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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삼위일체수녀회 (상)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2동 민주공원(대청공원) 입구에 위치한 삼위일체 수녀회(원장=이성숙 수녀)는 '모든 것을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과 사랑을 위하여'라는 모토 아래 삼위일체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수도 공동체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 갇힌 이들을 해방시키는 삼위일체 수도회를 설립한 마따의 성 요한을 창설자로 모시고 있다.
그의 영성과 정신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호소력을 갖고 있으며,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성령의 부르심으로 다가온다. 1187~1194년 소르본대학 신학교수로 재직했던 마따의 성 요한은 사제수품 후 첫미사때 그리스도께서 노예를 해방하시는 환시를 보고 은수생활에 들어가 삼위일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포로들의 해방을 위하여 투신하는 수도회를 설립했다. 십자군 전쟁으로 많은 포로들이 노예로 잡혀가는 시대 상황 아래 살았던 요한에게 이 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구체적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삼위일체수녀회는 창립자의 영성과 카리스마를 살고자 열망했던 삼위일체 수도회 재속회원들에 의해 1685년 프랑스에서 설립됐다. 재속회원이었던 4명의 시골처녀들이 1660년 온전히 삼위일체 하느님께 봉헌되어 흠숭과 애덕의 삶을 살고자 프랑스 리옹의 작은 마을에 모인 것이 이 수녀회의 시작이 된 것이다.
창립자 마따의 성 요한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 젖은 해방과 구원의 심오한 정신을 산 하느님 사랑의 증거자로 불린다. 그 사랑에 접목된 삼위일체수녀회의 새로운 탄생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친 풍랑에 떠밀려 이 거리, 저 골목, 버려지고 잊혀지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아픔, 인간 삶의 고통에서의 해방을 위한 또 다른 하느님 사랑의 섭리로 받아들여진다.
삼위일체수녀회의 영성과 정신은 흠숭, 해방과 자유, 일치와 친교라는 세 가지로 대별된다. 먼저 당신을 창조하신 분과 친교를 맺으며 그분께 흠숭(경배)드리며 자녀다운 자세 안에서 사람으로서 최고의 성소를 사는 기쁨을 체험하는 것이 첫번째 영성인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의 본래의 모습을 타락시키고 손상시키는 모든 형태의 노예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방의 길을 열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인이 되도록 도와주고자 투신하는 것이다.
또한 세 위격이 사랑의 일치로서 한 분의 하느님이신 것처럼, 공동체를 통한 형제적 삶안에서 인간 안에 있는 분열의 악을 이겨냄으로써 서로서로 받아들이며 일치의 삶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사랑으로 비롯된 하느님 창조사업의 사랑의 절정은 사람을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시면서 당신과 친교를 맺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관상하고 그 분의 무상적인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성 요한의 가르침이다. 삼위일체수녀회 창설자에게 있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인간이 창조 본래의 모습, 즉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엄성을 되찾고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되는 것이며, 이때 사람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삼위일체수녀회 (하)
'사랑과 자비의 행위가 있는 곳에 곧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이 삼위일체수녀회 창립자 '마따의 성 요한'의 사도적 영감이다.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며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신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생명을 바치시며 구속(원)자가 되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삼위일체수녀회 최고의 소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프랑스 리옹에 총원(모원)을 둔 삼위일체수녀회는 전세계 4대륙 16개국에서 400여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1985년 수도회 설립 300주년을 맞아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에 진출, 이듬해 부산에 공동체를 설립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박하게 그들의 성소를 살아가고 있다.
회원들은 날로 팽배해져 가는 물질만능주의, 소비지향주의, 개인주의, 향락주의 등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정서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이들에게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그리스도의 도구가 되고자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특히 점차 세력을 뻗치고 있는 사이비 종교와 신영성의 물결로 신앙의 오류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세 위 안에 한 분의 하느님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알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열정으로 수녀들은 사도직 현장에 임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회원들은 교정사도직을 비롯 병원과 양로사도직, 교육사도직, 에이즈환자들을 위한 특수 사도직, 빈민사도직, 선교지 시골순회 사도직, 외국인 사도직, 노숙자들을 위한 사도직 등 주로 특수 사도직에 종사하고 있다.
현재 종신서원자 11명, 유기서원자 4명, 수련자 3명 등 총 18명의 한국인 수녀들이 활동하고 있는 국내의 경우 교정 사도직, 피정지도, 선교지 파견활동, 본당사도직에 임하고 있다.
