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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말씀 19,9ㄴ-11.14-21.31-35ㄱ.36>
그 무렵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9 히즈키야에게 사신들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10 “너희는 유다 임금 히즈키야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네가 믿는 너의 하느님이, ′예루살렘은 아시리아 임금의 손에 넘어가지 않는다.′ 하면서, 너를 속이는 일이 없게 하여라.
11 자, 아시리아 임금들이 다른 모든 나라를 전멸시키면서 어떻게 하였는지 너는 듣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만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
14 히즈키야는 사신들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읽었다.
그런 다음 히즈키야는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서, 그것을 주님 앞에 펼쳐 놓았다.
15 그리고 히즈키야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세상의 모든 왕국 위에 당신 홀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16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조롱하려고 산헤립이 보낸 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7 주님, 사실 아시리아 임금들은 민족들과 그 영토를 황폐하게 하고,
18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것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작품으로서 나무와 돌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것들을 없애 버릴 수 있었습니다.
19 그러나 이제 주 저희 하느님, 부디 저희를 저자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왕국이, 주님, 당신 홀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20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히즈키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 때문에 네가 나에게 바친 기도를 내가 들었다.’
21 주님께서 그를 두고 하신 말씀은 이러합니다.
‘처녀 딸 시온이 너를 경멸한다, 너를 멸시한다.
딸 예루살렘이 네 뒤에서 머리를 흔든다.
31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생존자들이 시온산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라.’
32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시리아 임금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곳으로 활을 쏘지도 못하리라.
방패를 앞세워 접근하지도 못하고, 공격 축대를 쌓지도 못하리라.
33 자기가 왔던 그 길로 되돌아가고 이 도성에는 들어오지 못하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34 나는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니 이는 나 자신 때문이며 나의 종 다윗 때문이다.’”
35 그날 밤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36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그곳을 떠나 되돌아가서 니네베에 머물렀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7,6.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중요한 세 가지의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가르침이요, 둘째는“너희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가르침이요, 셋째는“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말씀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두 가지 원리 중 하나입니다.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는 이웃과의 화합의 원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이와는 대조되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 7,6)는 이웃과의 단절의 원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결코 남에게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분별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르기”(마태 7,6)때문입니다.
곧 세속적이고 악한 생활로부터 영적인 분별력과 신중함을 가지라는 말씀이요, 나아가서 균형 있고 조화 있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분별 있는 행동을 이렇게 권고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로마 12,2)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도 <수도규칙>에서 ‘분별은 모든 덕의 어머니’(64,19)라고 강조하였으며, 요한 카시아누스 역시 분별의 귀중함에 대해서 <담화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분별의 은총 없이는 완전한 덕이 없다.”(담화 2,3)
둘째 말씀은 흔히 황금률이라 불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이는 6장 33절의 말씀과 더불어 산상설교의 2대 강령이기도 합니다.
곧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는 말씀이 수직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면, 여기 7장 12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은 수평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코 ‘정직은 그 대가를 지불한다.’는 공리주의적 금언이 아니며, ‘주는 양만큼 똑같이 받을 것’을 기대하는 합리주의적 금언이 아니며, 오히려 ‘이타적인 사랑’으로 남에게 베풀라는 말씀이며, 더 나아가서는 겸손하게 ‘먼저’ 남에게 베풀라는 적극적인 사랑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마태 7,12)입니다.
셋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규명하는 세 가지 비유 중 첫 번째로, ‘좁은 문의 비유’입니다.
곧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14 참조)는 요청입니다.
이 문은 좁기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버려야 할 것들은 버리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분의 이끄심에 의탁하는 자라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이 세 가지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 7,13)
주님!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좁지만 열린 문이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기왕 살바에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흔히 우리는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비슷하지만 다른 맥락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남에게도 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
- 네가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도 해 주어라.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할까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네가 싫은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왜 네가 바라는 것을 그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제 생각에 전 세계에서 제일 개인주의적인 나라가 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어디를 가면 깃발을 앞세우고 그 뒤를 유치원 아이들마냥 졸졸 따라가기에 매우 집단적인 공동체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면의 이면에 너와 나의 경계를 분명히 두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그들에게는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아주 분명하게 있고, 사적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예의입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남을 자기 집에 초대하지 않고 자기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단체로 움직이고 깃발을 따라 일률적으로 따라가는 것도 어쩌면 남에게 피해주지 않기 위해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확치도 않은 일본 사람 얘기를 제가 왜 했냐 하면,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대표적인 예가
그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인간에는 아주 예의 바르고 절대 피해를 주지 않지만 서로 매우 경계하고 치열한 경쟁을 하며 살아가고
국가적으로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나라가 또한 일본입니다.
