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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주님,
주님의 오른팔로 주님의 가족을 영원토록 감싸 주시어
외아드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저희가
어떤 죄악에도 물들지 않고 천상 은총을 얻게 하소서.
제1독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헛된 것들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4,5-18
그 무렵 이코니온에서는 5 다른 민족 사람들과 유다인들이
저희 지도자들과 더불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괴롭히고
또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6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일을 알아채고
리카오니아 지방의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근방으로 피해 갔다.
7 그들은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8 리스트라에는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9 그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10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11 군중은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2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바오로가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13 도시 앞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와서,
군중과 함께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14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 15 말하였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지난날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17 그러면서도 좋은 일을 해 주셨으니,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18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군중이 자기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겨우 말렸다.
복음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21-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말씀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곧 성경 말씀이 율법이고 하느님 뜻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 하면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알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유다 지도자들은 그 성경 말씀을 공부했음에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에 순종 하지 않고 말씀을 해석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해석한다는 뜻은 내가 그 말씀을 한 이보다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라는 짤막한 질문으로 예수님과의 대화를 급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진리란 세상이 창조 된 원리입니다.
스마트폰의 원리는 그것을 창조한 인간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가 스마트폰을 해석하려 든다면 어떨까요? 그냥 과일을 깨 먹는 도구로밖에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만든 인간이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사용 설명서를 쓸 것인데 이것이 성경 말씀과 같습니다. 아이는 그 설명서에 순종 하여 스마트폰을 사용해보면 그 원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진리가 그 아이에게 밝혀지는 것입니다. 순종 하지 않고 설명서의 의미를 해석하려 든다면 자신이 그 스마트폰을 만든 사람보다 뛰어나서 스마트폰을 옳게 만들었는지를 심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부모의 말을 해석할까요?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 합니다. 해석하려 드는 즉시 아이는 부모 위에 서게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 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은 사람 수만큼 많습니다. 각자가 하나인 세상을 각자의 주관대로 해석하여 어떤 사람은 세상은 돈이 없으면 안 되는 곳으로, 어떤 사람은 명예가 꺾이면 안 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무시 당하면 안 되는 곳으로, 어떤 사람은 마치 컴퓨터 게임과 같다고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세상에 자신을 맞추어 살고 그 세상에 합당하게 변해갑니다. 오직 성모 마리아만이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순종’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천사의 말에 ‘인간이 어떻게 감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라며 말씀을 해석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그것을 이해하거나 해석하고 분석하려 들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순종 하려 든다면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성령은 사랑이신데 사랑은 사랑할 자격을 갖춘 이에게 오십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말씀을 잉태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말씀의 실체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어린 소년이 학교에서 편지 한 장을 가져왔습니다. 아이는 선생님께서 편지를 줬다며 엄마께 읽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잠시 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천재입니다. 이 학교는 그를 가르치기에 너무 작은 학교이며 좋은 선생님도 없습니다. 당신이 아이를 가르쳐주기를 바랍니다.”
엄마는 교사의 말을 따랐습니다. 병에 걸려 죽는 순간까지 직접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어머니가 떠난 지 수 년이 지나, 아들은 유능한 발명가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의 유품들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보냈던 그 편지도 놓여있었습니다. 그는 편지를 펴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저능아입니다. 우리 학교는 더 이상 이 아이를 받아줄 수 없습니다. 아이에게 퇴학 처분을 내립니다.”
아들은 편지를 읽고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다이어리에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습니다.
“토머스 에디슨은 저능아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 시대의 천재로 변화시켰다.”
이 이야기는 토머스 에디슨의 어린 시절에 관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일화입니다. 실제로 에디슨의 어린 시절에 관한 공식 기록에서는 이러한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한쪽 귀가 안 들리고 몸도 온전치 못한데 쓸데없는 호기심만 많은 아이를 무시하는 학교와 선생님들에게 화가 난 어머니가 아이를 집에서 직접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아이의 머리가 썩었다느니 저능아라느니 아이를 무시했지만, 어머니만이 그를 이해해주고 믿어주었습니다. 아이는 선생님이 아닌 어머니 낸시의 말을 믿고 순종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자신이 믿는 대로 되었습니다.
