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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제,속건제,속죄제
- 설교 : 김강산 목사 (은혜와평강교회)
오늘은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 세 제사 예물에 대해서 강론하겠다. 항상 공부할 때는 일단은 문법적으로 구분을 하는 것이다. 국어 책을 읽듯이 어떻게 배열이 되어 있는지 그 다음 그 자체에서 이 제사법의 의미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해석하고 그리고 나서 구원 역사에서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어떻게 의미가 있는지를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먼저 화목제 제물의 종류다. 소나 양 염소 이렇게 드리는데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린다. 드리는 방법은 임자가 안수하고 회막문에서 잡으면 제사장이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리고 임자가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 기름을 취한다. 이 기름 취하는 것이 화목제의 한 특징이다. 그런데 내장에 덮힌 모든 기름 거기 보니까 간 꺼풀 쭉 있는데 기름을 강조하는 방법이고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두 콩 팥 그리고 양일 때는 기름진 꼬리 이것을 단에 불살라 드린다. 그렇게 해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한다. 그런데 불사를 때도 그냥 단위에 불살르라 그렇게 되어 있지를 않고 번제물위에 사르라 그렇게 강조되어 있다.
항상 기록 자체를 자세히 읽어야 한다.
가령 3장 5절을 보면 아론 자손은 그것은 단위 불 위에 있는 번제물위에 사를지니 무엇이 복잡하다. 단에 불이 있다. 그 위에 나무가 있다. 그 위에 번제물이 탄다. 그 위에다 태워라 그렇게 되어 있다. 다른 데는 그렇게 자세히 언급이 안되어 있는데 단 위에 있는 나무 그 위에 불이 붙고 그 위에 번제물이 타고 있는데 그 위에다 드려라 이렇게 되어 있다.
화목제는 여호와께 드리는 식물이다. 제사장이 단위에 불살라 화제로 드리는 것은 여호와의 식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다. 기름과 피는 대대로 영원히 먹지 말라 16절에 그렇게 강조되어 있다. 3장 16절에 식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라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이것이 여호와의 식물이다. 여호와의 몫이다 하는 이것이 화목제의 강조가 되어 있다.
그 다음에 뒤에 장을 보면 속죄 제물을 보고 한꺼번에 강론하겠다. 속죄 제물의 종류는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수송아지 여기서는 짐승이 먼저 강조가 안되고 누가 죄를 지었냐 하는 죄의 등급이 강조가 되어 있다. 그래서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수송아지 이스라엘이 온 회중이 죄를 지어도 수송아지 족장이 죄를 지으면 수 염소 평민이 죄를 지으면 암염소나 어린 암양 여기 암컷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평민 중에서 힘이 암 염소나 암 양을 드릴 힘이 안되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둘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이 보다더 힘이 없으면 에바 십분의 일로 하나님 앞에 드린다. 그런데 이것은 속죄 제물로 드리기 때문에 소제처럼 기름과 향을 놓아서는 안된다. 에바 십분의 일은 성인 하루의 양식이다. 드리는 때는 여호와의 금령을 부지중에 범하고 그리고 깨달았을 때 드린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분해해 주니까 알기 좋지만 기록 문장 형식은 이렇게 안되어 있다. 속죄제는 어느 때 드리는가 그 죄에 대한 이야기는 저 뒤에 있고 앞에 누가 죄를 지었냐 죄의 등급이 전면에 드러나 있고 그 다음에 평민도 이렇게 드리라 해 놓고 저 뒤에다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을 때에 죄의 종목은 뒤에다 조금 붙어 있다.
속죄제를 보면 기록 형식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항상 기록 형식 문장 자체에 흐름이나 문맥을 잡으라 그 말이다. 속죄제는 다른 경우와 달리 누가 죄를 지었냐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죄의 등급이 중요하고 어디까지 죄를 미쳤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금령은 어떤 것이냐? 저 뒤에 쯤 보면 증인이 증거 하지 않을 때 부정한 사체를 만졌을 때 사람의 부정에 접촉할 때 무심중에 맹세할 때 그리고 깨닫고 나면 이렇게 이렇게 제사를 지내라. 그런 말이다.
드리는 방법은 죄를 자복하고 그리고 드리는 자가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으면 제사장이 피를 여호와 앞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여기서 속죄제는 피 뿌리는 장소가 특징이다. 속죄제 종류를 죄를 지은 사람 등급 어디까지 죄가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인데 드리는 방법은 피뿌리는 것이 속죄제의 특징이다. 그래서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여호와 앞 향단 뿔에 피를 바르고 피 전부 회막 문앞 번제단 앞에 쏟는다. 드리는 자가 화목제에서처럼 기름과 콩팥을 취하면 제사장이 화목제물 위에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한다.