어쨌거나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으로는 사랑을 이루거나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랑이요, 피해도 사랑도 주지 않는, 어쩌면 더 사랑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의 율법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남을 해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십계명을 봐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 외에는 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왕 살바에는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일생 걱정으로 일관하는 인생,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는 인생은 살고 싶지 않고, 비록 보잘것없더라도 목표만은 사랑에 두고 살고 싶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바라는 그대로 해주어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가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도 친구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와 바람에 만족하고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고 느낄 때가 훨씬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는 이 정도는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자기는 잘하고 있는데 상대는 그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상처를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남을 똑같이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받는 고통이나 기쁨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정된 사람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한정된 테두리를 극복하도록 촉구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루카 6,32)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온갖 유혹을 거슬러 살려면 문이 좁고 길이 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밑지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옳은 길과 옳은 문을 찾는 수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의 기대와 바람만큼 걸맞은 수고와 땀을 소홀히 하지 않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길이라 해도 그 길이 목적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서둘러 그 방향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험하고 힘든 고된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이 천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군소리 없이 걸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매 순간이 세상을 감당하는 도전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베풀면서도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내가 해주라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다 아는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 해주려다가 호구가 되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애덤 그랜트는 사람을 ‘기버-테이커-매처’의 세 부류로 구분하였습니다.
기버는 내어주는 사람이고 테이커는 빼앗는 사람이며 매처는 받으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공하는 사람을 보았더니 가장 높은 위치에 기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낮은 위치에도 기버가 있었습니다.
왜 어떤 내어주는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내어주는 사람은 호구가 되는 것일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에 모든 것을 내어주면서도 아이에게 폭력까지 당하는 이지현 씨가 나왔습니다.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아이의 호구가 됩니다.
이것 하나만 조심하면 됩니다.
또 '개는 훌륭하다' 10편에 토르라는 강아지에게 온 가족이 당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특별히 아버지는 개를 더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토르라는 강아지는 아무 때는 끼어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애꿎은 것을 물기는 하지만 화를 잘 냅니다.
가족은 평화를 위해 토르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마음씨 좋은 가족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잘해주는 것은 가족에게도 토르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토르는 가족들이 잘해주는 게 자신보다 서열이 낮아서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잘해주는 것이 오히려 토르의 교만을 부추깁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토르가 가족을 ‘몰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괜히 끼어들어서 마음에 안 들면 으르렁대고 무언가를 주어도 왜 미리 잘하지 않았느냐고 엄포를 놓습니다.
생존본능 중의 하나인 교만을 가족들이 키워준 것입니다.
이런 식의 베풂은 호구가 되기 딱 맞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래서 먼저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 7,6)
좋은 것을 주는데, 그것들이 그 좋은 것을 받고 오히려 나를 밟고 물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주면서 호구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면서도 호구가 되고 있는지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바로 내 감정을 살피면 됩니다.
토르가 아버지만을 특별히 공격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두려움의 냄새’를 맡기 때문입니다.
생존 욕구가 높은 개들은 두려움의 냄새에 매우 민감하다고 합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이를 이용해야 자기가 살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가 두려워서 잘해준다면, 그 잘해주는 것은 모두 상대를 더 교만하게 만들고 나는 호구가 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몰이하며 최강자임을 자처하려는 토르를 강 훈련사는 되려 몰아붙입니다.
그 와중에 개에게 물려 피까지 흘립니다.
하지만 순종할 때까지 몰아붙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다시는 개에게 지나친 관심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관심을 주어야 할 대상은 절대 나를 두렵게 만드는 이어서는 안 됩니다.
왜 사람이 두려워질까요?
내 위에 올라서려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상대에게서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내 부족한 것을 충족하는 도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토르에게 저렇게 대하는 가족들도 분명 토르의 귀여움을 원하고 있습니다.
