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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燕山君) [1476 ~ 1506] [1494.12 ~ 1506.09] 조선 제 10대 왕 前 왕세자 휘 : 융(隆) 자 : 없음 태어난 곳 : 1476년 11월 6일 승하한 곳 : 1506년 11월 강화도 교동도 아버지 : 성종(成宗의 제 1왕자) [1457 ~ 1494] 어머니 : 제헌왕후(齊獻王后) [1445 ~ 1482] (廢妃 尹氏)
이유... 그가 재위하던 12년 동안은 궁궐 내부적으로만 문제가 있었을 뿐,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은 극히 적었다. 그가 역대 최악의 군주로 선정된 것은 군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뤄내지 못하여 강력한 왕권을 남용함으로써 결국 폐위됨으로서 군강신약에서 군약신강으로 변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재위 2년째부터 대간들과 대립하는 연산군... 연산군은 재위 2년째 되면서 대간들과 대립을 하게 된다. 연산군은 돌아가신 친모 폐비 윤씨에 대해 제사라도 올리게 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지만 대간들은 장황하게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야 하는 논리를 설파하며 반대하였다.
선왕 성종이 사림 우대 정책으로 인해 사림들은 대간의 자리를 차지하고 연산군에게 집권초부터 무리한 강론을 펼치며 고리타분한 논쟁을 일삼았다. 또한 연산군이 추진하는 모든 일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들은 연산군에게 학문을 좋아했던 선왕보다 더 위대한 군주가 되어 달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 실제로 연산군 일기를 보면 재위 4년 대간들이 연산군에게 올린 글들이 보통 서너 페이지 이상 된다. 이것은 그만큼 연산군에 대해 계속 교육을 하겠다는 의미이며 연산군 입장에서는 귀찮은 잔소리로 비춰졌다.
그런 군주의 심경에 대간들은 다시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며 임금은 항상 공정한 바른 마음만 갖고 있어야 한다고 공자 생각만 펼치고 있었다. 연산군은 집권 4년이 지나자 지친 모습을 역력히 드러냈다. 집권 4년 무오년이 들어서자 군주와 대간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연산군은 이제 자신 마음대로 신하들의 품계를 조정할 인사권도 가질 수 없었다. 대간들은 신수근에게는 정승의 반열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계속 공박을 벌였고, 임사홍에게도 역시 소인배로 몰아붙이며 벼슬을 내리길 거부한 것이다. 여태까지 전해지고 있는 연산군에 대한 편견 01. 본래 공부를 싫어했다. 02. 수많은 기생을 거느리며 흥청망청 국고를 탕진했다. 03. 여염집 아내는 물론이고 신하의 아내, 심지어 큰어머니까지 욕을 보이는 패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04. 할머니인 인수대비의 머리를 받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 05. 민가를 철거하고 사냥터를 만드는 등 조선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극악무도한 행동을 일삼았다. 06. 생모의 복수를 위해 성종의 후궁인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를 아들들에게 몽둥이로 치게하여 죽였다는 것 또한 미심쩍다. 연산군이 만들고자 했던 조선이란 나라 그는 덕보다 힘을 중시한 패도주의자였고, 신권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고 또한 왕권에 흠이 되는 일은 손톱만큼도 용납하지않은 강력한 왕권주의 자였다. 결국 연산군은 선왕 세조처럼 강력한 왕권을 꿈꾸며 하나의 오치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실제의 연산군 01. 