氏族의 연원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시조는 이한(李翰)으로, 선원선계(璿源先系)에 의하면 그는 전주(全州)에 토착해온 명문 태생으로 신라 태종 무열왕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였고, 문성왕(文聖王, 839-856) 때 사공(司空)을 지냈다고 한다. 이한(李翰)의 선대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언제부터 전주(全州)에 세거했는 지도 알 수 없다 한다. 그러나 이한(李翰) 이후는 전주(全州)에 세거하여 전주(全州)를 본관으로 삼게된 것 같다. 후손 중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의 6대조 이린(李隣)과 그의 형 이의방(李義方) 등은 고려 중앙정부에 진출, 관직에 있기도 했다. 그 뒤 이성계(李成桂)의 직계 선조는 동북면(東北面)으로 이주, 여진족이 사는 지역으로 임시 옮겨가 살기도 했고, 뒤에 이성계(李成桂)가 조선 태조로 즉위하면서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조선의 왕실이 되었다. 본관지 연혁 전주(全州)는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이다. 신라 진흥왕 16년 완산주(完山州)를 두었다가 동(同) 26년 폐하였고, 경덕왕 15년에는 지금 이름으로 고쳐 신라 9주(州) 중의 하나로 하였다. 고려조 성종 12년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按撫使)로 하였고, 현종 9년에는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승격시켰다가 다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조선 건국 후 왕실의 고향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 3년 지금 이름으로 다시 개칭하였으며 세조 때는 진(鎭)을 두었다. 1895년 군(郡)이, 1935년 부(府)로, 1949년 시(市)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는 이(李)ㆍ김(金)ㆍ도(都)ㆍ동(董)ㆍ동(童)ㆍ연(連)ㆍ유(柳)ㆍ유(劉)ㆍ마(馬)ㆍ변(邊)ㆍ선(宣)ㆍ심(沈)ㆍ예(艾)ㆍ오(吳)ㆍ장(張)ㆍ전(全)ㆍ정(鄭)ㆍ주(朱)ㆍ최씨(崔氏) 등이 있었다. 파명록 시중공파(侍中公派)ㆍ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ㆍ주부공파(主簿公派)ㆍ안천대군파(安川大君派)ㆍ안원대군파(安原大君派)ㆍ안풍대군파(安豊大君派)ㆍ안창대군파(安昌大君派)ㆍ안흥대군파(安興大君派)ㆍ함녕대군파(咸寧大君派)ㆍ함창대군파(咸昌大君派)ㆍ함원대군파(咸原大君派)ㆍ함천대군파(咸川大君派)ㆍ함릉대군파(咸陵大君派)ㆍ함양대군파(咸陽大君派)ㆍ함성대군파(咸城大君派)ㆍ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ㆍ완원대군파(完原大君派)ㆍ완천대군파(完川大君派)ㆍ완성대군파(完城大君派)ㆍ영성대군파(永城大君派)ㆍ완풍대군파(完豊大君派)ㆍ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ㆍ진안대군파(鎭安大君派)ㆍ익안대군파(益安大君派)ㆍ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ㆍ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ㆍ의평군파(義平君派)ㆍ순평군파(順平君派)ㆍ선성군파(宣城君派)ㆍ종의군파(從義君派)ㆍ진남군파(鎭南君派)ㆍ수도군파(守道君派)ㆍ임언군파(林堰君派)ㆍ석보군파(石保君派)ㆍ덕천군파(德泉君派)ㆍ임성군파(任城君派)ㆍ도평군파(桃平君派)ㆍ장천군파(長川君派)ㆍ정석군파(貞石君派)ㆍ무림군파(茂林君派)ㆍ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ㆍ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ㆍ성녕대군파(誠寧大君派)ㆍ경녕군파(敬寧君派)ㆍ함녕군파ㆍ온녕군파(溫寧君派)ㆍ근녕군파(謹寧君派)ㆍ혜녕군파(惠寧君派)ㆍ희녕군파(熙寧君派)ㆍ후녕군파(厚寧君派)ㆍ익녕군파(益寧君派)ㆍ임영대군파(臨瀛大君派)ㆍ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ㆍ금성대군파(錦城大君派)ㆍ영응대군파(永膺大君派)ㆍ화의군파(和義君派)ㆍ계양군파(桂陽君派)ㆍ의창군파(義昌君派)ㆍ한남군파(漢南君派)ㆍ밀성군파(密城君派)ㆍ수춘군파(壽春君派)ㆍ익현군파(翼峴君派)ㆍ영풍군파(永豊君派)ㆍ영해군파(寧海君派)ㆍ담양군파(潭陽君派)ㆍ덕원군파(德源君派)ㆍ창원군파(昌原君派)ㆍ월산대군파(月山大君派)ㆍ인성대군파(仁城大君派)ㆍ제안대군파(齊安大君派)ㆍ계성군파(桂城君派)ㆍ안양군파(安陽君派)ㆍ완원군파(完原君派)ㆍ회산군파(檜山君派)ㆍ봉안군파(鳳安君派)ㆍ견성군파(甄城君派)ㆍ익양군파(益陽君派)ㆍ이성군파(利城君派)ㆍ경명군파(景明君派)ㆍ전성군파(全城君派)ㆍ무산군파(茂山君派)ㆍ영산군파(寧山君派)ㆍ운천군파(雲川君派)ㆍ양원군파(楊原君派)ㆍ복성군파(福城君派)ㆍ해안군파(海安君派)ㆍ금원군파(錦原君派)ㆍ영양군파(永陽君派)ㆍ덕양군파(德陽君派)ㆍ봉성군파(鳳城君派)ㆍ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ㆍ영창대군파(永昌大君派)ㆍ임해군파(臨海君派)ㆍ신성군파(信城君派)ㆍ순화군파(順和君派)ㆍ인성군파(仁城君派)ㆍ경창군파(慶昌君派)ㆍ경평군파(慶平君派)ㆍ인흥군파(仁興君派)ㆍ영성군파(寧城君派)ㆍ능원대군파(綾原大君派)ㆍ소현세자파(昭顯世子派)ㆍ인평대군파(麟坪大君派)ㆍ용성대군파(龍城大君派)ㆍ숭선군파(崇善君派)ㆍ낙선군파(樂善君派)ㆍ은언군파(恩彦君派)ㆍ은신군파(恩信君派)ㆍ은전군파(恩全君派) 씨족史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신라 문성왕(文聖王, 839-856) 때에 사공(司空)을 지냈다는 이한(李翰)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후대로 이어져 22세 이성계(李成桂)에 이르러 조선을 건국, 왕위에 오름으로써 왕으로 추존 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4대조 이안사(李安社)까지가 선원세계(璿源世系)에 들어가고, 시조부터 17세까지는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한다.