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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묵상글 들 ( 부활 8부 수요일-같은 영의 같은 운명.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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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8부 수요일-같은 영의 같은 운명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가 한 일은 기시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평행 이론과도 같은 느낌을 줍니다.
기시감이란 전에 본 것을 다시 보는듯한 느낌을 말하는 것이고,
평행 이론이란 시간과 장소가 다른 두 사람 사이에
비슷한 일이 벌어지거나 그런 운명을 말하는 거지요.
이를테면 미국의 두 대통령 에이브라함과 케네디 대통령은
100년의 시차를 두고 대통령이 되고 암살당하는 등
여러 면에서 비슷한 것이 많은 운명이었다는 거지요.
이런 면에서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한 일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일과 거의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가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던 사람을 고쳐주신 일이지요.
두 분 다 당사자들이 청하지도 않는데 환자와 불구자를 고쳐주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평행 이론처럼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운명이고
같은 일을 하게끔 되어있었기에 그리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아니면 베드로가 한 것은 스승이 하신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한 거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만일 그런 것이라면 베드로는 어쩌면 아주 무모한 것을 따라 한 것입니다.
따라 할 것이 따로 있지 어찌 병자를 고쳐주는 일을 따라 하는 겁니까?
고쳐주겠다고 했다가 못 고쳐줄 수도 있는데
아주 자신 있게,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청하지도 않은 사람을 고쳐줍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주님과 같은 운명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같이하고, 가신 길을 같이 갑니다.
같은 운명이기를 거부하여 잠시 주님을 배반한 적도 있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배반한 것을 꼬집어
세 번 물으시고, 그리고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 양 떼를 돌보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이미 그렇게 하기로 선택을 한 대로 한 것일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의 선택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선택한다고 제가 주님처럼 병자를 고쳐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주님처럼 사랑하겠다거나
그래서 주님처럼 수난을 당하거나 죽는 그런 겁니다.
그러나 부활의 힘이나 치유의 능력은 선택이 아니라
그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주셔야지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같이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시며 파견하실 때
주신 것이고,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령을 받으면서 받은 능력일 것입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는
말처럼 베드로는 실로 주님 외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소유할 때 주님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주님의 모든 것을 따라 하게 되는 것이며,
주님을 소유하기 위해 다른 것은 하나도 소유하지 않는 거지요.
그러니 우리도 이것을 묵상하고
스승 엘리야의 영을 받은 엘리사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베드로처럼,
주님의 영을 받고 주님을 소유한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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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아이가 목청껏 울고 있습니다. 얼굴까지 새빨개지면서까지 말입니다. 이때 주변의 이목을 강렬하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 엄마는 서둘러 구석으로 가서 아기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그 뒤에 이 아기는 어떠했을까요?
방긋방긋 웃으며 자신이 지금 기분 좋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이가 왜 울었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아이는 이런 표현을 한 것이 아닐까요?
“저 지금 굉장히 불편해요. 저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 불편함이 사라지자, “저 너무 기분 좋아요.”라면서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불편함을 울음으로 외친 이 아기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선 잘한 것일까요? 잘못된 것일까요? 자신의 무력함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오히려 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이 아기처럼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불편함, 어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언제까지 고백해야 할까요? 당연히 해결될 때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간절하게 기도로서 고백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해결되지 않았을 때 쉽게 주님의 반대편에 서서 불평불만으로 터뜨립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주님께서 도움을 주셔도 깨달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의 자세는 끝까지 주님께 고백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두 제자는 슬픔에 젖어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지만,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것에 실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의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자, 더는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옆에 계셔도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할 것 없이 주님을 찾고 주님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코 나의 청원이 들어줄 때만 알아볼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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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향수를 뿌리는 것과 같다. 뿌릴 때 자기에게도 몇 방울 정도는 묻기 때문이다(탈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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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먼저 제대로 보세요
여전히 코로나로 인해 자영업자들이 매우 힘들다고 하지만, 더 어려운 시간을 겪은 곳은 종교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개신교 측에서 확진자가 많이 나와서 개신교 쪽에서도 스스로 “자기들의 모습이 부끄럽다”라고 말합니다. 일반 사람들에게 사람을 살려야 하는 종교가 사람을 죽이는 종교처럼 비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비판이 더욱 커졌습니다.
열심히 성당에 다니는 어머니에게 딸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성당에 왜 나가요? 교회가 얼마나 부패했는데요?”
그러면서 어머니가 성당에 가지 않게 하려고 교회의 세속적인 모습, 상업적인 모습들을 계속 말하면서 열심히 비판했습니다. 한참을 듣던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 뭐 눈에는 X 밖에 안 뵌다더니, 넌 어째서 그런 것밖에 못 보니? 난 예수님 한 분만 보여서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더라.”
교회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망스러운 모습이 교회 전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서 교회 전부를 봤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판을 하기 전에, 나는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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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 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 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예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믿음이 무너졌다고 여긴 까닭에 절망하고 슬퍼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으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깊어져야 하고, 변화되어야 하고, 정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들은 먼저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실망과 절망에 빠질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고 슬퍼질 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뜻과 생각이 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눈이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시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세 과정을 봅니다. 그리고 이는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렉시오 디비나)의 세 과정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열리게 되고(open mind), 가슴이 열리게 되고(open heart), 우리의 뜻이 바뀌게 되는(open will) 과정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개방과 말씀의 수용과 말씀으로 말미암은 변형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지성을 동반하여 깨달아 알아듣고, 알아들은 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으며, 믿는 바를 그분의 뜻에 따라 실현함으로서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외적인 눈이 열리고, 속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리고, 마침내 그분을 뵙게 되는 일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입술에 가까이 계시고,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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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분이 먼저 알려주셔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무슨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할 것이고 지금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큰일을 치르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침묵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 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오늘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죽었으니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이제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과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사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낌새를 알고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 하는 기쁨을 차지했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아보기가 무섭게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알 것을 알았으니 더는 거기 남아계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성경 풀이를 듣고 마음이 타올랐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를 배우게 됩니다. 마음을 재빨리 움직일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믿는 마음’, ‘듣는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청하지 않고 ‘듣는 마음’(1열왕3,9)을 청한 이유를 함께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꼭 붙잡으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1,8). 미루지 않는 사랑에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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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4,13-35: 엠마오의 제자들
두 제자가 길을 가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과 유대인들의 불의한 짓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모르고 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함께 걸으시면서 다정하게 말을 건네신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17절) 제자들은 눈으로 그분을 보았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스승님께서 그들과 함께 길을 가신다. 그분이 바로 길이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걷고 있지 못했다. 그분은 그들이 길을 벗어나 헤매고 있음을 아셨다.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18절) 그리고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좌절과 상처를 감추지 않고 곧장 의사이신 그분께 모두 털어놓았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21절)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그들의 모든 바람을 수포가 되게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려고 성경을 풀이해 주신다. 그들이 실망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미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예언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풀이해 주셨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마음이 불타올랐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구약의 말씀을 설명하신 다음에야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어,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임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아직 빛을 알아보지는 못하고 있다.
