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악몽]
1. 어젯 밤 늦게 올린 짧은 글 하나 때문에 밤새 시달림을 당하였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어오는 '쪽지/메시지' 를 알리느라 연신 울리는 핸드폰 알람 소리 때문에 잠을 거의 잘 수가 없었습니다.
2. 폐일언하고, 제가 어제 올린 글의 요체는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과 정치의 자유에 따라 어떤 정치인이든 지지할 권리가 있습니다. 다만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자신의 의사에 성경을 덧붙이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덧붙이는 우를 범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3. 우리가 어느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주로 자신의 경험과 욕망, 즉 계급적, 정서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신앙적인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정치관을 신앙으로 포장해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런 유혹을 강하게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4. 저는 여전히 목사도 강단 밑에서는, 그리고 예배당 밖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시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가 갖고 있는 양심의 자유 때문입니다.
5. 양심의 자유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신천지를 믿는 사람을 좆아다니면서 이단이라고 꼬리표를 붙이며 비방할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천민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의 실명을 특정해서 기득권 세력이라고 비방하지 않습니다.
저는 군사 독재 시절이 더 먹고 살기 좋았다고 떠드는 사람을 역사의식이 제로인 후안무치한 사람이라고 애써 면박주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이나 판단은 그가 갖고 있는 양심의 자유, 즉 신앙의 자유, 사상의 자유와 정치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6. 하지만 만일 신천지 교인이나, 천민자본주의 신봉자나 독재 숭앙자가 자기의 입장을 제게도 강요하려고 한다면 단호히 맞서 논쟁할 것입니다. 제게는 고유의 양심의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7. 저는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목사에게도 정치적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양심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양심의 자유를 '덕스럽게' 표현할 능력과 범위, 방편은 온당히 그 목사 자신의 몫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목사들도 자신의 몫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이 책임지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어쨌거나 당신은 목사잖아?, 그러니 애시당초 안 되는 거야'라는 식으로 그 몫 자체를 빼앗거나 제한할 권리가 없습니다.
8. 목사는 공인이기 때문에 일체의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 의견에 담긴 충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무엇을 우려하시는 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혹시 그런 생각 이면에 이른바 "사제주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제주의'란 주지하듯이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 정도로 격상시켜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의 권위와 기능을 사실 이상으로 과대 평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제주의가 교회에 계급적 질서를 유포하기도 하며,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를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것으로 변질시킵니다.
사제주의에 경도된 것이 아니라면, 한 자유로운 주체로서 목사들에게도 강단 밑에서와 예배방 밖에서는 정치적 의사 표시의 권리는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9. '목사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게 되면 교인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표시해 주신 분들도 계십니다.
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단 여기에는 한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목사의 정치적 발언에 교인이 상처를 받는 대부분의 경우는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와 목사가 지지하는 후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와 목사가 지지하는 후보가 서로 겹치면, 아마 그 교인은 이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시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하나님 뜻에 합당했어"라고.
솔직히 이 매커니즘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이걸 인정하게 되면 상처 받는다는 것의 이유가 좀 달라지리라고 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정치적 의사 표시를 했기 때문에 교인이 상처를 받는 것은 목사가 정치적 의사 표시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아닌 다른 후보를 거명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본질은 목사의 정치적 의사 표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치관에 있는 것이지요.
10. 이런 논지를 펴신 분들도 계십니다.
'나는 지금까지 민주당, 혹은 민노당/진보신당 쪽 사람들에게 더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야당이 싫다, 혹은 투표를 안하려고 한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 자신은 어느 특정 정당의 당원이 아니며 또 어느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의 상처는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상처 때문에, 정치적 의사 표시를 거기에 준해 결정하는 것은 제 생각에는 절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치적 의사 표시는, 우리 개개인의 경험을 넘어서는 더 큰공론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미래가 걸린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가치 판단을 통해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지, 개인의 상처에 근거하여 결정될 성질의 것을 넘어선다고 생각합니다.
11. 일례로,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국교회 안의 교인들에게서 정말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제게 손해를 끼치고 위해를 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상당한 상처가 아직도 제 안에 온존합니다. 그러나 그 상처 때문에 교회를 부정하거나 떠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나아가 하나님나라는 제 부정적인 경험보다 훨씬 더 큰, 그리고 높은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12. 저는 이번 선거가 궁극적으로는 '가치 위주의 선거'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나라,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나라, 우리가 물려주어야 할 나라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각자 자신의 가치를 명확히 하고 거기에 최대한 근접한 후보를 선택하는 선거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이번 선거에서 누구를 찍어야 할지, 그리고 누구를 찍지 말아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13. 끝으로 하나 더 사족을 단다면, 매사에 신앙적인, 혹은 성경적인 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시는 것을 습관처럼 쓰시는 분들이 계신데,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입버릇처럼 성경적이라고 말하는 습관은 진짜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당신의 주관적 경험과 판단일 뿐입니다.
질곡의 한국 현대사와 오늘도 사방에 지뢰처럼 깔려 있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아픔에 대한 진지한 학습도 안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 형편에, 말 끝마다 무슨 성경의 도사를 자처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