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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말씀 19,16ㄴ.19-21>
그 무렵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19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20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21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 5,1.13-18>
형제 여러분,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13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15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한다면, 서로가 파멸할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16 내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17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18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51-62>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57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함당하지 않다.”>
오늘 말씀의 전례의 주제는 부르심과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이 부르심과 응답의 과정, 아니 끊임없는 부르심과 응답으로 이루어진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1독서는 예언자 엘리야가 엘리사를 후계자로 부르는 장면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기 겉옷을 걸쳐주며, 예언자 직분과 권한과 능력을 전해줍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먹게 하고, 엘리야를 따라나섭니다.
그야말로 다시는 그 일터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위해 모두를 버리고 따라나섭니다.
제2독서는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으니, 육의 욕망을 채우기보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라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습니다.'(루카 9,51).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루카 9.54)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예수님과 그러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봅니다.
혹 우리도 우리를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려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제자들의 부르심에 대한 내용을 전해주는데, 제1독서와는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급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하시며 내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당신을 따르도록 부르셨는데, 그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하시고, 또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이에게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함당하지 않다.”(루카 9,62)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당신을 따라나서겠다는 사람을 내치시는가 하면, 당신이 부른 이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일도 허락하지도 않으시고,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바로 여기에 참된 제자 됨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첫 번째의 사람을 내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낮고 겸손한 진정한 제자의 삶에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또 당신이 부르신 이가 ‘먼저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고자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당신을 따르는 삶은 죽음의 나라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 나라의 삶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하는 것을 거절하신 것은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는 말씀이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그를 '하느님 나라'로 부르시며,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자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이는 예수님이 제시하고 계시는 “하느님 나라”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당신을 따르겠다는 나선 첫 번째 사람을 통해서는 하느님 나라는 섬김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임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을 따르는 길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낮고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삶임을 드러내줍니다.
당신이 부르신 두 번째 사람을 통해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은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죽은 이들의 나라가 아니라 생명의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선포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당신이 부르신 세 번째 사람을 통해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쟁기를 가는 일임을, 곧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이 당신을 따르는 제자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 곧 부르심 받은 이가 가야 하는 길, 그것은 부르신 분이 선사하시고 함께 이루시고자 하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자 되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하오니, 주님!
제 손이 당신 말씀의 쟁기를 잡고 당신 나라의 밭을 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루카 9,62)
주님!
당신은 저의 탯줄, 저의 보금자리, 저의 무덤이오니 제 머리가 항상 당신 가슴에 기대어 있게 하소서.
제 몸이 당신 밭에 머물게 하소서.
제 손이 당신 말씀의 쟁기를 잡고 진리의 밭을 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의 담금질>
어제는 공교롭게도 사도들이 큰 풍랑 때문에 겁을 내고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꾸짖음을 듣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복음은 우리 교회가 세상이라는 바다를 배 저어 갈 때도 세상으로부터 큰 도전을 받고 인간적으로는 크게 흔들릴 수도 있지만 그런 때일수록 하느님께 믿음을 둬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약한 믿음 때문에 제자들이 풍랑에 겁을 내고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고, 베드로 사도도 틀림없이 예외가 아니었을 터인데,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반석으로 삼아 당신의 교회를 세운다고 하십니다.
약한 믿음은 반석과는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처음부터 교회의 반석였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는 차츰 교회의 반석이 되어간 것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차츰 교회의 반석이 되어갔을까 이것이 요점입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흔들리면서 반석이 되어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 약하기에 흔들리지만 흔들림으로 인해 믿음이 단단해졌다는 역설입니다.
물론 흔들림으로 인해 믿음이 아예 뿌리채 뽑힐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 그는 자기 입으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자기 스승 예수 그리스도가 확 죽어버렸습니다.