이 속죄 제물은 화목제의 기름 위에서 사르라.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1번 기름부은 제사장이나 온 이스라엘의 회중이 범죄 했을 때는 5번까지 순서다. 송아지 전체를 진밖에 재 버리는 곳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버린다 거기까지가 그렇고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과 회중의 속죄제를 드리는 법은 6번까지 그렇게 된다. 그러나 그 위에 즉 족장이나 평민이 죄를 지으면 피를 휘장이나 향단에 바르게 않고 번제단 뿔에 바르고 번제단 밑에 뿌리고 제물의 나머지는 제물을 드린 제사장이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
그렇게 하면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는다. 화목 제물의 제일 끝은 기름은 내것이라 너희들은 먹지 말아라 그 말로 끝나 있고 속죄제는 여호와께 속죄가 된다. 무슨 죄든지 속죄함을 얻으리라 그렇게 결론이 되어 있다.
속건제는 속건제와 속죄제가 거의 구별이 안될 만큼 연결이 되어 있지만 속건제는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하였을 때 또 여호와의 금령을 부지중에 범하였을 때 남의 물건을 전당 잡거나 강도질했거나 빼앗거나 분실물을 얻고도 부인할 때 들켰을 때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부지중에 범한 여호와의 금령은 어떤 것인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런데 드리는 종류는 이제는 속죄제는 사람에게 강조가 있었다. 누가 죄를 지었냐가 강조인데 속건제는 보상이 강조 점이다. 그래서 성물에 대해서 죄를 지었으면 속건제를 드리는데 지정한 가치를 따라서 성소의 은세겔에 해당하는 흠없는 수양 거기다가 1/5을 가산해야 한다. 여호와의 금령을 범한 경우는 지정한 가치에다 흠없는 수양이다. 이것은 직접 손해를 끼친 것은 아니다. 금령을 범했을 때도 일단은 하나님께 손해를 끼친 것인데 물건에 손해를 끼친 것이 아니여서 1/5을 가산하지 않지만 성소에서 지정 한대로 성소의 세겔은 일상 세겔의 약 두배가 된다. 그것도 은 가치에 해당한 것으로 그렇게 고가로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3번 같이 다른 사람에의 물건을 장난 질 했을 때는 본 물건에다가 1/5을 더하고 거기다가 지정한 가치대로 성소의 세겔대로 더 드려야 된다. 그것이 속건제을 드리는 종류다.
드리는 방법은 부지중에 죄를 지었는데 죄가 드러나는 날에 임자가 그렇게 보상을 하고 그리고 제사장이 속건제 수양으로 제사를 한다. 그러니까 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하는 5장에는 이 제사법은 안 나와 있고 보상 문제만 나와 있고 이 제사지내는 방법은 7장에 나와 있다.
7장에서는 실은 제사법이 강조가 아니라 음식 나누는 몫에가 더 강조거든요. 그런데 그 쪽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왜 문장이 거기 배열되어 있는지 그런 문제들이 중요하다.
가령 속죄제는 어떻게 지낸다냐? 법이나 연구하려면 이렇게 구분해 주면 알기에 좋다. 그래서 레위기는 복잡하지 않게 구분하니까 알기 좋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설명하기가 훨씬 쉽다. 그런데 기록된 문장 형식은 이렇게 안되어 있다. 그런 것은 제물을 나누는 데서 더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속건제는 제사 드리는 법은 일체 안 나와 있고 오히려 제사지내는 법은 오히려 제물을 나누는 몫에 들어가 있다.
그래도 여기서는 구분해서 배우니까 일단 읽어는 두자. 7장을 보면 드리는 방법이 있는데 속건제는 속죄제처럼 지극히 거룩하다 이 말이 제일 앞서 있다. 그리고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는다. 제사장은 피를 단 사면에 뿌린다. 모든 기름과 콩팥을 단에서 여호와께 화제로 드린다. 고기는 속죄제처럼 그것을 드린 제사장의 몫이요 지극히 거룩하니 제사장의 남은 자만이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 그렇게 되어 있다. 속건제는 지극히 거룩하다는 말이 앞과 뒤에 배열되어 있다.
여기서는 피를 어디다가 뿌린다 하는 것은 그렇게 강조가 되어 있지를 않는다. 단에 뿌리는 것이다. 피 뿌리는 것이 강조된 것은 속죄제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속건제를 드리면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는다 그것이 결론이다.
이제 해석을 하겠다. 그러면 이런 제사법은 어떻게 해석을 하냐?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제사법법들이 다섯 가지가 있지요? 그 특징들을 비교해야 한다. 그런데 제사법은 기록되기를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법과 또 제물 나누는 법 이렇게 두 단계로 구분이 되어 있다. 그런데 제물을 나누는 법은 제물을 나누는 법만 있냐? 그렇지 않고 드리는 법도 함께 언급이 되어 있다. 실은 거기서 드리는 법은 하나님의 몫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된 것이고 그리고 이 제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드리는 것의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그 본질은 앞에 제사 드리는 법에 나타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한꺼번에 모아서 해석을 하면 실은 잘 안 맞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들은 기록된 단위로서 레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를 보고 비교해 보면 아! 드리는 법에서 강조 점은 무엇이고 음식 나누는 강조 점은 무엇인가? 그래서 이것이 이렇게 배열이 되었구나. 그런 것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비교를 해보자. 5쪽으로 돌아가서 비교하는 것이다. 6쪽을 읽어도 될 것이다. 왜 이렇게 반복이 돼냐면 매주 하나씩 강론하지요? 그러니까 중요한 토대는 반복되고 또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한꺼번에 해 버리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6장 가운데 문단부터 읽겠다 그 말이다. - 각 제사 예물의 의미는 여호와께 향기로 예물을 드리는 법과 그 예물의 몫에 대한 규례를 함께 읽고 제사들을 서로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번제는 전체를 화제로 드린다. 불은 꺼지지 않게 하고 아침마다 번제물을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서 사른다. 가죽은 제사장의 몫이다. 지금은 전체에 대한 비교로서 설명을 하는 것이다. 나중에 몫은 왜 여기 기록되어 있는가는 다시 설명을 할 것이다.