부산 본원과 대구 분원을 두고 있는 삼위일체수녀회는 교정사도직을 통해 자유롭지 못한 재소자들의 마음과 정신과 육체에 그리스도의 해방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며, 죄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서 손상된 인간의 고귀함을 되찾게 해주고, 건전한 가장 공동체 건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같은 맥락으로 결손가정 아이들을 위한 활동도 벌이고 있다. 결손가정 아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 올바른 인격 안에 성장하도록 도와주며, 그들의 가장 큰 가난이요 결핍인 엄마?아빠의 부재에서 심리적, 정서적 결핍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해 그룹홈('맑은 사랑')방식으로 그들과 소공동체로 생활하고 있다.
부산 본원에서는 독거노인돌보기와 비행청소년 교정활동을 비롯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을 심어주고, 신앙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는 피정 지도와 젊은이 대상 기도모임을 갖고 있으며 대구 칠곡본당과 부산 장림본당에서는 카리스마를 구현하는 자세로 본당사도직에 임하고 있다.
특히 남미 콜롬비아에도 회원을 파견했었던 삼위일체수녀회는 현재 중국과 필리핀에 수녀들을 파견해 장애아동들과 빈민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 (상)
1887년 복자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차 신부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창설된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는 마태오 복음 말씀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수도회 설립의 은총, 카리스마(carisma)로 받아들이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치열한 생존경쟁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 정신적 소외감으로 고립되어 사는 사람들, 그리하여 그 고귀한 삶을 피기도 전에 포기하는 사람들을 초대해야 할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자들이 부족한 상황을 수도회가 펼쳐나가야할 가장 기본 소명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곧 '청하여라(Rogate)'로 시작되는 그 말씀은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 회원 모두에게 명령이자 권고이며 하느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일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끊임없는 간청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영성으로 회원들은 청빈 정결 순명의 서원과 함께 성소를 위한 기도의 사도직으로서 청하여라 (Rogate)를 제4서원으로 삼고 있다.
'청하여라' 영성은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의 고유한 색깔이다. 사도직은 그 시대의 상황이나 요구, 교회의 필요에 의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겠지만 추구하는 기본 영성에는 변함이 없다.
창립자는 이와관련 "성소위기는 기도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명하고 지적해 준 것이기 때문에 틀림없는 치료약이며 구제책입니다. 성소는 은총처럼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라고 설파했다. 회원들은 착하고 부지런한 일꾼은 자신들의 편안함이나 안위를 추구할 틈이 없다는 것, 즉 그들의 삶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 내어주는 삶이며, 'Rogate'를 기본 정신으로 삼아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성심과 하나 되어 거기서 힘을 얻고 함께 살아가는 회원들과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실천하며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의 소명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851년 이탈리아 메씨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78년 3월 16일 요셉 과라니 대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된 안니발레 신부는 서품 후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성심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힘없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하느님과 이웃」이라는 이상을 실현시키며, 빈민가인 아비뇨네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 삶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성소의 소중함을 가슴깊이 간직한 채 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그는 성소의 보석은 구체적인 희생과 인내,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가 수반될 때 그 찬란한 빛을 발한다는 것을 삶을 통해 제시했다.
회원들은 이러한 창립자 정신을 본받아 먼저 하느님의 참된 일꾼들이 되고자 힘쓰며, 사도직 활동을 통해 다른 이들이 각자의 부르심에 합당한 응답을 드리며 좋은 일꾼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한 교회가 꼭 필요로 하는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안니발레 신부는 1927년 76세를 일기로 선종했으며 1990년 10월 7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이번 5월 시성식을 앞두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4년 5월 2일, 이주연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 (하)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 창립자 안니발레 신부가 수도회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날 우연히 닥친 은총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하느님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신학교 과정중 부제 시절 눈먼 거지 '장코네'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은 안니발레 신부 자신의 특별한 소명을 명확하게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서품 즉시 모든 사목활동을 포기하고 '장코네'가 살고 있던 '아비뇨네' 빈민가로 들어간 안니발레 신부는 하느님을 모르는 불쌍한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온갖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소녀들을 위해 고아원 설립 작업을 하면서 이를 도울 수 있는 수도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안니발레 신부는 이 과정에서 목자 없는 양을 일컬은 복음 말씀을 발견하고 신앙적인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 목자없는 양같이 버림받은 채 무기력해져 있고 방황하는 수백만명의 군중들 앞에 과연 이 극소수의 구원받은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보잘 것 없는 내 힘의 한계, 내 능력의 초라함을 생각하곤 했다. 끊임없이 하나의 해결점을 모색하던 중에,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말씀을 발견하게 되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그때 나는 모든 선한 일들, 영혼을 구원하는 일들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때 부터 그의 끊임없는 선교 활동 즉, 주 하느님께서 많은 성직자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시도록 교회와 하느님의 백성이 다 함께 기도와 일상의 희생을 바치게끔 하는 부단한 노력이 시작된다. 결국 그의 염원은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1887)와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1897) 창설로 이어진다.
