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로 도피하는 아이들 = 타석에 서지 않고 스윙 연습만 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이유
부모들은 공부를 조금 해보니 직장도 생기고 나름의 삶이 가능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따라서 자녀가 공부한다고 하면 모든 것에 유예되어 버리는 사회 (제사, 명절, 가족 행사, 교회 등도 유예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체화)가 만들어 졌다.
이제는 대학을 졸업해서, 취업준비중생, 공시생, 인턴(모라토리엄) 이라고 하면 일단은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상황안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다.
거시적으로는 우리사회가 헬조선이다, 다포세대다 라는 공포분위기가 조장되면서 사회로 나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고, 무시무시한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완전체로 스펙을 쌓아야만 한다는 것을 내면화 하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
(엄기호는 이 정도 되면 폭동이 일어나야 하는데, 젊은 이들은 취업이 안 되는 이유가 자신의 노오력의 부족이라는 자기 원인으로 돌림으로써 이런 체제는 유지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생산은 하지 못하고 비평(댓글)만 하는 세대의 출현
직장을 갖게 되면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책이나 논문이나 각종 창작물을 만들어서 사회에서 검증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비평을 받는 일은 불편한 일이다. 성인이란 스스로 창작하고 타인에게 비평받고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아직 공부중인 학생들은 이마저도 두렵다. 공부하면서 이것 저것 알게 되면 삶의 각 영에에 다양한 비평이 가능해진다. '누구는 노래는 잘하는데, 뭐는 어떻고.'. 어쩌고 저쩌고 끊임없이 비평을 할 수 있게 된다. 뭔가 자신의 것을 만들어 다른 사람앞에서 평가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 비평할 수 있고 아는체 할 수 있는 사람들만 넘쳐난다. 그래서 한국에서 넘처나는 것은 '댓글'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양질의 담론은 생산되지 않고, 저질의 댓글만 난무할 뿐이다." (엄기호)
Schooling society (학교화 하는 사회)
- 배우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배워야 하는거. (삶 속에서 터득해야 하는 것) = 연애, 인간관계
2) 가르쳐야만 배울 수 있는 것(미적분 등)
사실 전통사회에서는 1)은 친구들 또는 공동체 내에서 삶의 통해(생활 기스) 자연스럽게 터득했던 영역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1) 영역은 사실 커리큘럼화 할 수 없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역이 배움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연애를 가르치는 '픽업아티스트'가 있으며 심지어 카톡 이모티콘을 어떨때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곳도 있다고 한다. 사실 1)과 2) 두 영역은 균형이 맞아야 한다. 현재 우리는 1) 영역이 없다. 1) 영역은 리스크가 있어서 이를 제거하기 위해 가르칠 수 없는 것인데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실 자기주도적 학습도이나 인성이라는 것도 커리큘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자기주도적 학습 컨설턴트가 이윤을 창출하고 인성교육 학원이 생기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가 1) 영역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결정 장애'이다. 누군가가 지도 치침을 내려주지 않으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그리고 자기 생각과 자기 욕망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대, 그러한 생각과 욕망을 드러내기 두려워지는 사회를 우리 아이들은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20년 사이에 초중고 학업 압력이 지대해 지면서 개인이 1)의 영역을 만들어낼 시간적 여유가 없어져 버리게 됨으로 인해 이를 보충하기 위해 '연애학원', '인간 관계 학원'에 등록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과 상담사례 공부잘하는 대학생 남자애가 "그 애 한테 83,000원을 썼는데 어떻게 그애가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내가 83,000원이나 썼으면 그애는 나랑 손도 잡아주고 진도도 나가주어야 하는데 왜 그애는 내가 싫다고 하고 전화도 안받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집앞에 가서 따졌는데 그게 잘못한 거냐?"
배움은 익혀야 한다. 그래서 '학'과 '습'이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런데 학만 존재하고 익히고 써보는 '습'이 부재하다는 점이 우리 교육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선생님이 열심히 설명하고 정리해주면 학생들은 잘 정리하고 암기한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말해보라고 하면 화를 낸다.
