 미래를 암시하는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에 시선을 돌렸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억제하기 힘든 의심으로 멍든 마음과 피폐해진 몸을 이끌고 유미 집 앞에 멈춰 섰다. 눈앞에 있는 철제문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유미 생각에 머리털이 곤두섰다.
“딩동”
벨 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지고 안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보폭이었고 유미는 아닌 것 같았다. 이윽고 그전에는 의식하지 않았던 귀를 괴롭히는 쇳소리와 함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열어준 사람은 그전과 같은 모습인 유미네 삼촌이었다.
“어서 와라. 유미가 널 기다리고 있다.”
활발한 성격 덕분인지 삼촌의 목소리는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옷매무새를 단정시키고서야 첫발을 디뎠다. 그를 따라 들어온 거실에 바로 소파에 앉아있던 유미가 보였다. 집안이라 간소하게 민소매 티와 파도 위에 고래가 수영하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겨우 일주일 못 봤는데도 처음 만난 사람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있잖아 유미야.”
“따라와.”
유미가 일어서서 내 팔을 잡고 어딘가로 질질 끌었다. 삼촌은 별 상관도 안 하고 고개를 저었다. 부엌을 넘어 깊숙한 안쪽에 방이 하나 있는데 문에 아기자기한 자기 사진을 붙여놓은 걸 보아 유미의 방이 분명했다. 이럴 상황은 아니지만 처음 유미의 방을 가게 되어 마음에 설렘이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횡재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방안은 작고 예쁘고 간결했다. 책장에 대부분을 차지한 영어 듣기 책이나 영문법 책이 눈에 들어온다. 더 구경하고 싶다만 유미에게 집중했다. 그녀의 권유로 책상 의자에 앉고 본인은 가벼운 몸으로 책상 위에 살짝 올라갔다. 우리는 얼굴을 정면으로 맞대고 몇 센티 떨어져 눈빛을 서로 교환했다. 바로 작은 방에서 남녀의 1대1 대면. 정면승부다.
“미안해.”
유미가 말 그대로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그 말이 나의 전투의지를 순식간에 떨어뜨렸다. 유미의 페이스에 흔들리지 않게 정신을 가다듬고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
“나에게 숨겼다는 사실이 굉장히 화가 나. 그게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말해줄 수 없는 끔찍한 것이라도 나에게는 말해줬어야지.”
“벌써 알아버린 거야?”
“……그래…….”
유미는 충격에 빠진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날 믿지 않아서 그런 거야?”
“아니야! 널 생각해서 그랬어.”
부정의 의미가 강하게 들렸다. 나는 높아진 말소리에 그대로 받아쳤다.
“거짓말! 넌 자기 생각만 하고 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 안방에서 자기방어를 위해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줬잖아. 지금도 잊히지 않아.”
“그 순간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어. 진심으로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야. 너도 내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잖아. 나보고 뭐라 할 자격이 없어.”
그 말 진심으로 하는 거야? 불순한 과거를 아무렇지도 않게 숨기고 자기 일이지만 남자친구로서 내가 상관했어야 할 아기를 나에게 상의도 없이 결정해버린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할 소리냐고.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너랑 깊숙한 관계가 되고 싶었지 실상은 연애 장난감일 뿐이잖아.
“힘들었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주일이었어. 너에게 준 상처와 나 때문에 말도 못 할 괴로움에 시달렸다는 걸 알아줘. 언젠가는 진실을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이 있었어. 하지만 아무 준비도 없이 네가 먼저 알아버렸으니 난 어떻게 해. 내 마음이 약한 걸 알잖아. 네가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든 것만큼이나 나도 너에게 안겨준 것을 마음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일단 현실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나약한 선택을 했어. 그런 나여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그런 나는 아직도 널 좋아해.”