그는 문(文), 무(武)를 겸비한 준비된 제왕이었다. [논어] [맹자] [시경] [춘추] [사기] [통감절요] [십구사략] [자치통감강목] [명신언행록] [사서]를 독파했다. 윤씨가 폐출되어 서인으로 강등될 때 연산군은 4살이었다. 당시 연산군은 병이 나서 궁궐 밖에 있는 강희맹의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병이 나은 후에도 계속 궐 밖에서 지냈다. 건강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어머니 윤씨와의 접촉을 차단하려는 조치이기도 했다. 얼마 후 성종은 폐비 윤씨가 여전히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갖가지 악행을 저지른다는 이유로 사약을 내렸다. 연산군은 단종 이후 처음으로 왕궁에서 태어난 원자였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궐 밖에서 자랐기 때문에 공식적인 원자교육은 이뤄지지 않았다. 1482년(성종 13년) 7월, 홍문관 부제학 유윤겸이 상소한 내용이다. “원자계서 이미 궁중에서 취학했다고 들은 듯한데 좌우에서 보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비록 [효경]과 [소학]과 같은 책이라 해도 내관으로 하여금 가르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단정하고 엄숙한 선비를 골라 날마다 번갈아가며 강의하게 하십시오.” 라고 나온다. 이때 연산군은 7살로 이미 강학청을 설치하여 교육해야 할 나이였다. [성종 13년(1482년) 7월 15일] ; 연산군 7세 때 그러나 성종은 연산군의 교육보다 신료들과 윤씨의 일을 의논하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 후에야 성종은 경복궁에서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영의정 정창손과 좌의정 윤필상을 세자의 사부로 삼아 서연을 열었다. 연산군의 첫 강학 교재는 [소학]이었고, [논어], [맹자]를 차례로 읽어 나갔다.
[논어]의 학습이 끝났을 때 성종은 ‘책거리’의 의미로 서연관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리고 빈객 이상의 스승에게는 호랑이 가죽을, 그 이하 관리에게는 사슴 가죽을 선물로 감사를 표시하였다. [성종 17년(1486년) 11월 4일] ; 연산군 11세 때 연산군이 성균관에 입학한 것은 1487년(성종 18년) 2월이었으며, 그의 나이 12세 때였다. 혼례를 치른 것은 그 이듬해 2월이었다. 연산군은 13세 때부터 [사서]를 비롯하여 [사기], [통감절요], [십구사략], [춘추], [시경], [자치통감강목], [명신언행록] 등을 공부하여 독파한 것을 볼 수 있다. 13세 때부터 재위할 때까지인 19세 때까지 책을 독파한 것이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하였지만 그는 왕위에 오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세자 위에 오른 연산군은 10년 이상 유교 경전과 역사를 공부하였다. 물론 어느 정도나 익혔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공부를 싫어했던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02. 그는 시(詩) 130여 편을 지을 정도로 제왕으로서의 풍류를 즐길줄 알았다.
연산군은 과거 때 시를 주 문제로 냈으며 여인 또한 시를 잘 읇을줄 아는 여인을 총애했다. 시는 어쩌면 경서를 달달 외우는것보다 더많은 공부를 해야했다. 그리고 시를 짓는 것은 학문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했다.
군주가 시를 짓는다는 것은 어느 사가의 양반이라 할지라도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학문적 뒷바침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기본적으로 서예나 문장을 다루는 능력이 안된다면 130여 편이나 되는 시를 짓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03. 연산군은 왕세자 시절, 인수대비, 대왕대비, 성종, 정현왕후 등 왕실의 어른들에게 극진히 효도를 하였다.