화내지 않을 때 가끔 부려주는 애교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무언가 얻으려 하는 것을 아는 개는 그것을 이용해 상대를 두렵게 만들고 지배하려 합니다.
따라서 무언가를 베풀 때는 상대에게 원하는 게 없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잘해주면서도 가스라이팅 당하기에 십상입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두려워집니다.
유튜브에 ‘EBS 부모’에서 방영되었던 ‘불안한 엄마, 무법자가 된 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5살 소라는 부모의 지나친 사랑에 무서운 것이 없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아이가 생떼 부리면 다 됩니다.
엄마와 아빠는 아이의 그런 마음을 부모가 다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 눈에는 아이가 절제 없이 자라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기가 죽어있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이는 절대 기죽는 아이가 아닙니다.
엄마는 어렸을 때 자신의 엄마에게 칭찬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야단만 맞다 보니까 자기는 자녀를 키울 때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칭찬해주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자신처럼 이해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한 아이로 자라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미안해서, 그래서 두려워서 무언가를 해 줄 때 나도 망치고 상대도 망칩니다.
두려워서 무언가를 줄 때는 호구가 됩니다.
결국 상대에게 지배당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무엇을 보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하셨기에 당연히 하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두려워하면 아이는 그 마음을 이용하게 됩니다.
미안함도 두려움입니다.
그냥 지금 해 주어야 하는 일을 하십시오.
이것이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목자입니다.
목자의 양은 그 좁은 문 뒤에 계시는 주님의 것입니다.
양 떼를 이용해서도 안 되고 그래서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 때문에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어차피 자녀도,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 것입니다.
그러니 겁내지 마십시오.
망가져도 주님 것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냥 맡겨졌으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안한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랑, 그 좁은 문 뒤에 내가 데리고 가는 사랑해야 할 대상의 주인이 계십니다.
다만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 하나가 있다면 내가 모든 것의 주인이신 그분 때문에 사랑하려고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보다 인간다운 삶, 보다 차원 높은 삶, 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누가 따로 부탁한 것도 아닌데 저희 수도원 출입구 앞마당에서 철통같은 경계를 서는 기특한 두 마리의 강아지가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락날락하며 자연스럽게 녀석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어제는 작은 친구 겨울 침구를 걷어내고 시원한 여름 담요를 깔아줬더니 고맙다고 꼬리를 칩니다.
강아지들과 지내면서 그들이 선호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젤 좋아하는 건 자신들의 넘버원, 넘버투, 넘버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같이 산책을 한다든지, 놀이를 한다든지, 옆에 앉아 쓰다듬어 줄 때 표정이 제일 행복해 보입니다.
가끔 특별보너스로 해변에라도 내려갈 양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에 못지않게 좋아하는 것이 특식, 간식, 그리고 주식인 사료 등 먹는 것입니다.
요즘같이 더운 날엔 시원한 그늘 아래, 세상 편안하게 널브러져 낮잠 자는 것도 좋아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십만원 짜리 수표가 생겨, 녀석들 눈앞에 펼쳐 보이며 제가 그랬습니다.
“애들아, 너희들 이게 뭔지 아니? 이거 어마어마한 거다. 십만원 짜리 수표야! 너희들 매일 먹는 사료 두 달 치나 살 수 있는 거금이라구!”
그러나 녀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녀석들은 수표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폐지나 수표나 그게 그것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을 잘 파악하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참으로 크게 다가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오 복음 7장 6절)
주변을 살펴보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대상의 가치와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그 놀라운 가치, 하느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모릅니다.
신앙이 우리에게 건네는 역동적인 힘과 에너지를 전혀 모르기에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영약인 성체성사의 의미를 모르니, 앉아있으면 짜증만 납니다.
사랑의 심오한 의미와 가치, 영혼이나 영원한 생명의 소중함, 진리나 성경의 위력을 조금도 파악하지 못하니, 그저 강아지처럼 돼지처럼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하느님의 모상이요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인 인간이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짐승처럼 살아간다는 것,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보다 소중하고 가치있는 대상들의 중요성을 인식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보다 인간다운 삶, 보다 차원 높은 삶, 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마라.">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 7,6)
‘거룩한 것, 진주’는 하느님의 말씀, 예수님의 복음, 성사 등입니다.
