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급이라면 (외 2편)
김경미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래도록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내 마음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것도 재밌어서
나는 오늘도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
결심은 베이커리처럼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나를 잘 아는 건 나의 결심들
가령 하루를 스물네 개로 치밀하게 조각내서 먹는
사과가 되겠다든지
밤 껍질 대신 뼈를
혹은 뼈 대신 고개를 깎겠다는 것
사람의 얼굴 양쪽에는 국자가 달렸으니
무엇이든 많이 담아 올리리라
국자가 아니라 손잡이라든가
그렇다면 뭐든 뜨겁게 들어 올리리라
여하튼 입을 벌리고 살지 말자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건 내 결심들
한밤의 기차에 올라
옥수수를 너무 많이 먹어
입안이 감당 안 되는 느낌처럼
무엇보다 창피스러운 건
떠나면 후회할까 봐 후회를 떠나지 못하는
신선한 베이커리 빵집처럼
언제나 당일 아침에 만들어서
당일 밤에 폐기하는
결심들만큼
영원히 나를 잘 모르는 것도 없다
밤의 프랑스어 수업
스물한 살이거나 하다못해 서른네 살도 아닌데돌은 썩고 물은 굳는데
나의 기차는 낭비를 싣고 어제도 오늘도 달린다
금잔화보다 시끄러운 이빨을 드러내거나구멍난 검정타이어를 질질 끌거나바닥없는 슬리퍼가 되거나
원장이 달아난 병원이 되고소방차들 물 뿌리고 간 전소(全燒)의 집이 되어 달린다
아무리 낭비해도
능숙한 종착역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것일회용 나무젓가락을 가르듯‘안녕하세요 제 이름은’까지만끝도 없이 되풀이하리란 것
어떤 말도
혀를 잡아당기고 놓치고 다시 잡아당기다가
또 놓쳐
얼굴에 자꾸 고무줄 맞는 반복이나 반복되리라는 것
벚꽃이나 수박처럼 한 계절도 채 못 넘기리라는 것무엇이든 혀끝에서 끝까지 정체를 감추리라는 것오 분은 고사하고 이 분도 안 되어 정체는 탄로 나고
대화가 다 떨어지리란 것
그런데도 나의 기차는 이 늦은 밤
어쩌자고 낭비를 싣고 계속 달리는가
밤의 강의실은 밤바다처럼 깊고 캄캄하고청춘남녀들에게선 온통 복숭아 냄새가 나는데어둔 창밖으로 갑자기 밤비 쏟아지고
총소리처럼 쏟아지고
총에 맞은 건 나뿐인 듯
이유도 원인도 맥락도 없는 전쟁터에 와서
나만 총 맞은 듯
아무리 반복해도
맛있는 복숭아는 다 어디로 가고
복숭아털만 자꾸 얼굴에 따끔대고
밤비는 더욱 거세지고 우산은 없고청춘 다 낭비하고
비에 젖은 맨몸 다 드러난 채
차비도 없이 걸어서 바다를 건너
그 나라 가야 하는 듯
가서도 한두 살짜리를 따라갈 수 있을지
점점 더 어이가 없고
점점 더 울고 싶은 밤
이 모든 게 프랑스어가 아닌
한국어와의 일인 것
―시집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2023.1
------------------------
김경미 / 1959년 경기 부천 출생. 1983년〈중앙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쉿, 나의 세컨드는』『고통을 달래는 순서』『밤의 입국 심사』『카프카식 이별』『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산문집 『바다, 내게로 오다』 『행복한 심리학』 『그 한마디에 물들다』 외.
출처: 푸른 시의 방 원문보기 글쓴이: 강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