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자춘(李子春)ㆍ이성계(李成桂)가 고려 말 고려 중앙정부에 진출, 현달하면서 고려의 여러 문벌귀족들과 연혼관계를 맺어 문벌로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을 건국한 이래 더욱 번성하여 우리나라의 가장 유력한 성씨 중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자손이 크게 번성, 현달하여 파계(派系)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성씨를 이를 때 제왕(帝王)은 “不敢祖其祖”, 즉 조상으로 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왕자(王子), 즉 대군(大君)이나 군(君)을 파조(派祖)로 하여 분파하였는데 이를 선원파계(璿源派系)라 한다.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분파(分派)는 이안사(李安社-목조(穆祖)로 추존)의 선계(先系)에서 갈라지는 파와 그 이후에서 갈라지는 파를 합하여 모두 123파가 된다. 이안사(李安社) 이전의 선계(先系)에서 갈라진 분파로는 15세조 이단신(李端信)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이안사(李安社)의 할아버지인 이린(李隣)의 동생 이거를 파조(派祖)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이안사(李安社)의 동생인 이영습(李英襲)을 파조(派祖)로 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가 있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 태조로 즉위한 후 추존 4조(祖) 사이의 인물을 파조(派祖)로 하는 분파로는 먼저 이행리(李行里-익조(翼祖)로 추존) 대에서 이어선(李於仙)을 파조(派祖)로 하는 안천대군파(安川大君派), 이진(李珍)을 파조(派祖)로 하는 안원대군파(安原大君派), 이정(李精)을 파조(派祖)로 하는 안풍대군파(安豊大君派), 이매불(李梅拂)을 파조(派祖)로하는 안창대군파(安昌大君派), 이구수(李球壽)를 파조(派祖)로하는 안흥대군파(安興大君派)의 5대군파(大君派)가 있다. 다음으로 이춘(李椿-도조(度祖)로 추존) 대에서는 7대군파(大君派)가 나누어졌는데, 이안(李安)을 파조(派祖)로 하는 함녕대군파(咸寧大君派), 이장(李長)을 파조(派祖)로 하는 함창대군파(咸昌大君派), 이송(李松)을 파조(派祖)로 하는 함원대군파(咸原大君派), 이원(李源)을 파조(派祖)로 하는 함천대군파(咸川大君派), 이고태(李古泰)를 파조(派祖)로하는 함릉대군파(咸陵大君波), 이전을 파조(派祖)로 하는 함양대군파(咸陽大君派), 이응거(李應巨)를 파조(派祖)로하는 함성대군파(咸城大君派)가 그것이다. 이자춘(李子春-환조(桓祖)로 추존) 대에서는 이자흥(李子興)을 파조(派祖)로 하는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 이자선(李子宣)을 파조(派祖)로 하는 완원대군파(完原大君派), 이평(李平)을 파조(派祖)로 하는 완천대군파(完川大君派), 이종(李宗)을 파조(派祖)로 하는 완성대군파(完城大君派)의 4대군파(大君派)가 나누어진다. 태조 이성계의 형제인 이원계(李元桂)의 후손이 완풍군파(完豊君派), 이화(李和)의 후손이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로 나누어지는데, 이상이 모두 18개 파이다. 그리고 태조 이후 고종 이전까지에 걸쳐 대군(大君)ㆍ군(君)을 파조(派祖)로 하는 파가 99파여서 모든 분파 수는 123파이다. 그러나 대군(大君)ㆍ군(君) 중에서 미혼으로 마쳤거나 후사가 없어 절손(絶孫) 된 경우가 20명이 되므로 전체 분파 수는 20파 정도가 적다. 이들 분파 중에서 조선조에 가장 번성한 파는 세종의 열세번 째 아들 이침(李琛)을 파조(派祖)로 하는 밀성군파(密城君派)이다. 후손에서 정승 6명, 대제학(大提學) 3명이 배출되었다. 이에 버금가는 파(派)는 정종의 열 번째 아들 이후생(李厚生)을 파조(派祖)로 하는 덕천군파(德泉君派)이다. 그 외에 세종의 다섯째 아들 이여(李璵)를 파조(派祖)로 하는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정종의 넷째 아들 이무생(李茂生)을 파조(派祖)로 하는 선성군파(宣城君派), 태종의 둘째 아들 이보(李補)를 파조(派祖)로 하는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가 번성하였다. 이 중에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의 자손이 가장 번성하였다. 정종의 열다섯번 째 아들 이선생(李善生)을 파조(派祖)로 하는 무림군파(茂林君派)와 중종의 아홉 번째 아들 이초(李초)를 파조(派祖)로 하는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에서는 많은 무관(武官)을 배출하였다. 전주 이씨(全州李氏) 선원선계(璿源先系)에 의하면 6세조 이긍휴(李兢休) 대에서부터 고려에 벼슬하였다. 시조인 이한(李翰)은 신라 태종 무열왕의 10세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3세 이천상(李天祥)은 복야(僕射)를 지냈고 시랑(侍郞)을 지낸 영일 정씨(迎日鄭氏) 정습명(鄭襲明)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균윤(軍尹)은 고려시대의 향직계(鄕職階)로 종9품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정습명(鄭襲明)은 영일 정씨(迎日鄭氏)의 1세조가 되는 인물로 고려 인종ㆍ의종대(1123-1170)의 명신이었다. 선계(先系)에 대한 족보의 기록에는 사실과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또 고려조에 들어와 7세조인 이렴순(李廉順)은 첨대정승(僉隊政丞)을 지낸 정익조(鄭翼祚)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는데, 고려에서 정승(政丞)이란 관직명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가 원(元)의 부마국으로 된 충렬왕 이후이며, 또 ‘첨대정승(僉隊政丞)’이란 관직명은 사용된 적이 없다.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6세조에서 고려에 벼슬하기 시작해 7세조 이렴순(李廉順) 때부터 11세조 이충민(李忠敏) 대에 이르는 동안 전주(全州)에 토착해서 향역(鄕役)에 종사한 것 같다. 그들이 직책이 호장(戶長), 장리(長吏)로 나타나 있다. 또한 대(代)를 뛰어넘어 13세조 이진유(李珍有)도 호장(戶長)을 지냈다 한다. 12세조 이화(李華)가 추밀(樞密)을 지내 중앙정부의 관직에 나아갔고, 13세조 이진유(李珍有) 대를 지나 14세조 이궁진(李宮進)은 한림(翰林), 15세 이용부(李勇夫)ㆍ이단신(李端信)은 각각 대장군(大將軍)ㆍ문하시중(門下侍中), 16세조 이린(李璘)ㆍ이거는 각각 내시집주(內侍執奏)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세계에 나오는 이들 중 역사에서 확인되는 인물은 무신정권성립초기에 무인이었던 이린(李璘)부터이다. 