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수님의 옷자락을 잡자.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아프고 병든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소경이 치유되기도 하고,
앉은뱅이가 씩씩하게 걸어가기도 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이야기에는 두 가지가 한꺼번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라고 불리는 회당장의 다 죽어가는 딸의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 집으로 가는 중에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여인이 병이 낫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둘 중에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기만 했는데도 병이 나은 여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돌보아 주셔서 병이 낫게 되는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정작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그저 살짝 손을 대기만 했는데도
병이 말짱하게 나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아닌 나의 가면을 앞에다 내세우고는
그것을 통해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진장 에너지를 쏟아붓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것은 가면 뒤에 있는 나의 참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면 갈수록 하혈병을 앓는 여인처럼
내적으로는 탈진하고 쇠약해져 가는 자기 자신만 발견하게 되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점점 피상적이고 공허하게 느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앞에 내세운 자신의 가면을 유지하려고 사용하는 에너지를 돌려서 자기 자신에게 쏟아부어야 합니다.
내 생명의 물줄기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하혈병을 앓는 여인처럼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세례받은 사람으로서,
즉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사람이라는 것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영세 때에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그 순간부터 세상에서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죽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인이 됨으로써
세속적인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무조건 피하는 것이 올바른 종교 생활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죽었다는 것은 세상이 이제는 우리에게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제는 성공, 능력, 재산, 명예, 지위 같은 세속적인 것으로
나 자신과 나의 삶을 정의하지 않고 하느님에 의해서 나의 삶을 정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는 참된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제 나의 가치를 대신할 것을 얻기 위해 허튼 데에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좀 더 많이 좀 더 자주 가지도록 해야겠습니다.
그것이 나를 생동감 있게 살아있게 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최경일 빈첸시오 신부 산곡3동 본당 주임
연중 제 13주일 (교황주일) 주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