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석태 (7~8) ‘편한 자리’보다 ‘남을 살리는 자리’로 예비하신 하나님
[역경의 열매] 김석태 (7) ‘편한 자리’보다 ‘남을 살리는 자리’로 예비하신 하나님
김용현 2026. 2. 6. 03:04
‘광야 신학교’ 이끄는 임 목사 설교로
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 근근이 버텨
부패한 행정관들 피해 병원 근무 지원
며칠 뒤 폭동으로 전 동료들 거의 사망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미군 군목 옥호열 선교사가 포로들을 대상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제공
1951년 2월, 거제도 제81포로수용소. 17만명의 포로가 뒤엉킨 그곳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밤이면 ‘해방대(친공 포로)’가 죽창을 들고 설치며 인민재판을 열었다. 살기가 감도는 그곳에서 유일한 숨구멍은 임한상 목사 등이 이끄는 천막 교회였다.
우리는 그곳을 ‘광야 신학교’라 불렀다. 번듯한 건물도, 종이도 없었다. 버려진 시멘트 포대 종이나 담뱃갑 은박지를 펴서 성경 구절을 받아 적었다. 인천 형무소 시체실에서 내가 업어왔던 임 목사는 그곳에서 ‘포로들의 영적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뼈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 강단에 서서 “이 죽음의 골짜기에도 하나님은 계신다”고 외쳤다.
그 사역의 뒤에는 미군 군목 옥호열(Harold Voelkel)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수용소를 제집 드나들듯 하며 우리에게 찬송가를 가르치고 어렵게 구한 신학 서적들을 공급해 주었다. 옥 선교사는 포로들을 적군이 아닌 형제로 대했다. 그의 헌신 덕분에 50년 성탄절에는 눈보라가 치는 허허벌판에서 4000명의 포로가 모여 눈물의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나는 그 덕분에 말씀을 얻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당시 나는 수용소 내 급식 담당관을 맡고 있었다. 배고픈 시절, 음식을 나누는 권한은 컸지만 동시에 부패의 온상이기도 했다. 포로 간부들은 힘없는 자들의 식량을 빼돌렸고, 나는 그 죄악의 사슬을 두고 보기 힘들어 괴로워했다. “하나님, 저를 이 죄짓는 자리에서 옮겨주십시오.” 내 고민을 눈치챈 임 목사가 어느 날 넌지시 길을 열어주었다. “김 선생, 미 64야전병원에서 위생병을 모집한다네. 자네가 가면 딱 맞을 걸세.”
편한 자리를 버리고 피고름 만지는 병원 일을 택하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스승의 권유를 하나님의 응답이라 믿고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렇게 행정실을 떠나 미 64야전병원으로 소속을 옮겼다.
야전병원은 총칼 대신 붕대를 드는 곳이었다. 옥 선교사의 지도 아래, 우리는 친공 포로들까지 치료해야 했다. 어제까지 “반동분자”라며 죽창을 겨누던 자들의 찢어진 살을 꿰매고 고름을 짰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몸으로 배운 현장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좌우 이념을 넘어 생명을 살리는 법을 배웠다.
병원으로 옮긴 지 딱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내가 떠나온 81수용소 행정실에서 피비린내 나는 폭동이 터졌다. 소식은 참혹했다. 공산 포로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불과 한 달 전까지 나와 함께 근무했던 행정실 동료 17명 중 16명이 살해당했다. 그들은 죽창과 몽둥이에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됐다.
사망자 명단을 확인하며 나는 숨이 턱 막혀왔다. 만약 내가 편한 급식 담당관 일에 안주했다면, 혹은 원수를 치료하기 싫어 수용소에 남았다면, 내 이름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임 목사를 통해 나를 미리 빼내셨고 ‘남을 살리는 자리’로 옮기심으로써 내 목숨을 건져주셨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뒤로, 먼저 간 동료들에 대한 무거운 부채감이 또 한 번 밀려왔다.
