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5468610
한국전쟁 당시 교통사고로 불행이 사망한 월튼 워커의 후임으로 제8군을 지휘했으며 유엔군 총사령관까지 하였던 제임스 밴플리트는 한국군에 대한 대대적 개편으로 국군의 전투력을 끌어올리며 전쟁 수행에 큰 공을 세운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맥아더와 더불어 한미동맹의 상징이자 대한민국을 사랑한 위대한 미국인으로서 국군에서 추앙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밴플리트는 4.19 혁명에 대해서는 이런 시선을 보였습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42300209102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4-23&officeId=00020&pageNo=2&printNo=11705&publishType=00010
밴플리트의 견해에 의하면, 4.19는 책임있는 시민이 일으킨 일이 아니며, 한국인은 민주주의의 책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4.19의 발생 원인을 야당의 선거불복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선거가 부정선거였음을 몰랐을 가능성도 있지만, 알아도 부정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밴플리트가 전후 제대한 뒤 이승만 정권의 로비스트가 되어 미국 기업의 대한 투자를 이끌어내는 활동을 맺으며 자유당 정권과 유착관계 비슷한 것을 형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동원의 논문「전쟁영웅의 이면, 밴 플리트의 대한 민간투자 유치 활동」, 『역사비평』통권 제125호 (2018년 11월)에 의하면, 밴플리트는 울산 정유공장 건설과 국군에 좋은 고기를 공급한다는 명목으로 시작한 제주도 국립목장 건설사업을 주도했습니다. 제주도 목장 건설에는 한국군 장병들과 군수물자가 동원되었습니다.
또한 밴플리트는 이듬해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7월 17일에 내한하여 쿠데타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072000209201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1-07-20&officeId=00020&pageNo=1&printNo=12158&publishType=00020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밴플리트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지지한다며 장면 내각을 지지한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과 주한대리대사 그린의 성명을 비난하였고, 쿠데타를 막으려 한 이한림 제1군 사령관의 행보도 비난하였습니다. 밴플리트의 발언은 아직 5.16에 대한 입장을 정하지 못한 케네디 행정부로서는 상당히 당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국무부는 밴플리트의 발언이 어디까지나 개인의 발언일 뿐이라고 해명해야 했습니다.
이런 점을 볼 때, 밴플리트가 사랑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가 정착된 자유로운 나라라기 보다는 공고한 반공주의로 뭉친 대한민국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독재 좀 해도 반공이면 그만이라는 정서 말입니다.
물론 이 같은 정서가 냉전기 미국 장교단의 보편적인 정서인 만큼, 밴플리트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Dienal 5434#
516쿠테타 뒤에는
김종필 - 하우스만 이 있죠...
박정희 옆에 김종필 있어서
하우스만의 지지를 얻어서
성공할수 있었는듯합니다.
그리고 516 쿠테타 이후
국민보도연맹 학살자 유족회 회장이 사형되었죠
Badger
거의 한국을 왕국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왕조와 좋은 관계를 맺으면 된다 정도로 접근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지금도 이승만 박정희 라인을 정통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비슷한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시절그때
대한민국 건국 당시부터 유구한 전통이죠.
38선 이남을 점령한 하지 준장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친 사람이어서, 독립운동가들을 박해하고, 개화된 신식의 한민당 인사들을 가까이 했지요. 이 나라가 친일파들의 나라가 된 것은 애당초 미군정의 의도였다고 밖에.
첫댓글 -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