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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7) 1400대 곤장을 버틴 사내, 박취득
곤장 1400대 맞고도 신앙 증거… 풀뿌리 교회의 횃불이 되다
- 박취득 라우렌시오가 온갖 형벌에도 굴하지 않자 옥졸들이 새끼줄로 목을 졸라 죽이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부헝이’와 ‘북실이’들
옛 기록을 보다가 거기 적힌 이름 앞에 울컥할 때가 있다. 앞서 본 1791년 12월 11일에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이 정조에게 올린 비밀 보고서 별지를 볼 때도 그랬다. 당시 그가 충청도 관내 각 지역에서 검거한 천주교인들의 명단과 그들에게서 압수한 서책과 성물 등의 물품 목록을 적은 것인데, 면천군 관련 기록은 이렇다.
“면천의 강주삼(姜柱三), 황아기(黃惡只), 박일득(朴日得)은 깨우쳤으므로 다짐을 받고 풀어주었습니다…. 신귀득(申貴得), 노막봉(盧莫奉), 김의복(金儀福), 모조이(牟召史), 김선돌(金先乭), 한봉돌(韓奉乭), 김부허응(金夫許應)은 자복을 받고 풀어 주었습니다. 하귀복(河貴福), 강세종(姜世宗), 유엇재(劉於叱才), 김만익(金萬益), 이오직(李五直), 김북실(金北失), 김답금(金畓金), 방백돈(房白頓), 박산흥(朴山興), 김계룡(金癸龍), 김종택(金宗宅), 이쾌손(李快孫), 김상요(金尙要), 강점복(姜占福), 강행복(姜行福)은 자복을 받고 풀어 주었습니다.”
뒤쪽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름으로 보아 대부분 노비 신분이었을 것이다. 성씨는 떼고 그저 막봉이, 선돌이, 봉돌이, 엇재, 오직이, 답금이, 백돈이 등으로 불렸을 눈물겨운 이름들이다. 김부허응(金夫許應)은 아마도 눈이 부엉이 눈처럼 동그랗대서 ‘부헝’이로 불린 것을 음을 취해 이렇게 적어놓은 것일 테고, 김북실(金北失)은 태어났을 때 북실북실 퉁퉁해서 얻은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 명단을 통해 당시 면천군의 교세가 상당했고, 그것도 대부분 신분 낮은 백성들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사는 일 답답하고, 평생 업신여김만 당하며 살아온 인생들이 천주학을 만나면서 삶이 문득 변했다. 사람이 이렇게 서로를 위해주고 아끼는 세상도 있었구나. 밥상에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주워 먹던 라자로가 천주의 품에 먼저 안겨 행복하더라는 천국의 소식에 이들은 고마워서 울었다. 뜻 모르고 외우던 천주경과, 너무도 단순해서 무섭던 십계명의 가르침만 따르면 죽음 뒤에는 못된 양반도 없고, 간악한 아전도 없는 천당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 복자 박취득 라우렌시오 초상화.
박일득과 박취득 형제
면천 고을 체포자 명단 첫머리에 나오는 강주삼과 황아기는 부부였을 가능성이 높다. 박일득은 이들 부부와 함께 면천 교회를 이끌던 지도자급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를 바로 이어 앞서 살펴본 김필군과 그의 아들 이름이 등장한다.