하여튼 불은 꺼지지 않게 하라는 것은 번제에 있는 이야기지 다른데는 불 이야기는 안 나온다. 그리고 그 단 이름도 번제단이다. 그리고 아침마다 드리고 정규적으로 드린 것이 번제다. 그것은 개인이 원해서 드리면서도 또 정규적으로 드리도록 뒤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이 불은 꺼지지 않고 하는 이야기는 실은 번제물에 대한 제사법에 나온 것이 아니라 뒤에 제물을 나누는 몫에 나온다. 하여튼 번제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번제물과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제물 나누는 법을 보면 화목제의 기름을 번제위에 사르라. 그것까지 번제에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제물을 나누는 목적에 해당되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제물의 종류가 강조였다. 전체로 불살라 드려라. 그런 것이 강조였는데 전체를 비교해 보면 이런 것이다. 그러니까 번제는 전체를 화제로 드린다. 불은 꺼지지 않게 하고 아침마다 드려야 되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살라야 되고 가죽은 제사장의 몫이다. 그것이 번제물에 대한 전체적인 요약이다.
그러면 소제는 어떻게 되어 있냐? 기념물로 일부를 드리고 모든 유향을 화제로 드린다. 기념물로 일부 그리고 모든 유향을 향내로 드려 향내나게 한다. 이것이 소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핵심이다. 특별히 향은 전부 사르라고 예비되어 있다. 그러니까 다른 것도 향내나는 예물이 되지만 완전히 향만 사르는 것이 진짜 향내가 나겠지요? 그래서 소제물로 한 움큼 기념물로 모든 유향을 화제로 불살라 드리면 향내가 된다. 그것이 소제물에서 강조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제사장의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며 성소의 뜰에서 먹는다. 이것에 접촉하는 자마다 거룩하게 된다. 그것이 소제물에 대한 총 요약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몫이 무엇이다 하는 것은 잘 안 나와 있고 제사장에게 양식을 준다. 그리고 이것은 지극히 거룩하니까 성소의 뜰에서 먹고 이 음식물에 접촉된 것은 다 거룩하다. 이 음식물의 지극히 거룩함 어떤 의미로 거룩한가? 성소에 속한다는 의미로 거룩함 모든 것을 정결케 한다는 의미로 거룩함 거기가 강조되어 있다.
화목제는 모든 기름과 콩팥을 화제로 드린다. 여기서 기름과 콩팥은 같은 자리에 있다. 문법적으로 같은 자리에 있다. 그러니까 콩팥은 기름하고 같은 의미다. 힘 이것은 아마 우리 동양권에서 말하는 개념들은 더 잘 이해를 할 것이다. 사람 힘이 어디서 나오냐 허리로부터 나온다. 힘이 좋다고 했을 때는 어깨의 힘이 좋다고는 잘 안한다. 허리힘이 좋다고 그런다. 힘이 어디서 나오냐 콩팥에서 그런 식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콩팥은 전부 기름진 것 내장에 덮인 기름진 것 그리고 그 기름과 함께 두 콩팥, 콩팥과 기름은 같은 가치를 가지는 그런 위치에 있다. 이것은 기름지고 힘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기름과 콩팥을 화재로 드린다. 번제물 위에서 사른다.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다. 화제물이 하나님 앞에 음식 드리는 것이 핵심이다. 내것이다. 음식의 친교가 화목제에서 특징이다. 기름은 여호와의 식물이다. 내 몫이다 주장하고 있는 것은 화목제에서 하는 이야기지 다른 제물에서 이것은 내것 그렇게 말한대가 별로 없다. 가령 속죄제를 드릴 때 기름을 사른데 기름은 내것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안는다. 화목제에서만 하는 이야기다. 기름은 여호와의 식물이다. 무교병과 유교병과 함께 드리고 음식상이 걸다.
