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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0일월요일 [(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아시리아가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가 남왕국 유다만 남게 된다. 예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탓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시며,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기 전에 제 눈의 들보부터 빼내라고 하신다(복음).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앞에서 물리치시니, 남은 것은 유다 지파뿐이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우리는 눈을 가진 덕분에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을 가졌다고 모두가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과 보고 싶은 것이 다르듯이, 무엇을 보느냐는 마음의 눈에 달려 있습니다. 내 이웃의 잘못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쉽게 보입니다. 하지만 내 허물은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에 대한 험담은 쉽지만, 자신에 대한 험담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가 봅니다. |
화가 날 때면 산책을 나가십시오
고령의 노인이 의사에게 건강 진단을 받았는데 아주 건강했습니다. 의사가 노인에게 건강하게 산 비결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50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는데, 결혼 초에 아내와 이런 약속을 했지요. ‘내가 화나면 당신이 부엌으로 비켜주고, 당신이 화가 나면 내가 산책을 나가겠소.’ 라는 거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정말 산책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건강해진 거지요. 하하.”(‘부부로 산다는 것’, 이즈덤 하우스 참조)
신혼 초에 내렸던 두 분의 결정, 참으로 지혜롭고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이지만 결혼은 현실입니다. 보통 현실이 아니라 쓰디쓴 현실입니다. 서로 마주보기만 해도 스파크가 번쩍 번쩍 튀는 꿈같은 나날은 한 순간이지요. 결혼은 매일같이 ‘사랑에 밥 말아서’ 먹고 사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일 년, 이년, 삼년이 지나가면 아무리 외면하려고 기를 써도 배우자의 결함이 슬슬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그 결함은 주로 어떤 것들입니까? 돌아보면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어서 웃음이 나옵니다. 마음 크게 먹으면 참아 넘길만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한두 번 조용히 말로 이야기할 때 마음에 안 드는 버릇 좀 고쳐주면 좋을 텐데, 죽어도 협조를 안 합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속상하게 하니 더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속으로 판단하고 분개하는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한심합니다. 한 평생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답답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마다 상대방을 마음속으로 심판하고, 단죄하고, 불같이 화를 내는 대신 밖으로 나가보십시오. 근처 공원을 거니십시오. 가까운 야산을 오르십시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과 접하십시오.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보십시오. 옹졸했던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미워하고, 단죄한 일이 떠오르면서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부분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습득해온 버릇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인내와 기도로만이 해결 가능한 것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내 판단이 100% 잘못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 단죄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어쩔 수 없는가봅니다. 우리는. 자기 코가 석자면서도 늘 상대방에 신경 엄청 씁니다. 자기 정리도 안 되는 사람이 이웃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 날카로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지 모릅니다.
상대방이란 존재를 잘 견뎌내는 것, 이웃을 잘 참아내는 것은 덕 중에서 큰 덕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한 평생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우리들입니다.
때로 상대방도 나를 순교자적 인내로 참아가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께서 배우자를, 가족을, 동료를, 형제를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완전함과 거룩함에로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존심 강하고 콧대 높은 우리의 스승으로 배우자, 가족, 동료, 형제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나날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우리의 생활이 아무리 부끄러워도 하느님께서는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끝없이 용서하십니다. 자비를 베푸십니다.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우리가 이웃들을 향해 할 일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그들을 단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없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새 출발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어느 날 나귀가 등에 짐을 잔뜩 지고 가다가 그만 개울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귀는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 개울을 건너던 개구리고 허우적거리는 나귀를 보며 소리쳤습니다.
“아, 시끄러워, 이 바보 같은 녀석아, 개울에 빠졌다고 왜 그리 호들갑이야. 날 봐, 난 너보다 힘도 없고 몸집도 엄청 작지만 그래도 헤엄쳐서 잘 건너잖아. 그렇게 소리 지를 시간에 헤엄을 치려고 노력을 해 봐.”