박일득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 그는 복자 박취득 라우렌시오의 친형이었다. 형 박일득이 면천 고을로 붙잡혀가 여러 달이 지나도 석방되지 않자, 박취득이 아침에 관청문을 두드려 군수 정동표(鄭東杓) 앞에 섰다. “죄 없는 사람을 사납게 매질하고 여러 달 감옥에 가두니, 이것은 큰 잘못이 아닙니까?” 그가 박일득의 동생이란 말을 들은 군수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에게 칼을 씌워 혹독하게 매질했다. 그는 가벼운 나무 칼 말고 무거운 쇠칼을 씌워 달라며 대들었다. 그는 면천 관내에서 인심을 얻은 인물이었다. 읍내가 들썩이며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군수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 마저 옥에 갇힌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조정의 석방 공문이 내려왔다. 이렇게 해서 1791년의 소동은 겨우 가라앉았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797년 8월 19일 박취득은 홍주(洪州) 목사 김이호(金履鎬)에게 다시 체포되었다. 그의 형 박일득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처음에 피해 달아났던 그는 아들이 자기 대신 잡혀갔다는 소식에 자진 출두했다. 목사가 임금과 관장의 명을 무시하고, 남의 아내를 범하며, 재산을 쓸데없는 데다 낭비하고, 조상에게 제사도 지내지 않는 패륜을 행한다며 나무라자, 그는 십계의 가르침을 낱낱이 대면서 목사의 말에 따박따박 반박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어째서 재산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이냐며 따졌다.
그는 매를 흠씬 맞았다. 형리는 집게로 맨살을 집어 뜯기까지 했다. 책과 성패(聖牌)와 그림을 불사르라고 하자, 죽어도 못한다며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공로, 부활과 승천, 재림에 대해 설교했다. 목숨을 앗아가겠다는 협박에는 이렇게 말했다. “죽어야 한다면 그것이 무슨 대수입니까?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습니다. 삶은 잠시 지나는 나그네 길이요, 죽음은 본향으로 돌아감입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꿈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새로 부임한 목사 앞에서도 그는 사람들의 첫째 아버지시요, 만물의 최고 주재자이신 천주를 결단코 배반하지 않겠다며 어떤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목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혹독한 매질을 더한 뒤 그를 서학 죄인들을 전문적으로 취조하던 해미의 좌영(左營)으로 넘겼다. 당시 해미 현감은 조한진(曺翰振)이었다.
심문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고, 고문의 강도는 점점 더 세졌다. 현감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교리로 가르치며 따지는 그에게 화가 날 대로 났다. 천주를 배반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자, 우리는 죽어 천당에 올라 큰 행복을 누리겠지만, 악인들은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서 끝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목을 쳐서 당장에 죽여달라고 했다.
현감은 감사에게 처분을 요청했고, 매질해도 항복하지 않으면 죽여도 좋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현감은 박취득에게 그 공문을 읽어주었다.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후 여러 달 동안 박취득은 8일 또는 10일에 한 번씩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상처투성이의 그를 옷을 벗긴 채 진흙 속에 던져 밤새 추위 속에 비를 맞게까지 했다. 박취득은 온몸이 너덜너덜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봄과 가을은 흐르는 물처럼 지나갑니다. 세월은 부싯돌에 이는 불똥과 같아 길지 못합니다. 저는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1799년 2월 27일, 그는 15번 또는 16번째의 심문에서 곤장 50대를 맞았다. 현감은 아예 그를 죽일 작정으로 때리면서 물까지 부어 물볼기를 쳤다. 그래도 그는 죽지 않았다. 현감과 형리들은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 그를 귀신 보듯 했다. 완전히 까무러친 그는 감옥에 다시 내던져졌다.
몇 시간 뒤 그는 혼자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감방에 들어가 누웠다. 이튿날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현감은 옥사장을 때리며 너까지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옥사장은 감옥으로 다시 와서 박취득을 죽도록 더 때렸다. 때리다 지친 옥사장이 잠깐 잠이 들었을 때, 감옥에 함께 갇혀 있던 교우들이 다가가자 박취득은 깨어나 그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처는 이미 다 나아 흔적도 없었다.
옥사장은 눈앞의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요술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새끼로 목을 졸라서 마침내 박취득의 긴 목숨을 거두었다. 달레의 기록에 따르면 1799년 2월 29일 오전 11시에 그는 세상을 떴다. 그가 감옥에 갇힌 뒤에 맞은 곤장은 모두 1400대가 넘었다. 8일 동안 물 한 모금 안 주고 굶긴 적도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한참 벗어난 잔혹한 매질이요 고문이었다.