이제 유고병도 드려져 있고 그리고 가슴과 우편 뒷다리를 드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상에 와서 하나는 흔들어 드리고 하나는 들었다 났다 한다. 어떻든 하나님의 상에 드린 것이다. 그리고 화목제를 읽어보면 임자가 가져오너라 그렇게 되어 있다. 다른 데는 제사장이 가져다 드린 것으로 되어 있다. 임자가 안수하고 죽이면 제사장이 가져다 드린 것으로 되어 있는데 화목제는 임자가 내게로 가져와라 표현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임자가 제단에 드린가? 아니다. 분명히 제사장이 드리는데 임자가 가져와라 그렇게 되어 있다. 여호와께 드린 가슴과 다리 소제물은 제사장의 몫이며 나머지는 임자의 몫이며 깨끗한 자만 먹는다. 그 고기가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고기가 부정하게 된다. 나중에 제물을 나누는 법을 보면 서원 해서 드리는 화목제물은 이틀까지 먹는다. 그러니까 이 예물을 소제물처럼 지극히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자만 먹는다는 의미로 거룩하다. 이것은 성소 밖의 양식이다. 왜 부정한 자가 접촉되면 음식이 부정하게 된다. 그런데 성소에서 먹으면 부정한 것이 접촉되면 부정한 것이 깨끗게 되어 버린다. 그런 차이점이 있다.
속죄제는 죄가 미치는 영향의 등급을 따라서 명령에 의해서 가난한 자라도 반드시 드린다. 이것은 거의 강제적이다. 번제는 너희들이 예물을 드리려거든 이렇게 되어 있는데 속죄제는 아니다. 이렇게 죄를 지어서 온 백성에게 죄가 미쳤으면 이렇게 이렇게 드려라 명령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제물은 드리고 싶으면 이것 이것을 드려라. 개인에게 자유가 허락되어 있는데 속죄제는 전부 항목이 정해져 있다. 누가 범죄 하면 이것 그리고 족장이 범죄 하면 수 염소다. 그런데 평민이 범죄 하면 암염소다. 이것은 풍성히 드린다는 것에 강조가 아니라 더 약한 것 작은 것을 드린다는데 강조 점이다. 왜 뒤에 힘이 미치지 못한 자들을 언급하는 것을 보니까 그렇다.
화목제에서 암컷을 드린 것은 풍성함이 강조다. 왜 거기는 나중에 유교병도 드리고 많이 드리니까 그것은 풍성함이 문제지만 속죄제에서 암컷을 드린 것은 더 작은 것을 드리는 문맥이다. 그러니까 그 문맥을 따라서 해석을 해야 되지 그 성별로 논쟁하고 있으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 문맥을 봐야 한다. 그런데 평민이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를 드려도 좋고 그것도 미치지 못하면 하루 식량으로 드려야 된다. 그러니까 안 드린 사람이 없다. 반드시 드려야 한다. 그것이 속죄제에 대한 강조 점이다. 그래서 죄가 미치는 등급을 따라서 이 죄가 어디까지 미쳤는가 봐서 피도 거기까지 뿌린다. 가난한 자라도 반드시 드린다.
기름은 화목제처럼 드리고 피는 죄얼이 미치는 곳까지 뿌리며 그런데도 제물은 화목제처럼 드리도록 했다. 그리고 피는 어디까지 뿌리는가? 죄의 결과가 미치는 곳까지 뿌려야 된다. 그래서 제사장이 범죄 하면 휘장 앞에 뿌려야 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막힌 것이고 또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이 범죄 하면 그것은 온 백성이 죄를 짓는 것과 같다. 향단 뿔에 발라야 된다. 왜 비는 권세가 영향을 받았다. 또 번제단에만 바르는 것이 아니라 번제단 뿔에 바르고 뿌려야 된다. 뿔에 바르는 것은 권세에 대한 강조다. 번제는 뿔에 바르라는 말은 업다. 번제단에 뿌리고 단 사면에 뿌리고 밑에 붓고 그런 식인데 속죄제는 그 뿔에 바르도록 되어 있다. 성소에 피를 가지고 드러간 것은 먹지 못하고 진 밖에서 태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휘장 앞에 뿌리고 향단에 뿌린 피 그렇게 뿌린 피는 기름 부음 받은 대 제사장이나 백성이 지은 죄 그런 것은 먹지 못하고 진 밖에서 태운다. 그 외에 경우에는 예물의 나머지는 제사장이 성소의 뜰에서 거룩한 양식으로 먹는다. 소제물처럼 거룩하고 속건제는 성소의 세겔대로 드리며 성물에 대해서 오분의 일을 더한다. 개인 피해에 대한 것은 항상 오분의 일을 더한다. 기름은 화목제처럼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제사장이 먹는다.
번제는 무엇이 강조냐? 전부 요약하면 번제는 전체를 드림이 소제는 향내가 화목제는 음식의 교제가 속죄제 는 죄를 속하는 것이 속건제는 손해에 대한 보상이 중심이다. 그 앞에 5쪽을 봐도 이런 말이 더 자세히 써 있을 것이다.
그것이 5대 제사를 비교 해 봤을 때 강조 점들이다. 이 강조 점들을 따라서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강조에 맞도록 배열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표현도 그렇게 되어 있다.
이제 다시 앞 페이지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속죄제를 해석할 찬스이니까? 지금은 해석하기 위해서 전부 비교해 봤다.
