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내용을 삭제하지 마세요!!
(아래 선 아래에 글을 올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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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혁재(혁명재판소)의 아버지 재판에 나는 한번도 빠지지않고 출석하여 작은 것도 놓치지않고
경청해 보았다. 세세히 다 알아들을 수도 없던 어려운 부분이 많았지만 이해하려 최선은 다하였다.
재판이 시작하기 전에 피고인들이 줄줄이 수갑을 차고 들어와 앞줄에 앉고 조금 후엔 정복차림의
남자가 '일동 기립'하고 외치면 피고인들이나 방청객들이나 모두 빳빳하게 서있어야했고 조금 후엔
법복을 입은 재판관들이 한명 씩 들어와 착석이 끝나면 '착석'이란 구령과 함께 모두 의자에 앉았다.
미리 주의를 받은 대로 우리는 모두 재판 중 잡담을 하거나 삣닥한 자세로 앉거나 반항적인 어떤 행동
도 엄격히 금지돼 있었다.
법관들이 들어오는 순서 앉는 자리 모두 정해져있어 점점 낯이 익게 되었지만 이름들은 알 수 없었다.
제일 먼저 들어오는 판사는 가운데 착석을 하고 그다음 들어오는 자들은 그 좌우 그 마지막은 각 맨
가장자리 끝에 총 다섯명이 앉는데 모두 권위적인 차가운 얼굴들을 하고 있어 무서운 분위기를 조성
해 내고 있었다.
나중에 어떤 뉴스에 그 법관들 사진이 한번 나오는데 맨 오른 쪽 가에 앉아있던 젊은 사람은 이회창
이라 하였다. 당시 26살의 그 중 최연소였으니 아직 큰 말빨은 없었겠으나 그의 정치적 입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경기중고 서울법대 미 버클리대학원 출신이라는 대표적 우익 코스로 그의 앞날
은 이미 승승장구로 예약돼 있었던 것이다. 그의 별명은 그후 시종 '대쪽 판사'라 불리웠는데 그것은
그가 사리사욕이나 정권의 입김에 억메이지 않는 대쪽같은 양심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행로로
보아 피고들에게 조금의 인간적인 동정이나 여유를 주지않는 줄곧 혹독한 판결을 내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법관들 의석은 방청객들보다 한단계 높은 위치에서 권위적인 표정으로 피고인들을 차겁게
내려다 보는 자리인데 어린 내게 그것은 너무나 불합리해 보였다. 누가 누구를 심판하고 벌준다는
말인가? 그들은 모두 일본군장교였던 자가 권력을 잡은 정권하에서 엄청난 권위를 부여받고 흰 한복
을 입고 수갑을 차고 앉아있는 피고들을 벌준다는 것인데 그 피고라는 분들은 한결같이 평생을 항일
투쟁을 한 애국투사였거늘.. 그들의 처지는 뒤바뀌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다른 법관들도 비슷하겠
지만 이회창 부친도 일제시대에 법관 출신이었으니 필경 그 때에도 조선의 항일투사들에게 '대쪽같은
형'을 때렸을 것이다.
그 이후 이회창은 예상대로 승승장구 정치인으로 부상하여 대선까지 올라갔으나 북풍총격사건 조작과
두 아들 병역면제사건으로 발목이 잡혀 실패한다. 김대중과의 경합에서 근소한 표 차이로.
이회창은 어느 자리에서 가까이 보니 진짜 대쪽이란 별명처럼 여유란 조금도 없는 좁은 얼굴과 왜소
한 체구로 전체적으로 팍팍한 인상이었으니 그가 대통령이 안된 것이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쪽이란 그가 다스리는 상대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그 자신은 총풍사건을 조작할 만큼 양심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으니.
혁명재판정 광경
피고인들이 수갑을 차고 들어오는 순서는 항상 정해져 있었는데 앞줄 맨왼
쪽이 민족일보 조용수사장 그다음이 송지영, 아버지 이종률, 안신규 순이다.
아래 앉아계신 순서도 마찬가지.