떼어진 빵 조각이 눈을 열어주는 열쇠다. 엠마오의 식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인 동시에 성사로 주님의 부활을 기리는 교회의 성찬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축복이 담긴 빵을 떼어 나누는 행위가 이루어질 때마다 그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서 사라지신 것은 이제부터 말씀과 성찬 안에서 믿음으로 당신을 모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빵을 떼어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그 빵은 우리가 매일 먹는 빵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된 빵이다. 두 제자가 주님을 알아보게 한 것도 그 빵이었다.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그분께서 그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성체성사임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성체성사로 그분을 알아봄으로써 하나가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오늘 복음 역시, 이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다른 제자들과 나누기 위해 얼마나 서둘렀는가를 볼 수 있다. 즉 예루살렘까지 ‘30리 길을’ 서둘러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께 대한 체험을 이웃과 나눌 수 있을 때 완전히 자기의 체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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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 31)
부활하신
주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오히려
단순하고
소박한 우리
일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난다.
거꾸로
뒤집어 보면
우리 일상은
그야말로
놀라운
신비이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차고 넘치는
주님의
사랑이다.
내어주시는
주님 사랑이
바로
부활이다.
사랑에도
쉼이 필요하다.
멈추었다
가는 쉼도
길을 가는
여정안에
참으로
소중하다.
부활은
특별하지
않다.
특별하지
않기에
특별한 것이다.
우리의
보는 눈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길에서 주님을
다시 만난다.
나누시는
말씀과
나누시는
빵 안에
부활이 있다.
말씀과 빵의
따뜻한
초대이다.
따뜻한 초대가
따뜻한
부활이 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다.
사랑은
엠마오의
저녁처럼
주님과 함께
편히 쉬는 것이다.
동행과 휴식
사이에 다시
타오르는
마음이 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부활이 있다.
눈이 열리는
것이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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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실망’과 ‘포기’의 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은 ‘믿음’과 ‘희망’과 ‘기쁨’의 길입니다.
엠마오로 갔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두 제자는 예수님 덕분에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9-24)”
여기서 “기대하였습니다.” 라는 말은,
“기대했는데 실망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믿었고,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허망하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이신 분”이
십자가형을 당한 일 자체도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당하는 모습’이 너무 무기력했다는 점도 크게 실망하게 된 이유였을 것입니다.
십자가 수난 과정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하느님의 힘’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는 말은,
두 제자가 생각하고 있었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메시아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두 제자는 로마제국이 예수님 앞에 굴복하는 것을 보기를 희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희망하고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일이 전개되었습니다.
두 제자의 ‘실망’은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1)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긴 했지만, 메시아이신 분이
무기력하게 죽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실망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진짜로 메시아이신 분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면,
십자가 수난을 당할 때, 아니면 수난을 당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박해자들을 제압하셨어야 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실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3) 두 제자는 자신들이 직접 체험한 ‘예수님의 힘’을 ‘하느님의 힘’으로 믿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힘’으로 로마제국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수난을 당하시는 것을 보고서 실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4)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체험한 ‘예수님의 힘’이
‘하느님의 힘’은 아니었나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실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떻든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가, 십자가 수난과 죽음 때문에
크게 실망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갔습니다.>
주일 아침에 있었던 일도 두 제자에게는 기대와 실망이 반복된 일이었습니다.
두 제자는 여자들이 전하는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듣고서 “예수님께서 정말로
부활하셨을까?” 라고 기대를 했는데, 무덤에 직접 가서 확인한 사도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시 실망했습니다.
(두 제자는 부활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지,
실망감도 그렇게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시는데(루카 24,27),
아마도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의 이유와 의미를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속죄 제물로
당신을 바치신 일이라고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전해 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진실이라는 것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두 제자는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그들의 ‘실망과 포기’가 ‘새로운 믿음과 희망’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냅니다.
두 제자가 완전히 변화된 때는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29-31).”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3-35).”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마음이 열렸고,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양들을 먹이시는 목자이신 분’, ‘생명의 주님이신 분’의 모습을 보았고,
그 모습에서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두 제자가 당신을 알아보자마자 사라지셨을까?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점은 두 제자가 전혀 놀라지 않았고,
기쁨에 가득 차서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확신한다면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든지 안 보이든지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것은,
새로운 믿음과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서 신앙여정을 다시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참된 신앙인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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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눈이 가리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까이에서 함께 걸으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눈이 가리어 알아보지 못할까요? 가려 있는 우리의 눈은 언제 열릴 수 있을까요? 집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는 절망하거나 실패하였을 때입니다. 엠마오로 걸어가는 제자들은 과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워 주실 줄 알았던, 그래서 자기 생애를 내맡겼던 분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의 눈이 가려집니다. 그렇게 걷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무슨 일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믿고 따랐던 예수님, 말씀과 행동에는 힘이 있어 마치 모세를 보는 듯하였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켰듯이, 그분께서 로마 점령군에게서 구해 주시리라 믿었는데, 그래서 이스라엘을 함께 다스릴 줄 알았는데, 그만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성경 전체에서 흐르는 수난과 영광에 대하여 들은 제자들은 지금까지 영광만 누리고자 하였던 자신의 욕망의 길과 죽음까지 내어 주시는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눈을 가리던 비늘이 떨어져 나갑니다.
성경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온 생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에 이르는 사랑, 이 고단하고 힘든 사랑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마음이 타오르고 눈이 열립니다.
과테말라에서 고통받는 아이들과 함께 사는 한 신부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언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냐면, ‘내가 아이들한테 어떤 마음으로 함께하고 일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 때예요.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사랑이 고난받는 것인 줄 몰랐니? 고난 다음에 영광이 온다고!’ 힘겨움이 찾아올 때, 이 단순한 이치를 왜 자꾸만 잊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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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니, 일어나 걸으시오!
인류는 구세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때를 기원으로 하여 그 전후의 역사를 구분합니다.
그런데 이 기원의 형식상 시점은 그분의 탄생이지만 사실상 시점은 그분의 부활입니다.
구세주 탄생에서 드러나는 강생의 신비는 부활의 신비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세상이 창조된 이래 가장 큰 사건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지으신 하늘과 땅은 그대로이되,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사람이 새로이 창조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사람이 새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주는 은총의 계기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인 부활은 그리스도인 개개인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가톨릭교회는 세례로 다시 태어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네 가지 덕행을 가르칩니다.
다시 태어난 삶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부활의 은총이라 부르는데,
이 은총을 받을 수 있는 도덕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노력이 네 가지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사추덕(四樞德)이라 합니다.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보는 지덕(智德), 선함의 용기를 내는 용덕(勇德),
의롭게 살아가는 의덕(義德) 그리고 주어진 물자와 시간과 관심 등을 절제하는 절덕(節德)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의 은총에 있어 첫째로 요구되는 지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스승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데 대해
무척이나 실망해서 허탈한 마음으로 엠마오 마을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허름한 나그네 차림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들은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소식은 물론,
대신 무덤에 발현한 천사들이 그분이 살아 계시다고 알려주었다는 소식까지 듣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루카가 전해준 것인데, 마르코나 마태오가 전한 복음서에는 이 소식이
좀더 자세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갈릴래아로 먼저 가셨으니 갈릴래아로 가서 그분을 만나뵈오라는 전갈이었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전갈을 듣고도 그 두 제자가 갈릴래아가 아니라 엠마오로 가려던 것은
자신들이 직접 보지 못했다는 이유, 단 한 가지 때문이었습니다(루카 24,24).
