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을 쥔 아저씨 그렇게 자꾸만 줄을 돌리지 마세요 어지러워 죽을 지경이에요 줄넘기 놀이에 지쳤어요 하나 넘어주면 또 하나 금이 내려오잖아요7ㅡ 매일매일 그래프종이 밖에서 그래프종이 속으로 못 들어가 발발 떠는 기분이에요 아저씬 밥 먹고 있을 때에도 입에서 눈에서 줄이 나온다지요? 매일매일 나보고 넘어봐 넘어봐 하는 것 같애요 그렇게 줄 가지고 종아리 치지 마세요 숨차 죽을 지경이에요 발바닥이 이제 다 닳았어요 종아리가 짧아졌어요 땅속에 묻히는 것처럼 키가 작아지고 줄은 더 더 더 높아져요 아저씨가 헤아리는 숫자 소리 밤마다 온 마루를 갉아먹어요 빨랫줄에 매달린 빨래들처럼 줄 잡고 흔들리는 저 사람들 좀 쳐다봐요 저기 저 줄에서 떨어져 구겨져 밟히고 흙 묻은 사람들 좀 봐요 하늘엔 손잡이도 없는데 어떻게 자꾸자꾸 뛰라 그러세요?
장난 좀 그만하세요
.............................................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스며있는 죽음을 명랑하고 귀여운 소녀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느닷없이 덮쳐올 죽음으로 신나게 줄넘기 놀이하기. 재미있죠? 줄이 그치면 바로 죽으니까 아프다는 핑계는 안 통해요. 다리에 쥐가 나서 못하겠다는 엄살도, 화장실 갔다 온다면서 느긋하게 담배 한 대 피우는 꼼수도 안 통해요.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스트레스를 에너지로 만들고 실패를 추진력으로 만들어야 한대요. 정신없어서 밥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더 많은 야근, 더 높은 목표, 더 혁신적인 사고와 자기개발, 더 세게 성과를 쥐어짜는 자발적 헌신, 더 많은 ‘할 수 있다’와 ‘해야 한다’를 향해 달려야 한대요. 더 재미있으라고 죽음 아저씨더러 더 빨리 줄을 돌리라고 할까요? 올해 죽도록 줄을 넘었는데 또 넘어야 할 줄이 새해와 함께 오고 있네요. 짜증과 스트레스, 불안과 두려움을 유쾌하게 비틀어 놀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줄을 또 넘을 수 있겠어요. 김기택 | 시인, 경희사이버대 교수 ㅡㅡㅡㅡㅡㅡㅡㅡㅡ
돼지는 말한다 ㅡ 김혜순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 없어
나는 선방에 와서 가부좌하고 명상을 하겠다고 벽을 째려본다
있지, 지금 고백하는 건데 사실 나 돼지거든. 있지, 나 태어날 때부터 돼지였어 더러워 나 더러워 진짜 더럽다니까. 영혼? 나 그런 거 없다니까
그러나 머리는 좋지 아이큐는 포유류 중 제일 높지 청결을 좋아하지 난 화장실 넘치는 꿈 제일 싫어해 그 꿈 꾸고 나면 아이큐가 삼십은 빠져
나는 더러운 물속에서 아침잠을 깬 사람처럼 쿨적거린다 코를 풀고 싶지만 선방엔 휴지가 없다 스님들은 콧물 안 나오나?
내가 로테르담의 쿤스트할레에서 얀 배닝이라는 사진가가 일제 식민지 치하 수마트라 할머니들 찍은 사진을 봤거든 그런데 그 사진 속 표정은 딱 두 종류였어
불안 아니면 슬픔, 그래서 난 걸어가면서 그 주름 얼굴들에게 이름을 붙여줬지 당신은 불안, 당신은 슬픔, 슬픔 다음 불안, 불안, 슬픔, 슬픔.
나의 내용물, 슬픔과 불안, 일평생 꿀꿀거리며 퍼먹은 것으로 만든 것 슬픔과 불안, 그 보리밭 사잇길로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돼지 한 마리 지나가네
그런데 돼지더러 마음속 돼지를 끌어내고 돼지우리를 청소하라 하다니 명상하다가 조는 돼지를 때려주려고 죽봉을 든 스님이 지나간다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 없어 아무래도 돼지가 죽어서 돼지로 부활한다면 어느 돼지가 믿겠어? 아무래도 여긴 괜히 왔나 봐, 나한테 템플스테이는 정말 안 어울려
있지 조금 있다 고백할 건데 나 돼지거든 나 본래 돼지였거든
ㅡㅡㅡㅡㅡㅡㅡㅡㅡ
피어라 돼지 ㅡ 김혜순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검은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 새파란 얼굴에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할 새도 없이 이 고문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한 공포의 줄넘기를 할 새도 없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리치는 손바닥을 깨무는 듯 내 입안의 살을 물어뜯을 새도 없이 손발을 묶고 고개를 젖혀 물을 먹일 새도 없이 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 새도 없이 얼굴에 수건을 놓고 주전자 물을 부을 새도 없이 포승줄도 수갑도 없이
나는 밤마다 우리나라 고문의 역사를 읽다가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저 산 아래 지붕들에 대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나에겐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 노래여 오늘 하루 12시간만 이 몸에 붙어 있어다오
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 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 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 비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한다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
멧돼지가 와서 뜯어 먹는다 독수리 떼가 와서 뜯어 먹는다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내리는 밤! 머리 잘린 돼지들이 번개치는 밤! 죽어도 죽어도 돼지가 버려지지 않는 무서운 밤! 천지에 돼지 울음소리 가득한 밤!