이보다 앞서 전주 이씨(全州李氏) 출신으로는 현종 때에 세워진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의 주인공인 승려 지종(智宗)과 전주리(全州吏) 출신으로 의종 즉위년에 사망한 평장사(平章事) 이준양(李俊陽)이 있었음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이 전주 이씨(全州李氏) 세계(世系)에 나오는 인물들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린(李璘)은 내시집주(內侍執奏)를 지냈고 시중(侍中)을 지낸 남평문씨가(南平文氏家)의 문극겸(文克謙)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 이린(李璘)은 ‘고려사’ 문극겸전(文克謙傳)에 이린(李隣)으로 나타나는 인물로, 무신난 주도자의 한 사람인 이의방(李義方)의 동생이다. 문극겸(文克謙)의 사위인 이린(李隣)이 전주 이씨(全州李氏) 16세조, 곧 이성계(李成桂)의 6대조인 이린(李璘)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은 ‘남평문씨세보(南平文氏世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린(李璘)은 무인집권초기에 형인 이의방(李義方)과 함께 권력을 장악한 소수 무인에 속하였을 것이다. 그의 장인인 문극겸(文克謙)이 무신난 직후에도 문신으로 왕의 측근인 우승선어사중승(右承宣御使中丞)을 역임하였고, 명종3년 김보당(金甫堂)의 무인정권에 대한 반대로 일어난 계사(癸巳)의 난에 많은 문신이 살육 당할 때에도 이의방(李義方)의 두둔으로 무사하였다는 것은 무인정권에서의 이들 형제의 위치를 짐작케 해 준다. 이의방(李義方)은 명종4년 12월 서경(西京)에서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에 정중부의 아들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이 때 형인 이준의(李俊義)도 함께 잡혀 죽었고 곧 이어서 태자빈이 되었던 그의 딸도 쫓겨났다. 이의방(李義方)이 피살된 뒤 이린(李璘)의 위치가 어찌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린(李璘)의 아들 이양무(李陽茂)는 장군(將軍)을 지냈다 하나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뚜렷이 나타난 것이 없다. 그의 아들이 이안사(李安社)로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인데, 적어도 이때에는 개경관인(開京官人)에서 본관지(本貫地)인 전주로 돌아와 있었다. 이안사(李安社) 대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고려말에 이색(李穡)이 찬한 이자춘신도비(李子春神道碑), ‘고려사(高麗史)’의 기록, 조선개국 후 이성계(李成桂)의 선대(先代)를 찬양하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편찬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에서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이안사(李安社)는 전주(全州)의 유력한 세력이었던 것 같다. 이 때는 몽고군의 고려침략이 한창이었던 고종 후반기였다. 그는 그가 아끼던 관기(官妓)의 일로 지주(知州)와 산성별감(山城別監)과 문제가 생겨 전주(全州)에 더 이상 살 수 없어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겨 두타산성에 의지해 몽고군의 침입에 대비했는데, 이때 그를 따라 삼척(三陟)으로 옮긴 민호가 1백 70여 호였다. 몽고군은 고려를 침략하면서 어떤 지역의 주민을 항복시키면 그 지역의 주민을 군대로 징발하여 고려의 다른 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몽고군은 주력부대로서 뒤에 남고 고려의 백성들이 선봉대가 되어 고려를 공격하였고, 때로는 자진하여 몽고에 항복 고려의 여러 지역주민들에게 항복을 권하거나 공격에 앞장서는 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사태를 예방하고 또 효과적으로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에 옮긴 고려정부는 산성별감(山城別監)을 전국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산성(山城)이나 섬으로 옮기게 했다. 그런데 산성별감(山城別監)들은 주민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명령에 따라 강제적으로 옮기게 하였으므로 그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수확을 바로 앞둔 농사를 그대로 두고 급하게 산성(山城)으로 옮기라거나, 먹고 살 양식과 물이 부족한 섬에 많은 주민들을 한꺼번에 옮기는 등의 일이 벌어졌고, 이에 백성들이 산성별감(山城別監)에 대항해 반란하거나 때로는 몽고에 항복, 혹은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유리하기도 하였다. 이안사(李安社)를 비롯한 전주민(全州民) 1백70여 호가 살던 곳을 떠나 멀리 삼척(三陟)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였다. 이안사(李安社)는 삼척으로 옮겼으나 자신과 갈등을 일으켰던 앞의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이 지역 안렴사(按廉使)로 부임하게 되자,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덕원)로 옮긴다. 고려정부는 그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에 임명하여 원병(元兵)을 막게 했으나, 그는 이 지역을 경략 중이던 원(元)의 산길대왕(散吉大王)에게 항복하고 족녀(族女)를 산길(散吉)에게 아내로 보낸다. 이에 앞서 전주(全州)에서 함께 떠나온 1백70여 호 외에 의주(宜州)에서 그에게 새로이 의탁해온 민호(民戶)가 많아 1천여 호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그 후 이안사(李安社)의 관할 하에 있게 되었다. 원(元)에 귀순한 이안사(李安社)와 그 관할 아래 있는 민호(民戶)는 고려의 영토를 떠나 여진족이 사는 지역이며, 원(元)의 통치를 받는 두만강변의 알동(斡東)에 옮겨 살게 된다. 이곳에서 이안사(李安社)는 원제(元帝)로부터 남경등처(南京等處) 5천호소수천호(千戶所首千戶) 겸달로화적(兼達魯花赤)에 임명되었다. 