답답해지신 예수님께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의 말씀을 비롯하여 성경 전체에서
메시아의 오심과 수난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예언되어 있는 대목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의 말씀 전례를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뜨겁게 타오른 그 두 제자는 그분께 하룻밤 묵어가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빵을 들고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마도 떼어낸 그 빵조각을 나누어주실 때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와 똑같은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두 제자가 단박에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비로소 알아볼 수 있었겠지요.
이는 오늘날 미사의 성찬 전례를 상기시킵니다.
선하게 살아갈 용기를 주는 용덕과 의롭게 살아가는 의덕
그리고 절제의 덕과 관련해서는 오늘 독서가 좋은 실제 사례가 되어 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자 시절과 달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옵고 나서 믿음이 담대해지고
용기도 굳세어졌으므로, 태생 불구자를 만났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통하여
그를 낫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우리는 태생 불구자가 아닐 수 있지만, 용기와 정의와 절제를
발휘하는 덕행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못한 불구자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면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얼마나 많은 영세자들이 세레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매 주일마다 미사에 참례하면서도,
마치 영적인 소경처럼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선을 실행할 용기도 잘 내지 못하는 것이고,
의롭게 살 각오도 그토록 어려운 것이며, 절제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정상적인 신앙인이라면 부활의 은총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몸이 정상이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듯이, 영혼이 정상이라면 자유롭게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정의를 각오할 수 있으며 절제도 어렵지 않게 실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용기의 덕과 정의의 덕 그리고 절제의 덕은 어디까지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뵈옵는 지덕에서 비롯됨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또 얼마나 많이 배운 신자들이 이 지덕을 행하지 못해 헤매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 부활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시고 또 심판주이심을 확인해 주는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모르면서, 그 중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
세상 지식 조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오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스스로 감히 무신론자임을 자랑스럽게 자처하는 지식인들이라면
오늘 복음 말씀을 겸손된 마음으로 귀담아 듣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진리를 모른 척하면서, 우리의 능력으로 행하는 선, 우리의 양심으로 행하는 정의,
우리의 인내로 행하는 절제란 얼마나 허약하고 부질없는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나자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어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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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 이후의 국제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각 나라가 봉쇄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코로나19 초기에 대부분의 나라는 봉쇄조치를 취했습니다. 코로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봉쇄조치는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데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백신의 개발이 늦어지고, 코로나19의 전파가 더욱 확산되었다면 봉쇄조치는 더 길어졌을 겁니다. 미국의 주도로 코로나19를 잠재운다면 제2의 ‘PAX AMERICANA'가 시작될 수 있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제질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중국의 주도로 코로나19를 잠재운다면 ’PAX CINICA'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중국은 코로나19 초기에는 혼란이 있었지만 코로나19를 일찍 종식시켰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중국은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서는 협력(Cooperation)하고, 무역에 대해서는 경쟁(Competition)하고, 인권과 가치에 대해서는 분쟁(Confliction)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중국도 코로나19를 종식시키지 못한다면 코로나19를 효과적으로 대처한 나라들과 국제적인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PAX UNIVERSALIS'라고 합니다.
강한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으로 국제사회의 질서를 유지했던 적이 있습니다. 역사는 당시를 ‘PAX ROMANA'라고 부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the roads lead to Rome.)’라는 말이 있습니다. 2,000년 전에 로마는 예술, 문화, 건축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로마는 종교적인 통합을 이루었고, 교회는 로마의 제도와 법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로마가 이루어놓은 길을 따라서 전해 질 수 있었습니다. 정치와 종교를 통합한 로마는 인류의 문명을 한 차원 높일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 않았다.(Rome was not built in a day.)’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로마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위대한 업적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끈질긴 노력 끝에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사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뉴욕에 오면 뉴욕의 법과 질서를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전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PAX CHRISTIANA'입니다. 삶의 중심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돈도 없었습니다. 힘도 없었습니다. 문화적인 역량도 없었습니다. 조직과 제도도 없었습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있었습니다. 그것이 박해를 이겨내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힘과 세상의 가치가 교회에 들어오면 언제나 갈등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웅장하게 건축된 성전은 교회를 지켜주지 못하였습니다. 완벽한 제도와 교리가 교회를 지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헌신했던 신앙인들이 교회의 주춧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우리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돈이 없어도, 힘이 없어도, 명예가 없어도 우리는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전에 좋아했던 성가 ‘엠마우스’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주님의 이집에 모셔 들이면 기쁨에 겨워 가슴 뛰오니
길에서의 이야기마저 하시며
우리와 한상에 자리하시어 주님의 빵을 떼시옵소서.
가난한 인생들 소원이오니
밤바람 차갑고 문풍지 떠나 주님의 음성이 호롱불 되고
주님의 손길은 따스하오니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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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아름다운 삶
- 예닮의 여정 -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확실한 것이 세월이요 죽음입니다. 아무도 나이들어 늙어감을 막을 수 없고 때되어 맞이하게 되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파스카의 봄이 지나면 곧 여름이 되고 신록과 더위는 한층 더해질 것입니다. 모두가 다 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며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저와 순교복자수녀회 진천 ‘무아無我의 집’ 피정집과는 인연이 참 깊습니다. 제 마음의 고향집 같이 참 푸근하고 편안합니다. 태령산 중턱의 옛 사제관을 그리며 2년만에 도착한 무아의 집, 피정집과 사제관은 상전벽해, 완전히 변해 있었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내적혁명을 통한 내적변화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비탈이 사라져 평평해 있었고 사제관 자리에는 예수 성심삼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축복 가득한 분위기의 새 건물의 피정집에서, 사제관에서 역사적인 첫 피정을 갖게 되었으니 참 감사합니다. 다 변화해도 내 순수한 ‘마음의 고향’과 ‘예수님’만은 영원했으면 좋겠습니다. 삶은 변화의 여정입니다. 참 많이 강론 주제로 택했던 ‘여정旅程’이란 말마디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참 아름다운 삶-예닮의 여정-’입니다. 누구나의 소망이 참 아름다운 삶이며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자 도반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깊어가는 아름다운 예닮의 삶일 것입니다.
죽음은 ‘무無’에로의 환원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낳아 하느님이 집으로 돌아가는 ‘귀가歸家의 여정’입니다. 제 즐겨하는 묵상이 인생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해 보는 것이며, 일년사계로 압축해 보는 것입니다. 제가 2000년 8월말 이곳 무아의 집 피정집에 피정지도차 왔을 때 51세의 시점을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확인해 보니 오후 2시쯤의 초가을 같고, 21년 후인 2021년 4월 지금은 73세 오후 4시쯤의 초겨울 같다는 생각에, 아버지 집으로의 귀가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처럼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압축해보면 내 삶의 시점이나 지점이 확연히 드러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삶을 살게 될 것이며, 하루하루 주어지는 하느님 선물에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요즘 예수님 부활 대축일후 말씀의 주제는 대부분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만남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만남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영원한 고질병인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유일한 답도 우리 삶의 영원한 목표目標이자 방향方向이며 중심中心이자 의미意味이신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이 빠진 삶은 살아도 참으로 사는 것이 아닌 완전히 유령같은 헛것의 삶입니다.