내가 돼지! 돼지! 울부짖는 밤!
돼지나무에 돼지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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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오면 ㅡ 김혜순
내 뒤통수는 서른 개
나는 세상에서 제일 징그러운 알 서른 개를 순서대로 살살 쓰다듬습니다
나는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짖을 겁니다
총알이 따뜻해질 때까지 단감이 홍시가 될 때까지 밤하늘 별이 녹을 때까지
암탉이 질병을 낳고 있습니다 암탉이 죽음을 낳고 있습니다 암탉이 귀신을 낳고 있습니다
옷을 벗기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서른 명의 신생아들이 도열해 있습니다
알은 닭이 되고 닭은 튀김이 되고 그 누가 이 알들의 앞날을 생각이나 해봤겠습니까?
자정 너머 헤아려보는 양 떼보다 빨리 사라지는 계란 한 판 그리고 6월 9월 11월
4월 17일 목요일 수업에 들어온 열다섯 명의 A반 학생들이 신생아실의 간호원들처럼 서른 개의 눈을 뜨고 나를 낱낱이 훑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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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용 감옥 ㅡ 김혜순
나는 물속에 들어가 혼자 있는 사람 같아요 입을 벌린 목구멍에서 물방울 보글보글 올라가요
옷을 벗지도 않고 물속에 서면 옷에 핀 꽃에서 붉은 물감이 연기처럼 올라가요
헬리콥터에서 촬영한 구명조끼를 입고 대양에서 떠오른 한 사람 두꺼운 사전 속에서 멸종하는 한 음절 단어처럼
눈감으면 나타나는 검은 바탕에 한 점 환한 벌레 한 마리 청진기로 듣는 구멍 막힌 갱도에서 마지막 남은 단 한 청년광부의 숨소리
누가 바다 가득 젤리를 쏟아 부어 굳힌 다음 몸을 하나 똑 떠내어 이 사거리 한복판에 세워두었나요?
나는 내 몸에 꼭 맞는 일인용 감옥에 살아요 나를 피해 내 몸속으로 도망간 소금기둥 같아요
—시집『피어라 돼지』(2016)에서 ------------- 김혜순/ 돼지는 말한다(외)…이 시집(『피어라 돼지』)의 1부는 모든 것을 품은 단 한 편의 시이며(…) 이 다면체— 돼지의 죽음과 부활, 희생과 구원의 서사는 「황무지」와 넓이를 겨루며 「실낙원」과 높이를 다툰다. 놀라운 일이다. 한국의 현대시가 여기에 이르렀다. _ ‘해설’에서. 권혁웅 시인이 너무 흥분해서 T. S. 엘리엇이나 J. 밀턴에 비견한 것인지는 전체를 읽어봐야 알 듯. 이 구제역으로 생매장된 돼지가 여성이며 비정규직이며 멸시받는 자, 그리고 조롱당하는 乙인 것은 분명합니다. 시인의 말-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가/ 아무것도 소리치지 않기가// 시의 체면을 세워주기가 /너무도 힘든 시절이었다// 2016년 3월 김혜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커피 ㅡ 김혜순
눈을 뜬 채 한 번 더 뜨고 싶어
입 맞출수록 점점 더 열릴까 안에서부터 점점 벗을까
마실수록 젖은 몸이 마르는 마실수록 투명해지는 점점 가벼워지다가 지워지는 입맞춤
검은 물시계를 장착한 다음 초침으로 나를 열어봐요
환한 햇빛을 구해다가 눈이 멀 만큼 때린 다음 자백하라 자백하라 침 뱉고 죄수들이 우글대는 감방에 밀봉한 다음 검은 알갱이를 얻는다 그리고 그것을 부수어 일용할 입맞춤
신을 흉내 내려고 잔에 담긴 눈 코 입을 은스푼으로 저어보는
내 안으로 우산을 접고 들어오는 사람
나에겐 검은 숨결이 좀 필요해 검은 것으로 검은 것을 좀 속여야 해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검은 물에 머리를 감는 한 사람
—《포지션》2016년 봄호 --
13층 ㅡ김혜순
꿈에서 암흑물질을 추출하고 남은 것 같은 흐릿한 장난감 도시에 혼자 누우면 나를 기형아를 만들어주길 좋아하는 침대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창문이 혼자 먼 하늘을 우러렀습니다
내가 얼굴을 기댈 때나 옆으로 밀어서 바람을 들일 때 창문은 슬픔의 드넓은 의인화처럼 말끔하게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지르고 나와 마주 서주었습니다
창문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담긴다고 나는 적은 적이 있습니다
개에게 손발을 붕대로 감싸고 밤과 낮, 밤과 낮 흑백의 방에 오래 넣어두면 환각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 환각이 발생하는 방을 감각박탈탱크라 부른답니다