너무도 힘없이 죽어버렸고 속절없이 그리고 부질없이 죽어버렸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믿음이 뿌리채 뽑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힘없이 그리고 속절없이 죽어버리셨다는 것은 맞지만 부질없이 죽어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부질없다는 것이 지금은 쓸데없이 공연히 한 짓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본래는 대장간에서 불질이 없으면 담금질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질을 하고 물질을 해야 담금질이 되는 것입니다.
불질로 뜨겁게 했던 쇠를 물질로 차갑게 식히지 않으면 담금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불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있어야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믿음도 그렇고 우리의 믿음도 그런데, 믿음의 좌절이 바로 믿음의 담금질이고 하느님의 담금질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으면 제자들의 부활 신앙은 애초부터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었으니, 주님의 죽으심과 그로 인한 제자들의 신앙 좌절은 부활 신앙을 위한 담금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면 믿음의 좌절이 문제가 아니라 좌절 다음에 믿음이 다시 불타오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질과 물질에 이어 또 불질과 물질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신앙을 다시 타오르게 하시고 이 체험을 통해 부활 신앙의 근간을 형성해주셨으며, 그래서 후에 또 좌절을 겪을지라도 다시 불질을 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반석 위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신앙을 키워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반석과 기둥이 되어준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축일을 특별히 기리며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담금질하기로 다짐합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을 닮은 삶>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한 한 주간되시길 빌며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기쁨충만 하시길 희망합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길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에게 정복당한 북왕국 이스라엘에 정착한 토착민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리짐산에서 하느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자기들만의 성전을 그곳에 건립하였습니다.
이 믿음이 장벽이 되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다인 사이에는 적대감으로 인한 싸움도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냉대를 받으시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사실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태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지냈는데 그들의 태도는 지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눈먼 이들을 보게 해 주시고,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들의 생명을 파괴하러 오지 않으시고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 안에서 원수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 있는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보면 오해도 있고, 모함과 시기질투, 미움과 싸워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겨내는 승리의 길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시며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냉대하는 마을을 피하여 다른 마을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무와도 맞서지 않고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목적지를 향합니다.
그의 목적지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누가 반대를 하든 상관없이 당신의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가야 할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마음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일에 직면할 때 예수님의 처신인지? 아니면 요한이나 야고보처럼 격하게 반응하고 있지 않은지?
사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통해서 내 마음의 너비와 폭, 깊이를 보게 됩니다.
그는 어떻게 보면 은총의 도구입니다.
개구리는 개굴개굴 울다가도 위협을 느끼면 소리를 멈춥니다.
안전하다 싶으면 또 울지요.
강아지는 먼저 짖어대고 그 다음에 자기에게 유익할 것 같으면 꼬리를 칩니다.
우리 신앙인의 처신은 일단은 침묵하고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논어의 ‘선진’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공자께 여쭙니다.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그러자 공자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곧장 하다니?”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는냐는 말씀입니다.
제자 ‘염유’가 똑같이 묻습니다.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십니다.
“들었으면 곧장 해야지!”
이에 ‘공서화’가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는 까닭을 묻자 공자께서 대답합니다.
“염유는 물러서는 사람이라 나가게 했고, 자로는 나서는 사람이라 물러서게 했다.”
참 스승은 상대에 따라 다르게 대답하십니다.
눈높이를 맞춰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길을 떠나고 냉대를 받으며 가정이라는 안전한 처소조차 없이 지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이는 말합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시며 우선순위에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하는 이에게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시며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서로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게 얘기하고 있습니까?
자녀에게, 이웃에게 내 것을 강요하고 가르치려는 욕심을 부리지는 않나요?
자녀들도 큰 아이, 작은아이가 받은 탈랜트가 다릅니다.
상대를 위하기보다는 내 유익을 먼저 챙기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어른과 어린이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시죠?
어른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 선포는 다른 어떤 일에도 우선합니다.
주님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은 입으로 선포되기도 하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의 모범, 표양을 통해 선포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삶’, ‘육을 거스르는 삶’을 통하여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당부하셨습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9)
왜 그러셨을까요?