그는 돌로 성을 쌓고 소와 말을 방목하면서 살았다. 이안사(李安社)는 뒤에 다시 원제(元帝)의 명에 의해 알동천호구당(斡東千戶句當)에 임명되었는데, 이 직책은 그의 아들 이행리(李行里)에게 세습되었다. 7년 뒤 원(元) 세조(世祖-쿠빌라이)가 일본을 침략하기 위하여 고려는 물론 원(元)에 귀부한 여러 종족들에게 군사동원을 명령하였다. 이때 이행리(李行里)는 알동(斡東)의 천호장(千戶長)으로서 자기 관할의 군인을 징발하여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충렬왕을 뵙게 되었다. 선대에 고려에 반역한 자의 아들이 이제는 고려의 종주국인 원의 부대장으로 충렬왕을 보게 된 것이다. ‘고려사’나 ‘용비어천가’에는 그가 선대의 일은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공손하게 사죄하면서 용서를 빌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충렬왕도 너그럽게 대했다고 한다. 이행리(李行里) 대에 전주 이씨가(全州李氏家)는 알동(斡東)에서 다시 의주(宜州)로 옮겨 살게 되었다. 여진족들 사이에서 이행리(李行里)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여진 천호(千戶)들이 그를 제거하려 했기 때문이다. 임시로 공주(孔州-함북 경원)에 피신했다가 이어 선친이 자리잡았던 의주(宜州)로 옮긴 것이다. 부자 대에 걸쳐 약 1세기 동안 여진인의 서리에 살았던 셈이다. 그러자 알동민(斡東民)이 많이 따라와서 그의 기반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승사랑(承仕郞)을 제수받고, 쌍성등지(雙城等地)의 고려 군민(軍民)을 관할하는 달로화적(達魯花赤)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등주(登州-안변) 호장(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딸과 결혼하여 춘(椿-래선(來善))을 낳았다. 그리고 그는 등주(登州)를 비롯, 화주(和州)ㆍ함주(咸州-함흥)를 왕래하면서 주민을 이주시키고 영향권을 넓혀갔다. 이춘(李椿)은 원(元) 조정으로부터 아버지의 관직을 세습하고 발안첩목아란 몽고식(蒙古式) 이름을 받았다. 이에 앞서 알동(斡東)에서 이행리(李行里)를 따라온 민호(民戶)들이 토지가 비옥한 함주(咸州)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춘(李椿) 대에 의주에서 함주(咸州)로 옮겨갔다. 그 후 그의 손자인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조에 출사(出仕)하고 조선을 개국하기까지 이곳은 이 집안의 터전이 되었다. 이춘(李椿)은 처음에 알동백호(斡東百戶)의 딸 박씨(朴氏)와 결혼하여 자흥(子興)(-탑사불화(塔思不花), 완창대군(完昌大君)으로 추봉)과 자춘(子春)을 낳고, 뒤에 쌍성총관(雙城摠管)의 딸 조씨(趙氏)와 결혼하여 완자불화(完者不花)와 나해(那海)를 낳았다. 박씨(朴氏) 자녀와 조씨(趙氏) 자녀 사이에 세습분쟁이 있었고, 자흥(子興)의 아들 교주(咬住)가 어렸기 때문에 자춘(子春)이 아버지의 기반을 물려받게 되었다. 함주(咸州)를 터전으로 삼은 이씨(李氏) 집안이 고려조에 출사(出仕)하게 된 계기는 공민왕 5년에 있었던 고려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공격과 탈환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한 해 앞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관내의 실력자인 이자춘(李子春)은 고려에 와 공민왕을 뵈었다고 한다. 이미 중국에서 원(元)이 쇠퇴하고 있었으므로 이자춘(李子春)은 이때 고려로 귀순할 뜻을 가졌건 것이 아닌가 한다. 공민왕도 원(元)의 쇠퇴에 대응, 약 1세기 동안 잃었던 영토를 수복할 뜻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자춘(李子春)을 잘 회유했다. 이때 공민왕은 이자춘(李子春)에게 “장차 너를 귀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다음해 공민왕은 중앙정부에 포진한 기철(奇轍)을 비롯한 부원세력을 일소하고, 99년 동안 원(元)에 빼앗긴 쌍성총관부를 공격, 영토수복에 성공하였다. 이 전쟁에서 이자춘(李子春)은 고려군에 협조, 공을 세우고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에 제수된다. 이때 쌍성총관 가문의 한 사람인 조돈(趙暾)과 조인벽(趙仁璧) 역시 고려에 협조, 공을 세우는데, 조인벽(趙仁璧)이 이자춘(李子春)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자춘(李子春)은 그 뒤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를 겸했고, 천우위상장군(千牛衛上將軍)을 거치면서 왜구방어에 공을 세웠다. 공민왕 10년 영록대부판장작감사(榮祿大夫判將作監事)로 삭방도만호(朔方都萬戶) 겸 병마사(兼兵馬使)로 부임, 그곳에서 죽었다. 이자춘(李子春)이 죽은 뒤 그의 세력은 아들 이성계(李成桂)에게로 이어졌다. 이성계(李成桂)는 고려에 벼슬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마침내는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조인옥(趙仁沃) 등이 중심이 된 정치세력의 추대를 받아 새 왕조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그는 조상대부터 내려온 세력을 기반으로 고려의 관군(官軍)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친병(親兵-사병)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사병조직은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무장으로 전쟁에 나아갈 때나, 혹은 최영(崔瑩)과 같은 고려 유신(遺臣) 세력을 제거할 때 선봉에 서서 그를 지지했다. 이성계(李成桂)는 공민왕 10년 이후 동북면(東北面)에 쳐들어온 원(元)의 행성승상(行省丞相) 납합출(納哈出), 여진인 삼선(三善)ㆍ삼개(三介)ㆍ호발도(胡拔都)를 모두 격퇴하였고, 공민왕 18-19년에는 2번에 걸쳐 원의 동녕부(東寧府)를 공격, 망원(亡元)의 잔류세력을 치는 한편 자신의 휘하세력을 확장해 갔다. 또한 전 국토를 종횡무진 약탈하던 왜구토벌에도 여러 번 공을 세웠다. 