창문은 내 환각의 바깥에서 우두커니 기다려주었습니다 내가 밖으로 고통의 박자들을 내뿜는 심연처럼 흐느낄 때 창문은 나의 유일한 가면처럼 밖으로 탈출하려는 것들을 맨몸으로 막아주었습니다
창문이 눈동자에 고인 눈물을 모서리에 모을 때 출입문을 잠근 빌딩이 고요한 바다의 수직적 우수처럼 젖을 때
나는 나에겐 투명한 가면이 있다고 적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달의 정면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상반신을 창문 밖으로 내밀 때
잠을 설친 사람의 베개 자국처럼 창문의 눈동자엔 길 건너편 쓰레기 박스 한 개가 붙어 있었습니다
네모반듯하게 펼친 눈물이 밖으로 매달린 채 먼 하늘을 우러렀습니다
—《시인동네》2015년 가을호 ----------
네가 다정함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ㅡ 김혜순
잡히기 전에 며칠 눈을 감고 햇살에 목욕을 하겠다 잡히기 전에 며칠 젖은 옷을 입은 채 말려보겠다 잡히기 전에 며칠 아니야 아니야 바람 속에 목소리를 넣어 보내겠다
잡히기 전에 며칠 월부 책도 주문하고 잡히기 전에 며칠 호수에 가서 자맥질을 하고 잡히기 전에 며칠 기억을 해선 뭣해
안전한 하늘인가 한번 쳐다보고 나뭇잎 그림자가 얼굴을 간질이는 기분을 좋아하고 여기가 아닌, 여기만 아니면 돼
그러나 잡히기 전에 며칠 내가 말 붙인 사람들이 모두 유령들이라 하고 유령의 거리에서 주문을 하고, 엄마를 만나고, 자전거를 빌렸다 하니
뇌 속의 추적자처럼 혹은 이명처럼 달려오는
거칠게 내쉬는 숨을 잡아챘다가 다시 놓아주는 허파 같은 그래, 일이 터지기 전에
잡히기 전에 흘러내려가다 돌부리를 잠시 붙잡아보는 강물 잡히기 전에 침대 가게의 침대가 내미는 손길 앞에 머뭇거리는 발길 잡히기 전에 뛰어내리다 7층에 켜놓은 촛불을 응시하는 눈동자
계간 『문학·선』 2016년 여름호 발표
심장의 유배 —마흔이레 ㅡ 김혜순
누가 네 몸속에서 물을 길어 올리나
누가 네 몸속에서 섹스를 하고 있나
창밖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두가 후두둑후두둑 떨어진다
(넌 알고 있었니? 우리가 흐느끼는 소리로 뭉쳐진 존재라는 걸)
누가 네 속에서 풍금을 치나
누가 네 속의 진흙 속에서 푸들거리나
누가 네 속의 몇 개의 지층 아래서 벌떡벌떡 물을 토하나
(몇 세기의 지붕을 소리 없이 걸어가던 여자가 임신한 배를 껴안고 잠시 쉬는 테라스 눈물로 만든 렌즈들이 유리창을 쓰다듬고 있네)
누군가를 잃고 흐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몸속에서 고통이 물을 긷고 풍금을 치고, 섹스처럼 강렬하게 진흙 바닥을 헤집습니다. 창밖으로 지난 사랑의 행적이 벗겨진 구두처럼 소용없이 떨어질 때, 몇 세기 동안 숨죽이며 우리 머리 위를 걷고 있는 것은 운명이겠지요. 그가 잉태한 슬픔은 아마도 영원히 유전될 것입니다. 인생이 정녕 죽음과 죽음 사이에 잘못 버려진 상자 같은 것이라고 해도, 그 속이 마냥 텅 비어 있기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가까운 이의 부고를 받았습니다. 그 짧은 전갈이 이승과 저승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ㅡ 신용목 (시인)
춤이란 춤 ㅡ김혜순
당신의 인생을 5분 안에 몸으로 표현해보세요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춤이란 그런 것 내 인생의 테이프를 전속력으로 돌리자 정신박약아의 파안 미소와 눈물 어린 정적이 남았습니다
눈 깜빡하는 순간에 나를 깜빡 잊어버리고 눈 깜빡하는 순간에 당신을 깜빡 잊어버리고
얼음거실이 천천히 녹고 있어요 다 녹기 전에 당신의 인생을 5분으로 줄여보세요 그 춤을 다 추면 집은 녹고요 그리고 당신은 죽어요
문은 열려 있는데 밖은 환한데 바람 가고 가을 가고 눈보라! 나무들이 머리에 인 보따리 떨구고 이사를 가는데
이 세상에 '잊었다'는 말이 있다는 걸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잊고 나서 어떻게 잊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내가 이 세상을 허리에 묶어서 끌고 가는 춤을 추는 중이에요
당신의 인생을 비커에 넣고 흔들어보세요 숟가락을 삼켰다 뱉었다 배를 항구에 붙였다 뗐다 손가락을 얽었다 풀었다 이건 스토리가 아니에요 이건 마비예요 이건 응결 중인 꿈이에요 비커엔 빨간 물이 찰랑거리네요 흘러내리는 화산도 솟아오르는 피도 붉은색 살아 있다면 저런 색이죠
빨강을 처음 본 사람의 표정을 지어보세요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찾아 헤매는 여자에게 눕자고 눕자고 눕자고 달라고 달라고 달라고 무엇이 갖고 싶은 줄도 모르면서 있잖아요! 있잖아요! 있잖아요!