참 삶은 예수님을 날로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참 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루카복음 말씀과 제1독서 사도행전 말씀의 배치가 참 고맙습니다.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가르침과 깨달음을 줍니다.
엠마오 도상의 여정이 상징하는바 우리 예닮의 여정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여정중인 두 제자들과 함께 한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셨지만 이들은 눈이 가려 함께 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신 임마누엘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지만 우리 역시 눈이 가려져 있다면 만날 수 없습니다.
하여 성경 말씀공부에 미사전례 참석입니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은 미사전례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제자들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고백에서 보다시피 복음의 전반부는 미사로 하면 ‘말씀 전례’에 해당되고, 후반부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사라지셨다’는 내용은 미사로 하면 ‘성찬전례’해당 됩니다. 그러니 매일 미사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이 예닮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을 주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엠마오 도상의 여정은 예닮의 여정에 근본적 요소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기도하라’, ‘공부하라’는 기본적 가르침에 환대의 영성입니다다. 미사 공동전례기도에 항구하고 성경 말씀 공부에 항구하며, 만나는 이웃을 따뜻한 마음으로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환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났듯이 우리 역시 일상의 크고 작은 이웃 환대를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온전한 영육의 균형잡힌 건강을 위해 ‘기도하라’, ‘공부하라’에 이어 ‘일하라’, ‘운동하라’ 꼭 둘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주신 참 좋은 선물이 파스카의 예수님과 만남의 선물입니다. 바로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한 삶자체가 이웃에겐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파스카의 예수님을 선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의 결정적 모범이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이었던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이를 치유하는 다음 대목은 읽을 때마다 늘 신선한 충격에 감동을 줍니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하고 말하였다.’ 눈맞춤의 아이 컨택트를 시도하는 베드로의 사랑입니다.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베드로가 말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얼마나 아름다운 살아있는 장면인지요! 파스카의 예수님과 하나된 베드로야 말로 최고의 영적 부자이자 자유인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만남의 선물로 치유의 구원에 새롭게 부활한 태생 불구자입니다. 주님은 친히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 하나된 우리의 영육을 아픔과 병을 말끔히 치유해주시며,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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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을 통해 미사의 흐름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5)
예수님의 사랑의 제사인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마음을 모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미사는 주님 현존의 잔치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루카 24,16-17)
예루살렘에서 겪은 실패 체험으로 낙담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질문을 통해 그들 마음의 고통을 끌어내어 주십니다. 마치 미사가 시작되면 구원의 신비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해 참회의 시간을 가지면서, 주님 앞에 나서기 죄스럽고 부끄러운 모습, 죄악과 걱정, 근심을 그분께 내보이며 자비를 청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루카 24,19)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미사 때 우리가 바치는 신앙 고백과는 달리 그들의 신앙 고백은 아직 불완전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난과 죽음의 희생을 잊은 자기본위적인 기대였기에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믿고 희망한 대로의 결과를 손에 쥐지 못했지요. 그래서 침통하고 낙담했습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7)
이는 말씀의 전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독서자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내용이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요.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제자들이 예수님을 붙듭니다. 그들이 혼자서 더 멀리 가시려는 듯 보이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거처와 식탁에 초대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열리고 더 관대해진 듯 하지요. 미사의 봉헌 예식에서 우리는 은총을 얻은 바를 주님께 정성껏 바치고 또 가난한 이웃과 기꺼이 나눕니다. 손을 내미는 마음이 곧 봉헌이지요.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0-31)
예수님께서 빵을 나누어 주실 때 제자들이 그분을 알아봅니다. 빵은 그분께서 내어 주시는 당신의 몸입니다. 우리도 미사 때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을 모시면서 그분의 현존을 누리지요.
"그러나 그분께서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31)
예수님께서 사라지십니다. 하지만 두 제자의 심장과 영혼, 존재 안에 깊이 각인되시지요. 미사 때 성체께서 우리 안에 들어 오심으로써 당신의 형체는 사라지지만, 우리 안에 녹아들고 흡수되어 우리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영한 성체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길이 남아 우리가 그분과 하나되고, 종래에는 그분이 되게 해 줍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엠마오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빵을 받은 뒤에야 뒤늦게 깨닫습니다. 말씀의 식탁과 성체성사는 각각 그 자체로도 완전하지만, 서로를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두 식탁에 온전히 참여하는 이들의 지혜와 통찰을 강화하여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5)
이제 파견과 선포의 때입니다. 예루살렘이 두렵고 깨진 꿈에 실망해서 고향을 향하던 이들이 가던 길을 돌이켜 수난의 도성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을 다른 제자들에게 선포하지요.
이는 미사를 마치며 세상으로 파견되는 우리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축 처진 어깨와 복잡한 마음, 무거운 발걸음이나마 주님을 향해 말씀과 성찬에 식탁에 참여하는 이는 은총으로 변모되어 그 사랑을 선포하는 이가 됩니다. 오늘 엠마오 제자들이 체험했듯, 미사는 곧 파견의 잔치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파견받은 이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구걸하는 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물질적인 희사를 바랐지만 그들이 가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파견된 이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지요. 그리고 이 나눔은 그에게 당장의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 건강을 되돌려 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한때의 두려움과 무지와 의혹을 딛고, 주님 이름에 의지해 주님의 능력을 전하는 진정한 사도로 거듭납니다. 미사를 마치고 파견되는 우리가 비록 가진 것 없고 능력 또한 미소해도, 우리가 가진 오직 하나 예수님의 이름이 지닌 무한한 능력을 믿으며 담대히 나아갈 때 반드시 그분께서 일하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쩌면 우리의 영적 여정 안에서 엠마오 제자들과 예수님의 만남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와 동행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거룩하고 역동적인 깨달음의 여정을 충만히 걸으시길 기원합니다. "무슨 일이냐?" 하시는 예수님께 눈과 귀,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 마음을 쏟아놓읍시다. 그분께서 격려하시고 도와주시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도 역시,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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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그들은 눈이 가리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24,16)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예수님의 두 제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간직한 채로,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약11km)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곳으로 무거운 발길을 옮깁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아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의 눈이 조금씩 열립니다.
