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주말 잘보내셨어요?
계속해서 마음건강을 위한 글들을 읽고 있습니다.
함께 나눌 얘기가 많을 것 같아요.
내일 수요일(10월 5일 오전10: 30-12:30)에 뵐게요.
문제해결 방식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문은희_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 소장, 심리학박사, 계간 「니」 편집장
<단단한 건 건강한 게 아니다>
마음의 건강을 말할 때마다 의과대학 다닐 적 해부학 교수님께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소개하곤 한다. 교수님은 우리에게 “우리 몸 가운데 제일 단단한 것이 무엇인가?”하고 물으셨다. 대답은 ‘이빨’이었다. “우리 몸 가운데 제일 유연한 것이 무엇인가?” 대답은 ‘혀’였다. 단단한 이는 썩기도 하고 늙으면 빠지기도 하지만 혀가 빠졌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단단한 것이 강해 보이지만 유연한 것을 당해낼 수 없다. 마음의 건강도 고집스럽고 경직된 것이 건강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한 것이 건강의 증표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유난히, 경직되고 곧은 것을 미덕으로 강조한다. 사육신이 그렇고, 춘향이 이야기도 한몫을 한다. 정치가 가운데도 대쪽 같은 이를 칭송한다. 그러나 바람이 심했던 큰 추위에 대나무가 흔들리면서도 나름으로 튼튼하게 뿌리에 붙어있고, 쉬 부러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
대나무는 그저 꼿꼿이 서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따라 몸을 유연하게 흔들리도록 놔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유연성이란 사물을 볼 때 한 가지로만 보려 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어떤 문제상황에 놓여도 길이 하나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까지 자기가 보고 판단했던 것과는 달리 볼 수 있고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화풍(畵風)이 시작되는 것도 똑같은 사물을 그림으로, 조각으로 달리 표현하는 안목 때문에 가능했다. 이제 와서 우리 눈에 보기좋게 된 인상파, 입체파, 점묘파도 처음에는 보는 이들에게 생소했던 작품을 창조해낸 데서 시작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음악들도 처음에는 이상한 음악이라 외면당하기도 했었다.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창조해내는 예술인들은 그만치 유연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다른 나의 인생, 평균치, 다수결로 사는 게 아니다>
그러면 예술활동하는 사람들, 창의력으로 사는 이들에게만 유연성이 필요할까? 보통사람인 우리에게는 유연성, 창의성이 아무 상관없는 것일까? 지난 번 글에서 말했듯 우리 각자는 다 남다른 특징을 하나님께 받고 태어났다. 그러니까 우리 각 사람이 보는 시각은 다른 사람의 시각과 다를 수밖에 없다. 각 사람이 하는 일은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이 당연하다. 그뿐인가.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단 하나뿐인 사람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한다. 그러기에 부부는 삶의 예술을 함께 창작하는 짝이다. 부모님과도 다르고 이웃의 부부와도 다른, 자기들만의 느낌과 생각과 방식으로 자기들만의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가는 예술가로 짝지어진 것이다.
부모와 자녀 관계, 며느리와 시댁식구들 관계, 사위와 처가식구들 사이, 친구 사이, 직장동료들과의 관계 모두 경직되지 않은 유연한 안목으로 볼 때 남다른 관계들로 짝지어진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평균치도 없고, 다수결로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남들은 어떻게 처리하나요?”하는 물음도 전혀 의미가 없다. 고정개념을 가지지 않는 것, 언제나 자신의 느낌과 생각으로 새로 출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남편은 돈을 많이 벌어와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고정개념이다. 아이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것도 고정개념이다. 모든 남성이 이 사회에서 돈을 잘 벌게 태어나지 않았다. 모든 아이들이 우리나라 교육제도에서 학교성적을 잘 올리도록 태어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여성들이 집안살림을 잘 하게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특별히 우리 사회같이 일률의 길을 가도록 되어있는 틀 속에서 유연성을 살리며 지내기가 심히 어렵다. 이 일률성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다. 오히려 유교의 가르침에 더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유교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같은 모델을 따라 성장하고 성숙해간다고 본다. 스무살에 이룰 모형, 서른살에 도달해야 할 모습, 마흔·쉰·예순에 이뤄야 할 경지가 있다고 여긴다. 기독교인들은 다르다.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인물들이 각기 다르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한몫을 하게 놔두는 것이다.
늙은 나이까지 믿음을 잃지 않은 아브라함, 성격이 나쁜 야곱, 매력 없는 레아, 형제들의 구박을 받은 요셉, 말더듬는 모세, 부도덕한 일을 하는 라합, 욕정을 이기지 못한 다윗, 우울한 예레미야, 망설임의 요나, 괴짜 (세례)요한, 천방지축의 베드로, 걱정 많은 마르다와 자기중심의 마리아, 결혼에 문제가 있는 사마리아 여인, 따돌림 당하는 삭개오, 의심 많은 도마, 건강에 문제가 있는 바울…. 하나님께서는 다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들을 쓰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 세상에서 이루신다는 것을 성경인물들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성서시대에서만 그랬을까? 오늘을 사는 우리도 다 다른 모습으로 지음받고 태어나서 그 모습을 살리며 살아가도록 계획하신 것이 아닌가?
나는 아들 둘을 길렀다. 연년생인 그 두 아이는 전혀 다른 외모를 가졌을 뿐 아니라 성격도 아주 다르다. 얼굴이 긴 큰아이와 동그란 둘째를 두고 누가 더 아름답다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세상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기독교인들이라면서도 세상이 좋다고 여기는 방식에 맞추어 (경직되게) 살려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을 그 경직된 틀에 맞추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반성한다. 세상의 뜻을 따라 경직되게 살면서 각자 달리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펼치지 않는다면 ‘예수 사람’이라 할 수 없다. 하나님께로부터 각자가 받은 선물은, 열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 선물상자를 열어서 쓰지 않는다면 선물의 가치를 살릴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의 생각, 지식은 완전하지 않다>
기독여성들이 자기특징을 살리는 활동을 하려 할 때 교회가 오히려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바리새인을 비판하면서도 바리새인보다 더 경직되게 살게 만들려 든다. 기독교인 가정에서도 부모들이 아이의 특징을 보려 하지 않고 세상이 주도하는 것을 따라 억지로 그렇게 만들려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세상을 믿는 꼴인 셈이다. 얼굴이 동그란 아이를 깎아서 길게 만든다면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고 따르지 않는 것이다. 보이는 얼굴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을 마구 바꾸려 드는 것은 더더욱 심한 폭행이다. 착한 아이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쳐 믿게 한다. 아이들에게 착한 아이는 어떤 아이냐 물으니 “엄마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아이”라고 대답한다. 엄마가 한 말이 틀렸을 때도 말을 잘 들어야 할 것인가? 아이 스스로 엄마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유연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 아닌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과 지식이란 완전한 것이 아니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좁은 ‘굴 안목(tunnel vision)’으로 사물을 보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다른 견해를 수용할 수 있고 이해하려 하는 자세를 가지려 한다. 가정, 이웃, 교회에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으로 존중하며 살아가면 더욱 다양하고 풍요로운 삶의 결을 즐길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 어느 한 시점에서 가지고 있는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처사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 곁에서 마지막을 함께한 두 강도는 경직됨과 유연함의 표본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라도 자기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구원받는다. 막강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말을 들어 마음을 바꾸시곤 하셨는데(창 18: 17∼33; 막 7: 24∼30), 우리가 뭐라고 감히 고집을 피우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