이때 그가 거느리는 부대에는 그의 세력아래 있는 동북면(東北面)의 여진족이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정부의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된 것은 우왕 14년에 있었던 명(明)의 요동정벌이었다. 중원을 통일한 명(明)은 고려에 부당한 요구를 해왔고, 이에 우왕과 최영이 중심이 되어 전군을 동원, 요동을 치게 하였다. 이때 우군통제사(右軍統制使)로 출전한 이성계(李成桂)는 본래 이 정벌을 반대했었다. 위화도에서 좌군통제사(左軍統制使) 조민수(曹敏修)를 비롯한 장수들을 설득,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유폐시킴으로써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그는 조민수(曹敏修)마저 제거하는 데 성공, 공양왕을 세웠으나 이미 정(政)ㆍ군(軍)이 모두 그에게 속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몽고의 침입 때 전주(全州)에서 동북면(東北面)으로 이주한 전주 이씨가(全州李氏家)는 조선을 개국, 그 왕실이 되었던 것이다.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후손으로서 조선조에서 현달하거나 학자로 이름을 남긴 인물은 왕손(王孫)으로서 자손이 번성한 만큼이나 많다. 그 중에서 국사에 이름이 알려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원계(李元桂)는 이성계(李成桂)의 서형(庶兄)이다. 공민왕 초에 내부령(內府令)이 되고, 홍건적(紅巾賊) 침입 때 안우(安祐)ㆍ김득배(金得培)의 휘하에 종군, 개경(開京)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워 2등 공신(二等功臣)에 책록되었다. 우왕 14년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팔도도통사조전원수(八道都統使助戰元帥)로 우군통제사(右軍統制使)인 이성계(李成桂) 휘하장수로 출전하였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지고 개국공신(開國功臣) 2등(等)에 책록되었다. 이화(李和)는 이성계(李成桂)의 서제(庶弟)이다. 조선개국 후 1등 공신(一等功臣)에 책록, 의안백(義安伯)에 봉해졌다. 이성계(李成桂)의 아들들 사이의 왕위계승 싸움에서 이방원(李芳遠) 측에 서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等),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等)이 되었다. 태종 7년 영의정(領議政)이 되고, 대군(大君)에 진봉(進封)되었다. 태조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양우(李良祐)는 태조7년 왕자의 난 후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 영안군(寧安君)에 봉해지고,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지낸 뒤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이천우(李天祐)는 처음에 만주로 유입(流入), 공민왕 18년 이전에는 여진족 동녕부(東寧府)의 수령으로 있었다. 공민왕 18년 이성계(李成桂)가 동녕부(東寧府)를 공격, 여진족을 복속시켰을 때 따라와 휘하장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이방원(李芳遠)의 측근으로 제1차 왕자(王子)의 난 후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으로 완산후(完山侯)에 봉해졌다. 정종2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거쳐 제2차 왕자(王子)의 난 때에는 군권(軍權)을 장악한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2등이 되고, 완산군(完山君)에 개봉(改封)되었다. 그 뒤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ㆍ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ㆍ이조판서(吏曹判書)ㆍ의금부도제조(義禁府都提調)를 지내고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나중에 태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숙(李淑)은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아들로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지고 우승지(右承旨),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는 세자에서 폐위(廢位)된 후 세종의 형으로서 강산을 유람하고 풍류객들과 사귀며 노는 것으로 일생을 마쳤다.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는 글읽기를 좋아하고 무예에도 능했는데, 뒤에 불가(佛家)에 귀의했다. 충민공(忠愍公) 이양(李穰)은 문종(文宗) 때 우찬성(右贊成)에 오르고 단종 때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했으나, 김종서와 함께 살해되었다. 이사철(李思哲)은 종실로 학문에 뛰어나 세종 말년에 도승지(都承旨)로 ‘선원록(璿源錄)’, ‘종친록(宗親錄)’, ‘유부록(類附錄)’을 개수했다.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等),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이 되어 좌찬성(左贊成)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은 세조의 총애를 받은 종친이었다. 세조 12년 무과(武科)에 장원, 다음해 사도병마도총사(四道兵馬都摠使)가 되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等)이 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특진되었다. 성종(成宗) 1년 어린 성종(成宗)을 몰아내고 왕(王)이 되려한다는 탄핵으로 경상도 영해(寧海)에 안치(安置), 그곳에서 죽었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은 성종의 형이다. 서사(書史)를 좋아했고, 문장이 뛰어나 그의 시작(詩作)이 중국에까지 널리 애송(愛誦)되었다. 고양(高陽)의 북촌에 별장을 두고 자연에 묻혀 일생을 마쳤다. 