철저한 ‘무소유’는 가진 것으로 행세하는 세상에서 세상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한 눈 팔지 말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다른 헛된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해야 할 일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은 정처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이미 지나간 일에 매여 있어도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를 자꾸 돌아보아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마침표를 찍은 것에 대해서 물음표를 달지 마십시오.
그분께는 오직 ‘지금 여기’가 유일한 삶의 자리였습니다.
우리도 약속된 천상의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천상은 여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여기서 열립니다.
그러므로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드십시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갈라티아 5,13)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사랑을 사는 나의 처신에 따라 복음이 선포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
(1요한 4,12)
서로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제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병을 치유하는 기적을 하고 예수님께 와서 자랑을 하였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루카 10,20)
사랑의 사람으로 하늘에 기록되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살아있다는 증거: 살릴 수 있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하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 나라를 전하지 않는 이들이 죽은 이들이란 뜻입니다.
살아 있지만 사람이 영적으로는 이미 죽어있을 수 있습니다.
좀비 영화 ‘웜 바디스’(2013)에서 인간 세상은 ‘인간-좀비-보니’의 세 부류로 나뉩니다.
좀비들은 인간을 먹습니다.
죽은 존재들입니다.
보니는 그렇게 지내다 인간성을 아주 상실한 지옥의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좀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좀비를 두려워하면 이미 그도 좀비입니다.
이 영화에서 한 남자 좀비는 한 여자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희생합니다.
좀비는 피를 흘리지 않지만,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니 심장이 다시 뛰고 피가 생겨납니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죽어가는 이를 위해 생명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려면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먹히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은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산 사람은 사람을 살립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03회에서는 중1 딸 금쪽이가 나옵니다.
이 아이는 친한 친구와는 서슴없이 음식을 먹고 말을 하지만, 친하지 않은 친구가 있으면 함께 빙수에 숟가락도 담그지 못하고 말도 하지 않고 손짓으로만 합니다.
이 일을 당하는 친하지 않은 친구는 얼마나 기분이 좋지 않겠습니까?
할아버지 장례식장에 가려고 학교에 전화를 걸어 나오라고 했는데 보안관 선생님에게 문을 열어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여 엄마가 아이를 데리러 왔어야 했습니다.
이 아이는 절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버스를 탈 때도 입과 몸이 얼어버려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 탔다가 다시 내립니다.
심지어 커피도 한 잔 주문하지 못합니다.
엄마도 속이 타겠지만, 사실 이것은 제가 볼 때 엄마에게서 왔습니다.
엄마가 불안증이 좀 있었던 것 같고 아이를 살리려 하기보다는 나부터 생각하는 말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말합니다.
“네가 학교 가서 말 못하면 엄마가 제일 힘든 거야, 그래 안 그래?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이것은 아이를 살리려는 마음이 아니라 엄마가 살려는 마음입니다.
어머니도 불안증이 있어서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딸은 겪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모든 것을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기게 되었고, 그렇게 엄마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존감 없는 아이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좀비에게서 좀비가 태어납니다.
그렇다고 기분 나빠 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좀비로 시작합니다.
다만 누군가를 위해 내 피를 흘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를 만들어 우리 본성을 상승시킬 수 있을 뿐입니다.
좀님이 되려면 인간에게 먹히시기 위해 오신 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도 그리스도처럼 복음을 전하며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살려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살리려는 사람이 산 사람입니다.
드라마 ‘굿 닥터’에 자폐성 장애 3급,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박시온이란 의사가 나옵니다.
그는 어렸을 때 토끼를 잃고 형도 잃어 죽음의 고통을 잘 압니다.
다시는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죽어가는 이를 살리려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처음엔 실력파 교수인 김도한이 박시온을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자신의 두려움 때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박시온에게 형처럼 애정을 가지게 되자 그도 이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산 사람이란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내가 이웃을 살리려는 삶입니다.
복음은 내가 죽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살려면 생명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내가 살려고 하면 다른 이의 생명이 나에게 흘러들어옵니다.
