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진정한 낙원… 궁전도시 스플리트, 성곽도시 두브로브니크
발칸반도의 땅 크로아티아에서는 아드리아해의 순풍이 해변을 푸르게 덧칠한다.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인근의 트로기르 마을 풍경.
한적한 열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여인이 엽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엽서 사진에는 푸른 바다와 맞닿은 주홍빛 성곽 마을이 선명한 글씨와 함께 담겨 있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크로아티아(Croatia)로 향하는 열차는 벌써 16시간째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다.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해의 순풍이 닿는 발칸반도의 땅이다. 중·동부 유럽을 여행하면서 고성과 교회에 슬그머니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곳은 막연한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푸른 바다와 그보다 더 짙푸른 하늘. 세르비아계의 피가 흐르는 늘씬하고 도드라진 외모의 미녀들…. 하지만 그 크로아티아를 막연히 낭만적인 단어로만 치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990년대 초반 유고 내전을 치렀고 그 상흔을 씻어내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크로아티아
스플리트까지는 꼬박 16시간 거리다. 오후 3시에 출발한 열차는 아침 7시에 도착한다. 여섯 명의 승객이 서로 마주 보고 앉은 크로아티아행 열차 객실은 낡고 투박했다. 백발의 노부부는 꾸벅꾸벅 졸고 있고 콧수염이 난 청년은 오히려 덩치 큰 동양인을 경계라도 하는 듯 힐끔힐끔 곁눈질을 했다. 한나절을 달려 비몽사몽간에 도착한 스플리트에서는 플랫폼의 뿌연 연기를 밀어내고 상쾌한 새벽 공기가 폐 속 깊이 파고들었다.
전쟁의 상흔이 서린 도시 스플리트
역 앞에는 ‘sobe(방)’라는 팻말을 들고 나온 아줌마·아저씨 서너 명이 서성거렸다. 호객꾼들은 그리 집요하지는 않다. 방을 이미 예약했다고 말하자 새벽 어둠 속으로 슬며시 사라졌다. 미처 방을 못 구한 사람들은 버스터미널과 기차역을 아우른 카페테리아에서 동이 틀 때까지 진한 커피를 홀짝거리며 기다렸다.
크로아티아에서 둘째로 큰 도시인 스플리트는 관광지와 번화가가 잘 어우러진 곳이다. 구시가인 그라드 지역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는데 이곳은 기원전 3세기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은퇴한 뒤 머물렀던 궁전이다. 지금은 궁전 안의 200여 개 건물이 상점·카페 등으로 활용된다. 황제의 영묘로 사용됐던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에 오르면 이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궁전은 동서로 215m, 남북으로 181m에 이르는 아담한 규모로 황제는 이집트에서 스핑크스를 옮겨올 정도로 궁전 꾸미기에 열중했다.
화려한 주홍빛 지붕들은 크로아티아 구도시의 상징처럼 굳어졌다.
스플리트 외곽 마을의 전경.
푸른 바다를 드리운 발칸반도의 휴양지는 긴 질곡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문화·언어가 다른 민족과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으로 통합됐다. 1990년대에 5년 동안이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전쟁과 그 상흔은 도시 여기저기에 쌓여 있다. 보듬고 가려도 북적대는 도시 뒷골목에는 그때의 슬픈 기억들이 남아 있었다.
새벽이면 구시가지 동문 초입에 대규모의 새벽 장터가 문을 연다. 따사로운 지중해 연안에서 생산된 채소며 과일이 지천으로 넘쳐난다. 궁전 골목에 들어서자 파란 하늘과 창가에 널린 빨래, 파스텔톤의 담벽, 그리고 자동차들이 묘한 앙상블을 만들어냈다.
국민광장 거리는 궁전 골목들과는 달리 현대식 예술작품들과 다양한 럭셔리 숍이 늘어서 있다. 치즈 빛으로 채색된 옛길과 도시의 미녀들이 활보하는 광장은 불과 5분 거리다. 해변을 바라보며 늘어선 노천 바에 앉아 자정이 넘도록 관광객과
이곳 젊은 청춘들이 뒤엉켜 맥주를 마셨다.
스플리트에서 성곽도시 두브로브니크로 향하는 버스는 아드리아 해변의 아슬아슬한 절벽 위를 달렸다. 지중해풍의 낯선 마을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자맥질을 한다. 가는 동안 보스니아 국경을 가로질렀고, 한 이탈리아 아줌마는 자리를 옮겨가며 창밖에 펼쳐진 해안과 바람을 카메라에 담아내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구불구불한 2차선 E65 도로는 뛰어난 풍광 때문에 유럽에서도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힌다고 한다.
Tip 크로아티아
여행 메모
가는 길
한국에서 직항편이 없어 오스트리아 빈이나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한다. 가끔 전세기가 뜨기도 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크로아티아 스플리트까지는 열차로 16시간이 걸린다. 비자는 필요 없다. 스플리트에서 두브로브니크까지는 버스로 4시간 30분이 걸린다. 이탈리아 바리에서 자드로리냐 페리(www.jadrolinija.hr)를 타고 두브로브니크에 닿을 수도 있다. 10시간 소요.
동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크로아티아 여행 때는 버스가 주요 교통수단이다. 버스 여행은 스플리트가 기점. 인근
관광지로 향하는 대형버스들이 이곳에서 매시간 출발하며 독일·오스트리아에서 오는 장거리 버스도 스플리트를 경유한다. 스플리트에서 머물 때는 또 다른 세계문화유산인 트로기르 섬을 다녀오면 좋다. 두브로브니크의 버스는 자정 넘게까지 운행된다.