종성령(鍾城令) 이구(李球)는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학문을 계승,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발전시켰으며,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주창했다. 조선의 전통적인 특색을 가장 잘 발휘한 학자로 알려졌다. 선조조 이후 현달한 인물 중에서 영의정에 오른 인물로는 이양원(李陽元)ㆍ이원익(李元翼)ㆍ이홍주ㆍ이경석(李景奭)ㆍ이성구(李聖求)ㆍ이경여(李敬輿) 등이 있다. 이양원(李陽元)은 명종18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명(明)나라에 들어가 객사한 정사(正使) 김주(金澍)를 대신하여 명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가 고려의 이인임(李仁任)으로 오기(誤記)된 것을 바로잡고 돌아와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고,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等),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진 뒤, 다음해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한강(漢江)을 지키다가 양주(楊州)에서 적군을 맞아 크게 승리한 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이때 의주(義州)에 피난 중이던 선조가 요동(遙東)으로 건너가 내부(內附)했다는 와전(訛傳)된 소문을 듣고 통분히 여겨 단식 8일만에 죽었다. 이원익(李元翼)은 선조2년 과거에 급제한 뒤 여려 관직을 거쳐 임란 후인 선조 30년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변무사(辨誣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1598년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나, 탄핵을 받아 삭직(削職)된 유성룡(柳成龍)을 변호하다 사직하고 은퇴했다. 선조 41년 다시 영의정이 되고 수차 사의를 표했으나 허락되지 않던 중 1615년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 홍천(洪川)에 유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인목대비(仁穆大妃)가 광해군(光海君)의 처형을 명했으나 이에 반대하여 유배에 그쳤다. 그에 앞서 그는 1608년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건의, 경기ㆍ강원도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이를 실시, 불합리한 세조(租稅) 제도를 시정하려고 했다.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있을 때 군병방수제도(軍兵防守制度)를 개혁, 1년에 3개월 복무를 2개월로 단축, 법제(法制)로 채택하게 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남인(南人)에 속했으나 성품이 원만하여 정적(政敵)들에게 호감을 받았고, 서민적인 인품으로서 오리정승(梧里政丞)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전한다.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홍주는 병조참판(兵曹參判)ㆍ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ㆍ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 때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가 되어 난군의 토벌에 공을 세웠다. 그 후 대사헌(大司憲)ㆍ전주부윤(全州府尹)ㆍ병조판서(兵曹判書)ㆍ예조판서(禮曹判書)ㆍ의금부부사(義禁府事) 등을 거쳐 1636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적진에 왕래하면서 화의를 교섭했으나 항복에는 끝까지 반대했다. 다음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이경석(李景奭)은 병자호란 뒤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찬진하고 대제학(大提學)ㆍ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냈다. 1642년 세자이사(世子貳師)로 김상헌(金尙憲)과 척화신(斥和臣)으로 심양(瀋陽)에 잡혀가 1년 간 구금되었다가 돌아와 대사헌(大司憲)ㆍ이조판서(吏曹判書)ㆍ우의정(右議政)을 거쳐 효종 즉위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지지수축(地池修築), 군인양성(軍人養成)을 청(淸)에 청하였는데, 이것이 북벌계획으로 의심받아 혼자 책임을 지고 백마성(白馬城)에 감금당하기도 하였다. 이성구(李聖求)는 이수광의 아들이다. 그가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 아버지 수광은 대사헌(大司憲), 동생 민구(敏求)는 홍문관(弘文館)에 있었으므로 한 집안의 3부자가 3사(司)를 지낸다고 세상사람의 찬탄을 받았다.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이항복(李恒福)이 정협(鄭浹)의 문제로 반대파의 모함을 받자 항변(抗辯)하여 구출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어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왕(王)을 호종(扈從), 1637년 왕세자(王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우의정(右議政)에서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수행하고,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이경여(李敬輿)는 일찍이 호란이 있을 것을 예견했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왕을 호종(扈從)했다. 1642년 배청친명파(排淸親明派)로 청(淸)나라 연호(年號)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다음해 세자(世子)와 함께 귀국,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1644년 사은사(謝恩使)로 청(淸)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다. 