그 순간, 유미의 눈에 맺혀있던 눈물이 넘쳐서 눈가를 넘어가려는 위태로운 상황이 펼쳐졌다. 눈물의 움직임에 시간이 갑자기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의지는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 찬 나를 버리고 열렬히 유미를 사랑하는 순수한 나로 되돌려놓았다. 현실과 진실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바로 눈앞에서 두 번의 실패를 막아야 하는 내가 되었다. 나는 눈물보다 빠르게 생각에 잠겨있는 유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깜짝 놀란 그녀는 눈물을 단숨에 수챗구멍으로 보내버리고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그 눈을 똑똑히 응시하며 마음을 순수하고 온전하게 드러내 보였다.
“진실을 없는 걸로 만들지 않겠어. 받아들일 거야. 그것에 뒤따른 고통도 모두 받아들일 거야.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함께 이겨내는 게 사랑이잖아. 사실 나 널 굉장히 미워했어. 내가 잡고 있는 이 손이 더럽고 네가 내뿜는 입김이 역겹다고 생각했어. 너의 이미지를 부숴버리면 마음이 통쾌할 줄 알았어. 하지만 그 반대야. 그럴수록 상처받는 쪽은 네가 아니고 나였어.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데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오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마찰을 일으켜 고통을 만들었어. 어떻게든 날 널 싫어하게 만들 수 없어. 그러고는 못살아. 나도 널 계속 사랑해.”
몸으로 압력과 열을 느꼈다. 모든 감정을 마음의 파도로 무너뜨리고 단 사랑만이 남은 두 사람이 서로 안았다. 밀착한 심장과 밀착한 마음을 교류했다. 이 행동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너 그동안 아기 임신하느라 엄청나게 힘들었지. 배가 안 나온 걸 보니까 2~3개월 사이겠네. 나중에 사진 보여줘. 유미를 닮아서 귀엽겠다.”
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유미가 내 말뜻을 이해한 다음의 미래는 별의 예언이 적중했다. 유미의 예쁜 손과 어울리지 않는 날카롭고 긴 나이프 같은 손톱이 얇디얇은 티 한 장을 간단히 뚫고 허리를 깊숙이 찔러 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유미야……. 무슨 짓이야.”
불길한 징조를 느낀 내 목소리가 쥐며느리처럼 움츠려졌다. 나는 유미에게서 떨어지려고 하는데 유미가 안은 힘이 강해서 안은 것이 아니라 붙잡힌 신세가 되었다.
“해도 되는 말이 있고 해선 안 되는 말이 있는 말이 있는데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이게 뭔 소리야. 인격이 바뀐 것도 아니고 말이 다 끝난 마당에 왜 화를 내는 거지?
“유미야, 이것 좀 놔줘.”
“오냐, 네 말대로 해주지.”
유미는 순순히 날 놔주었다. 그 대신 내 허리를 공격한 손톱을 무참하게 휘둘렀다. 얼굴, 손목, 어깨, 목이 차례대로 희생되었다.
“으악! 사람 살려!”
내 SOS 신호를 받고 거친 발걸음으로 삼촌이 유미의 방안에 들어왔다. 그의 시선에서 나를 잡아먹을 듯 서서 손톱을 세운 유미와 바닥에 쭈그려 팔로 얼굴을 보호하고 있는 찌질한 정우가 들어왔다.
“뭐야 너희, 부부 싸움하니?”
“내가 임신이라니 무슨 헛소리야!”
유미의 앙칼진 목소리가 나를 위협했다. 저렇게 무서운 여자였다니……. 내 여자친구가 울버린이라니…….
“나를 그렇게 생각했었구나. 그런 과거를 가진 그런 여자로 여겼다는 거지?”
“야, 이것도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알아낸 거라고. 젖병, 기저귀, 숨기는 태도. 가능한 예측은 한 가지밖에 없잖아.”
“내 배를 봐라. 이게 임산부 배냐.”
“임신 초기니까 별로 안 나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면 헷갈리지 않게 뱃살을 빼던가. 으악! 내 눈!”
방어벽이 눈꺼풀이 전부인 연약한 눈을 공격하다니, 치사하다. 하지만 고통이 먼저다.
