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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8:10-22]
“광야에서 만난 사다리”
여러분들은 꿈을 자주 꾸시나요?
어떤 꿈을 좋아하십니까?
아무래도 돼지꿈 아닐까요?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흡연자들은 금연을 할 때
흡연하는 꿈을 꾼다고 해요.
그만큼 현실에서 못하는 것을 이루는 꿈인 거죠.
어렸을 때 떨어지는 꿈을 꾸면 키가 큰다고 했죠.
저는 그런 꿈을 많이 못 꾼 것 같습니다.
대신 이런 꿈을 꿨습니다.
군대 전역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다시 부대에 들어가는 꿈이었어요.
아침 기상 나팔 소리가
꿈에서 현실처럼 들리더군요.
깨고 나서 현실이 아닌 걸 알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성경에서도 꿈이 자주 등장합니다.
‘꿈’하면 성경인물 중에 누가 떠오르시나요?
아무래도 요셉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요셉이 꾼 꿈도 대단하지만,
오늘은 그의 아버지인
야곱의 꿈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루기 앞서
이전 상황을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야곱은 쌍둥이 형이 있었어요.
그의 이름은 에서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성향이 완전히 달랐어요.
에서는 밖에서 사냥을 좋아하는
상남자 스타일이었다면,
야곱은 집에서 엄마 뒤를 따라다니는
집돌이 스타일이었어요.
엄마 입장에서는 항상 자기를 돕는 야곱을
예뻐할 수밖에 없었죠.
어느 날 아버지 이삭이 에서를 부릅니다.
“네가 나를 위해 사냥하여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오면
내가 너를 축복할 것이다.”
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텐트를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둘의 대화를
엄마 리브가가 듣고 있었어요.
그리곤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불러다가
형으로 분장해서 아버지께 특식을
가져가라고 했어요.
그래야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야곱은 아버지께 들킬 수도 있다고 했지만
엄마는 그를 형처럼 꾸며줬어요.
그리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남편 앞으로
야곱을 데려다 주었지요.
그렇게 야곱은 형 에서를 대신하여
장자의 축복을 받았어요.
한번 축복해주면 취소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얼마 뒤 형 에서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요리를 대접했어요.
당연히 아버지는 깜짝 놀랐고,
에서도 상황이 이상한 것을 알았어요.
“야곱 이 자식! 가만 안 둬!”
야곱을 향한 에서의 분노는 뜨겁게 끓어오르는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야곱은 에서를 피해
부모님이 알려주신 삼촌 집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하란이었어요.
야곱이 살던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의 거리는
대략 900km나 되었죠.
쉬지 않고 계속 걸어도 한 달이 넘게 걸리는
먼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부모님과 정든 고향을 떠나
멀고 먼 광야로 떠나는 야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야곱이라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저는 처음엔 정신이 없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과
따갑게 불어오는 모래 바람을 맞으며
정신을 차렸을 것 같습니다.
그리곤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을 것 같아요.
야곱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광야 생활을
홀로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그때 엄마 말만 듣지 말았었어도
이러지 않았을텐데.’
라며 말입니다.
그렇게 야곱은 한 곳에 이르렀을 때,
햇빛이 황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태양이 반쯤 감은 눈처럼 내려 앉았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흑단 같은 어둠이 하늘 덮었고,
그 사이에 하얀 별들이 반짝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원래 포춘 선정 500대 부자에 드는
대단한 집안 도련님이었어요.
그의 집엔 항상 먹을 것이 가득했고,
따뜻한 양털 이불도 있었죠.
집 밖을 지키는 삼촌 같은 경비원들도 많았어요.
하루 종일 집안 일을 하다가 더러워진 옷도
금세 빨아줄 이모님들도 계셨죠.
그런데 지금 야곱에겐
땀으로 찌든 옷이 이불이었고,
차갑고 딱딱한 돌이 베개일 뿐이었어요.
이런 생활이 3일이나 되었지만
적응할 수 없는 환경이었죠.
