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배우는 이유는 미래가 새롭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 만하다. <논어>
"배우려는 열의가 없으면 이끌어 주지 않고, 표현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일깨워 주지 않으며, 한 모퉁이를 들어울렸을 때 나머지 세 모퉁이를 미루어 알지 못하면 거듭해서 가르쳐 주지 않는다."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불분불계, 불비불발, 거일우불이삼우반, 즉불부야)
<論語 述而篇>에 실려 있는 이 구절에는 공자가 가르쳐 주는 올바른 배움의 자세가 담겨 있다. 먼저 앎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진정한 배움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배웠다면 반드시 그것을 표현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이 머릿속에만 미물면 진정한 내 것이 될 수 없다. 알았다면 반드시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 문장은 배움에서 창의성의 의미를 강조한다. 하나를 가르쳤다면 반드시 그 지식에서 유추해 셋을 알아야 한다. 공자는 심지어 창의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더 이상 제자로 인정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창의성은 배우는 학생뿐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만하다." 이 말은 스승의 자격을 가리키지만, 다르게 보면 가르치는 사람의 이점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가르침을 통해서도 새로운 것을 아는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의성을 얻는 이치도 이 문장에 담겨 있다. 새로운 것은 반드시 옛것을 익혀 통달할 때 얻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완전한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 아닌 하늘의 영역이다. <성경>에 실려 있는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가 말해주는 바다. 사람들은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 뿐"인 것이다.
예문의 의미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정조도 신하와의 불법 경연에서 설파한 바가 있다.
정조가 말하기를 "온고이지신이란 무슨 말인가?" 하니, 신하 이 유경은 "옛글을 익혀 새 글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정조가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다. 초학자들이 이렇게 보는 경우가 많은데, 대개 옛글을 익히면 그 가운데에서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어 자기가 몰랐던 새로운 것을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을 이른다."
정조가 경연을 하면서 시독관 이재학, 이유경과 나눈 대화다.
경연은 임금이 학식이 높은 신하와 함께 경서를 강독하는 행사다. 이유경은 '온고이지신'의 의미를 글을 읽고 공부하는 것에 국한했지만 정조는 창의성의 관점에서 폭넓게 해석했다. 글을 통해 지식을 얻으면 생각을 통해 창의적인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의는 기준의 틀에 갇혀 있기만 해서는 얻을 수 없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상에서도 얻기 힘들다. 가지고 있던 지식에서 새로운 지식이 합쳐질 때, 기존의 생각에서 완전히 다른 생각이 합쳐질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상을 벗어나 훌쩍 여행이나, 짧게는 가까운 곳을 거니는 산책이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이 된다.
나아가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의 지식이 합쳐질 때도 창의적인 발현이 가능하다. 바로 옛 지식, 고전이 필요한 이유다.
수많은 작가에게 영감을 준 대문호들도 옛글을 따라 쓰는 것에서 창작을 시작했다./신독, 혼자 있는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