1492년(성종 23년)에 성종은 왕세자의 서연을 중단하였다. 날씨가 몹시 무더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 수업을 중단했을 뿐미여, 서연이 공식적으로 방학을 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공식 행사 때문에 정연을 했다 하더라도 시간이 오래되면 ‘왕세자의 교양을 중단해선 안 된다’면서 대신들이 서연을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다시 서연을 중단할 일이 생겼다. 당시 성종은 오래도록 천식을 앓아 대신들의 문안도 받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때 왕세자였던 19세의 연산군은 시강관으로 있던 성현에게 서연을 정지하기를 청했다. “주상께서 지금 자주 측간엘 가시니, 너무 피로해 계십니다. 공자께서 ‘실천하고 여력이 있으면 학문을 한다’고 하셨으니, 제가 수업을 중단하고 부모님의 약시중을 들려고 합니다.” 유학에서 ‘부모가 병이 나면 약을 먼저 맛보고 올리라’고 가르쳤으므로 세자가 국왕의 약시중을 들겠다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성현도 옳다고 하였고 마침내 서연이 정지되었다. 연산군 왕세자 시절 아버지 성종에게 극진히 효도하였다. 1494년(성종 25년) 성종이 중병으로 몸저 눕자, 연산군은 크게 기뻐하며 부왕이 애지중지 키우던 사슴을 잡아먹었다는 좀 어처구니가 없는 기록이 있다. 그는 부왕이 위독하자 밤을 새며 간호를 했다고 하며 이를 입증하는 기록이 다수 남아있다. 소혜왕후와 안순왕후 등 왕실의 어른들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연산군이 그런 행동을 하면서 과연 제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특히 소혜왕후는 당시 정희왕후, 안순왕후와 함께 대비로서 상당한 권한을 가졌다. 뭔가 석연치가 않아 보인다. 연산군 대에 지낸 연회의 대부분은 대비전을 위한 것이었으며 오히려 너무 지나칠 정도로 대비전을 위한 연회를 자주 베풀었다. 그리고 성종 25년에 성종이 자리에 눞자 생일 축하연까지 취소하며 아버지 성종을 위해 직접 약을 먼저 맛을 보며 지극 정성을 다한 연산군이었다. 만약, 그가 왕세자 시절에 학문도 게을리하고 관심을 멀리하며 성격이 난폭한 것이 들어났다면 애당초에 폐세자가 되었어야 했다. 연산군일기의 대부분은 중종반정때 성공을 거둔 대신들이 쓴 것으로 믿지 말아야 할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연산군 일기와 중종실록에 의하면 연산군을 어렸을 적부터 성격이 꽤 더러웠다고 한다. 또한 그런 아들의 성격으로 성종은 그를 세자로 삼지 않으려 했으나 그 당시 아들이 오직 연산군 뿐이므로 어쩔 수 없이 세웠다고 나와있다. 과연 그럴까? 만약 연산군이 왕세자시절 추한 모습을 보였다면 당시 성종의 아들들은 많았다. 계성군(1478년생), 완원군, 안양군(1480년생), 회산군(1481 년생), 진성군(1482년생), 봉안군 등 아들들이 많았는데 연산군밖에 없었다는 것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생모의 죽음이 평생의 한으로 남아 폭정으로 분출된 군주... 어려서 부터 난폭하고 성종과 갈등관계에 있었다는 연산군은 유년시절부터 거의 왜곡되었다고 보면 된다.
오히려 폐비 윤씨를 사사하고 연산군이 점차 성장하면서 성종은 차마 아들 보기가 미안했을 것이다. 연산군 본인도 계모인 정현왕후와 성종이 자신에 대한 사랑이 좀 틀렸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결국 이런 면이 연산군이 성장하는데에 있어서 이중적인 성격이 나온 것이며 이만큼 친정 어머니와 계모와는 그만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계모가 잘해준다 해도 친모 만큼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위 초반까지 잘해오다가 결국 1498년부터 연산군의 이중적인 성격이 것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오르게 된다. 04. 연산군이 큰어머니를 욕보게 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정말 왜곡이 심하다. 오히려 연산군은 큰어머니인 박씨를 총애했다. 월산대군 부인 박씨와의 간통설은 시중에 떠돌던 소문을 마치 정설처럼 퍼뜨린 결과이다. 박씨가 월산대군의 명복을 빌기위해 흥복사라는 절을 지을 때 성종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연산군 때에도 달라지지 않았다.오히려 더 많은 하사품과 녹봉을 내리며 연산군의 아들 왕세자 이황이 박씨의 집에서 성장한다. 세자가 조금 커서 대궐로 돌아온 뒤에도 박씨에게 왕세자의 양육을 맡긴다. 부부인에서 부대부인의 칭호를 높인것을 보면 연산군이 그만큼 부대부인 박씨를 신뢰했다.