‘개들, 돼지들’은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라는 말씀은 어떤 ‘가나안 여자의 이야기’에 바로 연결됩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 15,25-26)
예수님께서 ‘개들’을 ‘강아지들’로 바꿔서 말씀하시긴 했지만, 이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을 우상숭배자에게 줄 수 없다.”는 거절입니다.
그 여자는 ‘이교도’, 즉 우상숭배자였고(마르 7,26),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우상에게 소원을 비는 것처럼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하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 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실 우상숭배자들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할 일은 아니고, 그들 쪽에서도 우상숭배를 버리고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기 전에 먼저, 우상숭배와 미신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라는 말씀은 ‘박해’를 뜻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님이 모독당하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도 없고, 성체성사도 안 믿는 사람에게 성체를 주지 않는 것은 ‘성체모독’을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성체를 주었다가 성체가 모독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성체를 준 사제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체성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사와 성경과 성물들에도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너희는 개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우상숭배나 미신에 빠진다면, 그것은 십계명 제1계명을 어기는 대죄를 짓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거룩함을 개들에게 주는 일이 되고, 자기 스스로 개가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직 예수님을 몰라서 미신을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마태 7,12)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남’은 하느님과 이웃을 모두 가리킵니다.
이 말씀을 하느님과의 관계에 적용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란다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
또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기를 바란다면 이웃을 사랑하여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주어라.” 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받은 다음에 주겠다.’, 또는 ‘받을 가능성이 있으면 주겠다.’ 라는 태도를 버리고, 받기 전이라도, 또 받을 가능성이 없더라도 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좋은 모범입니다.
그가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것은 보상받을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한 일도 아니고, 전에 무엇인가 받은 것이 있어서 한 일도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그냥 도와준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마태 7,13-14)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느님 나라의 문은 좁은 문이다.” 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문은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문,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는 넓은 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있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왜 ‘좁은 문’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그렇게 보인다는 뜻에서 좁은 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마태 8,19),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8,20).
그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따랐는지, 포기하고 떠났는지는 모릅니다.
사도들은 그 삶을 알면서도 ‘기꺼이’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몸의 편안함’만 찾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문은 ‘좁은 문’이지만, ‘영혼의 기쁨과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는 ‘넓고 편안한 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힘들어도 억지로 참는 생활이 아니라 좋아서, 또 기뻐서 하는 생활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앙생활에서 기쁨과 평화와 안식을 얻어 누리고 있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이 넓다는 말씀도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그렇다는 뜻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지혜로운 성인의 삶 - 분별력, 황금률, 좁은 문>
깨끗한 욕심, 거룩한 욕심은 언제든 좋습니다.
누구에게나 무해한 아니 오히려 유익한 욕심입니다.
누구에게나 마음 깊이에는 이런 욕심이 있습니다.
바로 성인이 되고 싶은 욕심, 청정욕(淸淨慾)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고 싶은 욕심입니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고 싶은 욕심입니다.
땅에서도 하늘에 보물을 쌓으며 살고 싶은 욕심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삶입니다.
사실 이렇게 살라고 주어진 선물 인생입니다.
하늘에는 여전히 빛나는 별들일텐데 요즘은 하늘에 별들 보기가 참 힘든 세상입니다.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천주교 하늘에 무수히 빛나는 별같은 성인들입니다.
천주교의 자랑이 이런 별같은 무수한 성인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 희망의 표징이 되는, 삶의 좌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우리 천주교가 참으로 부요한 것은 이런 별같은 보물같은 무수한 성인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써놨던, 가끔 인용했던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진리는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피어난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 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
- 2001.4.16
지금도 이 때의 장면이 생생합니다.
자비의 집 본관이 있기 전 옛 토굴같은 방 밖 창문을 열었을 때 뒤뜰 가득 눈부시게 피어난 샛노란 민들레꽃들을 보며 써놓고 큰 위로를 받았던 시입니다.
바로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았던 우리 천주교의 성인들입니다.
오늘은 예수회 출신 성 알로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그 어느 성인도 죽지 않은 성인은 없습니다.
어떤 성인도 때가 되면 죽습니다.
천상탄일에 이은 새로운 천상의 삶이 펼쳐집니다.
제가 성인 축일을 지낼 때 마다 본능적으로 하는 일이 생몰(生沒) 연대를 헤아리며 산 햇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1591년 빼기 1568년 해보니 고작 만 23년 살았습니다.