어떤 학생이 2시간 동안 토론으로 수업을 진행하자, 한 학생이 수업 말미에 "왜 선생님은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 안가르쳐주고 2시간 동안 뺑뺑이 돌리고 그럽니까?" 라는 항의성 발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강을 들으면서 "1번 내용 2번, 3,4. 이거 외우세요."라고 쭉쭉 뽑아내주는 것에 익숙해진 아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아이들이 했다는 '학(배움)'은 사실 선생님이한 공부를 뒤에서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업이 끝났는데 학생들이 "선생님 정말 설명 잘 해주세요. 정말 수업 잘 들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이 말의 이면에는 똑똑한 사람이 공연을 잘한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사실 공부중독은 학생들이 계속해서 학원과 학교를 통해 공부한 사람 구경 다는 일만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공부 구경 중독이고 이를 통해 자신은 은폐하려는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정작 삶아가면서 경험으로 배워야 하는 영역이 10%로 줄어들어버리고 나머지 90%는 학업에 매몰되어 버린다는 것이고 문제는 나머지 10%도 학원에서 배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와 학원에서 배운 '90%'는 어떻게 된 건가? 지적인 능력이라도 있다면 사회를 해처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되지 않을까? 안타갑게도 여기서 배운 '90'또한 삶의 동력이 되지 못하는 죽은 지식, 시험 보면 사라져 버리는 지식의 흔적 뿐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점이다.
486세대(1960~75년생, 학력고사로 대학에 들어간 세대)는 축복받은 세대로 자신의 부모와 자녀보다 잘 살 것으로 기대되는 유일한 세대이다. 그런데 이들은 대학 진학율이 30% 이하였다. 그래서 학점이 2.0인데 삼성에서 부르더라, 놀다가 삼성에 원서 넣는데 와서 일하라고 하더라. 라는 이상한 경험을 한 프리라이더 세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세대는 자신의 자녀들도 공부만 하면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 받을 것이라 굳게 믿는 세대이다. 다른 경험을 해보지 않았기에 대안이 없다는 점도 문제로 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이 대부분의 것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녀들도 잘 알고 있으며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다. 그런데 앎은 효율적인 통제를 가능하기 때문에 다양한 정보를 입수하여 자기 자녀를 컨설팅하고 메니지먼트 하기 시작한다. 교육과 미래라는 이름으로 우리 아이들은 통제와 억압을 받으며 그 속에서 억압과 통제를 스스로 내면화, 정당화하게 된다.
Q : 요즘은 지식 정보화사회라고 한다. 이러한 시대에 학교는 유지될 수 있을까?
엄 : 극단적인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 학교가 존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의 이야기가 분분하다. 그런데 우리는 지식과 경험을 구분해야 한다. 지식은 널려 있다. 언제든지 접근이 가능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것의 극단적인 형태는 아마도 아이언맨의 자비스 프로그램일 것이다. 그런데 수 많은 정보를 안다는 것과 그것을 내 삶의 형태 구현해 낼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여행에 대한 수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행을 스스로 갈 수 있느냐의 문제는 다른 것이다.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는 있지만 그 정보를 스스로 다룰 줄 아는 경험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공부는 정보가 어디에 찾아내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내가 익혀서 활용하고 사용할 수 있게 끔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진화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때 자유로워 지는 것이다. 김연아는 어름위에서 우리보다 자유롭다. 배우고 익힘으로써 자유를 얻게 된다는 말은 대상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갖느냐에 따라 그사람을 평가하고 인정해 왔었다. 그래서 우리는 학생들에게 꿈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묻으며 꿈을 가지라고 강요한다. 그런데 이제 이 아이들이 살아가야할 사회는 그렇게 노동(직업)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학생들이 별로 없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한 사람을 바라볼 때 직업이 아닌 그 사람 다른 부분으로 봐야하는 패러다임의 전화기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엄기호)
