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서, 안개 속에서 – 가리왕산
1. 장구목이골 이끼계곡
정선군 총면적 122,124ha(1995년) 중 임야가 100,532ha를 차지하여 82%에 달하고 정선의 주산인 가리왕산은
9,417ha로서 9.4%를 점하고 있는 듬직한 육산이다. 표고 950~1,000m 사이에는 83.28km의 임도로 둘러싸여 있어
우리나라 산악자전거 길로서는 으뜸이라 각광을 받고 있는 산이다.
정상 펑퍼짐한 천여 평의 넓은 초원 중심에는 헙수룩한 제단과 加里旺山(가리왕산)이라 새긴 정상 표지석 및 야산
(野史)에 의한 가리왕산의 유래, 국유림 표석이 있다.
정상에 서면 사방 겹겹한 산이 파도치듯이 전개되고 깊은 계곡의 큰 돌은 푸른 이끼가 감싸고, 회동리에는 자연휴양
림이 잘 가꾸어져 있고 민박집이 즐비하다.
―― 김형수, 『韓國400山行記』(깊은솔, 2002) ‘가리왕산(加里旺山) 1560.6m’ 개관에서
▶ 산행일시 : 2024년 6월 22일(토), 종일 비, 안개
▶ 산행코스 : 장구목이골,가리왕산,마항치삼거리,어은골,심마니교,자연휴양림
▶ 산행거리 : 도상 9.9km
▶ 산행시간 : 5시간 23분(10 : 02 ~ 15 : 25)
▶ 교 통 편 : 다음매일산악회(31명) 버스로 가고 옴
▶ 구간별 시간
07 : 00 – 양재역 1번 출구 200m 전방 스타벅스 앞
07 : 20 – 죽전 간이정류장
08 : 55 – 횡성휴게소( ~ 09 : 10)
10 : 02 – 장구목이 입구, 산행시작
11 : 26 – 임도, 장구목이 입구 2.6km, 가리왕산 정상 1.6km
12 : 25 - ┳자 갈림길 안부, 가리왕산 정상 0.2km
12 : 30 – 가리왕산(加里王山, △1,560.6m), 휴식( ~ 12 : 47)
13 : 00 – 1,456m봉, 마항치삼거리(┫자 갈림길), 가리왕산 정상 0.8km
13 : 45 – 어은골(漁隱-) 임도, 어은골
15 : 00 – 심마니교, 가리왕산 자연휴양림
15 : 25 – 용탄천 회동2교 앞, 산행종료, 휴식( ~ 17 : 00)
18 : 34 – 문막휴게소( ~ 18 : 50)
20 : 00 - 양재역
2. 가리왕산 지도
이번 주말에도 비가 올 줄은 몰랐다. 산행을 출발하는 당일에야 일행들이 우산을 준비하여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고, 다시 날씨정보를 살피니 엊그제만 해도 구름만 낀다던 주말 날씨가 비 소식으로 바뀌어 있다. 그래도 31인승
버스는 만차다. 산행대장님이 산에 갈 줄 안다. 서울은 엄청 무더울 텐데 우리가 가는 가리왕산은 고도가 높아 선선
할뿐더러 오후 하산할 때는 비가 내린다고 하니 이 또한 시원한 우중산행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덧붙여 장구목이골 이끼계곡 9폭과 고산지대 노거수인 주목, 야생화 등을 감상하시며 정상에 오른 다음 어은골
비경도 아울러 보시고 물놀이도 하시라고 주문한다. 물놀이는 알탕의 다른 말이다. 내 몇 번 가리왕산을 갔지만 골
로 가기는 처음이다. 대개 무박으로 중왕산을 올라 마항치, 가리왕산 상봉, 중봉, 하봉으로 진행하거나, 당일은 아무
지능선(어느 지능선이고 완만하다)이나 잡아 주릉으로 이어지는 산행을 일삼았다. 6년 전 잔설이 아직 깊던 3월에는
장전계곡 입구에서 지능선을 올라 가리왕산 상봉을 넘고, 중봉을 지나 하봉까지 갔었다. 그때는 입산을 통제하는
경방기간이라며 떼로 산림청 단속반에 걸려 1인당 10만원의 과태료를 물기도 했다.
장구목이골 입구 계류는 가뭄답지 않게 큰 소리 내지르며 흐른다. 9폭을 볼 거라고 했것다,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서둘러 출발한다. 이런, 오후에 내린다던 비가 마치 우리가 산행을 시작하기 기다렸다는 듯이 내리기 시작한다.
비옷은 배낭에 상시 넣고 다니지만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게 불찰이다. 어차피 안은 땀으로 젖는다. 오르막은 후덥
지근하다. 이따금 얼굴 들어 비를 맞으며 시원함을 느끼곤 한다.