참으로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성인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참으로 살았느냐가 성인의 판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성 알로시오의 성덕의 얼마나 출중했던지는 그가 신학공부 4년째 페스트병에 걸린 이들을 돌보다 전염되어 중병을 앓다 선종하기 얼마전 어머니에게 보낸 구구절절 감동의 편지에서 잘 드러납니다.
“어머니, 우리의 이별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 우리 구원이신 주님과 결합하여 불사불멸의 끝없는 기쁨을 누리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미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할 것입니다.
존경하올 어머니, 어머니와 우리 온가족이 제 죽음을 하느님의 기쁜 선물로 생각해 주십사고 간절히 희망하면서 이 모든 말씀을 드립니다.
제 희망의 성취인 그 항구를 향해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어머니께서 저를 친히 축복하시어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들로서 어머니께 바쳐야 하는 존경과 사랑을 더 확실히 보여 드릴 방도가 없기에, 어머니께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역시 성인의 배경에는 성녀같은 어머니가 배경에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회 총장이던 콜벤바흐는 다음과 같이 성인을 칭송합니다.
“성 알로시오는 어떤 환경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참 왕이며 참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충실한 벗으로 생활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모든 것을 내려 놓았을뿐 아니라 주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오히려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생활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의 시성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어 1605년 10월19일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고, 1726년 12월31일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시성됩니다.
그후 그는 모든 신학생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을까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지만, 이에 우리의 분투 노력의 응답도 필수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첫째,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할 때 주어지는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십시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밝고 돌아서서 우리를 물어뜯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편애나 무시의 차별이 아니라 분별의 지혜입니다.
각자에 맞게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내 읽은 책이 좋다하여 누구에게나 좋은 책은 아닐 것이며, 내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누구의 식성에 맞는 음식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참 어리석게도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들에게 던져 주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짐만 될 것이며 곧장 쓰레기 통에 버려질 것입니다.
둘째, 황금률을 명심하여 늘 지키는 것입니다.
황금처럼 귀하다 해서 황금률이며 어느 문화권에서나 볼 수 있는 삶의 지혜입니다.
예수님 이전 힐렐 율사 역시 “네가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마라. 이것이 율법 전부요 나머지는 풀이이다.”라고 황금률을 말했습니다.
부정적이도 소극적인 황금률이라 이러면 아무 일도 않게 됩니다.
이보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오늘 복음의 황금률이 더 좋고 바람직합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런 황금률의 사랑의 실천은 끝이 없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경구와 일맥상통합니다.
좌우간 황금률은 사랑의 이중계명과 함께 가장 포괄적인 계율입니다.
이대로의 사랑 실천 노력에 항구하면 누구나 성인입니다.
셋째, 좁은 문을 선택하여 통과하는 것입니다.
문이라 하여 다 똑같은 문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생명의 문도 있지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화려한 죽음의 문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인 좁 은문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선택이듯 구원의 좁은 문도 선택입니다.
주님께서도 좁은 문을 선택할 것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우리 수도자들처럼 자발적 기쁨으로 좁은문을 선택하여 사는 이들이 바로 성인입니다.
수도원뿐 아니라 세상 곳곳에서 자발적 기쁨으로 세상에 거슬러 좁은 문을 통과하며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사는 성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 덕분에 유지되는 세상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사 시절 선배교사와 주고 받은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이 선생, 왜 그리 힘들게 살아. 좀 편히 살아.”
“저는 이렇게 사는 게 편한데요.”
그렇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남이 볼 때는 좁은 문이지만 안에서 내가 볼 때는 넓은 문일 수 있습니다.
사실 주님을 좋아서 사랑해서 기쁘게 택한 길이라면 살아갈수록 내적으로 점차 넓은 문으로 변해갑니다.
성인들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성인들의 특징은 늘 고통이 따랐다는 것, 휴식이 없었다는 것이며, 그러나 이런 좁은 문의 통과 와중에도 늘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좁은 문이지 내적으로 감미로운 사랑의 넓은 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분도 성인도 그의 규칙에서 이를 언급합니다.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마라.
그러면 수도생활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
밖에서는 좁은 문이지만 갈수록 내적으로 넓어지는 감미로운 사랑의 문, 생명의 문, 구원의 문, 넓은 문입니다.