이로써 연산군이 박씨와 월산대군을 얼마나 존중했는지 알 수 있다.또한 박씨는 흥복사와,녹봉과 관련되어 대신들의 집중적인 탄핵을 받았다. 그에 대해 연산군은 박씨에 대해 특은을 내리는 것일 뿐이라며 대간들의 논박을 피해 버린다.
그녀가 죽기 일주일 전인 7월 23일 또한 박씨의 병세가 위독해 지자 연산군은 박원종에게 박씨를 계속 간호하도록 배려한다. 그렇기에 연산군이 박씨를 간통하여 박씨가 독극물을 먹고 죽었다는 것 또한 허구인것이다. 05. 연산군이 두 후궁(귀인 정씨, 엄씨)을 때려 죽였다?
사실 연산군의 어떤 하교에도 귀인 엄씨와 정씨를 죽이라는 내용은 들어있지 않다. 연산군은 안양군 이항과 봉안군 이봉을 불러들인 처음엔 옥에 가두라고 한 뒤 곧이어 장 80대를 치고 유배를 보내라고 한다.다시 명을 내려 창경궁으로 잡아오라고 한 뒤 다시 또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한다.
이 때 연산군은 몹시 화가 나있고 흥분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들은 불과 3시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이 때 다른 일을 할 시간적 여유는 거의 없었다고 봐야한다. 실제로 연산군은 이들을 대면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틑날 안양군과 봉안군의 상복문제와 엄씨와 정씨의 장례절차를 논한다. 06. 연산군이 할머니 인수대비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박종화의 <금삼의 피>에 나오는 내용을 대본에 그대로 옮긴데서비롯됀 왜곡이다. 상식적으로 군왕이 그것도 친할머니를 머리로 들이받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되며 이 이야기는 연산군일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금삼의 피>라는 책에서 나온 말이다. 07. 사냥을 매우 좋아했던 연산군, 경연까지 없애고 언론을 탄압한 이유는무엇일까? 연산군은 부왕을 닮아 시문도 잘 짓고 또한 사냥도 매우 좋아했다. 그는 자주 사냥을 즐겼는데, 사냥터의 범위, 즉 금표의 범위를 경기도 곳곳으로 넓히면서 몇몇 백성들이 집을 잃고 쫓겨났다.
그렇지만 그 쫓겨난 호 수는 다 합쳐봐야 500호 정도 밖에 안된다고 하며 대부분의 땅은 사림파와 훈구파를 때려잡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몰수한 과전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조선시대 군주들은 사냥을 강무라 하여 매우 중요시 여겼다.
군주의 사냥은 단순한 산짐승 잡기가 아닌 병사들의 군사훈련의 역할도 하였으며 사냥을 통해 도성 주변 산짐승들의 개체수를 조절하여 산짐승들에 인한 피해를 줄이고자 하는 의도도 숨어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창병은 여전하여 제위에 오른 이후 창병으로 망가진 얼굴을 경연에서 보이기가 싫어서 자주 안나간 모양인데, 경연을 주최하는 학사들이 왜 경연에 왜 안나오나며 계속 귀찮게 따지고 들자 패도주의(인의를 무시하고 무력이나 권모술수로써 다스리는 일)를 지향하던 그는 아예 경연을 없애버렸다. [연산군의 업적] 흔히 연산군의 치적은 아예 없거나 또는 거의 무시를 한다.