그동안 본국에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효종 즉위 후 유배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나, 청(淸)의 간섭으로 파면되었다. 지봉(芝峯) 이수광은 인조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으며 조선후기 실학의 선구를 이루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는 선조 18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정묘호란 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여러 번 사신(使臣)으로 명(明)나라에 왕래, 당시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 신부에게서 ‘천주실의(天主實義)’, ‘중우론(重友論)’을 얻어 왔다. 광해군 6년 ‘지봉유설(芝峯類說)’을 간행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天主敎)와 서양문물을 소개함으로써 실학(實學) 발전의 선구자가 되었다.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인물로는 이조(李肇-숙종조), 이민서(李敏敍-숙종조), 이진망(李眞望-영조조), 이광덕(李匡德-영조조)이 있다. 이후원(李厚源)은 우의정에 올랐는데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을 추진하였고 인재등용에도 힘써서 송준길(宋浚吉)을 병판에, 송시열(宋時烈)을 이판(吏判)에 추천하여 임명케 했다. 이이명은 숙종 때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숙종 승하 후 부고사(訃告使)로 청에 갔는데, 거기에서 독일 신부 쾨글러, 푸르투갈신부 사우레스 등과 사귀었고, 천주교(天主敎)ㆍ천문(天文)ㆍ역산(曆算)에 관한 서적을 가지고 귀국, 이를 소개했다. 당대의 석학(碩學)으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으며 특히 청(淸)나라의 실학사조(實學思潮)에 관심이 깊어 이를 소개했고 서학(西學)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노론(老論)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세제(世弟-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청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역시 노론(老論) 4대신의 한 사람이었던 이건명(李健命)도 숙종 때 좌의정을 지냈으나, 신임사화(辛任士禍)로 유배 사사(賜死)되었다.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는 경종묘정에 배향되었고, 이상황(李相璜)은 헌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이광사(李匡師)는 영조 31년 나주(羅州)의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백부(伯父) 진유(眞儒)가 처벌을 당할 때 이에 연좌, 회령(會寧)에 유배되었는데, 학문(學問)으로써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자 다시 진도(珍島)에 유배, 배소(配所)에서 일생을 마쳤다. 정제두(鄭齊斗)에게서 양명학(陽明學)을 배웠고, 일찍이 윤순(尹淳)에게서 글씨를 공부하여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필체를 이루었다. 그의 후손이 계속 정제두(鄭齊斗)의 학문을 이어 이른바 강화학파를 이루었다. 이시원(李是遠)은 영의정(領議政) 이수현(李壽賢)의 현손으로 순조 때 관직에 나아가 고종 2년 이조판서(吏曹判書)ㆍ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ㆍ예문관제학(禮文館提學)ㆍ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이르렀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 군함이 양화진(楊花津)에 들어오자 경계를 엄히 하고 외인(外人)을 물리치라고 상소했다. 이어 양화진(楊花津)이 점령되자 울분에 못 이겨 유소(遺疏)를 남기고 자결했다.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은 그의 아들이다. 어려서 4서5경에 정통, 15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23세 서장관(書狀官)으로 청에 가서 황각(黃珏) 등과 사귀어 문명(文名)을 떨쳤다.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항상 서양인을 미워했고 갑오경장 후 관직을 떠났다. 철저한 척화주의자(斥和主義者)로 일관하였다. 그가 지은 ‘당의통략(黨議通略)’은 당쟁의 원인을 기술한 것으로 당쟁사(黨爭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후손 중에는 조선후기 실학자로 알려진 이덕무(李德懋)와 그의 손자 이규경(李圭景) 및 이송(李淞)ㆍ이긍익(李肯翊)ㆍ이서구(李書九) 등이 있다. 이덕무(李德懋)는 박학다재하여 경사(經史)에서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했고, 문장(文章)이 뛰어나 문명(文名)을 일세(一世)에 떨쳤다. 1778년 심념조(沈念祖)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학자들과 사귀면서 학문을 닦고, 산천(山川), 도리(道里), 궁실(宮室), 누대(樓臺), 초목(草木), 충어(蟲魚), 조수(鳥獸)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적어와 더욱 명성을 날렸다. 돌아와서는 북학(北學)을 제창했고, 박제가(朴齊家)ㆍ유득공(柳得恭)ㆍ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4검서관(檢書官)으로 이름을 떨쳤다.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은 일생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할아버지 이덕무(李德懋)가 이룩한 실학(實學)을 계승하여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우리나라와 중국 고금사물(古今事物)에 대한 수백 종의 서적을 탐독하여 정밀한 고증으로써 천문(天文)ㆍ역산(曆算)ㆍ종족(種族)ㆍ역사(歷史)ㆍ지리(地理)ㆍ문학(文學)ㆍ음운(音韻) 등 모든 학문을 고정(考訂) 변증(辨證)했다. 