풀뿌리 교회의 횃불
하지만 박취득이 1799년 2월 29일 오전 11시에 죽었다고 시간까지 적시한 다블뤼와 달레의 기록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1799년 6월 21일에 당시 충청감사 이태영이 올린 상소문의 기록 때문이다. 당시 그는 이존창의 석방을 청했다가 조정이 들끓자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당시 충청도에서 사학 문제로 전향하지 않아 미결수의 상태로 갇혀 있던 사람은 이존창과 박취득 두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박취득은 지난달에 갑자기 죽고 이존창만 남았는데, 지난 가을 이후 이존창의 자세가 바뀌어 마음으로 맹세하고 입으로 다짐하는 태도에 진정성이 느껴져서 석방을 청하게 되었노라고 보고했다.
이 글에 따르면 박취득이 죽은 것은 1799년 2월 29일이 아니라 1799년 5월이었다. 실제 해미에서 2월에 죽은 것을 감사에게는 5월에 죽었다고 보고해서 이태영이 잘못 알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당시 조선의 죄수 관리와 보고 체계가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았다.
이존창을 정점에 두고 형성된 충청도 일대의 신앙은 양반 지식인층이 선도에 섰던 다른 지역과 달리 기층민 중심의 풀뿌리 교회였다. 정작 지도자였던 이존창이 1791년부터 여러 차례 배교 행동을 반복했음에도, 박취득이 조금의 흔들림없이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낸 것은 그 의미가 특별했다. 그의 주변에 형 박일득과 김필군 부자, 그리고 그들을 믿고 따랐던 부헝이와 막봉이와 엇재, 그리고 수많은 북실이들이 있었다. 1400대가 넘는 곤장으로도 결코 꺾을 수 없었던 박취득의 신앙은 그의 죽음 이후 점차 횃불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박취득은 한양에서 지황 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러니까 박취득이 지황(池潢, 1767~1795)에게서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그가 처음 면천 군수 앞에 섰던 1791년보다 훨씬 전의 일이었다. 지황은 1795년 주문모 신부 실포(失捕) 사건 당시 윤유일, 최인길과 함께 의금부로 붙잡혀 가서 단 하루 만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던 인물이다. 이들의 죽음에도 감춰진 얘기가 많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8) 밀정 조화진
신자로 위장한 밀정 조화진에 의해 내포 교회 핵심 세력 궤멸
- 탁희성 화백이 그린 복자 방 프란치스코의 마지막 밥상. 「벽위편」과 「정조실록」에 한차례 씩 니오는 방백동과 방 프란치스코가 동일인물로 보인다.
자세히 보아 두라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잠깐 주춤했던 교세가 1794년 이후로 날로 커져갔다. 특별히 호서(湖西) 지역은 풀뿌리 교회의 저변을 확장해가며 온 마을이 한꺼번에 신자촌으로 변하는 등 확산세가 심상치 않았다. 1795년 주문모 신부의 체포가 실패로 돌아가자, 장용영(壯勇營)의 별군직(別軍職) 선전관(宣傳官)에게 비밀스런 기찰(譏察) 명령이 자주 떨어졌다. 기찰 포교들은 그들 내부에 밀정을 심거나 각종 감시망을 동원해 신부의 자취를 바싹 쫓았다. 신부의 종적은 묘연했다.
신부가 충청도로 숨어든 것 같다는 보고까지 올라가자, 임금은 이때를 전후로 충청 감사와 충청 병사에게 천주교 신자들의 동향을 면밀히 염탐하여 하나하나 붙잡아 형벌로 다스릴 것을 특별히 명했다. 하지만 이 일은 조보(朝報)에도 실리지 않아 대부분 그 정황에 대해 몰랐다.
