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26]
김옥균(金玉均, 1851-1894)②
세계정세에 밝았던 김옥균은 기독교 사상을 민족에게 심어줄 가치가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급진개화파에 속했던 그는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윤치호 등과 함께 근대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정부가 기독교식 교육과 의료를 받아들이도록 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반면에 위정척사파(衞正斥邪波)는 우리 문화를 지키고 서양 문물을 배척하자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사교(邪敎)라 여기고 예수교를 믿으면 금수와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위정척사파가 나중에 항일운동의 동력이 되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기독교의 유입을 극도로 막고자 했던 것은 유교적 전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서양의 종교나 사상을 나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흥선대원군의 통상거부 정책을 찬성하는 등 개화파와는 정반대 편에 섰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도 김옥균은 서울 북촌을 중심으로 서학 즉 기독교 사상을 펼쳐나가고자 했습니다. 그가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방문했을 때 그곳에 있던 로버트 매클레이(Robert S. Maclay) 선교사 부부를 만나 교류했고, 1884년 6월 조선 선교를 위해 입국한 매클레이를 다시 만났습니다. 매클레이는 기독교 학교와 병원 설립안을 김옥균에게 전했고, 그는 고종을 설득해서 선교 요청이 승인되도록 했습니다. 7월 3일, 비록 학교와 병원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선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기독교 선교가 시작되도록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급진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때 자상을 당한 민영익을 알렌 선교사(1858-1932)가 치료하면서 고종이 첫 근대식 병원 제중원 원장을 알렌에게 맡겼고, 이로써 의료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참고>
전정희 『예수로 산 한국의 인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