물을 퍼내지 않으면 마르는 우물처럼 나에게서 생명이 나가지 않으면 나는 썩은 물이 됩니다.
심지어 다른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게 하면 그 우물은 마치 뱀이나 독충이 우글거리는 우물이 됩니다.
실제로는 죽은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산 우물이 됩시다.
다른 이들이 내 우물에서 생명을 얻도록 합시다.
그래야 산 사람입니다.
성장은 피 흘림의 두려움이 없는 분을 사랑함으로써 나도 이웃을 살리기 위해 흘리는 피가 두렵지 않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 복음을 전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들의 마을로 심부름꾼들을 보내신 것은 당신과 제자들의 식사와 휴식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아마도 그 심부름꾼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였을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려는 것이 아니라 잠시 쉬면서 식사를 하려고 한 것인데도 사마리아인들이 거부한 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적대감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맞아들이지 않았다.’ 라고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심부름꾼들을 심하게 모욕하고 학대했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는 두 사도의 말은 뜻으로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겠습니다.”입니다.
두 사도는(아마도 사도들 모두가) 사마리아인들이 한 짓은 ‘천벌’을 받아야 할 죄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두 사도가 실제로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서는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꾸짖으신 것은 그들의 생각과 말이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당신의 가르침을(루카 6,27-28)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냥 다른 마을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마리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루카복음 8장에 있는 ‘마귀들과 돼지 떼’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주민들에게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게라사인들의 지역 주민 전체가 예수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주십사고 요청하였다. \
그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 되돌아가셨다.'
(루카 8,37)
‘요청하였다.’ 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뜻으로는 ‘요구하였다.’입니다.
게라사인들은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예수님을 쫓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도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29-30)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쫓아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분명히 폭언과 폭행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것은 유대인들과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 때문인데, 그것은 자기들만이 옳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적대감이었습니다.
게라사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변화’를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유대인들의 선민사상과 특권의식 때문입니다.
그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모두 예수님 쪽에 무슨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 쪽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부당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그냥 떠나신 것은 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은 사람들이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일 자체가 그들에게 내린 ‘벌’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자기들 스스로 버림받는 벌을 선택했습니다.
아니면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루카 9,57-58)
이 이야기를 앞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로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시는 것을 보고 오히려 마음이 움직여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혹시 그는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불살라 버리겠다.” 라는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의 말 때문에 자기도 그런 능력을 갖고 싶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말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뜻인데, 그의 말은 최후의 만찬 때 베드로 사도가 했던 말과 비슷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루카 22,33)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그날 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22,54-62).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실제로 ‘죽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성급하게 한 말이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의 경우에도 ‘진심으로’ 한 말이었을 텐데, 그 말을 그대로 실행할 준비는 덜 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나의 삶은 여우들과 새들보다 못한, ‘몹시 고달프고 힘든’ 삶이다. 네가 나를 따르려면 그런 생활을 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도 나를 따르겠느냐?” 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는지, 그냥 떠났는지, 그것은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생활과는 거리가 먼, ‘좁은 문’을 향해서 가는 생활이다.
그런 생활을 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제자의 삶 - 사랑, 이탈, 따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도다.”
어제 저녁 성무일도 시 흥겹게 불렀던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긴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다. 눕고 싶구나.”
석가모니의 마지막 임종 장면이다.
죽음은 내가 걸어가는 ‘저 모퉁이’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의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러하듯 나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김수영을 비판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김수영의 일상을 간과했던 탓이다.
김수영의 일상은 소민적 모양새였지만, 그것은 ‘살아돌아온 자’의 치열한 일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누군들 일상을 견디는 장사가 있으랴.
세상은 아주 조금씩만 나아져 간다.
그래서 세월이 답답하고, 지난 자취는 흔적도 없이 잊혀가고, 먼지같은 개인은 늙고 시들고 사라져 간다.
이것이 남루하지만 숙연한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
어제 읽은 대목입니다.