[연산군의 업적 정리] 1495년 :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음 1495년 :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킴 1495년 :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 여 그들을 회유케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함 1495년 9월 3일 : 국왕이 신료들을 조회 등의 정사를 통해서가 아닌 직접 대소신료들의 고충 및 간언 등을 청문할 수 있는 기회로서 윤대를 행하도록 하도록 연산군이 5일마다 한 번씩 윤대할 것을 전교함 1496년 1월 : 종묘제도를 제정함 1496년 9월 4일 : 그동안 헤이해져 시행되지 못했던 [사가독서]를 재시 행 함으로써 학문을 권장하고 신진을 양성하도록 함 1497년 6월 : 문신의 [사가독서제]를 실시함 1497년 11월 : 공안개정을 정지함 1497년 11월 : 연산군의 명으로 중추부판사 [경상우도지도]를 만듦 1497년 : 조선 역대 국왕 중 한 해에 150여 차례의 경연을 열어서 정사 를 봄 1498년 2월 : 세조이래 편찬되지 않은 [국조보감]을 세조이하 덕종(의 경세자), 예종, 성종조의 내용을 첨부하여 다시 편집하 여 찬진하게 함 →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도움을 줌. 상평창을 설치함 (빈민문제 구율) 1498년 4월 : 영안도를 함경도로 개칭함 1498년 5월 : 호적신년을 개정함 1499년 1월 : 성종실록이 완성됨 1499년 10월 : [동국여지승람]을 수정. [구급이해방언해]를간행. [동국 명가집]을 간행함 1500년 7월 : 연산군의 왕명으로 성현에게 [역대명감]을 편찬함 1500년 9월 : [속국조보감]을 찬진함 1500년 11월 : 과부의 재가를 금함 [농서 언해], [잠서언해]를 간행함. 신미의 [목우자수심결언해]를 간행함 1502년 1월 : 명으로부터 염직을 배움 1502년 3월: 김익경이 제조한 수차를 경기도, 충청도에 시험적으로 설치함 1502년 6월 : 양계업거인의 내지인과의 혼인을 엄금함 1502년 7월 : 함경도에 사창을 설치함 (빈민문제 구율) 1502년 8월 : 상평창을 경외에 설치함 1503년 5월 : [임신최요방]을 간행함 1503년 11월 : 경복궁과 창덕궁의 담을 높이 쌓고 담밑의 주거를 금지함 조선왕조 106년 이후 큰 사건인 무오사화 [1498년 7월] 무오사화는 1498년에 일어난 조선 최초의 사화로 임사홍이 김종직이 썼다는 조의제문을 몰래 들춰 보면서 일어난 사건으로 알고 있다. 특히 연산군 같은 경우 증조부인 세조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연산군 자신이 세조의 증손이기 때문으로 세조를 욕하고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꼴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균관을 폐쇄시켰는데 그 이유는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 대부분이 명문가의 자식들로 대부분이 학문연구가 아닌 단순히 과거를 보기 위해 들어왔으며 그들의 건방짐과 오만함이 상당하였다.
폐비윤씨 사건으로 왕권에 도전하는 훈구세력을 완전히 제거함 갑자사화 [1504년 3월 ~ 10월] 이 사건은 흔히 폐비 윤씨에 대한 보복극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폐비 윤씨는 하나의 구실에 불과했으며 결국 왕권에 도전하는 신권을 때려잡기 위해 연산군이 또다시 벌인 사건일 뿐이다.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윤씨가 죽은 것은 알고는 있었으나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또한 외가 쪽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으며 장성한 다음에야 외조모를 비롯한 외가쪽 친척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제위에 오른 이후 생모의 묘를 지금의 서삼릉 부근으로 옮겨 묘를 화려하게 치장했으며 성종의 유명을 어기고 윤씨에게 제헌왕후란 시호를 올림과 동시의 그녀의 묘를 회릉으로 높이고 수시로 제사를 올려 어미에 대한 그리움과 효도를 표출했다.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대거 박살난 이후, 훈구세력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는 결국 언젠가 연산군의 왕권에 덤벼들 것은 뻔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몇몇 훈구 대신들은 연산군의 화를 은근히 돋구기 시작하였다.
생모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된 연산군은--임사홍이 자신의 권세를 확장하기 위해 꼬발렸다고 하지만 그 역시 갑자사화 때 형벌을 봤으므로 이 역시 신뢰할 바는 못되는 듯생모의 원수를 갚으면서 한편으로는 훈구세력들을 때려잡기 위해 소위 불경죄로 몰아세워 이들을 사냥하니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갑자사화로써 이때 윤필상, 이극균등이 처형되고 이미 죽어 없어진 한명회, 정창손 등도 묘가 파헤쳐지는 부관참시를 당해 폐비사건에 대한 연산군의 철저한 응징을 받았다.