바로 이런 영적 현실을 사는 이들이 성인입니다.
무엇보다 구원의 좁은 문 통과에 결정적인 것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히즈키야 임금이 풍전등화 위기 상황의 좁은문을 통과할 수 있었음도 이런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당신 홀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주 저희 하느님, 부디 저희를 저자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왕국이, 주님, 홀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이사야 예언자가 히즈키야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으셨음을 알려줍니다.
그날밤 주님의 천사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명을 쳤고,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그곳을 떠나 되돌아가서 니네베에 머무니, 히즈키야는 좁은문을 무사히 통과해 구원받았습니다.
바로 내 삶의 자리가 좁은 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좁은 문이고 계속되는 좁은 문의 연속이요 작금의 생존경쟁, 적자생존,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세상은 좁은 문의 절정입니다.
그래서 유독 자살자들이 많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유럽에서는 40도 이상의 폭염이, 아시아에서는 폭우의 홍수가 빈번하니 지구 역시 좁은 문의 위기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늘 하루도 우리 모두 좁은 문을 잘 통과하여 지혜로운 성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요약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 7,12)
예수님께서 성경에 담긴 무수한 가르침들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하십니다.
그리고는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단언하시지요.
훗날 예수님은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실 것입니다(마태 22,34-40 참조).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까지 하시지요.
그러니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구체화하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누구도 타인이 자기를 해치거나 증오하길 바라지 않지요.
본성적으로 우리가 남에게 바라는 것은 선의와 호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자기가 받고 싶은 마음을 타인에게 베푸는 것, 또 자기가 받고 싶은 대접을 타인에게 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를 때, 남에게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를 때는, 내가 받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역으로 생각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 7,13)
그런데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에 사랑도 서툴고 미숙하지요.
하느라고 했지만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픈 시행착오를 거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사랑도 자라고 우리도 자라니 실패한 건 아니지만, 과정이 결코 녹록치는 않습니다.
예언자들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러셨듯, 사랑은 번번히 배척당하고 공격받고 모욕당합니다.
민족과 인류의 선의를 위해 온 몸을 던져도 돌아오는 건 조롱과 버림받음, 죽음일 가능성이 더 크지요.
그래도 이미 사랑의 좁은 문으로 이어진 비좁은 길에 들어선 이상 발을 뺄 수 없습니다.
길이 더 위험하고 거칠고 외로워질수록 따름의 확신은 더욱 선명해지니까요.
우리 모두 부족한 인간이다 보니 비좁고 험난한 길을 수퍼맨처럼 넉근히 극복하면서 씩씩하게 걷지는 못하지만, 엎치락뒤치락 우왕좌왕 하면서도 따름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갑니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찾은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마태 7,6)
같은 의미를 원색적인 표현의 다른 단어로 반복하시니 어조가 더 강렬해집니다.
'거룩한 것'과 '진주'는 사랑과 진실과 믿음 등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서 포기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들이 아닐까 합니다.
때론 성소나 소명이기도 하고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주님께 지키고픈 신의이기도 하겠지요.
그렇다면 '개들'과 '돼지들'은 그런 가치들의 소중함을 모를 뿐만 아니라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나아가 제 욕망을 위해 하느님의 귀한 보물을 파괴하고 말살하려는 악의 힘을 상징할 겁니다.
슬프게도 그런 힘은 제 민낯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과 사건을 통해 교묘히 존재하지요.
그래서 우리의 순진하고 어설픈 사랑은 때때로 상처 입고 잠시 길을 잃기도 합니다.
제1독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가 유다마저도 함락시키려 침략한 위기의 순간을 들려줍니다.
"히즈키야는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서 그것을 주님 앞에 펼쳐 놓았다."
(2열왕 19,14)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조롱과 협박 가득한 편지를 유다 임금은 주님께 보여 드립니다.
가련한 처지에 몰렸을 때 주님 발 앞에 온 몸을 던지는 것은 믿음을 지닌 가난한 이의 최선일 겁니다.
사실 산헤립은 유다를 모욕하기 전에 하느님을 모욕한 것이지요.
이제 이 일은 나라 대 나라, 인간 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무도한 산헤립의 일이 되어 버립니다.