오늘도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광야 바람에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저 멀리 동물이 우는 소리만 들리는
이곳은 광야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인생을 살다가 광야와 같은 현실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엔 내가 잘못해서
그 길에 갈때도 있어요.
아니면 환경이 바뀌면서
광야처럼 느껴질 때도 있죠.
심지어 남이 시킨 일을 했다가
문제가 생겨서 도망치듯
광야로 떠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에서 건 광야는
익숙했던 것들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광야에 가면 익숙했던 사람, 익숙했던 환경,
익숙했던 감정과 완전히 단절되어 버리죠.
단절은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잘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
‘나에게 길을 알려줄 사람은 없나?’
이런 광야에서 우리는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광야란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거든요.
그러니 당연히 힘들죠.
예전에 봤던 드라마 중에
<응답하라 1988>이 있습니다.
1988년도 대한민국 가정을 보여주는
재미난 드라마였습니다.
여기 보면 덕선이가 나오는데,
그녀는 삼 남매 중 둘째 딸이었어요.
언니는 서울대 다니는
똑똑하고 완벽한 맏딸이었고,
동생은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하는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중간에 낀 덕선이는
생일도 언니와 같이 지내야했고,
맛있는 반찬도 양보해야만 했습니다.
항상 서운하고 외로웠지만
둘째라 참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생일 파티를 따로 해달라는
덕선이의 말을 부모님이 무시하자,
화가 나서 집을 뛰쳐 나갑니다.
나중에 아빠 성동일이
덕선이를 찾아가서 이런 말을 하죠.
“딸 미안혀. 몰라서 그랬어. 몰라서.
우리 자식들을
어떻게 키워하는지 몰라서 그랬어.
아빠도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아니잖아.”
우리의 고백이 이와 같지 않습니까?
모두가 인생 1회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며
변화무쌍한 광야처럼 느낍니다.
특히 야곱처럼 모든 것이 단절되었을 때는
극심한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처럼 모든 것이 단절된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사는 우리가
오늘 말씀 속에서 기억할 것이 무엇일까요?
먼저는 하나님의 적극성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야곱은 꿈을 꿉니다.
땅에서부터 하늘 끝까지 이어진
거대한 사다리가 등장하죠.
이 사다리를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끝에는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우리 본문 13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야곱은 잠에 들었지만
그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고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적극성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찾아오세요.
우리가 가장 힘들고 외롭고 어렵다고 느끼는 그때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씀은 이겁니다.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서서’란 말은 히브리어로 ‘나차브’라고 해요.
‘똑바로 서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죠.
하나님은 야곱의 꿈에 나타나실 뿐만 아니라
‘똑바로 서서’ 그를 응원하고 계셨습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사도행전 7장에도 등장합니다.
스데반 집사가 예수를 전하다가 붙잡혀
심문을 당합니다.
모두가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며 분노했습니다.
스데반은 세상과 단절되어
철저히 광야 한 가운데 놓였죠.
이 상황에 놀라운 광경이
스데반 눈 앞에 펼쳐집니다.
사도행전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여기 보면 스데반이 보았던 환상 속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서’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의 아픔과 고통 속에
주님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것 아닙니까?
‘스데반, 믿음 잃지마! 내가 널 지켜보고 있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광야에 놓인 것처럼
단절되어 있습니까?
자녀와 아무리 대화를 하려고 해도 답답하고,
부부 사이는 점점 서먹해지고,
회사에서 조차 아무도 내 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시나요?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편이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서서 우리 삶에 찾아오시는 분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 본문 13-1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28:13, 14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소망을 잃어버린 야곱에게
약속하십니다.
약속의 주제는 ‘땅’, ‘자손’입니다.
지금 야곱은 도망자입니다.
땅은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된 베개도 없었어요.
그리고 그는 지금 77세였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총각이었어요.
그런데 ‘자손이 티끌처럼 된다’는
약속을 하시다뇨?
그런데 이 약속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나요?