등로는 계류를 약간 벗어난 울퉁불퉁한 돌길의 연속이다. 숲속 저 아래로 포말 이는 계류가 보인다. 어서 내려가서
보고 싶은 발싸심에 서성이다가 마음 고쳐 잡는다. 내가 구태여 폭포를 구경하려고 생 너덜을 내려 갈 필요는 없을
것. 볼만한 폭포에는 어련히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으로 한참을 오른다. 내 생각이 맞았
다. 등로 벗어나 들른다. 대폭은 없다. 이끼 낀 돌 틈 사이로 흐르는 소폭이다. 푸른 이끼와 한데 어울린 포말이 더욱
희다.
비가 내리니 사진 찍기가 힘들다. 우산을 준비하지 않아 수건으로 카메라를 감싼다. 이끼계곡의 물살을 뿌옇게 표현
하려면 우선 수동모드로 셔터속도 2초 이상의 장노출로 찍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삼각대와 릴리즈에 덧붙여 시간이
필수적이다. 나의 열악한 조건에서는 바위에 기댄 부동자세의 셔터속도 1/4초가 한계다. 그것도 원샷 원킬이 아닌
수발의 산탄(?)을 연발하여 겨우 한 장을 건지는 게 고작이다. 그래도 파인더로 들여다보는 계류는 순간이 영원처럼
길다.
계곡을 향한 인적이 나오면 꼬박 들르고 하여, 선두로 시작했던 발걸음이 일행에 얼마나 뒤쳐지는지 모르겠다. 바쁘
다. 모두 스마트 폰으로 얼른 찍고 가니 한편 그들이 부럽기도 하다. 내 DSLR 카메라의 고집은 수십 년 전 중학교
때 선생님의 6.25 전쟁 경험담에서 비롯한다. 총을 쏘는 맛은 묵직한 M1이 최고라고 하였다. 그 둔중하고 느긋한
격발은 틀림없이 백발백중이었다고 했다. 카빈은 경망하여 총알이 직진하지 못하고 바람결에 흔들릴 것만 같다고
했다.
3. 장구목이골 이끼계곡, 산행시작부터 비가 내려 사진 찍기가 힘들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어둑한 풀숲에는 꿩의다리가 불꽃놀이마냥 산방화서(繖房花序) 꽃을 피웠다. 어느덧 계류
가 밭고 가파른 돌길을 오르고 또 오른다. 임도다. 이정표에 장구목이 입구 2.6km, 가리왕산 정상 1.6km이다. 이제
는 이끼계곡이 없으니 발걸음을 한층 빨리 할 수 있겠다. 수령 600년이 넘는다는 주목들이 곳곳에서 그 태곳적 위용
을 자랑하고 있다. 그에 내 발걸음이 힘 받는다. 설악산에만 노거수인 주목이 있는 줄을 안 나의 견식은 확실히 짧았다.
등로 주변 거목의 주목 아래는 납작납작한 돌들이 놓인 쉼터다. 지금은 비었다. 가리왕산 정상이 가까워지고 자욱한
안개 속에 든다. 곧 ┳자 갈림길 안부다. 일단의 등산객들이 주목 아래에서 우산 받치고 산상성찬을 즐기고 있다.
가리왕산 정상 0.2km는 풀숲 소로다. 풀숲 헤쳐 온 비까지 오지게 맞는다. 진작 우비를 입었지만 속옷까지 흠뻑 젖
었고 신발 속은 벌컥벌컥 거리고 발가락 사이로 물이 들고 나니 간지럽다. 이래서는 우중산행의 정취는 고역으로
변하고 만다.
가리왕산 정상. 돌탑과 정상 표지석, 삼각점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삼각점은 1등이다. 정선 11, 2004 재설. 가리왕
산은 옛날 맥국(貊國)의 갈왕(葛王 또는 加里王)이 이곳에 피난하여 성을 쌓고 머물렀다고 하여 갈왕산이라고 부르
다가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가리왕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와는 다른 견해로 멀리서 이 산을 바라
보면 산세가 곡식을 쌓아놓은 「낟가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나는 후자의 설을 적극 지지한다.
갈왕의 전설은 여러 곳에서 세인들의 그러한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한다. 북쪽 골짜기의 갈왕이 지었다는 대궐터,
동해가 아득히 바라보이는 정상에서 갈왕이 환도의 날을 꿈꿨다는 망운대, 갈왕이 이곳 암반 위에서 숙면을 취했다
는 숙암(宿岩)리, 천군만마를 주둔시켰다는 숲속의 광장 동심(東深)과 서심(西深), 갈왕의 시녀들이 중봉 아래 바위
에 올라서서 고국 쪽을 바라보며 부모형제를 그리워했다는 시녀암 등등.
