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언덕에서 어머니는 젊은 날부터 갈구하던 바람을 원 없이 만나고 있다. 어머니는 온몸으로 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이렇게 바람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어머니에게 시원한 바람은 고단한 삶에 위로였다.
아버지가 겨울 철 공사판으로 돈 벌러 떠나면 어머니 한숨소리는 애절했다. 탄식 소리는 깊었고 길었다. 작은 체구 어디에 저 긴 숨을 숨겨 두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는 방안의 공기로는 부족한지 차가운 바람을 찾아 마당으로 나갔다. 바람은 답답하고 억눌린 복장을 풀어줄 안위였다. 개 짖는 소리가 요란 한 밤이나, 술주정뱅이 삼촌이 빈 집을 들쑤시고 돌아간 날에는 늦은 밤까지 한숨이 이어졌다. 눈물을 대신하고, 토하듯이 내 쉬는 날숨에는 타는 냄새가 났다. 내뱉는 숨결에 어머니의 생명이 따라 나올까 걱정되었다. 샛강을 건너고 들판을 지나 마당으로 온 차가운 바람으로도 애환을 풀어내지 못한 날은 주먹손으로 당신 가슴을 쳤다. 어머니 속을 시원하게 해 줄 바람을 구해 오고 싶었다.
어머니의 걱정은 끝없이 이어졌다. 아픈 누이와 철없는 형이 수시로 근심을 보탰다. 고난까지 엉켜 붙어 응어리가 되었다. 가슴속에 쌓여가는 고민을 끌어 낼 시원한 바람이 필요했다. 촛불도 일렁거리게 할 수없는 정지된 공기는 쓸모가 없었다. 여름날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시원한 냉수 같은 바람. 흉부 깊숙이 들어와도 살아 꿈틀거리는 질긴 생명력의 바람. 가슴 가득한 수심을 몸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힘 있는 바람이 필요했다. 바람은 어디에도 있지만 어머니가 찾는 바람은 흔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삶은 지금까지 시원한 바람 한번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산꼭대기에서 만난 바람은 우악스럽고 거만했다. 들판의 바람은 대부분 걱정이었다. 해변의 바람은 뜨겁거나 차가움만 있었다. 파도가 거친 날에는 바닷물까지 딸려와 옷이 젖었다. 일흔의 어머니는 바람의 언덕에서 당신이 찾던 살아있는 바람을 만났다.
들뜬 어머니는 싱그러운 바람을 맞는다. 오래전부터 찾았던 활어 같은 싱싱한 바람이다. 마음이 통하는 반가운 손님을 대하듯 가슴을 활짝 펴 바람을 맞이하고, 바람은 거침없이 어머니 옷 속으로 스며든다. 어머니와 바람은 동화되어 하나가 되었다.
어머니는 언덕을 올라오는 바람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바다를 건너 뭍으로 오는 바람은 구릉을 오르면서 염분을 버렸다. 바람의 속살이 맑아 살갗에 닿는 느낌이 청아하다. 어머니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부드럽고 가슴에 부딪히는 바람은 힘이 있다. 어머니는 정신의 허기를 채우려고 볼이 불룩하도록 바람을 입속 가득 담고 내 쉰다. 나에게도 바람 한 입 권한다. 바람 맛은 달면서도 시원하고 끝 맛은 담백하다.
바람은 남해 바다를 건너 바람의 언덕까지 오는 동안 강한 생명과 사랑을 담았다. 긴 들숨이 필요한 사람에게 휴식과 마음의 안정을 주고, 어머니의 손이 되어 고단한 뱃사람들 땀을 훔친다. 사람들 가슴을 헤집으며 희망을 불어 넣는 능동의 바람으로 변모했다. 바람의 언덕 바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바람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표정에 생기가 돈다. 어머니 얼굴이 붉어진다.
바람은 능구에 마중 나온 초록의 풀들과 합쳐진다. 억센 바다의 사내가 육지의 여자에게 얌전해지듯 바람도 똑 같다. 바람 몇 가닥은 풀 숲 사이로 스며들어 유순해진다. 풀들이 내뿜는 싱그러운 향기를 실어 마음을 달래려고 섬으로 여행 온 사람들에게 전한다. 힘내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귓가를 지난다. 튼실한 바람은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더 많이 주려고 옷깃을 잡아 흔든다. 더 많이 담아가라고 주머니까지 스며들어 꽉꽉 채운다. 어머니도 바람을 안아 가슴에 차곡차곡 쌓고 있다. 바람은 저항 없이 어머니 손에 잡혀있다.
바람은 잠시도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인다. 지친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영혼을 달래고 가슴에 푸른 씨앗을 심는다. 바람은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불어 절망으로 고개 숙인 사람들을 바로 세운다. 바다를 흔들어 윤슬의 빛을 만들고 파도의 함성을 키워 응원을 시작한다. 바람의 언덕에서 긍정의 바람과 사람이 어울려 일체를 이룬다. 바다를 두르고 있는 바람의 언덕에서만 느끼고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어머니는 그런 바람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짓는다. 바람이 어머니를 웃게 만든다.
바람은 머무르지 않는다. 머문다는 건 소멸이다. 거침없이 산등성이를 오르는 바람을 따라 어머니도 발길을 재촉한다. 더 빨리 올라가라고 바람이 등을 밀어준다. 오늘따라 거제의 바람이 더 없이 미쁘다. 바람도 어머니도 고갯마루에 자리 잡은 거대한 풍차 앞에서 나란히 멈추었다. 바람은 어머니를 남겨두고 풍차의 날개에 달라붙었다. 풍차의 커다란 날개가 돌기 시작한다. 이국의 근사한 볼거리 풍차를 바람의 언덕에 올려놓은 사람은 누구일까. 그의 생각이 고맙다.
바람은 생성과 소멸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바람의 선택적 배분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다. 바람은 생명을 흔들기도 하지만 더 강하게 만드는 일도 한다. 뿌리를 더 튼튼하게 내리라고 사정없이 몰아친다. 바람은 의지가 없고 생명이 없는 것은 다 날려버리고 쓸어간다. 살아남고자 하는 것은 땅을 부여잡고 온 몸을 바닥에 누이면서도 꿈을 놓지 않는다. 어머니도 시련의 바람 앞에서 자식들을 부여잡고 억척으로 살아냈다. 풍차의 날개를 돌린 바람은 제 할 일을 끝내고 흔적도 없이 하늘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바람이 떠난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아쉬움도 미련도 없이 시원한 바람을 경험한 어머니는 옷깃을 여미고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한다. 바람의 언덕에서 근심을 다 날려 버린 내 어머니의 어깨와 걸음이 가볍다.(14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