어머니만큼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머니의 말씀은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믿고 순종 해야 합니다. 사랑의 말씀은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자신이 피땀 흘려 만든 작품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창조자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결국 창조자의 본 모습을 알아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창조자의 사랑이 피조물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성령’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라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의 말씀에 “아멘!”(Fiat)이라고 하시는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께서 잉태되시는 것과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 안에 말씀을 잉태하게 하신 성령께서는 이제 성모 마리아께서 방문하신 엘리사벳도 성령으로 가득 차서 태중의 아기도 기뻐 뛰게 하셨습니다. 에디슨도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사랑의 힘으로 커다란 업적을 이뤄내고 기뻤을 것입니다. 이 기쁨이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성모님께서 ‘마니피캇’을 노래하실 때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심을 바라보는 순간입니다. 에디슨이 “얘야,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정말 실현하고 나서야 어머니의 마음을 볼 수 있게 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에 먼저 순종하고 나서야 그 뜻을 이해하고 그렇게 말씀하신 분의 마음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보아야 진정으로 그 사람을 본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말씀 묵상이란 말씀을 해석하기 위함이 아닌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을 듣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라고 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기 위함이 아니라 순종 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믿음의 순종은 이해가 되어서가 아니라 겸손해서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의 말씀은 순종 하였을 때 ‘기쁨’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럼으로써 진정 그 말씀을 하신 분의 본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묵상을 통해 성경에서 어떤 새로운 진리를 찾아내려 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말씀에 순종 하기에 합당한 겸손을 기르기 위함이 묵상 기도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라고 하신 말씀은 해석이 아닌 순종 해야만 행복할 것이란 뜻입니다.
진리의 본모습은 이렇게 순종 하는 이에게서 드러나고 자기가 만든 거짓된 세상에서가 아닌 진리의 세상 안에서 사는 사람은 그 창조자의 목적대로 변화되어갑니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휴대전화가 울립니다. 휴대전화의 주소록에 등록되지 않은 ‘053’으로 시작하는 지역번호로 시작하는 번호였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저의 경우는 받지 않고 ‘수신 거부’를 합니다. 제가 사는 곳 지역번호는 ‘032’이고, 지역번호 ‘053’은 대구이니 저와 아무런 연관이 없기 때문이지요. 혹시 강의 문의로 전화한 것인가 해서 받은 적도 있었지만, 항상 스팸 전화나 보험, 대출 권유의 전화였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전화를 받았다가 ‘이렇게 좋은 상품을 받으려고 하지 않느냐?’면서 상대로부터 무시하는 말을 들으면서 기분이 아주 안 좋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제는 무조건 모르는 번호는 ‘수신거부’합니다. 이제 전화로 인한 스트레스는 없어졌습니다. 하긴 택배도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품이나 수취거부를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내뱉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도 이런 방법을 쓰면 어떨까요?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내게 다가오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힘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처를 만들지 않고 돌려주면 됩니다. 자신이 받지 않았으니 내 것이 아니라, 상대의 것이 되고 맙니다.
많은 성인 성녀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가까이에 두고 또 죄를 받아들이면 사랑이신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의 유혹이 다가왔을 때, 흔쾌히 받아들여서 나의 죄가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거부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달콤한 유혹이고, 정말로 내게 큰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예 발을 내딛지 않도록 시작부터 거부해 버리면 갈등의 시작도 없습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주님의 사랑은 당신의 생명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시는 너무나 큰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 이후 많은 혼란에서 힘들어할 제자들을 위해 성령을 약속해주십니다. 이 성령을 보내시어 사도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성령은 과거에 일회적으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따라서 이 성령을 받은 우리는 용기를 내서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죄와 악은 철저히 수신거부하고 선이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1독서에도 나오지만, 과거 사도들이 박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과만 함께하는 사람은 이렇게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이가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작은 일을 소중히 여겨라. 모든 것은 사소한 일에서 출발한다. 씨앗이 하늘을 찌르는 큰 나무가 되는 것을 보라. 행복도, 불행도, 성공도, 실패도 모두 그 처음은 조그만 일에서 시작된다(랠프 월도 에머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