마침내는 식탁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그 빵을 먹고 그들의 눈이 완전히 열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고,
그들은 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24,32)
볼 수 있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느님을 믿는 이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굳게 믿고 따르는 이들은 보이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 곧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좋았다."라고 감탄하신 하느님의 창조물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특히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너를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봅니다. 그러니 말과 행동으로 너를 함부로 대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믿는 이들의 참모습이요,
믿음의 결과인 은총이고 기적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믿는 이들 안에서 일어나는 은총과 기적에 관한 말입니다. 말씀과 빵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과 온전하게 하나가 될 때 기적이 일어나고,
그 힘으로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과 독서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라지고 말 것과 탐욕에 눈이 멀지 말고,
말씀과 성체 안에 머무는 자녀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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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은 건너갑니다
그 유명한 엠마오 복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한때 예수님으로 인해 잘 나가던 제자들, 예수님과 함께 하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제자들이었는데, 다들 ‘이제 뭐해먹고 살아야 되나?’하며 낙담해 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엠마오라는 마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말마디 그대로 잘 나가다가 미끄러져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믿었던 예수님, 그래서 자신들의 미래를 걸었던 예수님,
마지막 보루이자 희망이었던 예수님께서 저리도 맥없이 돌아가셨습니다.
귀향길에 나선 제자들의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깨에 힘이 완전히 빠졌습니다. 터덜터덜 맥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 표현에 따르면 침통한 표정으로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두 제자 사이로 예수님께서 슬쩍 끼어드십니다.
그리고 자상하게 인생 상담을 시작하십니다.
갑작스레 끼어드신 예수님의 출현에 두 제자는 꽤나 당혹스러웠습니다.
물론 아직 그분이 예수님이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에 들어오신 예수님이셨기에 두 제자는 별 거부감 없이 스스로를 무장해제 시킵니다.
일말의 경계심도 의구심도 없이 오랜 친구처럼, 편안한 스승처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최대한 거부감이나 부작용이 없도록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십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어느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성목요일 만찬석상에서 하신 똑같은 모습으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제야 제자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우리의 귀향길에 함께 걸으시는 예수님,
우리의 인생길에 슬그머니 끼어드시는 예수님,
우리 구차스런 살림살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예수님, 참으로 은혜롭고 마음 따스한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심하고 낙담한 두 제자들 사이로 끼어드심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건너가게 만드십니다.
무지에서 깨달음에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흐릿함에서 명료함으로, 오류에서 진리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게 만드십니다.
우리에게도 보다 확실한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건너감입니다.
건너가기 위해 또한 필요한 작업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걷은 인생 여정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느새 끼어드십니다.
그리고 적극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초대하십니다.
보다 큰 사랑에로, 보다 깊은 깨달음에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매일의 삶이 부담이요 스트레스가 아니라 매순간이 은총이요 꽃봉오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부활을 통해 가능합니다.
내 형제와 이웃이 고통과 십자가가 아니라 날 성장시키는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은 바로 부활을 통해 가능합니다.
수도원의 높은 담이 나를 가두는 장벽이 아니라
내게 날개를 달아주고 나에게 참 해방을 주는 성벽임을 깨닫는 것, 그것은 바로 부활을 통해 가능합니다.
“부활은 건너갑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재물을 섬기는 삶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이기적인 사람에서 베푸는 사람으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건너갑니다.
이 건너감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부활입니다.”
- 전숭규 아우구스티누스 신부님 묵상 중에서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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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루카 24,13-35
구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약의 주제는 나의 십자가다
오늘 복음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내용입니다.
이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들었음에도 믿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동행하시며 ‘성경’을 뜨겁게 설명해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우리의 ‘구약성경’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구약에서 어떤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바로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설명해 주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틀대로 국가를 재건해 줄 다윗과 같은 메시아 상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니 아담이 갈비뼈를 내어놓는 것이나, 아벨이 피를 흘려야 하는 이유나, 바위의 옆구리가 뚫려야 하는 것,
구리뱀이 장대에 들려야 하는 것 등의 내용이 메시아의 수난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성경을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자신들 숙소에 초대합니다.
그리고는 그분이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아봅니다.
이 덕분에 그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그리스도를 제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교회에 머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 머묾’은 신약성경의 주제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파견하셨듯이, 당신은 교회를 파견하시며 교회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머물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낯선 예수님을 자신들의 집에 맞아들였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아 교회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머무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이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약의 주제가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한다면, 신약의 주제는 ‘그리스도를 위한 나의 죽음’입니다.
이 방향에서 벗어난 해석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점점 벗어나게 만듭니다.
영화 ‘미나리’(2021)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어떠한 점에 초점을 맞춰 읽어야 하는지가 상징적인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미나리는 한 한국 가정이 미국에 정착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미나리가 어디에서나 잘 정착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이 가정은 아직 미국에 정착하기 어려워하며 큰 위기를 겪습니다.
이 힘든 상황에서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어머니를 미국으로 초청합니다.
아이들은 좀처럼 할머니를 할머니로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이들은 할머니를 가뜩이나 힘든 자신의 집에 민폐를 끼치는 사람 정도로만 인식합니다.
그래서 손자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오줌을 물이라고 속여 먹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가진 재산을 다 딸에게 주었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문화적 차이로 할머니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막내 데이빗이 다쳤을 때 잘 치료해주고 잠자기 무서울 때 안아줍니다.
할머니가 병에 걸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 피와 같은 1년 농사를 태워 먹었을 때,
아이들은 할머니가 떠나지 못하게 막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그리스도를 떠나지 못하게 막는 엠마오의 제자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영광보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아야 합니다.
사실 그렇게 보려 한다면 구약의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예언입니다.
모든 내용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신약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구약성경이 손자 데이빗의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는 것이라면, 신약성경은 할머니 윤여정 씨의 처지에서 보아야 합니다.
할머니는 이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1년 농사를 다 태워버리는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함께 머물러야 할 가족의 반대 방향으로 걷습니다.
그 가족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 머물 힘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손주들이 할머니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한 가족에 머물 힘은 내가 그 가정을 위해 공헌한 것보다 ‘자비’에 있습니다.
물론 할머니가 먼저 그 가족에게 자비를 베풀었기에 가족도 할머니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할머니라는 것만으로도 그 가족에 머물 자격이 있습니다.
신약의 목적이 교회에 머물게 함인데 교회에 머물려면 내가 교회에 공헌한 것보다 바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자비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줄 모를 때는 그 자비도 믿지 못합니다.
신약의 새로운 계약이란 이 자비의 계약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그리스도처럼 대할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를 교회에 머물게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어떠한 시선으로 읽어야 하는지 일깨워줍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고 묵상해도 이 초점을 잃으면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처럼 구약에서 메시아의 수난을 찾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오줌을 마시라고 가져다줄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죄의 용서가 있는 교회에 머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할까요? 나의 능력이 아닌 하느님 자비에 맡겨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지 않으셨으면 그 자비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이웃을 위해 그리스도처럼 빵이 되지 못할 때 새로운 계약상 그 사람은 진정으로 교회에 머물 힘을 잃게 됩니다.