손을 힘껏 뻗치는 여자에게
핵발전소 터지고 30년 후 태어난 아이들의 수용소에 온 것 같아요
눈 뜨고는 못 볼 자위에 빠진 헛손질 헛발질의 무대
혀가 껌처럼 이빨에 눌러붙은 것처럼
땅에 찰싹 눌러붙어서는
당신의 인생을 몇 개의 동작으로 분류해 보세요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허공을 움켜잡고 매달려 있는 박쥐처럼
명령을 내리시는 선생님
턱이 가슴에 붙들린 사람처럼
박쥐의 작은 몸에 들어간 그녀가
갈 곳 잃은 마지막 눈빛으로 그녀가
개처럼 묶여서 대문처럼 삐걱거리는 그녀가
싱싱한 장미가 주먹 속에서 숨을 거두는 것처럼
태양이 그만 놓아버린 행성의 꼬리처럼
춤!
몸에 들어 있는 새를 꺼내 보세요
새에게 원금을 갚으세요 자꾸 갚으세요
몸속의 물고기를 꺼내 보세요
물고기에게 원금을 갚으세요 자꾸 갚으세요
우리의 멀고 먼 조상들께 빚을 갚아 보세요 자꾸 갚아 보세요
땅에 떨어진 새처럼
결국 땅속에 묻히는 새처럼
그 발걸음으로 쏟아지는 눈발들의 레이스를 짜 보세요
두 팔로 공중에 흰 박쥐의 집을 지어 보세요
저런 저런 당신의 지붕이 쏟아지네요
인생을 5분 안에 몸으로 표현해 보세요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바다를 끄는 초승달처럼
당신의 심장이 끌어당기는 해변처럼
네 개의 달이 내 팔다리를 끌어가는데
정신병자들이 헤매는 정신의 그곳을 뒤쫓아 들어가는 것처럼
일어났다 누웠다 일어났다 누웠다
딱딱한 꿈들이 끄는 인력에 버둥거리면서
이 춤을 다 추면 얼음이 녹고요 그리고 당신은 죽어요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시집『피어라 돼지』(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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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말린 강가에서 서른 사흘 ㅡ 김혜순
시험관에 담긴 뇌는 아직 살아 있다 시를 쓰고 있나 보다 흐릿한 이미지에 풍덩 하고 있다 외갓집 문을 바람처럼 열고 있다 죽은 외할머니의 품속에 뛰어들려는 찰나
없는 눈이 번쩍 떠지자 사라진 몸의 어딘가가 환생한 검정 작대기가 대갈통을 후려친다
시험관에 담긴 뇌는 아프다
나는 내 밖에 있는 사람 밖이 아픈 사람
사라진 발가락들이 아프다 흩어진 방들이 아프다 심장이 아프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열 손가락으로 온몸을 긁고 있다 피 맺히게 긁고 있다
시험관에 담긴 뇌는 떠난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시험관을 떠난다 연쇄살인범의 비닐봉지에 담긴 머리처럼 흔들흔들 떠난다
말하고 싶은데 다 말하고 싶은데 입은 다물고 손은 떨리고 신발은 어디 갔나
시험관 안으로 검푸른 밤의 뿌리가 내려온다 실험실의 사람들마저 떠나고 시험관의 뇌는 중얼거린다 내 안의 희디흰 괴물 푸른 잠옷을 입었네
너는 물처럼 투명해 감촉도 부드러워 그렇지만 독사의 푸른 침처럼 치명적이야
시험관의 뇌는 방관자의 뇌 살아남은 자의 뇌
시험관에 담긴 뇌는 늘 머리를 벽에 짓찧으며 울고 싶다 포르말린 강에 담긴 뇌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 시같이 막연한 곳 이 시같이 애매한 곳 이 시같이 소독된 곳
시험관의 뇌는 모자를 쓰고 골똘히 생각해본다 왜 밖은 늘 아픈가
속이 빈 내 두 발이 아픈가 두 발바닥을 받친 강바닥이 아픈가
온몸에 불을 붙인 사람이 다리 난간에 서 있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소리친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미친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어떻게 하면 잊냐고
-시집 <죽음의 자서전> (문학실험실, 2016)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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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죽음의 자서전>이란 시집을 출간했다. 처음엔 ‘서울, 사자의 서’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다음엔 ‘심장의 해변’이라고 붙였다. 매일 제목을 바꿨다. 그러다가 시집에 들어간 시들이 모두 ‘죽음이 쓴 자서전’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의 시들마다 ‘너’라는 화자를 내세웠는데, 이 ‘너’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그/그녀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말하자면 너(죽음)는 인칭이 없었다. 자주 죽음의 인칭은 몇 인칭일까 생각했다. 결국 죽임에 이르게 하고야 마는 이 죽음의 체재 속에 내가, 우리가 속해 있었고, 살아남아 있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죽임의 일원이었다. 나는 죽음을 노래하고, 제사 지내고, 써버리고,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곁에서 혹은 나에게서 죽음이 솟아오를 때마다 시 한 편씩을 썼다. 49편이 모이자 시집으로 묶었다. 마치 칠칠은 사십구라고 무심히 구구단이 외워지는 것처럼 이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를 바랐다. 시마저도 휘발되기를 바랐다. 