음식
해변 근처에는 싱싱한 해산물 요리가 나오는 레스토랑이 여럿 있다. 이탈리아 음식이 많이 들어와 있어 피자·파스타 식당도 쉽게 만날 수 있다. 구시가지 내의 레스토랑들은 성수기인 5~9월에 음식 가격이 꽤 비싼 편이다. 구시가 안에는 이른 아침에 주민을 위한 시장이 열려 신선한 과일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두브로브니크 프로토(Proto)는 1866년 개업한 100년 전통의 해산물 전문 레스토랑이다.
숙소
호텔보다는 ‘sobe’라는 민박집에서 묵는 게 운치 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sobe’라는 종이를 든 민박집 호객꾼들을 만날 수 있는데 대부분 한 사람이 인근 여러 집의 민박을 대행해주는 경우가 많다. 인포메이션센터에서 안내해주는 민박집들이 대체로 관광지에서 가깝고 묵을 만하다. 비수기 때 방문하면 3만~4만원이면 혼자 독방을 쓸 수 있다. 크로아티아 여행 홈페이지(www.croatia.hr)를 통해서도 다양한 숙박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민박집 주인 딸의 이름은 마리안느였다. 첫 만남에 맥주 한 병을 내밀던 그녀는 친절했다. 2층방 침대에 누우면 창밖으로 라파드 해변의 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베란다에 걸려 있는 흰 빨래들. 새벽이면 이름 모를 새소리와 종소리에 잠을 깨고 창 너머로 실려오는 아드리아해의 바람은 코끝을 기분 좋게 간지럽힌다. 3인용 방을 호사스럽게 홀로 이용했던 포만감은 어느덧 성곽으로 이뤄진 중세도시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버나드 쇼가 ‘진정한 낙원’으로 칭송했고 유럽의 돈 있는 자들이 ‘10일간의 은둔처’로 여겼던 곳이 바로 두브로브니크였다. 그 고고함을 지켜내기 위해 유고 내전 당시 유럽의 지성인들이 나섰다. 폭격을 막으려고 성곽 앞에 배를 띄우고 인간방어벽을 만들기도 했다. 아드리아해의 오래된 도시는 오던 길에 만난 버스 차장 노인보다 더 주름이 깊은 중세 건물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
두브로브니크의 성벽 위를 거닐다
두브로브니크에 발을 디딘 여행객들은 구시가를 둘러보려고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성안에는 숱한 유적과 개성 넘치는 상점 외에도 크로아티아 최초의 약국과 양로원 등 무르익은 삶이 길목마다 배어 있다.
미로 같은 골목에 들어서면 이발소와 정육점이 나오고 성벽 사이로 난 좁은 문을 통과하자 바위에 기대 반라의 차림으로 맥주병을 끼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호사스러운 일광욕은 따뜻한 햇살 속에서 10월 말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스플리트의
매력이 구시가지 외곽의 노천 바에서 더욱 은은했다면 두브로브니크에서는 모든 삶이 성벽 안에 공존하는 듯하다. 성벽 입구인 필레 게이트를 지나면 석회암 바닥으로 채워진 중앙로가 나오고, 해 질 무렵이면 골목 모퉁이의 레스토랑들에서 잔잔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성안의 사람들은 그 풍경과 상점들에 기대 사는 듯하다.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에서는 독특한 걷기 여행이 인기였다. 유럽 부호들의 은둔처였던 외딴 도시가 실제로 알려진 것도 이 특별한 체험 때문이었다. 13~16세기에 지어진 성벽은 보존 상태가 완벽에 가깝다. 성벽의 길이가 무려 2km에 높이가 25m, 성벽 두께가 넓은 곳은 6m에 달했다. 절벽에 세워진 성 밑으로는 바닷물이 통하는 해자가 연결돼 멀리서 보면 마치 성이 섬처럼 보인다고 한다.
성벽 위에 오르면 붉은 지붕으로 채색된 구시가지의 속살과 아드리아해가 대비를 이룬다. 크로아티아행 열차에서 그 여인이 건네줬던 붉고 푸른 사진 속 풍경이 내 눈앞에 그대로 펼쳐졌다. 단지 이 성벽에 오르기 위해 수천km를 달려와 두브로브니크의 품에 안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시의 수호성인인 성 블라이세를 기념하는 성당과 스폰자 궁전, 렉터 궁전 등도 이방인들을 반겼다. 베네치아로부터 두브로브니크를 지켜낸 신부 블라이세를 기념하기 위해 성안에서는 매년 축제가 열렸고, 스폰자
궁전에는 이곳 천 년의 역사와 유고 내전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그 단단한 유적들을 바라보며 노천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구항구로 나서면 유람선들이 잔잔한 바다 위로 밀려나갔다. 유람선을 타고 아드리아해에서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성곽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색다른 체험이었다.
낮과 밤의 경계가 바뀔 때마다 고풍스러운 카페테리아에서 차를 마셨고, 풍만한 소파에 기대 맥주잔을 기울였으며, 허기가 지면 해산물 요리로 배를 채웠다. 돈 있는 자들이
10일간 은둔하며 만끽했을 호사스러움이 몸속으로부터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중세 성곽도시의 어디를 거닐어도 들뜬 오감을 쉬게 할 수가 없다. 성안의 붉은 지붕, 푸른 바다가 여인들의 수줍은 미소와 뒤엉켜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월간중앙 201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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