화목제다. 화목제 예물을 드리는 법에서 강조 점은 내장에 모든 기름과 콩팥을 화제로 드리는 것과 기름을 여호와의 식물이라 칭하고 피와 같이 사람에게 먹지 못하도록 금한 것이다. 그것이 화목제의 제일 끝에 강조되어 있다. 화목제를 드리는 것을 화목제의 기름을 사른다고 말한다. 또 화목제를 드릴 때도 어떻게 하느냐? 화목제의 의 기름을 사른다 했고 속죄제 는 피를 뿌린다 그런다. 표현하면 그래서 화목제를 드릴 때도 화목제의 기름을 드린다 이렇게까지 표현한다. 그래서 기름과 콩팥은 문장에서 같은 의미를 가진다. 기름과 콩팥은 생명의 힘을 표상 한다. 수컷뿐만 아니라 암컷도 드리며 임자도 성소 밖에서 먹으며 먹는 날수도 정한 것도 특징이다. 며칠까지 먹어라 다른 데서는 며칠날까지 먹어라 날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어디서 먹는가 먹는 장소가 강조다. 거룩한 뜰에서 먹어라 그것이 소제물이다. 거룩하게 먹어라 한 것은 속건제와 속죄제다. 그것은 장소가 문제인데 화목제는 몇 일까지 먹어라 그 쪽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먹는 날수를 정한 것도 특징이다.
속건죄와 속죄제와 소제의 예물은 성소에서 제사장이 먹는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며 접촉한 자를 거룩하게 하지만 화목제의 고기는 부정한 것에 접촉하면 부정하게 되며 깨끗한 자만 먹는다. 만일에 부정한 자가 먹으면 그는 하나님이 벌을 줄 것이다.
그렇게 먹는 방식의 차이가 있다. 이 먹는 방식은 어디 자리에서 먹는 것이 아니나 언제 까지 먹어라 드리는 것도 기름을 살라라. 이쪽이 강조다. 기름은 내것이라. 아까도 비교해 봤지만 많이 드린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다른 것은 기름만 주로 사르는데 번제는 전체를 사르고 나머지는 대표자만 사르는데 이것은 오른쪽 뒷다리 가슴도 드린다. 그러니까 많이 드린다. 그것이 강조다. 그러니까 이 예물은 성소 밖에서도 먹는데 거룩한 자만 먹어라 부정한 자가 먹으면 그가 벌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 고기도 부정하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특별히 서원 해서 드리는 감사제는 이틀까지 먹어라 더 확대가 되어 있다. 그것이 화목제의 특징이다.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가지는 거룩한 식탁의 교제 곧 하나님께서 성소에 속한 생명의 교제를 허락하신 것이다. 화목제의 교제는 전 생명을 드리는 번제물 위해서 사르며 향기로운 삶의 향기를 드리는 소제와 함께 드리고 유교병과 함께 드렸다. 이것은 화목제를 드리라는 제사 법에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나중에 제사 제물을 나누는 몫에서 나타나는 방법들이다. 그러니까 제사 제물을 나누는 몫에서 제사 드리는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몫으로서 의미가 드러나 있다. 거기에 그렇게 나타나 있다. 번제와 소제가 화목제의 토대요 화목제는 모든 제사의 목표이다.
시내산 언약 체결 식에서도 번제와 함께 화목제를 드렸다. 그러나 기름은 하나님만의 몫이며 백성에게는 생명의 양식도 부정으로부터 오염 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서원의 양식일지라도 안식일에 먹는 이틀까지 먹는 양식밖에는 안되었다.
화목제를 보면 화목제의 기름을 사른다. 콩팥을 사른다 해서 힘, 생명의 힘 그것을 드리는 것으로 되어 있고 특별히 기름은 내것이니 아무도 먹지 말아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 앞에 음식물 드리는 것이 강조 점인데 어떻게 드리자면 이 화목제는 번제물 위에서 불사르고 또 소제물 유교병과 무교병과 함께 드린다. 그러니까 이것은 완전히 음식상이다. 또 유교병까지 드리니까 안식의 양식까지 드려지는 것이다. 그렇게 드린다.
그러니까 이 화목제는 번제물 위에서 불사르고 소제와 함께 드린다. 그리고 이것은 제물을 먹는 것이 강조다. 그러니까 실은 이 화목제는 번제와 소제가 토대가 되고 번제와 소제가 목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 생명을 헌신하고 그리고 그들의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열매로 드리고 그렇게 하는 삶이 목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축제 하나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 그런데 이 축제는 성소 밖에까지 확대된다. 그것이 화목제의 중심이다. 먹는 것도 서원 제물은 이틀까지 먹는데 구약에서 먹는 양식의 최고 한도는 이틀이다. 왜 그것이 안식일에 만나를 먹는 방식이다. 다른 모든 것은 하루의 양식인데 안식일에는 이틀치를 주웠다. 그래서 이틀은 하루의 완성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서원제물도 이틀까지 먹고 더 이상 먹으면 부정한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식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으로 그의 삶을 성화 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그이 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로 세우셨다. 단어 그대로 화목제물로 나와 있는 구절들을 인용했다. 특별히 롬3:25. 요한-서 2:4절 4장 10절 예수는 그의 피로 인하여 교회로 자기 상에 앉게 하시고 그의 피에 살과 속한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허락하셨다. 예수를 화목제물로 보내셨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화목제물 그러니까 진노를 푸는 화목 그런 교리 적으로 해석을 하지만 그것은 구약이 화목제물이 일단은 토대다. 왜냐하면 그 화목제물은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의 특권이다. 성소에서만 먹는 것이 아니라 성소의 뜰 밖에서도 먹는 거룩한 교제의 양식이다. 그것이 예수를 화목제물로 보내셨으니 하나님과 화목해라 그런 말이다.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화목제물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먹고 마시는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음식 드리는 축제로 그렇게 드리도록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다.