혁재에선 조용수가 민족일보를 창간하면서 재일 간첩 이영근(李榮根)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창간되었다고 주장하나 이영근은 그 한참후인 '90년에 조국을 위해 일한 공로로 인정받아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추서받았으니 정부가 스스로 그가 간첩이 아니란 것을 인정해준 셈이다.
이영근과 조용수는 조총련(朝總聯)계가 아니고 둘다 민단(民團)출신인물이었다는 것도 나중에
밝혀졌는데 박정희는 그 때 정말 몰랐을까.
이영근은 자신이 간첩이 아니란 것을 밝히려 일본에서 입국하려 했는데 한국정부에서 그의 입국
을 극구 막았으니 그 재판과정을 지켜보던 어린나도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증인입국을 막다니..
조용수는 민족일보 창간 자금은 일본에 계신 그의 장인이 댄 것이라 주장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송지영(사진에서 조용수와 아버지 사이에 계신 키가 작으신 분)선생의 증언을 묵살했고 그 외
에도 몇몇분도 같은 증언을 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편집국장을 맡으신 아버지는 창간 전부터 민족일보는 국내자본을 이용해야한다고 주장하시고 실지로
대구에서 오랫동안 활동 중인 아버지의 친지인 한 재벌로부터 그 약속도 받아놓고 계셨는데 조용수는
아버지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 만약에(아무리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가 대 선배인 아버지 말씀을
따랐더라면 그런 비극까진 안일어났으리라. 그래도 박정희는 무슨 다른 명목으로라도 민족일보를 탄압
했을 것이고 또다른 희생양을 만들어냈을 테지만.
아버지는 그 후 민족일보에서 손을 떼시고 민자통운동에만 전념하셨는데 만일 계속 민족일보에
계셨더라면 틀림없이 조용수와 함께 사형당하셨으리라.
한참 후에 언론에선 "박정희, 민족일보를 그의 좌익경력의 세탁용으로 삼다"
"박정희는 '빨갱이 사냥'으로 미국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라 떠들었지만 당시엔 끽소리 못하고
모두 입닫고 있었다.
민족일보의 사설에선
"반공임시특별법은 물론 보안법 보강시도도 아예 포기하라"
"남북학생회담 실현을 위해 지원하라"
"민통련서 학생회담 구체안을 제시"
"통일은 먼저 남북교류로 시작하자"
"우선 체육교류부터 시작하자"
등의 참신한 글을 올리니 당시 국내 가장 부수가 많이 올라가던 동아일보보다 훨씬 판매부수가
많았으니 정권에선 이러다 잘못하면 통일이 될라 하는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첫댓글 어린 나이에도 언니는 참 당찼습니다..
아버지께서도 훌륭하시고...
역사적으로 드러나서 재평가 받아야합니다..
거꾸로 된 세상이 참 가혹하군요.......
험난한 평생을 보내셨으니 이제 부산대에서 편안히 말년을 보내셔도
누가 머라하진 않을 텐데 기어코 서울가셔서 다시 쇠고랑을 차고
사형구형을 받아가며 가혹한 징역생활로 들어가시다니 인간적으로
참으로 힘든 삶을 사신 것 같습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셔서 끝내 민족의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못보시고
그리고 그리도 염원하던 통일도 못보고 가셨음이 가슴아픕니다.
산비탈 마실 갔다가 좋은 글 잘 보고 가네요.....잊혀저 간다는 것이 더 비극이고,....다욱 더 가슴 아픈 것은 뉴라이트 가치관이 범람이지요.......
박정희 일본군 출신 5.16 반란 추종자들 거의 일본군 출신
이회창도 당연이 민족 배반도 출신
아나 거의 친일파 출신 이나라의 요직은
거의 친일파와 왜구들 점령
원칙과 양심에 따라 행하는 사람들 없소이다
통일은 무조건 방해 남북 전쟁 도모
적어도 민족주의 사람 노무현 김대중은 남북화합 차원
왜구와 친일파들은 남북전쟁 도모
박정희 역시 친일파
그리고 글은 갈무리 했네요
두고 두고 볼 내용 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