안니발레 신부는 또한 1900년 성소를 위한 기도에 동참할 사람들을 모아 '성소후원 청원회'를 조직, 젊은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 활동은 교황 레오 13세를 비롯한 역대 교황으로부터 격려를 받았으며, 한 주교는 "안니발레 신부는 우리 모두가 기도하도록 무릎을 꿇게 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수도회는 그후 세계 16개국으로 뻗어나가 지역 교회와 상황이 필요로 하는 것에 응답하는 참된 일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세계 곳곳 각 분원에서의 사도직은 학교, 유치원, 농아자들을 위한 학교와 기숙사, 고아원, 미혼모의 집, 대학생 기숙사, 피정센터 운영 등이며 교리교육, 의료활동, 무료급식 활동도 벌이고 있다.
한국 진출은 수도회 창설 100주년을 맞는 1986년 이뤄졌다. 이후 한국 분원은 유치원 운영과 구립 어린이집 위탁 교육, 결손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가족 공동체 그리고 주말 개인피정과 젊은이들을 위한 기도 모임의 사도직, 그리고 교리교육 등 봉사를 계속하며 소명에 임하고 있다. 남자 수도회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는 2003년 1월에 한국에 진출, 한국 이탈리아 필리핀 출신 신부 세명이 서울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한편 안니발레 신부는 오는 5월 16일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된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보혈선교수녀회 (상)
영성과 삶
대전에서 신탄진을 지나 청주 방향 40번 국도를 타고 가다 현도사회복지대학교 진입로로 들어서서 5분 남짓. 도로 왼편에 세워둔 팻말 너머로 보혈선교수녀원(충북 청원군 현도면 상삼리 164)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도심에서 불과 20여분 거리. 그러나 수녀원이 자리한 그곳은 마치 깊은 산속인양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급작스레 맛보는 고요함에 잠시 정신이 멍해진다. 수녀원을 둘러싼 주변 봉우리들 모양새 하며 수도(修道)하고 기도하기에 이보다 더한 「명당(明堂)」이 없을 듯 하다.
보혈영성
보혈선교수녀회(한국지부장=장효은 수녀)의 영성은 「보혈」(보배로운 피, Precious Blood)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피의 영성」이다. 물론 십자가에서 마지막 한방울까지 쏟으신 그리스도의 피다.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의 현시이듯이, 피의 영성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
「피의 영성」은 그러나 보다 깊은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은 생명의 영성이고, 살림의 영성이다. 사람에게 피가 곧 생명의 상징이듯, 보혈은 우리의 영적 생명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고 그 피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끊임없이 흘러간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피」, 즉 「보혈」은 그분의 강생과 죽음, 부활이라는 「파스카의 신비」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용서, 구원하심을 뜻한다. 따라서 보혈선교수녀회원들의 영성과 삶은 『예수님의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온 피에 담긴 사랑과 용서, 구원하심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이며 이것은 이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려는 노력으로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영성과 삶은 날마다 제대에서 이루어지는 미사성제,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기념)제사에서 비롯되고 확산된다.
수도자요 선교사
『아무도 가지 않겠다면 내가 가겠소』
『우리의 선교 영역은 하느님 나라요, 그 나라에는 국경이 없다』
창립자 프란치스코 판너(1825~1909)가 강조한 이 말은 보혈선교수녀회가 지향하는 구체적인 삶과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 수도자이면서 또한 선교사로서의 삶은 타 수도단체와의 차별성이자 이들의 고유한 카리스마이기도 하다.