이 글을 쓴이는 황석영 작가이고 그는 김지하 시인이고 김수영은 그 유명한 ‘풀’의 시인입니다.
세 분 다 대가(大家)의 반열에 드는 참 치열하게 산 분들입니다.
일상을 견디지 못해 변절이요 변질이요 부패요 속절없이 무너지는 삶입니다.
참으로 깨어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이 치열하게 절박하게 주님의 참제자답게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누가 뭐래도
하늘이 무너져도
나 불암산의 옹달샘으로 머물으리라
확장도 개발도 홍보도
그 무슨 인위의 장식도 없이
자연 그대로의 옹달샘으로 나 머물으리라
님 안에 숨어 사는
옹달샘으로 나 머물으리라
목마른 이들에게 샘솟는 생명수가 되리라.”
- 1997.4.3.
치기(稚氣) 어린 여기 이 자리에서의 25년 전 고백이었지만 예나 이제나 끊임없이 샘솟는 '옹달샘의 영성'은 제가 희구(希求)하는 삶입니다.
이와 더불어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의 영성' 역시 제가 희구하는 삶입니다.
엊그제 많은 비가 내린 후부터는 노래하며 맑게 흐르는 맑은 불암산 계곡물을 보며 산책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동요도 불러보며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처럼 끊임없이 한결같이 주님을 따라 참제자로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합니다.
긴 듯 하지만 짧은 인생이 흡사 인생휴가(人生休暇)처럼 생각됩니다.
10일간 휴가 떠났던 도반이 귀원했습니다.
출발할때는 긴 듯 했지만 금방이듯 인생휴가도 그러할 것입니다.
“집에 오니 참 편하다.”
얼핏 스치듯 순간 들은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인생휴가 참 치열하게 잘 살다가 본향집인 주님의 집에 도착했을 때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참 제자의 삶'입니다.
오늘은 교황주일입니다.
모든 교황님들이 그러하지만 특히 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참제자의 모범입니다.
온전히 자기를 비운 주님 추종의 삶을 사시는 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참제자로 살 수 있을까요?
첫째, 사랑입니다.
주님께 대한 열렬한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런 이들을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오늘 제1독서 중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에서도 우연같겠지만 엘리야는 첫눈에 엘리사의 내적 주님 사랑을 직감했음이 분명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하는 엘리사의 모습이 이를 증명합니다.
제1독서 마지막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엘리사는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파부침선(破釜沈船)의 결연한 자세를 느끼게 하는 장면입니다.
파부침선은 밥짓는 가마솥을 부수고, 돌아갈 배도 가라앉히고 결사의 각오로 싸움터에 나서거나 최후의 결단을 내림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대로 스승 엘리야에 대한 엘리사 제자의 신뢰와 사랑을 반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도상의 절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합니다만, 첫째는 에둘러 거절하고, 둘째와 셋째는 당신의 제자로 택하시려 하는데, 분명 이들의 당신 향한 사랑을 직감했음이 분명합니다.
둘째, 이탈(離脫)입니다.
억지로의 이탈은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봤을 때,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 선명할 때 저절로 이탈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이탈이, 버림이 뒤따릅니다.
이탈의 사랑, 이탈의 무욕, 이탈의 자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신선한 감동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한결같이 이탈의 자유를 선택하여 종살이의 멍에에서 벗어날 것을 명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
과연 이런 정처없는 무집착의, 이탈의 삶을 살수 있겠느냐 에둘러 답변하며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의 청을 거절하는 주님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역시 일상사에 초연한 이탈의 삶을 명하시는 주님이시며,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그 목표임이 환히 드러납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이, 비전이 이탈의 동인(動因)임을 깨닫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셋째 경우 역시 과거를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며 당신을 따라 이탈의 초연한 삶을 살것을 명하시는 주님이시며, 역시 하느님 나라의 꿈과 비전이 이의 동인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이 강렬할수록 자연스런 이탈의 삶임을 봅니다.