스위덴에서 모든 국민에게 월 기본소득으로 300만원을 제공해 줌으로써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함으로써 모두가 행복해지는 국가를 만들어보자는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다. 사실 부결되긴 했지만, 미래에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로 생산력의 비약적으로 증가한다면 거기서 나오는 이윤을 소수 재벌만이 독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기본소득을 지급함으로써 국민 모두는 자신의 원하는 가치들을 실현시키고 이러한 가치가 다시 사회로 환원되는 선순환 구조도 생각해 볼 수 있지않까 생각해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이 국회로 가야 하는 전제가 깔려야 할 것이다. 그래도 투표라도 해본 나라가 있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공부만이 답이라고 믿는 이들에게"공부만이 살 길이라 외치던 게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요즘처럼 사회 전체가 공부 외길을 위태롭게 걸으며 이 말을 순도 100%로 실현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회학자 엄기호와 정신과의사 하지현은 신화가 현실이 되어버린 공부 중독사회의 속내를 각자의 방식으로 들여다 보며, 이런 사회가 만들어 낸 공부의 현실과 그 속에서 공부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이들이 함께 맞이할 내일을 조금이라도 바꿔볼 방법을 찾으려 머리를 맞댄다. 엄기호는 스스로 공부의 자식이라 말하면서도 요즘 공부하는 게 재미없고 가르치는 게 고역이라 고백한다. 하지현은 공부가 학교를 넘어 사회와 인생까지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고 말한다. 공부가 나쁜 일도 아닌데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공부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입시, 대학, 서열을 떠올리면, 관계, 연민, 공감마저도 공부로 돌파하거나 외면하려는 모습을 생각하면, 공부를 질식시키는 공부로부터 공부를 구해내, 공부가 있던 자리, 즉 성장하는 삶을 위한 공부를 다시 구성하며, 공부의 식민지가 된 삶을 공부로부터 구해내야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쯤 되면 공부를 하자는 말인지 하지 말자는 말인지 헷갈리기 시작할 터, 이 책을 공부중독에서 벗어나 공부의 의미를 찾아볼 계기로 삼아 보자. 공부는 그 다음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 사회과학 MD 박태근 (2015.12.11)
이 시대의 성공 판타지, 공부라는 만능키를 두고 사회학자 엄기호와 정신과의사 하지현이 만났다. 강의실과 진료실, 각자 다른 현장에서 청소년들을 만나온 저자들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에 대한 걱정과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사회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공부에 중독된 아이들, 공부 중독 사회라는 현상이 그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공부는 모든 문제를 빨아들이는 중심축이 되고 있다. 부모, 아이 할 것 없이 공부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생각의 틀이 모두 공부를 중심으로 획일화되어 사회성, 공감능력, 유연성 같은 요소는 상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다. 그런데 이 요소들이 모자라다고 느끼면 역시 공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며 책과 학원을 찾는다.
공부라는 블랙홀이 개인의 인생을 넘어서 학교와 사회를 강력한 힘으로 빨아들이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어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대담을 엮었다. 교육뿐 아니라 취업, 부동산, 노후, 경제 불평등까지 거의 모든 영역의 사회문제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공부라는 블랙홀이 2015년 현재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게걸스럽게 잠식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이 시대의 성공 판타지, 공부라는 만능키를 두고
사회학자 엄기호와 정신과의사 하지현이 만났다
삶의 다음 단계를 유예시키는 프리 패스,
대한민국 전 연령대 사람들의 ‘마음 고통’의 공통분모,
지금의 공부 중독은 어떤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지금, 누가 공부에 욕심을 내고 있는가?
대담의 시작
2015년 8월, 두 명의 저자가 만났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로 한국사회 청년층 문제를 새롭게 환기하여 주목받고, 이후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서 ‘폐허’가 된 학교 현장의 뒷모습을 교사들의 목소리로 담아냄으로써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사회학자 엄기호. 『심야 치유 식당』『그렇다면 정상입니다』등을 펴냈고 주목할 만한 매체에 다양한 칼럼을 기고하면서 대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 너무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문제들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고민해온 정신과의사 하지현. 다른 영역의 두 전문가가 만난 이유는 ‘공부’ 때문이었다. 강의실과 진료실, 각자 다른 현장에서 청소년들을 만나온 저자들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에 대한 걱정과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사회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공부에 중독된 아이들’, ‘공부 중독 사회’라는 현상이 그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공부는 모든 문제를 빨아들이는 중심축이 되고 있다. 부모, 아이 할 것 없이 공부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생각의 틀이 모두 공부를 중심으로 획일화된 상태다. 공부가 마치 모태 신앙과도 같은 부모는 공부에 중독된 아이를 만들고, 그 아이들이 사회에 나온다. 공부 백 퍼센트짜리 순도 높은 존재일 뿐, 사회성, 공감능력, 유연성 같은 요소는 상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다. 그런데 이 요소들이 모자라다고 느끼면 역시 공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며 책과 학원을 찾는다. 이런 악순환에 빠져 있는 것이 우리 사회다. 공부라는 블랙홀이 개인의 인생을 넘어서 학교와 사회를 강력한 힘으로 빨아들이고 있다.