"네가 나에게 바친 기도를 내가 들었다."
(2열왕 19,20)
위기의 순간에 비참하고 가난한 처지에서 올린 진솔한 탄식와 애원을 주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존재이자 진주인 당신 백성을 개들과 돼지들에게 던져 주지 않으시고, 손수 적들을 쳐서 그들을 구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은 우리가 아무리 깨진 그릇처럼 쓸모 잃은 죄인이고 부족하다 해도 절대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귀한 진주이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바치고라도 지켜내고 싶은 보물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님도 그런 보물이십니다.
그분 말씀과 가르침, 그분을 따르는 삶이 곧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입니다.
그러니 한껏 사랑을 실천하고 희생과 인내로 좁은 문을 통과해놓고 하릴없이 일순간 개, 돼지들에게 그 귀한 보물을 빼앗기지 않도록 우리도 온 힘을 다해 보물을 지켜내야 합니다.
주님의 귀한 진주요 거룩한 이신 벗님!
우리가 저마다 주님께 허락받아 간직해온 귀한 보물을 잘 간수하고 사랑으로 성장시키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산보 길에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집 앞에서 아버지가 학교에 가는 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의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어린 딸은 해맑은 모습으로 웃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흐뭇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습니다.
아빠의 축복을 받은 아이는 든든한 마음으로 학교로 갔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힘들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축복을 믿고 시련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받은 축복을 아들 이사악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야곱은 그 축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형을 대신해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도 이렇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네 일생 동안 임금들 가운데 너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걸었듯이 내 길을 걸으며, 내 규정과 내 계명을 지키면 네 수명도 늘려 주겠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 예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였고, 마귀를 쫓아냈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도 축복하셨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의 축복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도 제가 먼 길을 갈 때면 항상 축복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갈 때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주님만을 믿고 따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군대에 갈 때는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새 사제가 되어 첫 본당으로 갈 때는 무엇보다 겸손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멀리 외국으로 연수 갈 때에는 행동을 신중하게 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은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새벽미사에 참례하셨고, 성무일도를 빠지지 않고 바쳤습니다.
제가 31년 사제생활을 큰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축복과 기도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보편교회는 ‘시노드’의 닻을 올렸습니다.
경청, 친교, 소통, 동행으로 교회에 산적한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교황님의 지향에 따라서 지역교회도 ‘시노달리타스’를 시작하였습니다.
시노달리타스는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듯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축복하셨듯이, 각 가정에서 축복의 전승이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축복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전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가정을 넘어 이웃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축복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은 산상설교를 통해서 가르쳐 주신 ‘진복팔단’의 문입니다.
겸손과 희생이 좁은 문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좁은 문입니다.
오늘 하루 가족과 이웃을 축복해 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오늘 제가 만나는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듬뿍 받도록 기도하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평생 구두 수선을 해왔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주 작고 허름한 구둣방을 운영하면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계셨지요.
그런데 이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을 단 한 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만나기를 간절하게 바라니, 너의 구둣방을 오늘 방문하겠다.”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니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구둣방에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청소했고, 구둣방에서 드실 수 있는 맛있는 음식과 음료도 준비했습니다.
또 구둣방이 추워서 따뜻한 담요로 예수님 자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개꿈이었나?’ 싶기도 했지만, 너무 생생한 꿈이었기에 기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아주 허름한 옷차림의 거지가 들어왔습니다.
너무 춥다고 하면서 이불이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담요를 주었습니다.
잠시 뒤에 한 학생이 들어왔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러니 음식이 좀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너무 배고파하는 것 같아서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한 음식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청소부가 와서는 너무 목이 마르니 물 좀 달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음료를 주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꿈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냐면서 따졌지요.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의 구둣방에 세 번이나 갔었다.
그리고 세 번 다 대접을 잘 받았다.
이웃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내게 해 주는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를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기원후 3세기의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이 문장을 금으로 써서 자기 거실 벽에 붙인 데에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사실 이와 비슷한 구절을 동서양의 여러 현인이 말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에서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점에서 이 황금률을 새롭게 표현하십니다.
첫째, 보답을 바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아예 생각하지 말고 솔선하여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이 교훈을 성경 전체의 정신을 종합한 말씀으로 제시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이 결국 주님께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좁은 문이지만,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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