셋째, 따름입니다.
1.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2. “나를 따라라.”
3.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셋 다 주님을 따르겠다 하나 첫째는 에둘러 거절당했고, 둘째와 셋째는 지체없이 세상사에 연연하지 말고 당신만 보고 따를 것을 명하십니다.
새삼 주님의 참제자로서의 삶은 '따름의 여정'임을 알게 됩니다.
부단히 안팎으로 버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며 평생 주님을 따르는 여정입니다.
이에 대한 바오로의 가르침이 고맙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바로 따름의 여정의 내용을 보여 줍니다.
막연한 따름이 아니라 이탈을 통해 얻은 자유는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데 쓰라는 것입니다.
따름의 여정은 사랑의 섬김의 여정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좋고 유익하며 적절한 말씀인지요!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며 더불어 주님을 따름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 역시 따름의 여정에 귀한 영감을 제공합니다.
따름의 여정은 성령의 인도 따른 여정임을 또 깨닫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육의 욕망에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따라 주님 따름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제자에게 따름의 여정은 사랑안에서 섬김의 여정임을, 성령의 인도에 따른 여정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참으로 살고 싶습니가?
주님의 참제자답게 사십시오.
참제자로 살아갈 때 참기쁨이며 참행복입니다.
사랑의 여정, 이탈의 여정, 따름의 여정의 삼위일체로 이뤄지는 참제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따라 자기를 비우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며 참제자의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
(시편 16,1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그동안 큼직큼직한 대축일들이 이어지면서 축제의 분위기를 실컷 누린 우리는 이제 연중시기의 차분하고 조촐한 행복 속으로 안착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크게 '배척받으신 예수님'과 '부르심'이라는 두 내용이 담긴 듯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주제로 흘러갑니다.
복음의 시작은 자못 비장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예수님의 방향성이 당신의 지상 사명을 완성하실 '때'와 '장소'로 정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거쳐가려는 사마리아인의 마을에서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루카 9,53)으니까요.
이에 혈기 넘치는 제자들이 발끈해서 그 마을을 불살라 버리는 게 어떨지 여쭙다가 혼쭐이 납니다.
제자들은 그간 스승에게서 드러난 기적과 표징에 우쭐한 데다가, 아직은 예언자의 운명, 즉 모욕과 수모, 없신여김과 배척, 거부 등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한 악의 '종살이의 멍에'(갈라 5,1)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왔건만 자기에게 영광이 돌아오지 않는 순간을 맞닥뜨리자 보복과 징벌, 저주의 심보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루카 9,55)
과연 예수님의 태도가 자유인답지 않습니까?
불필요한 소모적 분쟁을 피하고 온전히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온유한 개방성이 느껴집니다.
지나친 자기애와 자기 영광에 사로잡힌 이는 그것을 인정받지 못하면 분노하고 증오하며 응징하려 하지만, 타인의 거부와 모욕이 자기의 존재적 가치를 훼손할 수 없음을 아는 이는 그보다 더한 공격이 와도 막힘없이 거침없이 흐릅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라 5,13)라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처럼, 악이 조장하는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악에게 악으로 맞서지 말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종살이의 멍에를 벗어버린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일 겁니다.
이제 복음은 '부르심과 응답'의 내용으로 흘러갑니다.
예수님과 그 일행이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가는데"(루카 9,57) 여러 사람들이 다가와 주님을 따르겠다고 청하자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이는 마땅한 거처조차 없는 예수님의 가난을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오늘의 문맥 안에서 각도를 조금 달리 해 본다면, 먼저 일어난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따름'의 지향이 자기 영광이어서는 안 된다는 걸, '머리를 기댈 곳'이라 우회적으로 표현을 하시는 듯합니다.
그 안에는 종교나 단체, 소명에 응답할 때 안정감과 명예, 신분 보장, 자기 영광의 지향을 품고서는 곤란하다는 뜻도 들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수난과 고통, 죽음에 이르는 참 예언자의 길, 주님의 길로의 초대이기에 그렇습니다.