정리=김용현 기자 face@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석태 (8) “환자만 두고 갈 수 없다” 자유의 문 앞에서 돌린 발길
김용현 2026. 2. 9. 03:06
반공포로 석방 조치로 포로들 자유 찾아
떠났지만 중환자들만 두고 나갈 수 없어
수용소 지켜… 휴전협정 후 판문점 이송
북측의 설득·회유 견디고 90일 만에 석방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풀려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들이 1953년 6월 18일 태극기와 유엔기를 앞세우고 환호하고 있다. 거제시 제공
거제 포로수용소 제64야전병원으로 보직을 옮긴 뒤 몸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평안을 찾았다. 낮에는 썩어가는 환부를 소독하고, 밤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들의 손을 잡아주는 일에 매진했다. 눈앞에 실려 온 사람을 하나라도 더 살려내는 일이 내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인 1953년 6월, 휴전 회담이 포로 송환 문제로 난항을 겪자 수용소 내부는 다시 술렁거렸다.
반공포로들 사이에서는 “이대로 있다간 북으로 끌려간다”는 공포가 퍼져나갔다. 불안감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입원하게 된 인민군 장교 김 소위를 향한 적개심으로 번졌다.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던 그가 “죽더라도 고향의 부모님을 뵙겠다”며 끝내 북송을 택했기 때문이다. 격분한 반공포로들은 “배신자를 살려 보낼 수 없다”며 그를 노끈으로 목 졸라 죽이려는 끔찍한 모의까지 꾸몄다.
그때마다 기독교인 군의관이 나섰다. 그는 흥분한 포로들을 가로막으며 “신앙인인 우리가 저항 못 하는 환자를 해쳐서야 되겠느냐”고 호소했다. 그의 신앙 고백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여기고 나 역시 그를 거들며 김 소위 곁을 지켰다. 눈앞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밤을 새웠다.
6월 18일 새벽 2시, 억수같은 빗소리 사이로 함성이 터졌다. 이승만 대통령의 조치로 ‘반공포로 석방’이 단행된 것이다. 철조망이 뚫렸다는 소식에 병원 막사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김 선생! 문 열렸다! 빨리 짐 싸!” 동료들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환자복을 입은 포로들도 성한 다리를 절뚝이며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따라나서기만 하면 자유였고, 지긋지긋한 수용소 생활도 끝이었다. 하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중환자들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목숨들이었다. “누워있는 환자들은 못 나가는데, 간호하던 내가 어떻게 혼자 나가겠나.”
탈출하지 못하고 남은 이들은 휴전협정 체결 후, 판문점 인근 중립지대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90일간의 설득 기간을 견뎌야 했다. 북측 포로 설득관들이 매일 찾아와 “공화국으로 돌아가자”며 회유하는, 피 말리는 심리전의 시간이었다. 반공포로들의 저항은 처절했다. 북측 설득관이 마이크를 잡고 선전 방송을 시작하면, 포로들은 받은 양철 식기를 숟가락으로 미친 듯이 두드렸다. “챙, 챙, 챙, 챙!” 수천명이 동시에 두드리는 쇳소리에 설득관의 목소리는 완전히 묻혀버렸다. 어떤 이들은 설득관이 악수를 청하면 손에 숨겨둔 면도칼로 상처를 내며 저항하기도 했다.
나는 묵묵히 달력의 날짜를 지워나갔다. 마침내 54년 1월 20일, 석방이 결정됐다. 중립지대를 벗어나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면서 내게는 또 다른 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징집 대상자들은 자동으로 국군에 편입된 것이다. 나는 한 달간의 특별 휴가를 받아 처음으로 서울 구경도 하고 자유를 만끽했다. 이후 훈련소로 들어가 정식으로 군번을 받고 강원도 춘천의 부대로 배치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이라도 하신 듯 그 춘천에서, 구세군과 처음 만나게 된다.
정리=김용현 기자 face@kmib.co.kr
https://v.daum.net/v/20260209030636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