이 시 ‘포르말린 강가에서’는 2014년 3월 <유심>이라는 잡지에 발표했었고, 시집의 서른세 번째 시로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 전 이비에스국제다큐영화제 (EIDF) 2016에서 <내추럴 디스오더> 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나중에 이 작품이 2016년 EIDF 대상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먼저 벌거벗은 동양인 남자가 포르말린 용액에 담겨진 채 시험관 안에 앉아 있는 포스터를 보았다. 그러자 이 시 ‘포르말린 강가에서’를 쓸 때가 생각나서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이 필름을 보기로 결정했다. 이 필름은 크리스티안 쇠네르뷔 옙센 이라는 덴마크 감독이 왕립극장에서 공연하려는 야코브 윤 노셀 주연의 연극 제작 과정을 메이킹 필름 형식으로 촬영한 것이었다. 나는 막연히 서양의 동양에 대한 인종주의적 시선을 다룬 필름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야코브는 인종주의적 편견을 포함해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판단과 편견을 위한 모든 악조건을 두루 다 갖춘 청년이었다. 먼저, 그는 한국에서 입양된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는데, 시력이 좋지 않았고, 걸음걸이도 불편했으며, 교통사고를 당했고, 심지어 대변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지능은 정상이고, 시 창작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끝없이 자신이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계속 살아도 되는가,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장애인을 자식으로 낳아도 되는가를 질문했다. 그의 목소리는 투명한 공 속에 둘러싸인 듯 공명이 컸지만 느리고 불분명했다. 이 필름은 우리에게 ‘무엇이 정상인지, 얼마만큼 정상이 아닌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네가 가졌다고 자부해 마지않는 배려와 관심과 관용이 너와 얼마만큼의 다름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너는 얼마나 네게 다가오는 비정상을 참아낼 수 있는지’를 질문하고 또 질문했다. 야코브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줄에 묶여 제 몸 크기의 시험관에 담겼다. 마치 소록도 병원의 찬장 위에 올려져 있던 한센인의 태아처럼. 그는 시선의 폭력을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나는 시인은 비정상성으로 정상을, 건강하지 못함으로 소위 건강하다고, 건전하다고 믿는 신념을, 없음으로 있음을 타격하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모든 인간이 멸종하고 난 다음 생존할 수 있는 섬으로 배를 타고 떠날 때 적정한 승선 인원 조정을 위해 제일 먼저 버리고 가야 할 존재가 시인이라 했지만 시인은 그 추방됨으로써 오히려 쓸모 있음의 비윤리를 타격한다. 포르말린 용액에 담겨 영원히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못하는 신세지만 시인은 그 차별과 구별의 경계의 자리에 스스로를 세워 늘 바깥이 아픈 사람이다. 시인은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한다기보다는 비정상의 언어로, 기형의 언어로 마구잡이로 통용되어 상식이 된, 신념이 되어버린 그런 언어들에 균열을 낸다. 매일 척결을 부르짖는 높으신 분들의 언어 테이블에 그것이 아니라고, 그 한국어가 바로 죽음이라고, 시라는 부정의 언어를, 언어의 부정을 구축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죽음 앞에서 매일 죽는 사람이며, 죽음으로 죽음을 타격하러 가는 검객이다. 포름알데히드가 비처럼 쏟아지는 오염된 강가에서 시험관을 박차고 나간 자가 목격한 것은 무엇인가. ‘온몸에 불을 붙인 사람이 난간에 서 있었다.’ ㅡ김혜순 시인 ※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 잔의 붉은 거울> <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등을 냈다. -----------------------------------------------------------------------------------------------------------
시험관에 담긴 뇌
올해 김혜순은 세 권의 작품집을 펴냈다. 시집 <죽음의 자서전>과 <피어라 돼지>,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세 권의 제목은 김혜순 식 발화의 독특함을 드러낸다. 몇 개의 인칭에 고정된 ‘인간화된 발화’ 의 협소한(폭력적인) 체재를 거절하고, 사건과 만물과 언어 자체가 말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죽음의 자서전>은 ‘죽음’이 스스로 말하는 죽음의 이야기이다. <피어라 돼지>는 인간을 위협하는 질병에 걸린 이유로 학살당한 수많은 가축들과 이와 다를 바 없이 갖가지 이유로 타살된 인간들, 이 와중에 살아남은 자들이 모두 ‘돼지’임을 선언하며(현 정권이 “개, 돼지”로 칭한 것과는 정반대의 윤리로) 죽은 돼지들의 식물적인(비폭력적인) 재생을 열망하는 ‘(인간-)돼지’의 이야기이다.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는 본래의 자신을 되찾기 위해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존재”라고 설파한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패러디한 것으로, ‘않아’라는 언어가 한 말을 받아 쓴 ‘언어의 어록’이다.
