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무인(朝鮮武人)들은 자결을 하였다.
공자사상을 받아들인 한민족 무인계급들은 할복이란 행위 자체를 금기시 하였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무인(朝鮮武人)들은 적에게 패하면 스스로 자결하였는데 자결 방법은 정의로운 방법인 독약을 복용하거나 강물, 절벽에서 뛰어내린 방법이었고 조선후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후 권총자결 방법등을 사용하였지만 자신의 배를 가르는 할복 방법등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 조선독립운동사에서 -
할복 확실히 있기는 했었습니다. 절복이란 의식과 개념이 존재했죠.
그게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의식입니다. 상무정신이 강하기 때문에 적들과 싸워 죽거나, 적의 칼에 베이기 전에 죽거나 하는 등의 사상 정신이 강했던 시대이니 만큼 '절복'이란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 절복의식이 백제를 통해 일본으로 가면서 할복으로 바뀌게 된게 사실이구요. 할복은 좀 더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됐죠. 삼국시대땐 단순히 목을 베거나 배를 긋거나 하는 등이었지, 일본처럼 '의식화'되서 국가적 중대사까지 발전되는 경우는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할복 하나 하는데 왕이 참여하고 하는 엄청 대단한 행사였었죠. 삼국시대도 이 정도는 아니었고, 그냥 군인 개개인이나 장군이 하던 소의식이라고 보심 됩니다. 사실 의식이 아니라 명예회복의 행위였죠.
대표적으로 계백의 혈족들이 절복을 통해 계백의 오천결사대의 사기를 충천시켰고, 관창과 황창랑 역시 신라의 대표적인 화랑이었죠. 이들 모두 적장을 죽인 후 스스로 절복합니다. 관창은 모든 화랑 중에서 단연 최고로 치는 실력자고, 황창랑은 본국검법의 창시자로 이름나죠. 고구려 3대 유리명왕의 황태자인 해명 태자가 전쟁터에서 전과를 잃어버리자 유리명왕이 자신의 군대를 몰래 빼들고 가서 전쟁을 했음에도 이기지 못하다니 하면서 화를 냅니다. 사실 유리명왕이 치뤘어야 할 원정을 해명 태자의 욕심으로 군대가 전멸당하고 해명 태자만 살아돌아온 것이죠. 이 사건으로 해명 태자는 결국 고구려인들의 총망을 잃고, 명예를 더 이상 실추할 수 없다며 들판에 창을 꽂은 뒤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려 창에 찍어 스스로 자결합니다. 절복이죠.
일본의 할복과 삼국시대의 절복이 다른 점은. 일본의 할복은 '의식화'되있기 때문에 사무라이들. 즉, 검으로서 사는 직업이라는 점으로 할복을 오로지 검으로. 그것도 베를 긋는 것에만 인정이 된다는 거죠. 반면 삼국시대의 절복은 꼭 검으로 자결을 하는 것뿐 아니라 자결의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죠.
하지만 조선시대처럼 사약으로 자결하는 경우는 유교 사상의 도입에 의해서입니다. 고려가 멸망함과 동시에 전 세계 문물들이 조선으로 쏟아져들어오는데 그 과정에서 유교도 함께 편입이 됐고, 유교 사상이 조선의 국제 사상으로 인정받습니다. 그 결과 조선시대는 상무정신을 잔인한 호전사상이라 하면서 절복이란 행위 자체를 완전히 금기시하고, 다만 자결을 할 때는 사약을 하는 정의로운 방법으로 해결하라는 제시를 내렸죠.
성환(星煥) 박승환(朴昇煥) 선생(先生)
선생은 1869년(고종6년) 한양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도감, 포도청등에서 군생활을 시작한다. 구조선군, 구조선경찰은 신식군대인 대한제국군을 창설하게되면서 대한제국군에 흡수된다. 1907년 7월 31일 일제는 대한제국군을 강제로 해산한다는 칙령을 내리게 된다. 한양을 방어하는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소령)은 분개하여 "군인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애석함이 없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는 내용의 유서를 쓰고 '대한제국만세'를 외친 후 권총으로 자결하게 되고 선생의 순국소식을 전해들은 대한제국군은 전국에서 봉기하였고 살아남은 대한제국군은 만주, 러시아로 피신후 독립운동을 전개하게된다.
예관(檉觀) 신규식(申圭植) 선생(先生)
선생은 1979년(고종16년) 충청북도 청원에서 희현당(希賢堂) 신숙주(申叔舟) 선생(先生)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조선의 명문가 자제들만 다닐수 있었던 외국어학교에서 중국어를 수학하였고 무과에 급제후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를 졸업후 부위(소위)가 되었고 대한제국군내 지방경찰조직 책임자로 있을때에는 억울한 백성을 없도록 최선을 다하였다고 한다.
일제가 대한제국군을 강제로 해산하자 한강 이북지역(지금의 북한) 대한제국군을 동원하여 일제에 항거하였고 일제에 의하여 대한제국군 대부분은 몰살당한다. 전투에서 패한 선생은 너무나 분개하여 독약을 먹고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고향 후배였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에게 발견되어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한쪽눈을 실명하게된다.
일제의 눈을 피하여 살아남은 대한제국군들은 만주대륙, 러시아 대륙으로 피신하게 되며 선생도 상하이로 피신한다. 선생은 상하이에서 당대의 대학자였던 손문(孫文) 선생(先生), 진영사(陳英士) 선생(先生)ㆍ여천민(呂天民) 선생(先生)등과 함께 청왕조를 무너뜨리고 상해혁명을 이룩한다. 살아남은 대한제국군들이 청왕조와 러시아 왕조를 무너뜨리는 상해혁명, 러시아혁명의 중심세력이었다는것은 얼마나 조선이라는 나라의 성리학이 위대하였다는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수 있다. 북경대 총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방 관아의 포졸 나팔수였던 홍범도의 필체를 보고 포졸 출신이 어떻게 이런 문장을 남길수 있단 말인가라고...
선생(先生)은 중화민국 총통이었던 장개석(蔣介石)을 직접 만나서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낙받게 된다. 선생과 장개석은 상해혁명 동지였다. 1922년 이승만이 임정대표가 되자 무장독립투쟁을 주장하였던 강경파 군.경찰 출신들이 이승만에 반발하여 임정에서 탈퇴하게 되고 임시정부는 내분에 휩싸이게 되고 민족의 앞날을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 끝에 1922년 9월 25일 순국한다. 역사가들은 선생을 임시정부의 아버지로 평가한다.
첫댓글 역사적으로 존경허는 어르신이자 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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