각각의 사람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답변이 각각이지만 기본 줄기는 같습니다.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루카 9,60)
이 말씀이 너무 냉정하게 들리십니까?
교회 안의 신분적 부르심뿐 아니라 신앙 안에서 나눔과 헌신, 참여의 부르심에서도 마찬가지로, '따름'을 위한 '떠남'의 순간에는 가정사, 인간사, 세상사에 얽힌 모든 것이 다 내 책임 같아 망설이고 주저하고 지연시키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인데 말입니다.
여기서 "내버려 두라."는 말씀은 회피나 외면이 아니라 원래 그 일을 주관하고 계신 하느님 손에서 그 일을 빼앗지 말고 그분 손 안에, 원래 자리에 놓으라는 뜻일 겁니다.
벗님도 체험하신 적이 있으시겠지만 부르심은 내가 응답하고 떠나는 순간 나의 빈 자리를 하느님께서 대신 채워 주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제1독서는 엘리사의 소명 이야기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걸쳐 준 '겉옷'(1열왕 19,19)은 자리, 신분, 역할, 지위 등을 모두 포함하는 '예언자의 소명'을 의미하지요.
건강하고 안정되고 활기 넘치는 일상의 터전에서 부르심을 받은 엘리사는 "겨릿소를 잡고 쟁기를 부수어"(1열왕 19,21) 그간의 축복을 주님께 되돌려 드린 뒤 미련없이 떠납니다.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1열왕 19,20)
그저 짐작입니다만, 겨릿소 열두 마리를 부려 자기 밭을 경작할 정도면 크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었을 것 같습니다.
열둘이 의미하는 완전성을 보건대 나름 충만한 삶이었을 것도 같고요.
그런 그가 다 버리고 떠나와 엘리야를 시중 듭니다.
고작 누구 한 사람의 시중이나 들자고 그걸 다 버리냐고요?
엘리사의 응답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목소리가 되겠다는, 그 길에서 배척과 조롱과 죽음까지 불사하겠다는 비장한 응답입니다.
그러니 당장 주어진 일의 귀천이나 중요도를 따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하느님의 일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 부르심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 긴 여정입니다.
생애 전체를 결정짓는 부르심도 있고 일상 안에 동행하시는 주님의 속삭임과 이웃을 통한 메시지까지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갈라 5,16) 우리는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기대하시는 바를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고 있나이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복음 환호송)
이처럼 매일 매순간 당신을 알아듣도록 우리에게는 말씀, 생명의 말씀이 주어졌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축복을 만끽하는 한 주간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현대인들의 사망 원인 1위는 ‘암’이라고 합니다.
통계를 보면 30초에 한 명 암이 발생하고 60초에 한 명 암으로 사망한다고 합니다.
하루에 2,880명이 암에 걸리고, 하루에 1,440명이 암으로 사망한다는 의미입니다.
1년에 1,051,200명이 암에 걸리고, 1년에 525,600명이 암으로 사망한다는 의미입니다.
현대의학은 암을 이겨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암치료와 예방을 위해서 100조 이상의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암은 현대인을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하는 질병입니다.
암은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힘들게 하는 질병입니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사용하면서, 수많은 의사들이 연구를 하면서 암을 극복하려고 하는데, 암은 여전히 사망원인 1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암에 대한 우리의 접근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의학은 암을 치료하는 데 3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수술로 종양을 잘라내는 방법, 항암제를 사용해서 종양을 죽이는 방법, 방사선을 통해서 종양을 태우는 것입니다.
수술을 잘해도 암으로 재발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항암치료는 삶의 질을 떨어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항암치료는 암세포는 물론 정상세포에도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방사선 치료 역시 정상세포에게도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수술을 했지만 재발해서 다시 병원으로 오는 환자를 보는 의사의 마음도 아프다고 합니다.