자신이 아끼던 신하에게 배신을 당해 창경궁에서 쫓겨난 연산군 갑자사화 이후 2년 동안은 정국이 좀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백성들의 삶까지 피해를 본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백성들의 삶은 대체로 편안했던 모양이다. 물론 사냥 등의 이유로 금표를 확대하면서 쫓겨난 백성들도 있긴 하지만, 그 외에 백성들은 성종 때부터 지속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근거가 없는 낭설로 연산군은 큰어머니 박씨에게 상당한 지원과 특혜를 베풀었음) 홍경주를 꼬드기며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반란을 모의한다. 그렇지만 연산군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런 방비없이 자기가 꿈꾸던 패도정치를 실현하는데 몰두한다. 특히 연산군 같은 경우 증조부인 세조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연산군 자신이 세조의 증손이기 때문으로 세조를 욕하고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꼴이기 때문이다.
중종반정을 일으켰던 두 인물, 박원종과 성희안...
중종반정을 일으켰던 인물들은 공교롭게도 연산군이 믿고 총애했던 인물들이었다. 연산군이 물론 1498년, 1504년 두 사화를 통해 피비린내 나는 사화를 일으켜 엄청난 희생이 일어난건 사실이었고, 1504년 익명서 사건으로 백성들의 한글 사용을 금지하여 원성을 사긴 했으나 그 당시 나라가 궁 안 내부적으로 문제만 있었지 백성들의 삶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다.
이 두 인물이 반정을 일으킨것은 실로 사소한 것이었다. 박원종은 중추부지사, 경기도 관찰사,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평성군에 봉해진 뒤 도총부 도총관을 겸직했다.
자세한건 모르나 박원종은 현 자신의 신분이 성이 안찼던 모양이다. 그는 평소 연산군이 월산대군 부인인 박씨를 총애한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겁탈하여 박씨가 자살한 것처럼 꾸며대어 사실인마냥 퍼뜨렸고, 성희안은 금표구역을 관리를 소홀히 하여 연산군에게 혼쭐아 난데다가 1504년 이조참판 겸 부총관 때 양화도 놀이에서 연산군의 횡포를 풍자한 시를 지어 바침으로서 미움을 사 무신직에 좌천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박원종과 함께 반정을 도모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의 재위 12년... 그가 백성들에게 죄를 진 것이 있다면 사냥을 하기 위해 민가 500여 채를 철거한 것과, 1504년 익명서 사건으로 한글 쓰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것 뿐이다. 그가 전국에 있는 기생들을 모두 잡아다 들혀 향연을 베풀었다 하는데 그건 연산군이 시를 좋아하므로 향락을 즐긴것이 아니라 시를 잘 읊을 줄 아는 여성을 뽑은 것이었고, 성리학을 철저히 배척했던 것이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세운 이른바 중종반정은 반란파와 사림세력에 의해 당연히 일어나야 되는 사건으로 합리화, 정당화가 되었으며 우리는 그 사건이 마치 정당한 것처럼 오랜 세월 세뇌를 받아왔다. 흔히 조선은 전제왕권 국가로 알고 있으나 실상은 신권이 왕권보다 거의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제왕들은 조정관료들의 눈치를 많이 받았으며 종종 하는 일에 대해 심하게 간섭을 받을 정도로 왕권은 그리 강하지는 못하였다. 물론 앞에 거론한 태종과 세조 등 일부 군주는 제외한다.