내게 가리왕산은 조망 인연이 닿지 않나 보다. 올 때마다 오늘처럼 안개 속이라 사방 둘러 뭇 산을 바라본 기억이
없다. ‘조망의 산행’(월간 산 2001년 4월호)을 보면 가리왕산이 우리나라 정중앙에 위치한 것처럼, 북으로는 오대산,
박지산, 황병산, 발왕산, 노추산이, 동으로는 고적대, 청옥산, 문래산, 육백산, 함백산, 태백산이, 남으로는 소백산,
남병산, 백덕산이, 서로는 치악산, 흥정산, 방태산, 계방산이 하늘금이다.
13. 장구목이골 이끼계곡
14. 장구목이골 임도 지나서
15. 가리왕산 정상 직전 삼거리 주변
16. 가리왕산 정상
18. 마항치삼거리 가는 길
돌탑에 기대어 점심 요기한다. 우산이 없고 비를 가릴 데가 없는 벌판이라 도시락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인절
미를 하나씩 꺼내어 먹는다. 한속이 가실까 탁주를 연거푸 두 잔을 들이키니 도리어 한속을 더한다. 이럴 때는 걷는
게 상책이다. 어은골을 향한다. 마항치삼거리가 그 갈림길이다. 외길이다. 완만한 내리막이다. 등로 주변의 풀숲이
보기 좋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한 번쯤 누비고 싶은 초원이다. 오늘은 허리께 차는 물구덩이다.
가리왕산에 정상에서 0.8km 내린 ┫자 갈림길 야트막한 안부다. 마항치삼거리다. 마항치는 직진하여 2.3km를 더
가야 한다. 왼쪽이 어은골을 지나 휴양림 매표소(5.9km)로 간다. 나로서는 처음 가는 길이다. 걸음걸음 아껴 걷는
다. 안개 자욱한 숲속을 내린다. 눈 닿는 데마다 수묵담채의 대폭 병풍이다. 이대로 두고 가는 경치가 차마 아깝고,
저 비탈을 내리면 또 어떤 경치가 펼쳐질까 사뭇 궁금하다. 내 처지가 한편 영락없는 뷔리당의 당나귀(Buridan's
ass)이다.
어은골 임도다. 한 피치 남은 능선을 마저 내리면 어은골이 시작된다. 이곳에는 이무기바위라 부르는 길이 10m 가
량의 길쭉한 바위가 있는데 계곡의 물고기들이 이 바위를 두려워해 숨었다고 해서 어은(魚隱)골이란 이름이 붙었다
고 전한다. 다른 견해로는 물이 너무 차가워 ‘얼음골’이 변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여기도 이끼계곡이지만 계곡
미는 장구목이골보다 못하다. 폭포로 이어지는 인적이 없을 뿐더러 도중에 산을 올라 사면을 길게 돌아 넘기도 한다.
이대로 물러서기는 아쉬워 계곡에 근접했을 때 큰 소리 치는 계류에 잡목과 너덜 뚫고 다가가 본다. 뜻밖의 미폭이
다. 휴식할 겸사로 오래 머문다. 새삼스레 물놀이는 가망 없다. 이미 산중 샤워 중이기도 하다. 어은골은 정자에서
잠깐 휴식하고 천일굴(千日窟) 안내판을 지나면 용탄천(龍灘川)과 합류한다. 천일굴은 1,000일 동안 말을 삼가고,
좌선 기도하면 득도할 수 있다는 수행길지(修行吉地)로 옛날에는 많은 구도자가 찾아 왔다고 한다.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바람에 천일굴을 찾아보지 못했다.
산림문화휴양관을 지나고 용탄천 심마니교를 건너면 차도고 주변은 가리왕산 자연휴양림이다. 대천인 용탄천 여울
을 내려다보며 간다. 산행종점인 휴양림 입구다. 너무 일찍 내려왔다. 버스 승차는 기사님이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산행마감시간(17시) 1시간 전부터 가능하다. 젖은 옷을 갈아입을 데가 없다. 화장실 문은 잠겨 있다. 비는
주룩주룩 내린다. 정체 모를 건물의 좁다란 처마에 옹기종기 모여 비 피한다. 산행 내내 인절미 한 곽에 탁주 2잔
마실 게 전부다. 허기지니 더 춥다.
아아, 다음 주말(특히 일요일)에도 전국에 걸쳐 비가 내릴 거라고 한다. 어디로 갈까?
23. 어은골 가는 길
30. 어은골 임도
31. 어은골. 어은골도 이끼계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