조류독감, 구제역, 메르스로 해마다 많은 닭과 돼지들이 죽는 것을 봅니다.
그 원인은 바이러스에 있겠지만 닭과 돼지를 기르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좁은 공간에 많은 닭과 돼지를 기르는 방법, 충분히 잠을 못자는 환경, 아예 운동을 못하는 공간, 항생제와 호르몬이 섞인 사료를 먹는 닭과 돼지들은 바이러스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야생에서 기르는 닭과 돼지는 조류독감, 메르스, 구제역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걸리더라도 곧 회복된다고 합니다.
자유로운 공간에서 충분히 운동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잘 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면역력이 강하기 때문에 바이러스를 이겨낸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암에 취약한 것은 암세포가 강해서가 아니라 현대인들의 생활방식에 문제가 많다고 합니다.
지나친 육식, 가공식품, 지방섭취는 우리 몸의 면역력을 떨어트린다고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역시 우리 몸의 면역력을 떨어트린다고 합니다.
지나친 음주와 약물 복용도 우리 몸의 면역력을 떨어트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닭과 돼지를 좁은 우리에 가두어 기르고 항생제와 호르몬이 섞인 사료를 먹이면서 닭과 돼지의 면역력이 약해졌듯이 현대인들의 생활방식은 암세포가 자라기 쉬운 상태라고 합니다.
자연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닭과 돼지들이 바이러스의 공격에 면역력이 강하듯이, 생활습관을 바꾸면 암에 잘 걸리지 않고, 암이 생겨도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의사를 3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병을 약으로 고치는 의사를 약의(藥醫)라고 합니다.
병을 음식으로 고치는 의사를 식의(食醫)라고 합니다.
병을 마음으로 고치는 의사를 심의(心醫)라고 합니다.
수술하고, 죽이고, 태우는 것도 치료방법이지만 면역력을 키워서 미리 병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병에 걸렸어도 몸이 자연적으로 치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로병사의 과정을 받아들이고 삶을 가치 있게, 보람 있게,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연에서 난 야채를 주로 먹는다면, 적당한 운동을 한다면, 욕심을 버리고 봉사한다면,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다면, 하루를 감사하면서 보낼 수 있다면, 우리의 몸은 스스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건강한 생활 습관과 이웃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암을 극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을 믿는다면 이 생을 기쁘게 마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사는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따라갔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마귀를 쫓아냈어도 기도하지 않으면 다른 마귀가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고백성사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못된 삶의 습관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세상의 욕망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필요한 문구류가 있어서 서랍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아서 서랍 안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한다고, 오랜만에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쓸모없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나중에 어떻게든 쓰겠지.’라는 생각으로 서랍 안에 고이 모셔놓았던 것도 있지만, 전혀 필요 없는 것도 많았습니다.
몇 년 지난 영수증도 있었고, 잉크가 전혀 나오지 않는 펜, 말라비틀어진 물티슈도 있었습니다.
모두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런 것을 왜 가지고 있었던 거야?’라고 생각하게 하는 물건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물건만 그럴까요?
우리 마음 안에도 쓸데없는 것이 참 많음을 깨닫습니다.
‘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들을 너무 많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삶에서 버려야 할 것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간직해서는 안 되는 마음들도 버려야 합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미움, 질투, 단죄, 폭력 등의 부정적인 마음들을 꼭 움켜잡고 있어서는 주님을 온전하게 따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낸 뒤에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의 장례도 아닌 아버지의 장례까지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만큼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주님을 따르겠지만,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합니다.
이 부분을 보면,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그 장면이 오늘 제1독서에 나오지요.
이때 엘리야는 엘리사의 부탁을 거절했을까요? 아니면 받아들였을까요?
당연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족들과의 작별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엘리야의 부름보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훨씬 더 준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각자는 주님의 부르심을 삶 안에서 계속해서 받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마음을 비우고, 주님의 마음으로 채우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 삶은 아버지의 장례보다도 더 우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부름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존엄한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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