사람은 대부분 이 개구리처럼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 다 못해도 내가 하나 잘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그 판단은 반드시 나에게 돌아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강냉이 장수 아저씨가 공자로 강냉이를 나누어준다고 했을 때 빈손으로 나갔습니다. 그 아저씨를 그렇게 자비롭게 판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는 내 자신이 자비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기준으로 그 아저씨가 내 손 가득히 강냉이를 주어도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밥그릇부터 시작하여 큰 대야까지 가지고 나왔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들을 비웃었지만 그 아저씨는 각자 가져나온 그릇에다 강냉이를 하나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저는 겨우 손바닥에 조금만 담아올 수 있었습니다. 각자 그 아저씨를 평가한 대로 되돌려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고 하시며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심판하는 잣대로 하느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내가 남을 거짓말쟁이라고 심판했다면 하느님 앞에서 정말 완전히 거짓이 없는 한 나도 거짓말쟁이라고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나의 심판 기준으로 나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완전하게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울 수 있다면 내가 어떤 죄를 지었든 하느님도 나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판단 잣대를 내가 버려서 하느님께서 나를 어떤 잣대로 심판해야 할지 모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잣대로 하느님만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 잣대로 심판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판단은 나에게 그대로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터지기 몇 해 전, 오하이오주의 큰 농장에 한 초라한 소년이 찾아와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주인은 일손이 모자랄 때라 소년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3년 뒤 이 ‘머슴’이 자기 딸과 사귀는 것을 알고 내쫓았습니다. 그로부터 30년 뒤 주인은 낡은 창고를 수리하다 그 소년의 짐을 발견하고 내용물을 살피던 중 소년의 이름이 제임스 A 가필드라는 것과 현직 20대 미합중국 대통령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농장 주인은 대통령 사위를 맞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도 단점이 아주 많습니다. 노아도 술주정꾼이었고 모세는 말더듬이에 용기 없는 사람이었고 삼손은 호색가였으며, 다윗은 호색가에 살인자였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호색가에 우상 숭배자였으며 우리의 첫 교황님인 베드로는 하루에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사람이고 바오로도 교회의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 역사의 큰 획을 그으신 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대한 인물로 세우셨는데 우리가 어찌 그들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심판자는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노상강도의 이야기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란 이름은 ‘늘리는 자’란 뜻입니다. 그는 앗티카라는 지방에 살면서 자기 영지를 지나가는 나그네를 잡아 쇠 침대 위에 누이고 결박했습니다. 그래서 여행자의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몸을 잡아 늘여 침대 길이에 맞추고, 반대로 길이가 침대보다 길면 긴만큼 잘라버려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테세우스라는 영웅이 이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 그가 여행자들에게 했던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라는 말은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융통성이 없다는 뜻의 관용구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마음 안에 그런 침대가 있다면 빨리 버립시다. 언젠가 그 침대 위에 내가 누이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조: 한태환,예화포커스)
“형제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자기 형제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율법을 심판하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심판자가 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정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그분은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이기에 이웃을 심판한단 말입니까?” (야고4,11-12)
<<짧은 묵상>>
저는 신학생 때 성경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의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박사학위를 하려면 석사 때 학과시험, 종합시험, 논문의 점수를 종합하여 평균 90점이 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논문 점수를 너무 낮게 받아 성경으로 계속 박사학위를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되고 다시 유학 나와서는 교의신학으로 바꾸어 석사부터 다시 해야 했던 것입니다.
사실 저는 처음에 성경을 공부하면 그리스도에 대해 더 많이 알 것 같아서 남들이 어려워 꺼리는 성경을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부하다보니 성경은 신학보다는 수학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성경신학 내에서는 성모님의 원죄 없으심이나 승천과 같은 교리에 대해서는 언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쓰여 있는 문자에서 벗어나는 해석을 하면 너무 비약한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식의 공부는 저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느끼고 박사학위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마음먹은 대로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논문을 제출할 때 논문지도 교수님이 저에게 대단히 화가 난 것이었습니다.이유는 그 신부님은 제가 박사학위를 이어 쓰려는 줄 알고 지도해 줬는데 저는 한국 들어가서 서품 받겠다고 하기 때문이었습니다.그 분은 서품 받고 바로 나와서 논문을 이어서 쓰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너무 지쳐서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할 수 없을 것 같고 일단 한국에 들어가서 서품 받고 보좌생활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너무 지쳐있었기에 약간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고 신부님은 논문발표 때 당신이 어떻게 하는지 한 번 보라고 하셨습니다.
어차피 논문은 제출한 것이니 학위는 딸 수 있는 것이고 그러면 서품 받는 것도 문제없고, 그리고 논문 점수가 낮으면 굳이 주교님께 공부 못하겠다고 변명을 대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유학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논문발표는 지도 교수님과 다른 두 분의 교수님이 함께 들어오십니다. 제가 논문의 줄거리를 발표하자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답하기도 이전에 논문 지도 교수님은 “이거 다 베껴 쓴 거야.”라고 두 교수에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논문에서 베껴 쓴다는 것은 일종의 도둑질이고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두 명의 교수의 눈빛이 갑자기 바뀌며 지도교수와 한 몸이 되어서 저를 나쁘게 판단하였고 그렇게 통과는 되었지만 박사를 계속할 수 없는 점수를 주었습니다.
사람의 판단이 얼마나 부적절하고 정의롭지 못한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담당 교수는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다고 당신이 직접 교정해 준 것까지도 모두 남의 것을 베껴서 쓴 것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교수들은 학생의 말은 들어볼 생각도 안하고 지도 교수의 말만 듣고 학생을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좋게 판단 받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좋게 판단해주지 않는다고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심판자이신 하느님께만 정의롭게 판단 받으면 그만입니다. 사람은 하느님까지도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판단하면서 저지르는 큰 잘못은 남들을 심판하면서 자신이 하느님의 지위에 오르는 교만을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심판관이 되면 그만큼 완전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기에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그 잣대로 자신도 심판을 받고 그러면 죄인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남에게 되질하는 바로 그대로 너희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남을 항상 좋게 평가하고 좋은 면만을 보면 남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도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을 평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교만해 있다는 것이고 남을 높인다는 것은 그만큼 겸손해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래서 낮아지면 높아질 것이고 높아지려하면 낮아질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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