특별히 보혈선교수녀들은 그들 고유의 「내적 영성」과 「덕목」에 따라 살아간다. 초대 총장인 마더 파울라 수녀가 남긴 「내적 영성」은 곧 회원들이 성혈을 공경하는 구체적인 방법일뿐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있는 회원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영적 구심점이기도 하다. 내적 영성 가운데 첫째가 「보혈신심」이다. 이들은 주님의 보혈을 특별한 방법으로 공경한다. 둘째가 「보혈의 샘이신 예수성심과의 일치」다. 세 번째가 「보혈선교수녀의 모델이신 천주의 모친 마리아」다.
회원들의 순간 순간 삶을 규범짓는 4가지 「덕목」은 ▲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완전히 자신을 내어놓음 ▲ 끊임없는 하느님의 흠숭 ▲ 작은 일에 충실함으로써 끊임없는 자기극복 ▲ 희생하는데 있어서의 관대함 이다.
이러한 내적 영성과 덕목의 지침에 따라 보혈선교수녀들은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라 고백하며 「아버지의 딸」로서 일치를 이루며 하느님 나라 완성에 투신하게 된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보혈선교수녀회 (하)
보혈선교수녀회의 창설 역사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하다. 우여곡절도 많았고, 그에 따른 창설자의 고뇌와 희생, 초창기 공동체 회원들의 고난도 적지 않았다. 보혈선교수녀회의 창설 역사를 이해하는데는 『아무도 가지 않으면 내가 가겠소』라는 창설자 프란치스코 판너 아빠스의 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수도회 탄생의 역사적, 신앙적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또 「수도자이며 선교사」란 말의 뜻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제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 간략하나마 창설자의 이력을 살펴보자. 창립자 프란치스코 판너(본명 웬들린 판너)는 1825년 오스트리아 랑겐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5년 브릭스의 신학교에 입학해 사제수업을 받았고, 1850년 교구 사제로 서품됐다.
13년간 사제로 활동하던 그는 건강악화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성지순례 도중 트라피스트 수도회원으로 여생을 마감할 뜻을 갖게 되고, 1863년 당시 나이 38세에 독일 아이펠에 있는 마리아발드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한다. 1869년 보스니아(현 유고슬라비아)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세우도록 명을 받은 그는 「마리아 스틴」 수도원을 세우고 이후 11년간 아빠스로 헌신했다.
사부(師父)의 선교열정
1879년 9월 프랑스에서 열린 총회에서 남아프리카 주교의 초청을 접한 판너는 『아무도 가지 않으면 내가 가겠소』라는 말을 남기고 아프리카 선교를 자원한다. 1880년 31명의 다른 수사들과 남아프리카 단브로디에 도착한 그는 현지 주교의 도움으로 1882년 12월 「마리안 힐」 수도원을 세우고 정착하게 된다.
당시 수사들은 원주민과의 직접 접촉이 불가능했으므로 선교잡지를 발간하고 유럽에서 젊은 여성들을 초대했다. 마침내 1885년 9월 8일 독일에서 5명의 젊은 여성들이 선교 협력자로 살기 위해 도착했고, 이것이 보혈선교수녀회의 창설이다.
보혈선교수녀회의 창설 역사에선 초대 총장 마더 파울라를 빼놓을 수 없다. 공동창설자로 불리는 파울라 수녀는 1886년 아프리카에 와서 이듬해부터 수련장을 맡으며 온전한 신뢰와 용기, 뛰어난 지혜와 책임감으로 사부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1905년 모원(母院)의 유럽 이주와 1906년 보혈선교수녀회 승인을 주도했고, 1907년 초대 총장에 선출되어 이후 12년간 공동체를 이끌며 초창기 수도회 발전에 초석을 놓았다.
보혈선교수녀회는 현재 전세계 21개국에서 960여명이 활동중이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아프리카에서 선교 및 수도생활에 종사하고 있다. 아시아에선 한국 수녀회가 유일하다.
한국에는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중이던 장효은, 장효숙, 강효선 3명의 한국인 수녀(사진 참조)가 1986년 11월 24일 당시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현 서울대교구장)의 초청으로 입국했다. 외국인 선교사를 동반하지 않고 한국인 수녀들만 입국해 수도회를 시작하게 된 것은 한국에서 최초의 사례다.
1988년 첫 지원자 4명이 입회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서원자 35명이 본당사목, 장애인 및 노인복지, 교육사업, 피정지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1989년 현재의 자리에 부지를 마련하고 1990년 10월 수녀원과 피정의 집을 신축 봉헌했으며 1998년에 한국지부로 승격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