속죄 제물이다.
죄를 위한 제물은 속건제 든 속죄제 든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방법이 아니라 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며 성소에서 먹는 교제를 허락하심이다. 물론 속죄 제물은 어디까지 피를 뿌린다는 것이 강조 점으로 되어 있지만 그 제물에 모든 목표는 그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성소에 들어와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한다 그것이 핵심이다. 그러니까 이런 저런 부지중에 지은 죄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성소에서 친교 하는 친교에서 끊지를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길을 열으셨기 때문에 그것이 속죄 제물의 강조 점이다.
그러므로 속죄 제물의 기름을 화목 제물 위에 사르며 고기는 소제물처럼 제사장의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린다 했을 때 속죄제 는 피 뿌리는 것이 강조지 기름은 어디다가 사르고 물론 기름은 거기 나오지만 어떻게 먹는지 하는 것은 강조가 안되어 있다. 그런데 먹는 문제는 제물을 나누는 몫에 있지만 이것은 제사법과 제물을 나누는 법을 함께 읽고 해석해야 할 문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 법에는 피뿌리는 법만 주로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속죄 제물은 죄 사함에 강조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그 제사의 본질들은 그런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상에서 먹는 친교가 결단코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는 생명의 교제 언약의 친교 그것이 출애굽기에서 언약 체결의 본질이다.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은 화나 있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달랠까. 그런 의미로 좁혀서 해석하지 말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속죄가 중심이기 때문에 몫에 대한 말씀은 뒤에서 다른 예물의 몫과 함께 언급이 된다. 제사 드리는 법에서는 나누는 몫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제사장에게 양식으로 주는 것은 소제물에 있다. 하나님 앞에 향기가 되고 제사장은 이것으로 먹고살아라. 소제가 제사장의 가장 기본적인 양식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열매 향내나는 삶 그것이 곧 거룩한 백성의 삶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음식 드리는 친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삶의 열매를 드리는 문제가 소제의 중심이다.
예수는 우리의 속죄 제물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단번에 죄를 속하시고 하늘의 성소에 속한 그리스도의 상에서 먹고 마시고 헌신하게 하신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오직 저희 자신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서 살게 하려 함이니라. 무슨 말이냐 하면 구약 때 속죄물을 통해서 성소에서 교제하게 하신 하나님이 아들을 속죄물로 세우셔서 하늘에 속한 교제로 완전케하셨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구약에 있었던 은혜의 역사를 완성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언약 백성이 이런 저런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속하는 단번 속죄물이다. 그분은 참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하늘 성소에서 거룩한 양식이다. 먹는 모든 자가 거룩하리라 했는데 특별히 그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먹는다. 그리고 한 번 더 강조하기를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을지니라 그렇게 확대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제사장이 먹는데다가 강조가 되어 있다. 아직 백성은 못 먹는다. 그래도 이것을 제사장이 먹음을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 앞에 교제의 예물로 드려진 것이다. 그것이 속죄제물의 강조 점이다.
그러면 속건제는 어떤가? 속죄제와 속건제 는 향기를 위하여가 아니라 속죄를 위하여 드린다. 속죄제는 하나님께 죄를 속함 받는 것이 중심이기 때문에 피를 뿌리고 바르는 곳과 죄를 지은 사람의 신분과 제물의 등급과 화목제처럼 기름을 사르는 것이 그 드리는데 있어서 주된 내용이다. 속건제 는 보상이 중심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가 없으며 지정한 대로 성소의 세겔대로 은의 가치에 해당하는 수양을 드리고 본 물에 오분의 일을 더해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주된 내용이다. 갚으라 그 말이다. 그러므로 속건제의 제물을 단에 드리는 제사법은 제물의 몫을 기록한 부분에 배당하였다.
어떻게 제사할 것인가 하는 것도 보상이 강조이기 때문에 처음에 드리는 법에다가 기록하지 않고 제물을 나누는 데다 속건제의 제물을 드리는 법을 기록해 놨다. 왜 속건제 는 보상이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다.