성체 성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은 나도 그런 사랑을 베풀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모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다시 그리스도 공동체에 진정으로 머물기 위해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하고 ‘신약성경에서는 나도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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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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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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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복음묵상.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복음에 나오는 두 제자들이 엠마오를 향해 길을 갈 때 그들의 마음은 참으로 착찹했을 것입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아닌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제자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뭔가 힘이 있고 또 예언자라는 생각에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예언자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결과는 그들이 생각했던 예상과 기대가 빗겨갔습니다. 희망이 절망이 되어 각자 자기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일에 대해 아마 넋두리 아닌 넋두리를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하나만 추측을 해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그동안의 이적이나 기적을 보면 그렇게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을 정도의 위인이신데 어떻게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실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가는데 어느 지점에서 예수님과 동행을 하게 되어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이때 복음은 눈이 가리어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고 나옵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물어보시자 그들의 반응은 오히려 예수님의 이런 질문에 의아해합니다. 어찌 예루살렘에 있었다면 최근에 일어난 일에 대해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하는 식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죽음이 그때 엄청난 사회적인 이슈가 된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간 일어난 사건을 예수님께 전했습니다.
마지막 예수님 부활이 일어난 사건까지 말했을 때 그때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한방 먹습니다. '어리석은 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런 모든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는 걸 차근차근 일러주시게 됩니다. 사실 이때 이들은 이 말씀을 들었을 때는 머리로만 이해를 했습니다. 또 마음도 뭔지는 모르지만 타오르는 느낌도 있었지만 이땐 이 느낌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저녁에 함께 묵게 될 집에 들어간 후에 예수님과 앉은 식탁에서 예수님이 빵을 주실 때 그때 그들은 함께 길을 걸어오면서 대화를 나눈 분이 예수님이라는 걸 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후에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라지셨다고만 나오지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때 그들은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서 그들 마음이 타올랐는 걸 상기하게 됩니다. 이미 낮에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그땐 그걸 잘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같이 함께 묵지 않고 예수님만 따로 길을 더 가셨다고 상상한다면 그들이 저녁에 낮에 예수님과 만나면서 마음속에 일어난, 타오르는 마음에 대해서 무심코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린 상태에서 자기들 마음속에 뭔가 타올랐다는 게, 예수님 말씀 덕분에 일어난 것임을 그때 비로소 자세히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어도 예수님이라는 신원을 몰랐다면 그냥 지나쳤을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의 성경 지식 상태가 어떤지는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몇 가지 경우의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풀이를 해 주시는 내용을 그대로 잘 알고 있었다는 걸 가정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대충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그들의 상태가 후자에 가깝습니다. 만약 제대로 잘 알았더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당연히 인정이 됐을 텐데, 그러지 못해 예수님으로부터 굼뜨느냐고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알긴 알아도 확실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굼뜰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귀에 쏙쏙 들어올 수 있게 설명을 얼마나 잘 하셨을 거라고는 굳이 상상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걸 보면서 저는 우리 교회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도 신자 나름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려고 노력을 해야지만, 교회 자체에도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잘 알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해 예수님을 대신해서 말씀을 잘 연구해 신자들에게 잘 전달할 책무가 있음에도 이걸 게을리 한다면, 그것도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의 수위권을 맡기실 때 교회로부터 부여된 위임받은 권한을 교회가 잘 수행하지 못하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걸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성경을 잘 접하지 않는다는 말만 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신자들이 성경의 말씀을 잘 가까이 할 수가 있을지도 고민을 하고, 또 교회도 어떻게 하면 말씀을 잘 연구해서 잘 전달할지를 고민해야 할 텐데, 그런 부분은 조금 아쉽습니다.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강론을 들어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접한 유튜브나 인터넷을 통해 본 자료를 바탕으로 판단한다면 강론을 통해 만약 성경의 지식을 알게 된다면 거의 수박 겉 핧기식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와 신자 둘 모두에게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강론 자체가 복음에 초점에 맞추는 것이고 또한 시간적인 한계도 있는 것도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상세한 내용이냐 하면 그렇지 못하고 일부 부분적인 것만 인용해서 강론이 진행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보면 개신교 주일학교 일 년만 다니면 되는 실력으로 우리는 평생 성당을 다니면서 얻게 되는 수준까지밖에는 교회에서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본당뿐만 아니라 우리 천주교에서 강론 때 구약은 거의 몇 개 정도 범위 안에서만 그것도 일부의 내용 정도만 이루어지지 자세한 내용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실제 개신교 다닐 때를 기억해보면 복음도 중요하지만 신앙적으로 감동적인 부분과 회개를 촉구하고 자성하는 마음을 생기도록 유발하는 것은 구약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목사님이 말씀을 어떻게 풀어서 잘 설명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목사님도 말씀의 은사가 탁월한 분도 있지만 때로는 수준이 떨어지는 목사도 더러 있습니다. 이건 우리 교회의 특수성 때문에 가지는 한계도 있습니다.
개신교는 말씀 중심이기 때문에 그쪽에 치중을 할 수가 있지만 우리는 말씀과 성찬이 둘 다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신자 자신이 따로 자신의 영혼을 위해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해 죽을 때까지 제대로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고 아니 바로 이 제자들처럼 옆에 예수님이 계셔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만 하늘나라에 갈 수도 있습니다. 만약 실제 그렇게 된다면 아찔합니다. 이건 앞으로 교회가 이런 부분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야 될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자가 우매하면 교회도 그 책임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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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7.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사도3,1-10) "그 무렵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1) 사도행전은 1-2장이 성령 강림 사건으로 인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설립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면, 사도행전 3-7장까지는 사도 가운데서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복음의 강력한 선포 및 초대 교회의 폭발적인 확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3장에서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첫 치유 기적인 베드로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과 이것을 계기로 이루어진 솔로몬 행각에서의 베드로의 설교를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본절에서 시간과 장소, 기적의 주역을 소개함으로써 이 일이 꾸며낸 일이 아닌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오후 세 시는 유대인들의 시간표에서 제9시이다. 유대인들이 구별해서 정해 놓은 기도 시간이 제3시, 제6시, 제9시 (현대 시각으로는 오전9시, 정오, 오후3시)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마지막 기도 시간인 오후 3시경에 성전에 올라갔던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유대교의 좋은 기도 전통을 버리지 않고 정한 시간마다 성전에서 열심히 기도하였다(사도2,5.42.46). 또한 초대 교회 신도들의 기도는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기도와(마태6,5) 달리 역동적인 기도였으며 많은 기적과 승리를 가져왔다(사도12,3-17). 이런 차원에서 사도행전은 기도의 승리를 기록한 기도의 행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데'에서 '올라가는데'에 해당하는 '아네바이논'(anebainon)은 미완료 과거 형태이다. 