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냥
이 수 영
“아주 그냥 죽여줘요.”
짜내는 듯한 가수 P의 목소리가 울려 나온다. 몸짓도 몸짓이지만 ‘눈에 띄게 예쁘다’는 뜻의 “샤방샤방”이라는 노랫말이 듣는 이의 귀에 신선하게 다가오고 ‘브이라인’, ‘에스라인’까지 언급되면 가사만 들어도 머릿속에는 어떤 상이 그려지게 된다.
그것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젊거나 늙거나 상관없다. ‘아주 그냥 죽여줘요’의 상태를 만들어 즐기는 쪽은 개인들의 희망사항이거나 생각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 끼여 있는 ‘그냥’이라는 용어다.
별다른 이유 없이, 변화도 없이 늘 그 상태 그대로 살아가거나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그냥’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그냥’이라는 말이 참 재미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어서 그런지 평소의 대화에서도 생략된 요소들이 많다. 그러고도 말이 잘 통한다. 그 중 제일 유명한 말이 ‘거시기’다. “거시기로 말하면 된다.” “거시기 해 가지고 ~” “거시기 가져 오너라”등.
“그냥‘이라는 말도 ’거시기‘에 못하지 않다. 도대체 딱 집어 ’이렇다‘라고 말할 확실한 것이 없다. 애매모호하다.
“너 왜 왔니?” “그냥.”
“너 왜 울었니?” “그냥.”
“너 요즘 어떻게 지내니?” “그냥 저냥.”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냥’이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와는 너무나 다른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거시기’와 ‘그냥’은 많이 닮았다.
재미있는 것은 확실하지도 않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어떻게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에 대해 따지지도 묻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몇 년 전 서점에서 ‘그냥’이라는 제목의 에세이 한 권을 샀다. 제목이 궁금증을 더해왔기 때문이다. 거기다 박칼린이라는 작가의 프로필이 이채로웠다.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나, 경남여고 캘리포니아 예술대학 서울대학 등에서 대금 가야금 첼로 등의 다양한 악기를 섭렵하며 뮤지컬 명성황후, 오페라의 유령, 사운드 어브 뮤직 등의 음악감독, 그리고 몇 년 전, 남자의 자격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합창지도자로 감동을 준 바 있는 그녀의 지금까지의 삶은 책 제목처럼 ‘그냥’ 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고, 피를 말리는 열정의 무대였고, 잠시도 쉬지 않는 개척의 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걸 ‘그냥’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비로소 나는 ‘그냥’이라는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치열한 삶 그 자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어떤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들의 일을 ‘그냥’ 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이었다는 깨달음이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 왔는가? 그리고 살고 있는가?
‘거시기’ 하면서, 그럭저럭 ‘그냥 그렇게’ 살아왔는가? 그렇다면 지난 삶이 너무 허허롭지 않은가. 그리고 앞으로의 삶이 너무 초라하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 같다.
어느 연구에서 127종의 자료, 150만 어절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쓰는 말이 ‘없다’였다고 한다. 평상시 습관화된 그 ‘없다’라는 말 때문에 아무리 풍족해도 부족을 느끼게 되고 그 ‘없다’라는 생각이 OECD국가 중 행복지수 꼴지를 기록하게 했다는 것이다.
말이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행동을 만든다고 한다.
이제부터라도 ‘그냥’의 의미를 업그레이드 해야겠다. 치열하게 사는 삶도, 개척하는 삶도 모두가 ‘그냥’사는 삶이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삶, ‘없다’고 부정하는 삶 보다는 긍정적으로 사는 삶, ‘그냥’ 그렇게 사는 삶을 살고 싶다.
2014. 12. 26
첫댓글 좋은글 잘 읽였습니다.본글과 댓글이 그냥 아름답습니다. 흐뭇합니다.~~~
얘기를 풀어가는 솜씨가 대단합니다. 내 같으면 한귀로 듣고 잊어버릴 유행가 가락에서 이야기를 엮어가다니 대단한 익살꾼의 소질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놀랍고 부럽습니다.
그냥 애매모호하게 걷는것이 편할때도 많지요.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길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서 어디 갑니까? 하면 볼일보러간다 참 막연하지만 그냥 알아 듣지요 .여유도 있어보입니다.제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