1798년 12월 1일, 정충달(鄭忠達)이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던 날이었다. 임명장을 받고 떠나는 인사를 올리려고 어전에 엎드린 그에게 임금은 고개를 들라고 명했다. 임금이 말했다. “여기 서 있는 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아 두거라.” 정충달이 그의 얼굴을 보고 얼른 고개를 숙이자, 임금이 다시 명했다. “아니다. 두 번 세 번 자세히 보거라. 다른 곳에서 만나더라도 그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정충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충달이 홍주 병영에 도착한 얼마 뒤 한 사람이 찾아와 뵙기를 청했다. 불러보니 대궐에서 임금 앞에 서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조화진(趙和鎭)이었다. 그는 풍양 조씨 중에서도 명문의 위세가 대단하던 이른바 청교 조씨의 서족(庶族)이었다. 그는 임금의 특명으로 특수 임무를 수행키 위해 내려온 것이었다. 조화진은 사학을 염탐하여 철저히 다스리라는 임금의 밀유(密諭)를 소매에서 꺼내 정충달에게 전했다. 전후 사정은 「벽위편」에 자세하다.
황사영의 「백서」에도 이 일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을묘년에 주문모 신부를 놓친 뒤로부터 선왕의 의구심이 날로 깊어졌다. 몰래 염탐하고 비밀리에 기찰하는 것을 잠시도 그만두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신부의 종적은 알지 못했다. 이에 조화진이란 자를 시켜, 천주교를 믿는 것으로 가탁해서 충청도 지역의 사정을 탐지케 하였다. 마침내 1799년 겨울 청주의 박해가 있었고, 충청도의 열심한 교우들이 거의 다 죽었다.”
저도 신자입니다
한 사람의 밀정을 투입해서 서학이 극성하던 충청도 교우의 핵심 세력을 거의 궤멸시켰으니, 성과가 참 대단했다. 보이지 않게 그를 돕던 별동 조직의 존재도 느껴진다. 교세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포교를 통해 성장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들이자면 먼저 자기 쪽을 열어야 했다. 작정하고 연구한 뒤에 달려든 밀정 앞에 열어야만 하는 신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밀정 조화진의 행동은 어떠했을까? 조화진은 족제비 꼬리를 몇 개씩 달고 다니며 필공(筆工) 행세를 했다. 마을마다 돌아다니다가 주문을 받으면 그 집에 머물며 붓을 매주었다. 붓은 소모품이어서 어디서든 수요가 있었다. 양반 집 사랑은 붓을 매는 척 염탐하기가 좋았다. 각종 행상 노릇도 했다. 구석진 마을을 다니며 옷감이나 기름, 젓갈과 실 또는 빗 같은 생활필수품을 파는 보부상들은 당시 전국 어디에나 흔했다. 실제 천주교 신자들의 포교도 이같은 생활밀착형 행상을 활용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규칙적으로 여러 구역을 돌아다니며 안면을 텄고, 질 좋고 값싼 물건으로 환심을 산 뒤, 어려움을 도우며 포교했다.
조화진은 미리 파악해둔 천주교 신자의 집을 타겟으로, 이 마을 저 동네로 다니며 낯을 익혔다. 슬며시 성호를 그어 자기도 신자라는 표시를 하며 그들에게 접근했다. 관심을 보이면 경문을 입으로 외워 보였다. 순박한 촌사람들은 의심 없이 넘어갔다. 그는 신자로 대접받았다. 때로 그들의 집회에 참석해서 조직을 염탐하고, 교세를 파악했다. 이따금 그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전달해 주는 역할도 맡았다. 마을별 사학 조직의 동태와 지역별 지도자 조직, 서학책의 숫자에서부터 집회는 언제 어느 집에서 열리고, 한번 모일 때 모이는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꼼꼼히 염탐하고 또 기록했다. 유동 인구가 많은 서울과 달리 향촌은 주거가 한정되어 이같은 파악이 더 용이했다. 한번 그물에 들면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 결과 조직 계통이 환히 드러나고, 공격 목표가 분명해지면 그는 중간중간 편지로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비밀리에 보고했다. 절대로 자신이 직접 병영에 연통하지 않았다. 병영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음성 현감 노숙(盧)으로 하여금 중간에 사람을 보내 우회 보고를 올리게끔 했다. 다 미리 짜둔 설계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고도 혹 문제가 생길까 봐 이들은 집회 날에 맞춰 천주교 신자 조직을 급습해 체포할 때, 일부러 조화진까지 함께 검거하는 술수까지 부렸다. 그에게 의심의 눈길이 쏠리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신자들과 함께 신문하고 시늉으로 매질도 해서 그들의 의심을 차단했다. 신심이 약한 신자들이 배교를 다짐하고 풀려날 때, 그는 슬그머니 묻어 나왔다.