희랍어에서 미완료 과거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상태나 계속 이루어지는 동작 및 습관적인 동작을 묘사한다. 말하자면 베드로 일행이 성전을 방문하여 기도하는 것이 일회적인 일이 아니라 습관이 될 만큼 자주 하였던 행동이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당시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움직임을 보다 생생하고 현장감있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궁금증을 자연스럽게 유발하는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여다 놓았던 것이다."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는 직역하면 그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앉은뱅이(콜로스; cholos)라는 말이다. 저자가 그의 병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불치병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사도행전 4장 22절에는 당시 그의 나이가 사십여 세가 되었으므로 40 여년간 굳어진 그의 뼈가 펴져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문'(미문; 美門)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높이가 23 미터에 이를 만큼 거대하고 금과 은으로 입혀진 황동으로 만들어진 이중문이어서 웅장하고 장엄하기까지 하였다.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에서 (사람들이)'들어서'에 해당하는 '에바스타제토'(ebastazeto)와 '놓았다'에 해당하는 동사 '에티둔'(etithun)은 모두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사람들이 앉은뱅이를 메고 오는 상황을 완료되지 않은 동작으로 현장감있게 보여 주면서 동시에 앉은뱅이가 '아름다운 문'에 앉게 되는 일이 이때의 당일만이 아니고 거의 매일 반복적으로(날마다) 행해지던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즉 그는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걸하는 일을 통해 생계를 꾸려갈 수 밖에 없는 직업적인 거지였던 것이다. 신명기 15장 4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아 그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다. 따라서 구걸하는 자가 다른 장소도 아니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던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는 비극적인 상황은 이스라엘의 경제적 형편 뿐만 아니라 영적 상황까지도 극도로 빈약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이에 베드로가 '아름다운 문'앞의 그 불구자에게 그가 구걸한 몇 푼의 돈을 주기보다는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적을 행하는 것은 '아름다운 문'에서 구걸하는 불구자를 통해 투영된 당시 이스라엘의 무기력한 영적인 상황을 치유하기 위한 가장 현명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의 생명력 없는 형식적 껍데기 신앙 생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역동적인 복음의 능력으로만 치유될 수 있는 무력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 (6-7) 여기서 '은과 금'이라는 표현은 금은으로 장식되어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아름다운 문'처럼 껍데기만 남아 형식적인 종교로 타락한 유대교를 빗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에서 '~으로'에 해당하는 희랍어 전치사 '엔'(en)을 직역하면 '~안에'(in)라는 뜻이다. 한글의 '~으로' 라는 번역은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단지 걷기 위한 수단으로 준 것 같은 잘못된 뉘앙스를 준다. 하지만 원문의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안에서'라는 표현은 앉은뱅이가 자신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영적 진리를 보여 준다. 또한 유다 사회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대표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영원히 추구해야 할 목적이다(히브12,2; 묵시11,18). 앉은뱅이가 자신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보인 반응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은(8절) 그가 예수님안에 머묾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장애를 극복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건강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본몬의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은과 금'은 대조를 이룬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리스도교가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을 가리키고 '은과 금'은 외형적인 면에만 치우쳐 있는 예루살렘 성전과 영적으로 피폐해져 있는 유다교를 상징한다. 앉은뱅이가 형식에 물든 유다교의 화려한 성전 문 앞에서는 기껏해야 하루 하루를 겨우 연명할 수 있는 동전만을 받을 수 있었지만,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는 자신의 병든 육신을 고침받고 참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안에 머무는 귀한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매우 인상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앞에 '나자렛'이란 지명까지 거론하는 것은 지금까지 대부분 멸시하고 천대하는 의미로 사용했던 호칭(요한1,46; 18,5.7; 19,19)이 영광된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랑할 수 있는 높은 가치가 되었음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앉은뱅이가 강한 새 힘을 얻어 다리의 선천적 장애가 치유된 사건은 의료적 의미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도 갖는다. 먼저 사회적인 의미이다. 당시는 모두 자신의 손과 발을 사용하여 경제 활동을 해야 하는 농업과 목축업 중심의 원시 경제 사회였는데, 손이나 발 등 신체의 일부분을 쓰지 못하는 지체 장애인들은 구걸하는 일 외에는 자신의 생계를 연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사도10,46-52).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의 다리를 완전히 치유하여 걷게 하심으로써 이제는 구걸에서 스스로 경제적 행위를 하여 자립하게 하심으로써 사회의 일반 구성원으로 복귀하여 살게 해주신 것이다. 또 하나는 종교적 의미이다.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김받을 수 밖에 없는 장애인이었던 앉은뱅이는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고, 단지 성전을 드나드는 유다인들로부터 몇 푼의 돈과 함께 경멸과 비난의 시선만을 받을 뿐이었다. 당시 유다의 형식적 율법주의자들은 몇 푼의 돈을 앉은뱅이에게 던져주며 상처받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는 교만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적을 베풀어 그의 불구의 몸을 고쳐 줌으로써 그가 갖고 있었던 종교적 부정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한편 경제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무기력하게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의 모습은 영적으로 무기력한 당시의 유다인들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던져 주는 단편적인 진리가 담긴 불확실한 정보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희망없이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걷게하신 것은 영적 불구자인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포함한 복음만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며, 하느님께 대한 바른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이제 땅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걸어가자 독서(사도3,1-10)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ㄱ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 우리 모두는 모태에서 부터 선악과를 먹은 불구자로 태어난 존재들 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알아들어라’ 오늘 주시는 말씀입니다. 2ㄴ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ㄱ 벌떡 일어나 걸었다. = 오른손-오른 방법으로 일으켰다 입니다. 내가 가치로 여겼던, 그래서 청하고 구했던 그 육의 것이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그 뜻으로 입니다. 이름(쉠-멤)-‘분석된 말씀’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한 것으로 이해되어진 구원의 말씀을 뜻합니다. (요한14,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하늘의 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완전한 방법이요 과정이며 결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 그 사랑, 그 의로움만이 죄인을 일으킬 수 있는 오른손(올바른)의 방법, 길인 것입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하느님의 말슴을 선악의 윤리ㄹ, 사람의 규정과 교리, 곧 땅의 계명으로 듣고 따랐던, 그래서 땅의 것만 청했던 그 땅에 앉은 불구의 삶에서 일어나 선이 악을 덮어 용서로 생명을 주시는 그 하느님의 진리의 길을 걸으시오~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그 자신을 버리고~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따라야한다’(마르8,34) 하셨을 때, 자신을 버리고 (아파르네오마이) 자신의 말을 완전히 거절하고~라는 뜻입니다. 8ㄴ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 치유, 용서 받고 제일 먼저 한 일이 기뻐하며 성전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들어가는 이들을 부러워 만 했던 불구자 입니다. 당시 교회법이 불구자, 곧 죄인은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늘의 용서를 깨달았기에 세상이 아닌 하느님께 먼저 들어간 것입니다. 그 기쁨이 있어야합니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 놀라운 육의 기적으로만 봅니다. 영 의 치유, 용서를 깨닫지 못한 눈들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치유를 용서로, 구원의 믿음으로 가져야 합니다. (로마9,31-32) 31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32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을 믿음으로 찾지 않고 행위로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 사람의 규정, 교리, 계명에 의한 열심한 행위의 의로움을 지키느라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을 내 죄의 용서, 구원의 믿음으로 갖지 못하면 모태에서 부터 불구로 태어난 앉은뱅이 그대로 남게 됩니다. 오늘 복음으로~ (루카 24,25.30-31)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 왜 사라지셨나요? 