속건제의 고기는 속죄제의 고기처럼 지극히 거룩하다. 특히 속죄 제물의 고기는 지극히 거룩함이 강조되어 있다. 속건제 는 속죄 제물처럼 지극히 거룩하다 나도 이하 동감 그렇게 쓰여져 있다. 지극히 거룩하다는 의미는 속죄 제물에 강조가 되어 있다. 그 먹는 고기에 지극히 거룩한 것은 소제와 속건제와 속죄제 이 세 가지 제물이 지극히 거룩하다. 화목제는 깨끗 한자만 먹는다는 의미로 거룩하지 지극히 거룩함 즉 성소에 속한 거룩함은 아니다. 왜 성소 밖에까지 확대된 음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죄를 위한 제물은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방식이 아니라 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화목제의 기름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며 성서에서 먹는 교제를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 제물의 기름을 화목제물위에서 사르게 하시며 고기는 소제 물에서처럼 제사장의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그렇게 표현한다. 그냥 지극히 거룩하다 하지 않고 소제물처럼 거룩하다 그렇게 말한다.
소제물은 제사장의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하나님 앞에는 지극히 거룩한 향이고 제사장에게는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그런데 속건제 는 거룩한데 소제물처럼 거룩하다. 이렇게 되어 있다. 실은 진노에 대한 문제는 실은 속죄제에 강조가 되어 있다. 왜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막히니까. 그것은 속죄해야 되거든요. 거기서 먹는 것이 거룩하다가 강조가 되어 있다. 왜 거기서 특별히 강조해야 되겠지요. 왜 죄를 위해서 드리고 있으니까. 만일에 이것이 지극히 거룩하다고 강조가 안되면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속죄제물을 드려 놓고 화목제처럼 깨끗한 자만 먹고 부정한 것에 접촉한 자는 부정하다 그러면 이것은 속죄의 완전함이 안되는 것이다. 문맥에서다.
화목제물은 성소 밖에까지 확대되어야 속죄제의 의미로 강화된 것이고 만일에 속죄제물을 먹는데 지극히 거룩하고 내 뜰에서만 먹어라 그렇게 하지 않고 뜰 밖에서도 먹어라 그러면 그것은 속죄제로서 온전하지 못하다 그 말이다. 강조 점이 그러니까 문맥을 따라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속건제 물은 소제물처럼 지극히 거룩하다. 먹는 자마다 거룩하리라 또 이것이 접촉된 모든 것이 거룩하리라.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휘장 앞에 나아가는 길이 막히고 죄라는 것은 기도하는 권세가 막히고 그런 데도 불구하고 이 예물을 통해서 모든 죄를 속하고 내 뜰에서 먹으라 했으니 바로 그 속죄제물 안에서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전부 열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먹는데 강조를 두고 있다. 지극히 거룩하다.
예수는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일 뿐만 아니라 속건제물이시다. 속죄제물과 속건제의 제물이 구별 없이 강조되어 있다. 왜냐면 하나는 죄 책에 대한 강조이면 하나는 죄의 피해에 대한 보상이거든요.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 죄에 대한 책임 벌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속건제의 제물과 속죄제물은 넘어갈 때 어디까지가 속죄제물이고 어디까지가 속건제의 제물인지 정확하게 구별이 안될 만큼 섞어져서 넘어가면서 기록이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속건제의 제물이시다. 사53을 길게 인용을 했다. (사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여기 속건제의 제물이 되사 그랬는데 내용은 전부 속죄제물의 의미로 되어 있다. 구별이 안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속죄제물이 되심으로 그들의 영혼들을 구원했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온전한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앞에 나가는 새롭고 산 구원의 길이 열렸고 이제는 부활하시는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생명의 친교에 참여한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법을 범한 모든 죄의 얼 하나님 앞에 가리운 하나님 앞에 관계가 단절된 모든 죄를 해결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모든 피해 보상도 해결이 됐다.
그것은 속죄제의 기름을 드린 것처럼 우리들이 우리의 전생을 그를 위해서 살고 그것이 기름을 드리는 콩팥을 드리는 힘의 삶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소제물처럼 거룩하다 그랬는데 향내 나는 제사를 드리니까 그분 안에서 먹고 마시고 그리고 형제에 대한 보상도 되어 있다. 왜 그가 우리를 위해서 몸을 드리는 사랑의 봉사로 형제를 봉사하는 삶을 살거든요. 단순한 구제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의 의미가 형제를 봉사함 형제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구원하는 봉사적인 삶으로 부르심을 입었다. 우리의 삶의 특질이 그렇게 되어 있다. 거기서 실은 형제에 대한 모든 보상도 오분의 일이 가해진 정도가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시고 속건제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형제를 위해서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고 그것이 우리가 주의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이 됐다.