“유미 남자친구가 아직 모르는 모양이네. 누나가 지금 깨어있으니까. 정식으로 소개해줘.”
삼촌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나처럼 독신으로 살라니까.’ 라고 말하려다 만 것 같다. 삼촌이 먼저 나가고 우리도 그를 따라 방을 나갔다. 유미는 나를 안방으로 데려다 주었다. 과거와 다름없는 풍경에 한 가지 다른 점은 유미네 엄마가 깨어있었다. 너무나도 닮은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는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엄마……. 아니, 어머님은 (입에 잘 맞지 않은 단어다.) 날 보고도 물끄러미 쳐다보시기만 하시고 아무 말도 없으셨다. 반면에 딸인 유미를 보고는 반응하고 입을 여셨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셨다.
“엄마 나 밥 줘.”
아 아, 그랬던 거였어. 이것이 진실이었구나. 유미는 부엌으로 가서 능숙하게 우유를 타가지도 돌아와 젖병을 어머님에게 드렸다. 몸과 어울리지 않게 다 큰 어른이 작은 젖병을 물고 힘껏 들이켰다. 마치 아이처럼. 진실은 이것이다. 모순에 이르는 병.
“우리 엄마 치매야.”
자, 잠깐만! 천천히 생각해보자. 유미가 임신했다는 추리는 냉장고를 차지한 우유에 의해 깨진다. 임신했다 해도 내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면 임신 초기수준인데 세상에 나오기 한참 먼 아기를 위해 유통기한이 짧은 우유를 8통이나 사들일 이유가 없다. 그리고 기저귀 말인데 포장지 모양만 대충 보고 어린 아기용이라고 착각해버린 게 잘못된 추측을 이끄는데 큰 한몫을 했다. 나중에 자세히 보니 ‘성인용’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병이나 장애로 배설을 자율적으로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이렇게 치매 환자를 위한 기저귀였다. 그리고 안방에서 유미와 내가 직면했을 때 그녀는 어떻게든 말을 얼버무려서 아기에 대한 의심을 회피할 수 있었다. 삼촌의 아기라고 속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녀는 의심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엄마가 잠에서 깨어있을 때 치매 행동을 나에게 보였다는 의심이 나처럼 착각을 일으켰다. 나는 잘못된 추리로 수많은 손실을 받은 셈이 되었다.
“엄마의 모습이 부끄러웠어. 누구보다도 특히 너에게만은 보여주기 싫었어. 적어도 네가 이해해줄 거라는 확신을 얻기 전까지 말이야.”
“그랬구나.”
평범한 아기를 키우는 것도 힘들다고 얘기하는데 몸이 어른인 아기를 키운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할 고통일 것이다. 적어도 아기는 행동에 자유가 없지만, 감시가 없으면 치매 환자가 어디를 나가 어떤 사고를 일으킬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저항 행동이 심하면 큰 사고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아기로 인한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그 사람은 아기의 당연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이해해주겠지만 치매 환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요양원으로 옮기라고 달달 볶을 것이 분명하다. 더욱더 절망적인 건 아기는 끝이 확정적이지만 치매 환자는 끝이 불확실하다는 점이 큰 차이가 있다. 이 생활은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지? 확정이 없는 불안감은 최고의 공포다. 불행하게도 유미네 엄마는 이른 나이에 조기 치매를 앓으셨다. 치매는 노인병이라는 인식은 의미가 없다. 청년도 치매를 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미가 나에게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에 엄마에게 고개 숙인 내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정우라고 합니다. 유미 남자친구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저희 집이 한정식 식당을 운영하는데요. 맛이 기가 막힙니다. 외국산 재료를 쓴 식당과는 차원이 달라요. 언제 시간이 되면…….”
나의 태도에 유미는 놀라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마음, 나의 마음은 치매 따위를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첫댓글 현대적인 용어를 많이 썼는데 괜찮을련지. 주인공이 고등학생이라서 그렇게 표현한 건데 과하다는 느낌이 있네요.
아직은 내용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이해가 가지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