스스로 자서전을 쓰는 ‘죽음’이 개별자의 구체적 형상(시체)으로 현시될 뿐 육체가 없는 발화의 주체라면, “피어라 돼지”(!)라고 애통히 축원하는 이는 실제의 돼지거나 인간-돼지거나 누구인지 규정할 필요가 없는 발화의 주체다. ‘않아’는 모든 행위와 상태에 부정성을 가하는 언어 자체가 입을 벌려 생겨난 발화의 주체다. 이들은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시야와 윤리성을 지니며, 살아 있는 존재와 세계의 온전한 형상을 증언한다. 김혜순은 시와 시인의 역할이 이 주체들을 발견하고 출현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사건이든, 사물이든, 언어 자체든, 인간(여성)이든 김혜순은 세계의 ‘안’에 밀폐되었거나 ‘바깥’에 떠도는 것들을 자신의 내부에서 건져 올려 말문을 틔운다. 고대의 무당부터 현대의 비판적 모더니스트까지 역사적으로 시인이 해온 모든 역할을 통합 실천 중인 김혜순은, 이 세계가 만든 끔찍한 “시험관”들이 부서지고 그 “시험관에 담긴 뇌”가 육체와 목소리를 얻기를 바란다. 그 시험관을 만든 것이, 시험관에 담긴 뇌가 ‘나’(의 일부)임을 잊지 않으면서. ㅡ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한겨레] 2016-10-07
나비 ㅡ 김혜순
내 왼쪽 귀와 네 오른쪽 귀로 만든 나비 한 마리
두 날개가 파닥이면 맞잡은 전신으로 파문진다
환한 날개 가루들로 네 꿈을 채워줄게 네 꿈속에 내 꿈을 메아리처럼 울리게 할게 귓바퀴 속 두 소용돌이가 환하게 공명한다
어쩌면 귀먹은 사람이 잠결에 들은 것 같은 그런 편지를 내 왼쪽 귀를 다하여 쓸게 네 꿈속으로 들어가 혈액을 다정히 흔들어줄게
이 세상 끝까지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만큼 그렇게 가볍게 날개를 파닥일 수 있겠니
문드러진 꽃처럼 피어난 우리 입술의 암술 수술로 우리가 키우는 이 나비 한 마리
나중에 나중에 우리 없는 세상에 뭐가 남을까 우리 몸을 버리고 날아오를 저 나비 한 마리 우리 몸속에서 아직도 팔딱거리는 어둠처럼 아직 생기지도 않은 저 멀고먼 쌍둥이 태아처럼
두 손을 맞잡고 누운 침대 위 우리는 두 귀를 맞댄 채 생생히 썩어가네 우리 무덤 위로 바스라질 듯 두 귀를 팔딱거리는 저 나비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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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눈부신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 마치 미세한 레이저망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를 보는 것처럼, 우리를 전혀 다른 환상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그 나비는, 내 왼쪽 귀와 네 오른 쪽 귀로 만든 팽팽한 나비 한 마리다. 시인은 은근한 귓속말처럼 다정하게 네 존재와 나비 한 마리를 만들며 끊임없이 교신하고 있다. 내 귀와 네 귀가 만든 이 나비 한 마리가, 더욱 더 머언 상상의 공간 속으로 파닥이며 날아가기를, 마침내 이 세상 끝까지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만큼 그렇게, 가볍게 날개를 파닥이게 되기를 시인은 열망한다. 시인의 섬세한 의식과 상상이 빚어낸 이 나비 한 마리는 두 존재가 서로 맞잡고 당기어서 만든 나비인 것이며, 두 소용돌이가 서로 환하게 공명하고 있다. 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나비야말로 이미 우리가 없는 세상에도 파닥거리며 혼자 날아오를 것이라 시인은 말한다. 즉 시인은 ‘두 손을 맞잡고 누운 침대 위, 우리는 두 귀를 맞댄 채 생생히 썩어가네 우리 무덤 위로 바스라질 듯 두 귀를 팔딱거리는 저 나비 한 마리!’ 라고 나비의 영구불변성을 묘파한다. 시인의 자유로운 심층적 구도의 상상과 열망이 만들어 낸, 이 나비는 두 존재가 만든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게 빛나는 공유물로서 결국 만남이란 존재와 존재의 단순한 만남뿐만이 아닌 것이며, 결국 영속적인 나비 한 마 리를 빚어내게 되는 것이라 암시하고 있다. 이 시는 가히 독특한 시적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이미 획일화된 현대시적 독해의 경향과 천편일률적으로 고착화된 시적 틀에서 과감히 탈피한 독보적인 시로써, 그 상상력의 무한 경지 속으로 우리를 단숨에 매혹시킨다.