함께 잡혀갔던 신자들은 그를 제 편이라고 더 믿게 되었다. 그는 전처럼 다시 마을을 다니면서 병영에 잡혀가서 겪은 자신의 경험담을 실감 나게 늘어놓았다. 이런 꼼꼼한 술책 때문에 충청도 교회 조직은 내부의 첩자가 조화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동안 그가 다닌 곳마다 도미노가 쓰러지듯 해당 지역 교회 조직이 뿌리째 흔들렸다.
앞에서 박취득을 홍주에서 해미로 내려보낸 일을 말했는데, 당시 내포 일대의 천주교 신자들은 해미의 진영(鎭營)으로 끌려가서 사형에 처해지는 일이 많았다. 해미에는 충청좌군영이 있었다. 당시 천주교인의 검거는 행정 책임자인 충청 감사와 군사 책임자인 충청 병사가 함께 진행했다. 그래서 앞서 김필군의 경우처럼 서로 간에 성과를 높이려는 보이지 않는 경쟁이 심했다. 충청 병사 정충달은 1798년 12월 1일에 부임해 1800년 8월 18일 회령 부사로 이임할 때까지 1년 9개월 동안 조화진을 통해 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 들여, 해미에서만 100명이 넘는 핵심 신자들을 죽였다. 교회 조직에서도 끝에 가서는 자신들을 사지로 밀어 넣은 밀정이 조화진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달레는 면천 배관겸 프란치스코를 밀고한 것도 조화진이었다고 썼다.
어떻게 이룩한 교회였던가? 밀정 하나 때문에 전체 교회가 붕괴 직전에 이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분해서 이를 갈며 복수를 생각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지자, 붙들려 간 천주교인이 조화진을 지목했다. 입을 맞춘 조직적인 음해에 그는 여러 달 고문을 당했다. 이때는 충청 병사 정충달과 음성 현감 노숙도 타지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고, 새로 온 관장들은 조화진의 정체를 잘 몰랐다. 애초에 그는 비선(秘線)에 속해 있어서 조정에서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는 감옥에서 끝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벽위편」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한편 달레는 “내포 지방에서는 조화진이라는 배교자가 밀고하여 많은 교우를 죽게 하였는데, 박해가 끝난 뒤에도 그 흉악한 생활과 강도질을 계속하다가 드디어 법망에 걸리게 되자 자살하고 말았다”고 조금 달리 썼다.
- 복자 방 프란치스코 초상화.
방백동의 천주교 신자 명부
김이영(金履永, 1755~1845)은 1799년 11월 17일에 충청 감사로 내려왔다. 이때 보령(保寧)에서 천주교 신자 방백동(方百同)이 붙잡혀 왔다. 방백동은 「벽위편」과 「정조실록」에 한차례 씩 나온다. 그는 체포될 때 작은 책자 한 권을 압수당했다. 책 속에 유력한 천주교 신자의 성명이 적혀 있었다. 이가환과 정약용 형제, 홍낙민, 이기양 등의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 일반 상민과 천민의 이름까지 100명이 넘었다. 1801년 3월 11일에 정언 이의채(李毅采)가 올린 상소문에도 “작년에 호서(湖西)에서 사당(邪黨) 방백동(方百同)을 잡아들이고 그 비감(秘龕) 가운데 기록된 바를 수색해 보니 제일 먼저 이가환이 기록되어 있고 다음에 이일운(李日運)이 기록되어 있어 사람들의 말이 낭자하게 전파되었다고 합니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책자를 보고 놀란 김이영은 비밀 공문과 함께 책자를 밀봉해 임금께 보고했다. 정조는 이 책을 이익운(李益運)에게 보여주었다. 이익운은 아들 이명호(李明鎬)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다산과도 아주 가까웠다. 이익운은 화들짝 놀라 그들 내부에 이 소식을 알렸다. 말이 금세 돌아, 기미를 알아채고 달아나 숨은 자가 많았다. 역시 「벽위편」이 전하는 소식이다.