이 대담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 누가 공부에 엄청난 욕심을 내고 있는가? 우리의 청소년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나아가 공부 중독을 통해서 어떤 주체들이 형성되고 있고 이런 병적인 주체를 만들어내는 그 사회는 무슨 사회인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대담(2015년 8월 10일, 9월 2일, 9월 10일, 9월 18일, 10월 2일)을 엮은 이 책은 교육뿐 아니라 취업, 부동산, 노후, 경제 불평등까지 거의 모든 영역의 사회문제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공부라는 블랙홀이 2015년 현재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게걸스럽게 잠식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회학의 망원경과 정신의학의 현미경으로 바라본 대한민국 ‘공부 중독 사회’
공부라는 주제를 놓고 교육 시스템에 정통한 교육 전문가가 아닌 사회학자와 정신과의사가 만났을 때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현재의 공부 중독은 교육 시스템의 개선만으로는 획기적인 변화가 힘들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수많은 교육 개선책이 나오지만 미치는 영향은 미비하다. 어떤 식으로든 공부를 통해서 또 다른 줄 세우기가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 그보다 먼저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담을 통해 저자들은 공부 중독은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라고 단언한다. 특정한 연령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자칫 세대의 문제로 비칠 수 있지만, 한국 사회의 구조가 바뀌면서 나타난 사회구조의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저자는 이 구조의 변화를 사회적, 정신 병리적 관점에서 해부한다. 사회 변화에 따른 삶 속에서 각 세대는 어떻게 커왔는지, 그리고 어떤 감정과 멘탈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이야기한다. 교육 현장에서 교사, 학생들과 깊은 소통을 하고 있는 사회학자의 통찰력 있는 문제의식과 진료실에서 청소년, 부모들을 상담하면서 쌓은 정신과의사의 임상적 경험을 통해 우리는 지금 현실의 심각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공부에 중독된 아이들
1부에서는 각자 현장에서 만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공부 중독의 ‘독’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삶이 온통 공부로 점철된, 오로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죽어라 공부만 해온 청소년들이 성인이 된다. 그러나 대학 강의실에 앉아 있는 이들 중 많은 학생들이 심각한 공부 중독의 폐해를 드러내고 있다. 불안장애, 우울증, 분노조절장애…. 그러나 공부 중독의 가장 큰 폐해는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만능감’이다. 공부 중이라는 푯말을 들고 언제까지고 타석에 서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붙들고 있다는 것. 아울러 모든 것을 공부로 풀려고 하는 태도, 관계에 대한 몰이해, 공정함에 대한 집착. 두 저자는 현장에서 만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공부의 폐해가 지금 우리의 청소년들을 어떤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대담이 이른바 ‘요즘 애들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애들’의 이런 태도와 행동은 우리 사회의 조건, 구조, 상황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저 몸에 배면서 자라왔을 뿐이다. 대담에서 저자는 ‘요즘 애들론’과 같은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2015년 대한민국의 동시대성의 발견하기 위한 방편이지 결코 그걸 지금 청년 세대의 특성으로 본질화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동시대성의 발견과 그 동시대성에 공동으로 대결하는 동시대인의 형성이기 때문이다. 공부에 중독된 아이들은 결국 공부 중독 사회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누가 공부에 욕심을 내고 있는가
누가 공부에 욕심을 내고 있는가? 두 저자는 명확하게 말한다. 486세대. 공부로 성공한 사람들, 공부만이 답이라고 믿는 사람들, 그래서 자식들에게도 그 판타지를 실현시키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공부는 삶이라는 1차 방정식의 유일한 해(解)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고속 성장의 시기에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집을 장만할 수 있었던 486세대와 달리 지금은 성공한다는 것에 있어서, 또는 생존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에 있어서 변수가 무척 많아졌다. 공부만이 답이라고 믿는 것은 판타지라는 것이다. 한때는 가능한 신화였지만 이제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은 판타지. 하지만 부모 세대는 여전히 ‘상위 4.5퍼센트를 평균이라고 믿으며’, ‘공부로 탁월한 아이들을 만들어내서’ 공부로 성공하겠다는 의지를 여전히 고수함으로써 대한민국 전부가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무엇보다 삶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데 공부와 삶을 분리시키고 공부에 올인하다 보니 삶이 더욱더 빈약하고 허약해지고 있는 공부 중독 사회의 비극적 현실이다. 사회 전체가 ‘스쿨링화’되고 공부가 삶의 영역들을 식민화하면서 삶의 다양한 루트들이 형성되지 못하고 결국 ‘진짜 삶’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두 저자는 공부라는 마스터키를 한국사회 전반의 성장과 엮어 들여다보면서, 고차 방정식이 된 지금의 삶 속에서 무엇이 공부가 되어야 할지 고찰한다.