신지혜 (시인)
레시피 동지 ㅡ 김혜순
눈이 와
흰 벌판 한가운데
물로 만든 척추처럼
개울이 흘렀다
나는 팥죽을 쑤었다
오른쪽 폐에서 피떡처럼
검붉은 기침이 펄떡거리고
집을 떠나 이곳에 오면서
이름도 적지 않고
초대장을 보냈는데
꼭 올 것만 같았다
공중에서 내려온
흰 시트를 헤치자
아빠, 네가 서 있었다
팥이 다 익었을 때
두 눈에 맺힌 아빠를 닦으며
흰 설탕을 넣었다
눈이 더 와
물로 만든 척추를 가진 새가
거대한 날개를 털며
일어나는 게 보였다
작은 물고기들이
폭설처럼 쏟아졌다
쏟아지고 나니 다 은빛 티스푼인
물고기들이었다
1. 오지 않은 날들이여
2. 오지 말고 돌아가라
풍경에서 소리란 소리가 다 말랐다
나는 포스트잇에
아빠 잘 가 라고 써야할지
아빠 가지 마 라고 써야할지
동지의 레시피를 적었다
하얀 동그라미를 빚어
뜨거운 팥죽 속에 000 자꾸 밀어 넣었다
나의 일부를 밀어 넣는 느낌
죽은 사람과 뭘 하며 밤을 보내지? 생각했다
살을 만지고 싶은데
흰 뼈의 풍경이었다
왠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날들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 국자 한 국자
눈밭에 팥죽을 던졌다
좀비 레인 ㅡ 김혜순
좀비 내리는 날 다른 세상이 오는 날 내 마음이 죽었으므로 앞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과 고양이 울음과 톱 바이올린의 울음소리를 마음 대신 간직하기로 한다
(파란 하늘과 환한 꽃나무 아래 깍지낀 두 손 같은 끈적거리는 뇌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좀비 자욱히 내리는 날 좀비는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닌다 그리하여 나는 다리를 질질 끌고 나간다
그러나 나는 밤의 칠판에 추적추적 편지를 쓰는 선생 (선생은 머물고 학생은 떠난다) 나는 아마 달력 위에 영원히 빗금을 그으며 내릴 것만 같아
젖은 행주 같은 머리칼로 칠판을 지운다 무서워서 또 쓴다
어둠 속에 가만히 숨어 있겠다고 약속해줄게 어둠 속에 이빨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약속해줄게
그렇지만 죽음을 전파하러 무덤에서 일어납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지만 제발 안아주세요
추적추적 처마 아래 좀비 내려서
나는 물속에서 뭉개지는 흐린 안경을 쓰고 대학본부의 중앙계단 아래서 피 흐르는 것들의 소리를 듣는다
좀비는 눈알이 빨개져도 괜찮아 그리하여 눈알이 빨개진다 좀비는 깡통을 걷어차도 괜찮아 그리하여 깡통을 걷어찬다
그리하여 밥을 안 먹어도 괜찮아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아 젖어도 괜찮아 구겨져도 괜찮아 하염없이 축축한 편지를 쓴다
좀비 자욱히 내리고 또 내려 무덤에 손톱만한 창들이 꽂히는 날
살아 있는 척하는 거 쉬워, 그리하여 괜찮아 내 그림자를 뜯어먹고 배불러도 괜찮아
사방에 내린다
ㅡ계간 《문학과 사람》 2018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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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은 물러설 퇴 ㅡ 김혜순
나는 묘지 담벼락에 붙은 집에 묵기로 했다 내가 창문에서 몸을 날리면 묘지에서 떨어지게 되는 집이었다 묘지는 그곳 사람들의 마지막 안식처이기도 했지만 한가한 산책로이기도 했다 묘지를 제 집 정원인 양 산책하고 가꾸는 이웃들 나는 한 발은 묘지에 한 발은 내 방에 이렇게 올려놓고 산책 겸 휴식, 산책 겸 식사, 산책 겸 잠을 잤다 잠을 자고 있으면 묘지가 거인으로 일어서서 내 이름을 불렀다 산책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어선 묘지의 커다란 몸엔 당연히 식물들과 새들이 매달려 있었고 묘비들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어느 날은 스스로 자신의 몸에 물조리개로 물까지 주면서 나를 불렀다 그러면 나는 다시 비를 맞으며 산책 겸 꿈을 진행하게 되었다 나는 산책을 하면서 비문을 읽기도 했는데 어느 날 거인은 산책 겸 잠을 자는 나에게 분명히 말했다 산책을 하면서 비문에 새겨진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출석부를 부르듯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산책을 하게 되었는데 나중엔 내 방에 들어와서도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유리컵 위에 올려놓고 기르는 감자에게 잘자라~~ 내 감자~ 내 귀여운 감자~~ 하루에 한 번씩 자장가를 불러주면 나의 감자가 독이 오른 싹들을 더 잘 내뿜게 되는 것처럼 그들의 죽음을 더 잘 자라게 하는 일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그만 그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게 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그 묘지 밖에서조차 먹지도 자지도 않고 산책만 하면서 매일 안식에 든 사람들의 출석만 부르고 다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월간 《현대시》 201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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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숨을 은 물러설 퇴 … 좋은 시로 소개한 건 아닙니다. 내년이면 김혜순은 대학에서 정년을 하게 됩니다. 은퇴를 한다 생각하고 시인은 이런 시를 내놓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술회한 산문을 시의 진보로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제 시인은 시를 졸업한 모양입니다.
나비 —열하루 ㅡ김혜순
네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 방법은 이와 같다
유리창에 대고 입김을 불어본다 가슴에 손을 얹어본다
탄생이란 항상 추락이고 주음이란 항상 비상이라 하니 절벽에서 몸을 날려본다
매일 너는 지면(紙面)을 향한 추락인가? 비상인가? 한쪽 발로 선 나비가 다른 쪽 발에 빨간 잉크를 찍어 종이에 편지를 써본다
엄마: 설마 너 태어나자마자 웃는 거야? 너: 아니 웃을 수 있는가 보는 거야!
추락이 시작되면 비명의 비상도 시작한다 심연의 가장자리가 무한히 떠오른다 하늘에서 푸른 물방울 하나 지펴질 때마다 네 날개가 물 위에 퍼지는 파문처럼 일시에 지펴지고 너는 이제 너에게서 해방인가!
네 발에는 곧 발자국이 없다 네 목소리에는 곧 소리가 없다 네 기쁨에는 곧 호흡이 없다 네 편지에는 곧 이름이 없다
너는 눈물 속의 소금처럼만 하얗게 너는 바람 속의 하품처럼만 아아아아
너는 지금 너 중의 하나를 만나는 중인가?