맞습니다.
이삭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같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창세기 13:14-16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받을 때도
이미 75세가 넘은 시점이었어요.
나이도 많이 먹었고,
사랑하는 조카 롯도 떠난 상태였죠.
모든 것이 단절된 것 같은 그때에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하나님의 완벽한 때에 응답되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보기엔
전혀 답이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뤄집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를 기억하십시오.
다른 10명의 정탐꾼은 모두 ‘불가능’을 외치며
불평했습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 땅은 우리의 밥이라!’고 외쳤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약속을 이뤄가십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바로 이런 관점에서 구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기둥이 되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시편 81:10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우리가 믿음의 입을 크게 열 때
하나님께서 채우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실지
기대됩니다.
얼마 전 수요 예배를 마치고 담임목사님께서
신도시 개발 예정지역을 가자고 하셨습니다.
차를 가지고 그 주변을 돌면서 땅밟기 기도를 했죠.
그리고 주변이 잘 보이는 지역에서 내려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그때 같이 기도하면서 사모님을 통해
주님께서 주셨던
우리 교회 비전을 다시 떠올리게 하셨습니다.
바로 1270의 비전입니다.
전 세계에 12개의 교회를 세우고
70명의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것이죠.
담임 목사님께서 개척 초기부터
쉬지 않고 부르짖어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췌장암으로 투병하시면서
잠시 잊으셨다고 해요.
그랬는데 그날 기도 중에
이 비전을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새벽 담임목사님께 주셨던
또 하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58장 11절입니다.
이사야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물 댄 동산처럼
세워주실 줄 믿읍시다.
무엇보다 믿음의 입을 크게 열어
채워주심을 경험합시다.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이 있어요.
본문 15절입니다.
창세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에게 적극적으로 나타나시고
약속을 주신 하나님은
매우 중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동행’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만큼
외로운 야곱에겐 위로가 되는 말씀이 없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는 어떤가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고 사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 약속은 여전히 변함없습니다.
때로 ‘내 인생 실패했어’라며 자책이 들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하시죠.
그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게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얼마 전 <유퀴즈 온더 블럭>이라는 프로그램에
히딩크 감독이 나왔습니다.
그가 처음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
이런 별명이 있었죠.
“오대영 감독”
유럽 강호들과 상대하면서
계속 5대0으로 지니까 이런 별명이 생긴 겁니다.
그렇게 계속 지고 있을 때
고참이었던 황선홍 선수가
두려운 마음으로 히딩크 감독에게 물었답니다.
“이대로 16강이 가능합니까?
솔직히 첫 승은 가능합니까?”
그러자 히딩크가 이렇게 답했답니다.
“이건 월드컵으로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마라.”
결국 히딩크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대한민국을 월드컵 4강에 올려놓았죠.
저는 이 영상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도 지금은 빚어지고 있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실패하고 넘어지는 건 당연한 거죠.
주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회복될 것입니다.
야곱도 똑같지 않습니까?
그는 절대 실패한 인생이 아니었어요.
하나님께서 그걸 보증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망할 수 없습니다.
야곱은 이 꿈을 꾸고 난 뒤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본문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야곱은 사닥다리를 만난 자리에
돌로 기둥을 세웠어요.
그리고 기름을 부었죠.
기름은 먼 길을 떠나는 자에게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걸 주님께 드리고 그 자리를
하나님의 집인 “벧엘”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는 이전까지 들었던 하나님을
이제 진짜 만났습니다.
이 만남이 정말 중요해요.
이 만남이 있기까지 ‘사닥다리’가 있었던 걸
기억하십시오.
야곱은 사다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보길 원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곳마다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이 찬양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찬송가 440장입니다.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어디든지 예수나를 이끌면
어디든지 예수함께 가려네
예수함께 아니가면 낙없고
예수님과 동행하면 겁없네
어디를 가든지 겁낼것 없네
어디든지 예수함께 가려네
날마다 예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에게
두려움이 없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