우리가 주의 상에서 먹을 때는 주님 앞에 우리가 온 몸으로 감사할 뿐만 아니라 마땅히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는 형제를 위한 구제를 위해서 한 상에 모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주께서 몸을 주셔서 너희를 부요케 하셨으니 너희들의 생명의 것으로 가난한 형제를 부요케 하는 것이 그 은혜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 한 몸에 참여하니까 많이 거둔자나 적게 거둔 자나 부족함이 없다. 구제 본문에서 하는 이야기다. 오순절에서도 구제 본문에서 하는 이야기다. 주의 상에서 먹음으로 우리가 그렇게 산다. 그렇게 해서 형제에 대한 사랑의 봉사 갚음이 끝난 것이다. 완성된 것이다
만일에 교회가 그렇게 먹지 않으면 한 구제 단체로 그렇게 먹으면 모를까 생명의 본질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옳은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오분의 일 보상이 여러분이 남의 닭을 훔쳐먹었으니까 구약에 보니까 오분의 일 보상 아 갚아야 되겠구나 우리는 그전에 설교를 그렇게 들었다. 그리고 지금 죄가 떠오르면 당장에 적어 두고 지금 당장 나가든지 전보를 치든지 고백을 해라 왜 마귀라는 것은 쥐꼬리 비슷해서 생각났다 다음에 회개하려고 하면 ?들어가 버리고 없으니까 당장 해라 우리 경험상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떠오를 때 즉각 적어 뒀다가 내일 고백하려고 하면 그 쥐꼬리가 사라지고 없으니까 당장 전화를 해라 그렇게 하고 갔다 갚아라. 그냥 남 몰래 담을 넘어서 던져 놓지 말고 안수하고 갚으라 했으니까 다 고백하고 갚아라 그리고 거기다가 오분이 일을 더하라고 그랬는데 봐라 오분의 일은 이제 신식 이자 계산 한 것이다. 그 때는 오분의 일만 갚으면 되는데 세월이 몇 년이냐 그러니까 오분의 일이라는 것은 마음에 섭섭함이 없이 갚으라는 말이 아니냐 그러니까 충분히 갚아라 이제 오분이 일을 확대 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 소위 성장한 정신에 맞아 들어가는 것 같지요?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갚으라는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갚음은 예수에게서 성취된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봉사로 형제의 종이 됨으로 갚아 지는 것이지 얼마를 갚음으로 당신하고 계산 끝 이것으로 갚아 지는 것이 아니다. 신약에는 그런 율례로 살지 않는다. 한 몸에 교제의 생명으로 산다. 그것이 몸으로 사는 것이고 갚는 것이다.
그것은 전체를 짐지는 것이지 얼마 갚고 나는 끝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구약 같은 율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히브리서도 그렇게 전부 레위기의 언어로 예수의 구원의 일들을 설명하고 또 이 구원의 교제 성소의 교제 문제로 신약 성도의 삶을 전부 설명하는데 우리들은 이쪽은 설교를 못하고 부흥사나 이것 가지고 다니면서 무엇 내고 무엇 내고 하는데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헌금 많이 해도 소 한 마리 내기 힘들 것이다. 그래 놓고는 어디 교회는 십일조는 제사장의 몫, 처음에 교회 개척할 때 십일조만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얼마큼 거룩한 종이여 처음에 교회 개척할 때 십일조 내는 사람 얼마 안되거든. 이제 초신자들이라.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십일조 낸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러면 열 명만 내면 한 재산이다. 십일조 낸다고 해도 그런데 교회가 커지니까 이제 대부자가 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교회것 나머지는 전부 목사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을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된 구원으로 해석을 하지 않고 교회에서 재산 나눈 법으로 해석을 한 것이다. 헌금 나누는 법으로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큼 어리석은 일이 되냐 그 말이다.
이것은 반찬 나누는 방법이 아니라 구약에서 가슴과 뒷다리는 가장 소중한 기관으로 알고 하나님의 상에 드리면 그것은 제사장의 몫이다. 그렇게 친교를 나타내는 방식이지 음식물 나누는 법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들을 항상 기독론적인 해석을 했을 때만 구약의 어린아이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전 몸으로 헌신하고 사랑의 종이 되는 완전한 헌신의 삶이 되고 그것이 곧 우리가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참 생명의 교제다. 그것은 하늘의 속한 것을 먹는 영원한 생명의 교제다. 그렇게 산다.
다음에 속건제물의 끝에 보면 제물 나누는 법도 다시 나오니까 그 때 다시 이것에 나타난 일을 한 번 반복하면서 제물 나누는 몫만 강조해서 한 번 풀면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막 예수께 붙이려고 영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 당시 제물 드리는 법 그 문장에서 어떻게 드리는가 그런 문제들을 문학 형식을 따라서 비교하고 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한 장막에서 만나신다는 언약 친교의 배경에서 해석을 하고 그리고 나서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를 선언하고 있다. 기독론적인 해석이 교회가 그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까지는 예수님의 속죄제고 어디까지는 속건제인가 그런 것을 나누어서는 안된다. 그는 모든 예물이 그에게서 완성이 된 것이기 때문에 나누어서는 안된다. 십자가에 죽은 것은 속죄제 그리고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소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전체를 드린 것은 번제 그런 식으로 나누어서는 안된다.
그 제사가 그의 인격과 사역에서 완성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분리해서 구분하면 안된다. 속건제도 돈으로 갚으려고 하지 말라 그 말이다. 평생 형제의 사랑의 종으로 수고하는 것에서 온전한 완성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강론하면 죄가 막 떠올라서 빨리 가서 회개해야지 이런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런 말씀을 들은 자체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평안함과 완전함을 누리고 거기는 죄의 욕구가 없다. 그것은 이 부분은 내것 하는 욕구가 없다. 그렇게 믿음으로 깨어 있는 것이 여러분의 모든 삶에 나타나 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