여기 나오는 방백동은 아무래도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서 박취득 라우렌시오, 원시보 야고보, 정산필 베드로와 함께 순교하기로 약속했던 복자 방 프란치스코와 동일 인물이 아닐까 싶다. 방 프란치스코는 충청 감사 김이영의 비장이었다. 달레는 방 프란치스코가 1798년 12월 16일에 죽었다고 했는데, 방백동의 죽음은 1799년 말 또는 1800년 봄의 일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려면 사망 시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정조는 사학을 엄하게 다스려 교세의 확산을 차단했다. 다만 조정 관리에 대해서만은 스스로 사학을 끊고 임금의 교화에 따르게 하려는 기조를 유지했다. 이가환과 정약용 등은 이 때문에 여전히 벼슬길에서 쫓겨나지 않고 있었다. 1797년 이래로 충청도 교회는 밀정들의 밀고와 관장들의 참혹한 탄압으로 지도부는 와해되고, 조직은 붕괴되어 피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9) 내겐 천국이 두 개입니다
“천한 백정을 점잖게 대해 주니 내게는 천국이 두 개 있습니다”
-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황일광 시몬은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건히 신앙을 지켰다. 그는 모진 형벌에 다리 하나가 완전히 으스러져 들것에 실려 형장인 고향 홍주로 압송되면서도 명랑한 성격을 잃지 않았다. 그림=탁희성 화백.
내포의 천민 출신 지도자들
초기 교회의 양상에서 지역별로 성격 차이가 발견되는 것은 흥미롭다. 여주나 양근, 충주 및 청주 교회는 양반 계층이 전면에 섰고, 충청도 내포 일대만은 유난히 신분 낮은 일반 백성과 노비 계층이 신자의 주축을 이루었다.
내포 지역의 지도자는 이존창이었다. 「송담유록」에 따르면 그는 홍낙민 집안의 속량 노비의 아들이었다. 같은 책에서 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존창이 상민이었기 때문에 비록 무식하고 어리석은 백성에게 가르침을 행하였지만, 충청도의 사족(士族) 중에는 한 사람도 물든 자가 없었다는 점이다(所幸者, 存昌以常漢之故, 雖行敎於無識愚氓, 而湖中士族, 無一人浸染者矣)”라고 적고 있을 정도다. 내포 지역 교회의 특성은 상한(常漢), 즉 상놈들이라 불리는 신분 낮은 계층을 중심으로 신도층이 형성되었다는 데 있었다.
1791년 진산 사건 이후 박종악이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와 내포 지역 교회에 대한 검거가 본격화되었을 때, 붙잡혀 간 이존창은 자신의 제자 10인의 이름을 댔다. 천안의 최두고금(崔斗古金), 한봉이(韓奉伊), 최완복(崔完卜), 이개봉(李介奉), 황유복(黃有卜), 김명복(金明卜), 유복철(柳卜哲), 이복돌(李卜乭), 이치한(李就汗), 예산(禮山) 김삼득(金三得) 등이었다. 대부분 상한(常漢)으로, 이름으로 보아 노비 출신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리더인 이존창이 배교를 다짐하며 타이르자, 그를 따라 대부분 다짐장을 쓰고 풀려났다.
