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무의식에 대하여
-나는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가
수필문단에 발을 들인지가 벌써 만 15년이 되어 갑니다. 초기에는 수필스럽게 글을 썼습니다만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가 없었습니다. 수필이라는 문학장르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생각 속에 갇혀서 산다는 것을 이해하고 <생각 속에 갇힌 인간>을 발표한 후 독자들의 기존의 생각세계를 흔들어 놓는 방법으로 글을 썼습니다. 책을 출간해 봐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카페를 활용하기로 마음을 먹고 신작을 쓰면 카페로 올렸습니다. 제 글을 의미 있게 읽어주시는 독자 분들을 만나기가 가뭄에 콩 나듯 했습니다. 계속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있는지 자문자답을 해야 했습니다.
나는 뭣 때문에 글을 쓰는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글을 과연 계속 써야 하는가?
그런 자문자답을 하다 보니 ‘사람은 무엇에 가장 관심이 많고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그리고 어떤 것을 가장 좋아 하는가?’에 관심이 가더군요. 그 모든 것이 "존재의 본능"으로 귀착된다고 이해하고나니 비로소 써야 할 이유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 졌습니다.
모든 종은 선악을 떠나서 자기 존재를 위해서 반응을 하는데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고 그걸 드러낼 때 삶의 의욕이 생기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어 마음이 기뻐진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감 확보를 위한 행위를 하다가 이웃의 존재감과 충돌하거나 융화하는 거기서 증오와 사랑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저 인간은 안 돼"라고 단정하는 말도 분해해보면 "저 인간 속에 내재된 의식은 타인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 존재감만 내세우려는 것이라서 잘못된 거야"라는 의미가 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간 그 자체를 혐오해 버리고 증오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의식을 전환시켜서 그 사람에게서 왜 그런 의식이 형성되었는지 그걸 변화 시킬 수는 없는지를 고민하게되면 사람을 사랑할 길(인문학의 길이자 써야 할 이유)이 열리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좌빨우빨하는 빨갱이 타령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횡횡하고 있고 우리 문단에도 아직 그런 시각을 가진 분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칼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의 관점에서 글을 몇편 썼습니다. 집단 무의식은 동일 유형의 트라우마가 집단화 되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존재론적 관점에서 우리의 역사에서 이념과 사상이 생명인 우리의 존재를 얼마나 위협.유린했던가를 살펴보아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조선 왕조 5백년과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은 우리사회 전체의 정신세계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사대부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양천제로 짜여진 신분제시대", "제국화가 몰고온 식민적 폭력시대", " 공산주의 등장으로 인한 좌우 이념적 폭력시대", " 명령과 복종의 군사문화로 일구어 낸 산업화, 금력화 된 자본폭력시대" 로 이어지면서 우리 정신세계에는 나의 존재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존재는 무시되어도 좋다(이 기회에 나도 한번 팔자를 바꿔 보자)는 반목과 질시의 폭력적 유전형질이 우리도 모르는 깊숙한 곳에 숨겨져 내려왔던 것입니다. 내 존재를 위해서라면 남보다 더 높은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해서 타인의 존재 위에 군림해야 살아 갈수가 있다는 잘못 형성된 무의식 때문에 자기를 중심으로 사회를 집단화, 세력화 시키고 자기가 소속된 그 집단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공공의 적"을 만들고 함께 패거리를 지어서 적이 아닌 이웃을 향해서 돌을 던지게 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이건 다른 나라의 민중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고대사회, 중세봉건사회, 제국적 쇼비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민중은 늘 전쟁의 도구였고 수탈의 대상이었던 것이기에 어떻게 처신해야 살아 남는지 힘이 센 것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지혜를 유전적으로 터득하여 무의식 속에서 전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 거짓 정의와 거짓 사랑이 판을 치는 원인)
폭력의 수단이 무기이든 이념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법률이든 그것이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무서운 도구 임에는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폭력성"을 몰아내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의 해방인데 트라우마가 강한 인간일수록 자학이든 가학이든 그만큼 더 잔인하고 폭력적이 되고 맙니다. 강한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더 높은 정신적 가치로 승화시키지도 못한 체 무기를 쥐고 설치는 장면을 상상한다면 생명인 우리가 공포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리길 원한다면 자기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각인이 지닌 모든 삶의 에너지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바쳐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우면 우선 내가 즐겁고 다음으로 그걸 보는 이웃이 즐겁습니다. 힘이 약한 것들도 존재감을 인정받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모든 면에서 아름다움을 최고의 선으로 인식하는 쪽으로 의식이 변화된다면 그 만큼 덜 폭력적이 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나태주 시인이 쓴 <풀꽃>이란 시(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는 그런 정신이 담겨져 있기에 짧지만 큰 울림이 있습니다. 예쁘지 않은 생명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간은 둘 이상만 모이면 정치적인 행동을 합니다. 정치행위란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 강화하려는 일체의 행위를 두고 일컽는 말입니다. 인지의 발달이 미달인 인간이 쉽게 취하는 존재감 확보 방식은 폭력이며 "왕따"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친소관계로 분리시켜서 동일 색깔과 동일 깃발아래로 불러 모아서 줄세우기 시키고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폭력과 왕따를 행사하면 사랑의 참 정신이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증오가 싹이 터서 새로운 트라우마가 생성되고 그 트라우마로 인하여 인간의 인간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대를 이어 지속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이유는 내 존재가 이 땅에 처음으로 현현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생명의 탄생은 종을 불문하고 존재 그 자체 만으로 축하를 받아야 하고 축하 하는 것이 마땅 합니다. 우리 인간이 모든 이들의 생일을 예수탄생이나 석가 탄생일 처럼 축하 한다면 세상에는 폭력이 사라질 것입니다.
제 글은 인간의 "존재를 향한 감추어진 욕구의 세계"를 들추어 내어 보여주려는 목적성을 내포한 글이 많지만 그걸 통하여 우리의 의식을 "보다 더 인간적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데 아직은 표현 방법이 미숙합니다. 문학이 왜 아름다워야 하는가를 알고 아름답게 쓰는 글과 그냥 아름답게만 쓰려는 글은 그 담긴 무게감이 전혀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문학예술이 아름다움을 선도하고 더 많은 대중이 이를 이해하고 생활 속에서 아름다움을 실천해야, 폭력이 없는 세상, 언제 어디서나 내 존재감을 인정받는 살만한 세상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절대로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고들 하네요. 자기 트라우마를 씻어내기가 그 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트라우마를 씻어내지 못하면 마음 거울에 두터운 먼지가 쌓인 것처럼 절대로 새 하늘과 새 땅(=새로운 신세계, 새로운 문학적 세계, 이제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미지의 정신영역)이 보이지 않습니다.( 20.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