지나친 왕권강화를 집착하다가 결국 팽(烹)당하고 만 연산군... 연산군을 보면 세조란 왕이 가장 근접한 군주라 할 수 있다. 흔히 태종도 똑같지 않냐고 반문하겠지만 그도 물론 친동생과 외척들을 제거하긴 했지만 연산군처럼 왕권에만 집착하거나 자신에게 적이 되는 인물을 모두 사사했다거나 엄청난 사화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세조가 연산군과 흡사한 이유는 물론 사화는 일으키지 않았지만 두 인물은 공통적으로 지나친 왕권강화에 집착했다. 세조 또한 아무리 유능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자신과 타협이 될 만한 인물이 아니라면 사사하거나 유배보냈다. 세조 또한 혜빈 양씨를 비롯하여 그의 소생들(3명), 안평대군, 금성대군의 친동생들, 박팽년, 성삼문 등 우수한 집현전 학자들, 그리고 정순왕후의 장인 송현수, 그리고 조카 단종까지 왕실과 관련된 수많은 인사들을 사사시켰다.
문제는 방법에 있다는 것이다. 두 인물이 공통점이 있지만 약간의 차이라면 연산군이 왕권 강화에 한 술 더 떴다는 것이다. 세조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통해 자신을 위해 한 몸 바칠 수 있는 세력들과 군사들을 적절하게 배치하며 반대되는 인물들을 적지적소에 시기에 따라 사사한 반면, 연산군은 자신을 위해 죽어줄 세력이 없이 어떤 세력과도 타협도 않은채, 한번에 무자비하게 몇개월에 걸쳐 수십여 명을 사사했다는 것에 차이가 있겠다.
다만, 세조 시기는 이처럼 훈구파와 사림파간의 대립이 거의 없었던 시기로 세종 대의 왕권과 신권의 적절한 조화의 시대에서 세조 대에 접어들면서 왕권이 신권을 압도하는 시기에서 세조 대에 정권을 잡았던 훈구파를 사림파가 배격하더니 성종 대에 사림파가 진출하면서 태평성대가 이어지자 서로간에 헐뜯는 양상이 나오는 상황에서 연산군이 즉위한 것이다.
만약 이 시기에 태종이나 숙종, 영조, 정조가 즉위했더라면 숙종, 영조, 정조 같은 경우 탕평책을 통하여 훈구, 사림간의 적절한 조화 속에 유능한 인재들을 기용했을 것이며 태종 또한 강력한 왕권 속에 신권을 조화를 이루려 했을 것이다. 물론 신권이 도전을 해올 경우 약간의 일은 있겠으나 연산군처럼의 살육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왕이 아무리 백성들을 위해 성정을 펼쳐도 왕권과 신권의 조화, 그리고 궁 내부에서의 일을 원만히 못한다면 군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군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에 대한 정책보다도 궁 내부에서 탄탄히 정치를 다져놓지 못하면 백성들에게 성정을 베풀 수는 없는 것이다.
연산군과 정조의 차이점...
연산군은 그 시대에 어울리는 군주가 되지 못했다. 군주란, 자신과의 적과도 타협할 줄 아는 능력과 지혜가 필요하며 인내가 필요하다. 아버지를 여읜 정조 경우 연산군 보다 더 심했다. 연산군 시대야 아버지 성종의 태평성대 속에 이어서 왕위에 올랐다지만 정조의 상황은 그러하질 못했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가 뒤주 속에 죽는 광경을 직접 목도했고, 자신의 왕위를 부정하며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해치우려는 세력들이 넘쳐 흘렀다. (정순왕후, 홍인한, 김귀주, 정후겸, 화완옹주, 궁 내의 사람들까지) 정조는 보위에 오르고도 암살을 세 번씩이나 당할 뻔했다.
하지만 정조는 참고 또 참으며 노론이란 큰 거두를 배척하기 보다는 그들도 감싸 안으며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정쟁이 격화된 시기로 절정에 달했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이런 정조의 조치는 그야말로 탁월한 군주임에 틀림이 없다.
연산군이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자신의 어머니 사건을 빌미삼아 죽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흉악하게 7개월간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일으킨 반면, 정조는 왕권 강화 차원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아버지 사건에 연루된 주연들만 간단하게 제거함으로서 깔끔하게 사건을 마무리 지은 반면, 연산군은 그러하질 못했다.