중독에서 해독으로
대담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3부에서 저자들은 공부 중독에서 벗어날 방편을 모색하기 위해 지금의 공부 중독은 엄밀히 말해 ‘교육 중독’임을 명확히 한다. 교육 시스템과 진짜 공부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이야기다. 이 사회 전체가 더 이상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의미에서 교육이 불가능한 상태인 지금,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가능할까?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저자들은 두 가지 트랙으로 나누어서 이야기한다.
첫 번째 트랙은 현재 중독 현상을 퍼트리고 있는 진앙지, 중산층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진학이란 애초부터 중산층 지식인들의 게임이었고, 현재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올인하게 되는 게임이 되어버렸지만, 이들 역시 간절하게 탈출구를 원하고 있다. 공부에 대한 과잉 투자로 보통의 중산층은 이제 감당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아랍 왕자처럼 판돈이 넘치는 사람만 이길 수 있는 게임. 그렇다면 이 미친 드라이브에 어떻게 브레이크를 걸 것인가? 저자들은 이 상황을 막 돌파하려고 하는 이들의 노력과 그 한계들을 짚어본다. 두 번째 트랙은 이러한 공부 중독에서마저 소외된 청소년들이다. 부모들이 가진 자원의 부재로 목적 없는 공부에 발목이 잡혀 있는 아이들. 공부 속에서 좌절만을 경험하다가 삶의 태도까지 망가지는 아이들. 그렇다면 이들에게 필요한 공부는 무엇일까? 이들이 삶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를 모색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공부 중독이라는 블랙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두 저자는 이제 ‘공부’라는 말을 구제해서 원래 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공부에 대한 지금의 인식이 바뀔 때 마음이 바뀌고 그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모두가 “미쳤어”, “이건 아니야”를 외치면서도 그 트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아는 도둑질이 이것뿐’이라는 점도 있지만, 나만 혼자 빠져나갔다가 혼자서만 불리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강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 대담을 시작으로 한 명이라도 더 이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각의 전환과 용기의 불씨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시스템에 그 어떤 혁명적 변화를 준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공부 중독에서 벗어나서 다른 트랙에 선 사람이 늘어날수록 공부라는 블랙홀의 중력장은 힘을 잃을 것이다. 차곡차곡 쌓여서 어느 순간의 임계점을 넘어설 정도의 참여자가 모이고 나면, 블랙홀은 그 위력을 잃고 사라져버릴 것이라 기대하고 희망한다. 그런 준비가 먼저 된 다음에야 비로소 새로운 교육 시스템이 아이와 부모 모두, 더 나아가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게 실제적인 작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현)
“삶이 성장의 과정이라면 공부는 성장하는 삶을 위한 도구여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공부는 삶을 식민화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이런 공부를 그만두자는 것입니다. 대신 공부의 자리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당대의 문제를 파악하고 헤쳐 나가는 삶의 지혜, 기술을 익히는 과정으로서의 공부 말입니다. 이것은 청소년들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어른들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무능력하기는 어른들도 매한가지입니다. 그게 공부라는 맥락에서 보면 어른과 청소년 모두가 처한 ‘동시대성’이겠죠.
바로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을 우리와 더불어 당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동시대인으로서 이 난국의 시대를 헤쳐갈 수 있는 삶의 기술을 배워나가는 성장의 도구로서의 공부를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만큼이나 어른들에게도, 어른들에게 만큼이나 ‘아이’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청소년들을 문제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부와 관련한, 우리 모두를 문제화해야 합니다.”(엄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