그 예수님을 꽉 붙들까봐서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그 대속의 죽음을 구원의 진리로 깨닫지 못한, 갖지 못한 그 앉은뱅이로 낙향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빵을 떼시는 모습을 보고 성찬례의 새 계약을 보았습니다. 깨달은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루가22,16.20) 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 예수님의 죽음으로 얻는 용서, 자유의 새 계약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 새 계약을 붙들라고 예수님께서 사라지신 것입니다. 그 새 계약으로 땅의 앉은뱅이가 하늘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보이는 예수님을 기억하는, 붙잡고 섬기는 그 종교행위가 아닌~ 그분께서 하신일, 십자가의 대속으로 얻는 용서, 구원, 그 피의 새 계약을 깨닫고 붙들었을 때, 믿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의 법, 그 길을 버리고 하느님의 지혜의 법, 그 대속의 십자가의 길을 진리로 따라갑시다. 오늘 땅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걸어갑시다. 아멘.♡♡♡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복음 (루카24,13-35)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15.31) 엠마오의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님께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을 때,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그것도 영적인 몸이 아닌, 겉으로는 보통의 육체를 가진 사람처럼 친히 나타나셔서 동행하신다. 루카 복음 24장 14절에 나오는 데로 그동안에 일어난 예수님께 관한 '모든 일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의 얼굴을 정확히 알고 있었을 터인데, 그들은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며 이야기를 나누시고 있는, 지척에 있는 예수님을 알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눈이 가리어'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눈이 가리어'에 해당하는 '에크라툰토'(ekratunto; were holden; were kept)는 '억제하다'를 뜻하는 '크라테오'(krateo)의 미완료 수동태이므로, 직역하면 '그들의 눈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게 계속 억제되었다'가 된다. 이것은 엠마오의 두 제자들의 의식과 시각이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이런 수동적 표현에는 하느님의 행위가 암시되어 있는데, 뒤에 나오는 루카 복음 24장 31절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보게'될 극적인 반전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의도적인 가림'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영적 상태에 이상이 있음을 나타낸다. 아마도 과월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던 제자들일 가능성이 많기에 그들은 뜻하지 않은 예수님의 십자가형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루카 복음 24장 30절 이하에 보면, 엠마오의 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것도 '성찬', 혹은 '성만찬'을 의미하는 '빵의 나눔' (Fractio Panis)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알아뵙지 못했던 영적 무지에서 탈출한다. 루카 복음 24장 31절의 희랍어 원문에는 '그들의 눈이 열려'에 해당하는 '아우톤 데 디에노익테산 호이 옵탈모이'(auton de dienoichthesan hoi ophthalmoi)'에서 '그들의'에 해당하는 '아우톤'(auton; their)과 '눈'에 해당하는 '옵탈모이'(ophthalmoi; eyes)가 떨어져 있어 문법적으로 어색하게 표현되어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영적 무지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의 눈이 떠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다. 여기서 눈이 '열려'에 해당하는 '디에노익테산'(dienoichthesan; were opened)은 '열다'를 뜻하는 '디아노이고'(dianoigo)의 부정(不定) 과거 수동태 3인칭 복수로서 그들의 눈이 자신들의 노력이나 의지에서가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그것도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떠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눈이 밝아지고 나서야 그들은 함께 식사한 낯선 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아보았다'에 해당하는 '에페그노산'(epegnosan; they knew; they recognized)은 '충분히 알다','완전히 알다'를 뜻하는 '에피기노스코'(epiginosko)의 부정(不定) 과거형으로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눈을 뜬 제자들이 또렷하게 예수님의 모습을 알아보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사라지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칭대명사 주격(autos)을 사용하고 있다. 사라지신 분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에 해당하는 '카이 아우토스 아판토스 에게네토 아프 아우톤'(kai autos aphantos egeneto ap' auton)에서 '사라지셨다'로 번역된 단어는 '아판토스(aphantos; out of sight) 에게네토(egeneto; anished; disappeared)'이다. 여기서 '보이지 아니'로 번역될 수 있는 '아판토스'는 부정접두사 '아'(a)와 '나타나다'를 뜻하는 '파이노마이'(phainomai)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지신 것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천사들이 인간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처럼(2마카3,34) 사라지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의미는 영광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시간과 공간에 더 이상 제약되지 않은 영적인 몸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은 쪼개어진 빵, 곧 성체 안으로 들어가 현존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영적이고도 인격적이며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을 원한다면, 주도적으로 주님께서 영안을 열어 주셔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도적인 주님의 절대적 개입과 성령의 능력의 터치도 마리아 막달레나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그것을 받을만한 주님께 대한 애달픈 갈망과 사랑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고, 항상 우리들의 영안을 열어 주시도록 '오소서, 성령님!'을 간절히 불러야만 하는 것이다. 2021년 4월 7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대속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 세상의 안식을 찾아 다시 돌아가는 육의 사람으로 남지말자, 예수님의 안식이 우리안에 계십니다, (루카 24,13-31) 13 주간 첫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 두 사람, 선악의 두마음으로 선이 악을 덮어 생명을 주는, 그 생명을 받지 못한 두 사람입니다. 그 생명 그 하나를 가진 자 (모노게네스-독생자), 그 구원의 독생자(예수)를 못 알아보고~ 그분의 구원의 길에서 예순 길 떨어진 자신들의 옛모습(본능) 으로 다시 돌아가는 제자들입니다. 다시 육의 안식, 그 본능(흙)의 안식(엠마오-따듯한 샘)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예순(60)- 숫자6 - 사람(육)을 뜻합니다. 하늘의 생명을 깨닫지 못한 땅의 사람, 제자들입니다. 창조6일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쉼, 안식. 그 하나를 깨닫지 못한 육입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 하늘의 생명, 쉼, 안식을 못 알아보는 눈입니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 예수님 혼자만, 선이 악을 덮는 생명을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님만 외아들, 독생자(모노게네스)이십니다. 그 예수님과 하나 되었을 때. 생명 그 하나를 가진 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사도2,23)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 善이신 예수께서 惡인 우리의 罪를 덮으셔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이 미리 정해진 하느님의 계획과 예지였습니다. (에페1,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 유대인, 자신들은 선민사상으로 구원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식민지에서 해방시켜 풍요로웠던 다윗시대로 회복시켜줄 메사아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 생각이 그들의 눈을 가리어~ 하느님의 뜻인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회 의원인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3,3) 하신 것입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 믿지 못하는 것, 완악한 마음- 어리석음입니다. 그것이 나쁜 생각, 죄입니다.(마르7,22)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 성경 전체는 모두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 십자가의 예수님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루가2,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 율법의 니고데모, 그의 제사와 윤리의 의로움이 부인 되는 그 쓰러짐으로~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으로 다시 일어나는, 살아나는 것, 그것이 구원의 표징- 예수님 입니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ㄱ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성찬례 때 주셨던 새 계약의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루가22,18-20) 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19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31ㄴ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 예수님을 알아보았기에 사라진 것입니다. 어디로? 그들의 마음속으로 요~ 우리의 생명, 빛, 새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들어가신 겁니다. (에제36,26)<새계약>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요한16,8) 보호자(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 선악의 심판인 죄와 의로움이 그릇된 것이고 대속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증언 하십니다. 그래서~ (로마8,1-3)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아멘,-*^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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