군주가 정치를 해나가자면 세력이 필효하다. 율곡 이이의 말처럼... 정조는 장장 1694년 갑술환국 이후 82년간 소외되었던 영남 남인과 손을 잡으로 노론이라는 큰 거두를 견제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도모함과 동시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노론 마저 껴안으며 그야말로 궁 내부에서 안정된 왕권 강화속에 백성들을 위해 민생 정치를 실현한 으뜸 군주였다.
그리고 정조는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함으로서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기구와 함께 집현전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발탁함으로서 철저히 노론을 견제함과 동시에 노론,소론,남인을 통합하여 다스리는 모범을 선보인 것이다.
모든 일에든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궁 내부에서 신하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백성들에 대에 살생정치를 편다는 것은 말도 안되며, 그리 할 경우 강력한 신권의 도전이 있게 마련이다. 연산군은 강력한 왕권만 믿고 자신의 업적에 대해 너무 과신하였고, 군주가 신권을 제압할 때의 기본 요소인 자신과 정치적인 뜻을 같이 해줄 수 있는 세력이 없었고, 군사들이 없었고, 오로지 왕권 강화에만 집착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학살함으로서 왕권 강화의 방법이 부풀어져 신권들에게 원망을 샀다.
적과 타협할 줄 알며 언변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 또한 군주의 몫이다. 아무리 자신의 뜻과 맞지 않다 하여 죽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세조 또한 자신의 뜻과 맞지 않다 하여 많은 인재들을 죽였다. 단지 그 시대는 세조 본인이 자신 주변에 보호해줄 수 있는 인사들을 배치시키며 철저하게 왕권을 지켜나간 반면, 연산군은 아무런 세력도 없이 혼자 무모하게 살육을 하다가 신권들에게 팽 당하고 만 것이다.
군주는 업적이 많다고 훌륭한 왕이 될 수 없다. 왕권과 신권을 적절히 다룰 줄 알아야 하며, 적과도 타협할 줄 알아야 하고, 그들을 안아줄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가진 군주여야 하며, 쓴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며, 자신의 업적이 기만하지 말아야 하며, 그런 상태가 갖추어진 상태에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 제 10대 왕으로 군림하던 연산군은 실패했다.
정리... 사림세력에게는 아버지 성종의 치세를 이어받아 호학의 군주가 될 것을 지나치게 강요받고 훈구 척신세력들이 공신칭호를 세습하며 막대한 재산을 축척하여 나라의 재정을 축나게 한다는 것에 분개한 연산군은 그들을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죽게 한 죄를 뒤집어 씌워 살육의 정치를 했던 연산군은 폐위를 예감이나 한 것처럼 슬프고 애잔한 시들을 적어 술자리를 숙연하게 하는 등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를 보인 미스테리 군주였다.
연산군을 포악한 군주로 만든 단초를 제공한 것은 연산군 집권 초기 사림세력들의 지나친 왕권 억제책일 수 있다. 사림세력에게 철저하게 부도덕하고 무능하다는 비판를 받았던 연산군의 정치는 사실보다 과장된 측면이 강하며 그의 역사는 은폐 조작된 것이 사실이다.
그럼으로 조선의 역사는 군주의 역사라기 보다는 사림세력, 특히 주도적 입장이었던 정통 성리학의 주류, 노론세력들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 했던 군주가 또한 연산군이었으나 뚜렷한 이유 없이 신권들에게 팽을 당한 비운의 군주가 된 셈이다.
끝으로 연산군이 지었다는 시문중 아주 짧은 것 2수를 추려보았다.
삼월 삼짓날 봄바람 부는 서울(紫陌-서울을 뜻한다고 함)에 紫陌春風三月三 鳥飛魚泳百花馣 蘭亭稧事誰云好 不似銀臺賜酒酣 恃恩輕國是邪臣 當信思誠可謂純 取舍都由君聖暗 何隨虛例瀆辭陳
2004년 12월 9일 목요일 카페매니저 崔洙辰
속히..연산군이 재평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