이들 중 존장(尊長)으로 불리며 가장 존경을 받던 이는 최두고금이었다. 박종악은 「수기」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천안 호동의 사학하는 무식한 부류 중에서는 최두고금이 가장 오래 익히고 깊이 통달한 자입니다. 그래서 근처의 어리석은 백성 중 사학을 하는 자들이 대부분 두고금을 추존하여 존장이라고 합니다. 이자는 비록 이미 다짐을 받고 놓아 주었지만, 따로 징벌하여 혼낸 뒤라야 어리석은 백성들이 더욱 두려워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천안 호동, 즉 여사울의 천주교 신자 중 최두고금은 지도자급 인물이었다. 이존창이 내포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지도자였다면, 그는 여사울 지역 교회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최두고금(崔斗古金)과 최구두쇠(崔去斗金)
그런데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사학징의」 기록 속에 최두고금과 이름이 비슷한 최거두금(崔去斗金)란 인물이 다시 나온다. 거두금(去斗金)은 ‘구두쇠’의 한자 표기다. 실제로 그는 최구두쇠로 불렸을 것이다. 현재 「수기」 번역본은 최두고금을 ‘최뚝쇠’로 읽었는데, 두고(斗古)는 ‘뚝’으로 읽을 수 없다. 뚝은 뚝섬(纛島)의 표기에서 보듯, ‘뚝(纛)’이란 글자가 따로 있다. 「수기」의 최두고금은 최고두금(崔古斗金)의 오기일 것이다. 두고(斗古)의 두 글자 순서를 바꾸면 고두금(古斗金) 즉 ‘고두쇠’로, 역시 ‘구두쇠’로 읽힌다.
1791년 박종악의 「수기」에 이존창의 제자로 나온 ‘최두고금’과, 1801년 「사학징의」에 보이는 최구두쇠는 동일 인물이다. 충청감영에서 1801년 3월 29일 자로 의금부로 보낸 공문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최천명(崔千明)의 아비 최구두쇠(崔去斗金)는 이존창과 이웃에 있으면서, 오래 사학에 물들었다. 지금은 비록 하지 않는다 하면서도 삿되게 묵주를 숨겨두고 있었다. 이미 체포된 막내아들 최억명(崔億明)도 일찍이 이존창을 따라 금산(錦山)으로 들어갔는데, 지금 또한 달아나서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그 부자(父子)의 자취는 실로 의심할만한 것이 많다.”최구두쇠는 1791년 배교를 다짐하고 풀려났지만, 배교는 커녕 그의 두 아들 최천명과 최억명까지 이존창의 심복으로 열심히 활동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모두 검거되었다. 이때 최구두쇠의 집에서 묵주가 나왔고, 최천명은 안성교(安聖敎)와의 관련으로 서울까지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다. 막내 최억명은 이존창을 수행하여 금산까지 갔다가 달아나 숨은 상태였다.
최구두쇠는 여사울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고, 두 아들 최천명과 최억명도 이존창을 곁에서 보좌하며 직분에 충실했던 인물들이다. 아들 최천명이 「사학징의」에 남긴 공초에는 이존창은 한마을에 살았지만 상종도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이들 부자는 다행히 뚜렷한 행적이 없고, 증거물과 증인이 나오지 않아 당장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던 듯하다.
- 복자 황일광 시몬.
두 개의 천국을 가진 황일광 시몬
황일광(黃日光, 1757~1802) 시몬은 홍주(洪州) 사람으로 최하층민인 백정 출신이었다. 달레는 어린 시절과 젊은 날 그가 “모든 사람의 멸시와 쓰레기 같은 취급을 받아가며 지냈다”고 썼다. 이하 그의 생애는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와 「사학징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그는 42세 나던 1798년 홍산(鴻山)으로 이존창을 찾아가 그 집에 부쳐 살며 천주교를 배워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고향을 떠나 아우인 황차돌(黃次乭)과 함께 멀리 경상도 땅으로 옮겨가 살았다. 경상도 어디인지, 그곳에 왜 갔는지에 대한 설명은 남아있지 않다.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라고만 했다. 뭔가 맡겨진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간 곳의 교우들은 천한 백정 출신의 형제를 편견 없는 애덕으로 감싸주었다.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후 황일광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손가락질당하고 멸시받던 삶, 쓰레기 취급의 응어리가 눈 녹듯 사라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기쁨이 샘물처럼 차올랐다.
그는 편견을 거두고 자신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주는 신앙 공동체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천국이 두 개 있습니다. 저같이 천한 백정을 이처럼 점잖게 대해 주시니, 이 세상의 삶이 제게는 천국이요, 죽은 뒤에 가게 될 하늘나라가 또 하나의 천국입니다.” 하루하루가 벅찬 기쁨의 날들이었다.