너는 곧 사생활조차 없는 현기증이다
너는 이제 너무 가벼워서 절대로 추락할 수 없는 오직 저 심연 맨 꼭대기 층의 파문에 이은 파문이다!
—《시인수첩》2015년 봄호 -------------- 김혜순/나비…이 시에서 제목의 '나비'를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나비'를 '사람'이나 '시인'으로 바꿔놓고 읽어볼 일입니다. 4연의 1행을 보면 '시인'인 듯한데... 부제의 '열하루'는 또 뭔지, 자기만의 암호? 그러므로 이 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이 되겠지요.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만 '나비'의 존재성이 분명히 드러날 뿐입니다. 시인이 2004년에 쓴 시「나비」와는 전혀 다른 시이지만 그 시에 쓰인 ‘파문’이라는 단어가 여기에도 다시 나타나는 시인의 무의식의 일면에 주목해 봅니다. 강인한 | 06:30 New 저는 창가에 맺힌 수증기가 구름이 되는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승화되는 물방을의 몸짓을 나비의 날갯짓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주황형광펜 | 김혜순의 시에 등장하는 '나비'는 형이하학적으로 읽으면 시 전체가 해독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만의 시 읽기일수도 있겠으나. 저의 의미부여가 심각합니다.좀 엉뚱 ㅡ구름공장 여러 번 읽게 만드는 시입니다. 이러한 시를 '난해시'라고 불러야 하나요? 저의 감상문 남깁니다. 나비 한마리(영혼의 세계, 환생, 나비의 가벼움을 영혼에 비유), 탄생(죽음을 향한 추락), 죽음(영혼의 세계를 향한 비상), 파문( 너와 내가 한 침대에서 썩어가며 일으키는 일시적 현상, 생의 허무), 열하루( 수에서 10은 꽉 참을 의미, 11은 20을 향한 시작, 나비로 진입하는 시작을 의미, 영혼의 세계)로 읽어봤습니다.ㅡㅡ구름공장 | 15.03.15 N
김혜순의 「나비」 감상 / 신지혜 나비 ㅡ 김혜순
내 왼쪽 귀와 네 오른쪽 귀로 만든 나비 한 마리
두 날개가 파닥이면 맞잡은 전신으로 파문진다
환한 날개 가루들로 네 꿈을 채워줄게 네 꿈속에 내 꿈을 메아리처럼 울리게 할게 귓바퀴 속 두 소용돌이가 환하게 공명한다
어쩌면 귀먹은 사람이 잠결에 들은 것 같은 그런 편지를 내 왼쪽 귀를 다하여 쓸게 네 꿈속으로 들어가 혈액을 다정히 흔들어줄게
이 세상 끝까지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만큼 그렇게 가볍게 날개를 파닥일 수 있겠니?
문드러진 꽃처럼 피어난 우리 입술의 암술 수술로 우리가 키우는 이 나비 한 마리
나중에 나중에 우리 없는 세상에 뭐가 남을까 우리 몸을 버리고 날아오를 저 나비 한 마리 우리 몸속에서 아직도 팔딱거리는 어둠처럼 아직 생기지도 않은 저 멀고먼 쌍둥이 태아처럼
두 손을 맞잡고 누운 침대 위 우리는 두 귀를 맞댄 채 생생히 썩어가네 우리 무덤 위로 바스러질 듯 두 귀를 팔딱거리는 저 나비 한 마리! —시집『한잔의 붉은 거울』(2004) ................................................................... 여기 눈부신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 마치 미세한 레이저망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를 보는 것처럼, 우리를 전혀 다른 환상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그 나비는, 내 왼쪽 귀와 네 오른 쪽 귀로 만든 팽팽한 나비 한 마리다. 시인은 은근한 귓속말처럼 다정하게 네 존재와 나비 한 마리를 만들며 끊임없이 교신하고 있다. 내 귀와 네 귀가 만든 이 나비 한 마리가, 더욱 더 머언 상상의 공간 속으로 파닥이며 날아가기를, 마침내 이 세상 끝까지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만큼 그렇게, 가볍게 날개를 파닥이게 되기를 시인은 열망한다. 시인의 섬세한 의식과 상상이 빚어낸 이 나비 한 마리는 두 존재가 서로 맞잡고 당기어서 만든 나비인 것이며, 두 소용돌이가 서로 환하게 공명하고 있다. 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나비야말로 이미 우리가 없는 세상에도 파닥거리며 혼자 날아오를 것이라 시인은 말한다. 즉 시인은 ‘두 손을 맞잡고 누운 침대 위, 우리는 두 귀를 맞댄 채 생생히 썩어가네 우리 무덤 위로 바스라질 듯 두 귀를 팔딱거리는 저 나비 한 마리!’ 라고 나비의 영구불변성을 묘파한다. 시인의 자유로운 심층적 구도의 상상과 열망이 만들어 낸, 이 나비는 두 존재가 만든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게 빛나는 공유물로서 결국 만남이란 존재와 존재의 단순한 만남뿐만이 아닌 것이며, 결국 영속적인 나비 한 마리를 빚어내게 되는 것이라 암시하고 있다. 이 시는 가히 독특한 시적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이미 획일화된 현대시적 독해의 경향과 천편일률적으로 고착화된 시적 틀에서 과감히 탈피한 독보적인 시로써, 그 상상력의 무한 경지 속으로 우리를 단숨에 매혹시킨다.ㅡ 신지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