1800년 2월, 황일광과 황차돌 형제는 광주 분원(分院)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의 행랑채로 이사했다. 형제는 그 튼튼한 몸과 티 없는 신앙의 모범으로 이존창의 명에 따라 각 지역 교회를 오가며 모종의 역할을 맡았던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경상도에 머물던 그들이, 당시 명도회 회장으로 천주교의 지도자였던 광주 정약종 집의 문간방으로 찾아들어 갈 이유가 없다. 그의 활동 범위는 가히 전국구였다. 그는 이곳에서 정약종과 서울 및 지방 교회를 연결하는 심부름꾼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황일광의 열심은 언제나 주변 모든 이들의 탄복을 부를 정도였다.
어찌 배반하리이까?
1800년 10월에 정약종은 상경해서 청석동에 살던 궁녀 문영인(文榮仁)의 집으로 이사했다. 정조 임금의 국상 중이어서 이 기간 중 일체의 검거 활동이 멈춘 까닭에 잠깐의 진공 상태가 있었다. 10월을 보통 소춘(小春)이라 하는데, 가을의 한복판에서 한동안 봄날 같은 날씨가 이어지는 시기가 들어 있어서이다. 앞서 「벽위편」에서 아녀자들이 겁도 없이 밤중에 쏟아져 나와 길거리를 다녔다던 그 시기이다. 곧 다가올 매서운 추위의 전조 격으로, 일종의 인디언 섬머 같은 기간이었다.
명도회 회장 정약종의 상경은 아마도 주문모 신부의 요청에 따른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궁을 나와 살고 있던 궁녀 문영인의 집에 세를 얻어 서울에 근거지를 확보했다. 이때도 황일광 형제가 이삿짐을 날랐다. 이 집에서 황일광은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고 시몬(深淵)이란 세례명을 받았다. 함께 미사를 올리는 벅찬 기쁨도 맛보았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문영인의 집이 좁아 함께 거처할 수 없자, 형제는 정동(貞洞)의 골목집 사랑채에 들어 땔감을 팔며 생활했다. 서울 생활은 땔감 없이는 밥도 못 짓고 겨울철 난방도 할 수가 없었다. 땔감 배달은 신자들을 방문하여 소식을 전하면서도 남의 의심을 사지 않을 일거리였다.
이들 형제는 1801년 2월, 정약종이 체포되기 며칠 전에 붙잡혔다. 끌려갈 때도 끌려가서도 그는 내내 명랑했다. 관리의 날카로운 추궁과 고문에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천한 백정이 신앙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며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할 때는 거룩한 아우라가 넘쳤다. 대가는 잔혹한 고문이었다. 다리 하나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11월 12일에 포도청은 형제를 형조로 넘겼다. 그는 정약종, 이존창, 황사영 등 사학 3적(賊)의 심복으로 지목되었고, 혈안이 되어 찾고 있던 황사영의 소재를 대라며 집중 추궁을 받았다. 그의 대답은 구차하지 않았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사학에 빠져서 이를 바른 도리로 알았습니다. 비록 죽는 지경에 이른다 해도 어찌 배반하여 버릴 마음이 있으리이까? 속히 죽임을 당하는 것이 지극한 소원이올시다.” 첫 번째 천국에서의 삶이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조정은 그를 고향인 홍주로 보내 그곳에서 목을 베라고 했다. 그곳 천주교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 먼 길을 그는 들것에 실려 갔다. 들것 위에 그를 얹고 서울에서 홍주까지 옮겨야 했던 포졸들은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그는 홍주에 도착한 당일 45세의 나이로 목이 잘렸다. 그는 그날 두 번째 천국에 올라 천주의 품에 안겼다.
황일광 시몬의 빛나는 덕행은 그곳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대신 무한한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천한 백정인 그도 천주의 영광을 위해 저토록 거룩하게 죽었다. 우리도 따라가자. 우리도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