이서구(李書九)는 실학자로 우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순조조에 이(吏)ㆍ형(刑)ㆍ호조(戶曹)의 판서(判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대사헌(大司憲),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명문장가(名文章家)로서 특히 시명(詩名)이 높아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유덕공(柳得恭)과 함께 한시(漢詩)의 4대가로 알려졌고, 오언고시(五言古詩)에 능했다. 정조 승하 후에는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지실록사(知實錄事)가 되어 ‘정조실록(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송(李淞)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아버지 이민곤(李敏坤)이 귀양가던 도중 금성(金城)에서 불에 타 죽는 참상을 보고, 벼슬을 단념하고 서산(西山)에 은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實學)을 깊이 연구했다. 실학의 대가인 홍대용(洪大容)과 학문을 토론하며 경륜(經綸)을 논하였다.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 당대 대표적인 실학자(實學者)들과 교분이 두터웠고, 여러 번 임관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은 이광사(李匡師)의 아들로 실학자이면서도 강화학파의 계보에도 들어가는 인물이다. 어려서 아버지 이광사(李匡師)에게서 수학(修學), 학문(學問)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실학(實學)을 제창하고 고증학파(考證學派) 학자(學者)로서도 유명했다. 소론(小論)의 한 사람으로 당론(黨論)을 강경히 주장, 귀양살이를 여러 번 겪었고, 온 집안이 크게 화를 입었다. 저작(著作)이 많았으나 겹치는 귀양살이로 대부분이 없어지고 현재 전하는 그의 대표적 저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조선왕조의 역대 사실을 여러 책에서 뽑아 엮은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의 사적(史籍)이다. 외세의 침입이 본격화되던 조선말의 인물로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그의 형 이최응(李最應), 종실로 갑신정변 후 개화정당에서 영의정을 지낸 이재원(李載元) 등이 있다. 흥선대원군은 가까운 왕실이면서도 안동 김씨(安東金氏) 세도정치 기간에는 파락호 생활로 목숨을 부지했다. 고종 즉위 후 섭정이 되어 당시 외척 세도의 아성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주류를 숙청, 당색(黨色)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부패관리를 파직시키는 한편 사설서원(私設書院)을 철폐했으며, 법률제도의 확립을 기해 중앙집권적인 정치기강을 수립했다. 또한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고,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귀족ㆍ상인에게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했으며 조세(租稅)의 운반 과정에서 지방관들의 부정을 근절하였다. 그의 개혁정치는 조선사회의 모순을 개혁, 보수적인 왕조를 재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淸)ㆍ일(日)을 대표로 하는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 조선은 점차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의 정치행로도 많은 파란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망국의 시기를 전후하여서는 의병장으로 일본 침략군에 대항해 싸우다가 체포되어 사형된 이강년(李康秊), 진안(鎭安)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동신(金東臣)과 함께 기세를 떨친 이석용(李錫庸), 유생으로 궐기했던 이은찬(李殷瓚), 그 외에 이재윤(李載允), 이학순(李學純), 이래수(李來修)가 있다. 헤이그밀사 사건의 주인공 이준(李儁)은 독립협회,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였고,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고종의 밀명을 받고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위종(李瑋鍾)은 그 뒤 이상설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항일투쟁을 하였다. 이 시기에 불교사(佛敎使)를 연구, 학계에 큰 공적을 남긴 인물로 이능화(李能和)를 들 수 있다. 그는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우고, 1895년 관립(官立) 법어학교(法語學校)에 입학, 1897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官立漢城外國語學校) 교관이 되었다. 다음 1907년 관립한성법어학교(官立漢城法語學校) 교장이 되었다가 의정부(議政府)의 특명으로 도일(度日), 각 관청(官廳)을 시찰하고 돌아와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 위원(委員)이 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학교(學校)가 폐쇄되자 학문 연구에 전심, 사료(史料) 수집과 종교(宗敎)ㆍ민속(民俗) 등을 연구했다. 1912년 사립 능인보통학교(私立能仁普通學校) 교장이 되고, 1914년 불교진흥회(佛敎振興會) 간사에 피선, 다음해 교장직을 사임한 후 불교진흥회 월보를 편집했으며, 1917년 동 진흥회의 이사(理事)가 되었다. 1921년 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회(朝鮮史編修委員會)’의 편수관ㆍ편수위원이 되고, 많은 저서(著書)와 논문(論文)을 남겼다. 항렬표(行列表) ※(★표 이후가 항렬자(行列字)이며 그 이전은 이름임)
(시중공파(侍中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주구공파(主簿公派)) (안천대군파(安川大君派)) (안원대군파(安原大君派))
(안풍대군파(安豊大君派)) (안창대군파(安昌大君派)) (안흥대군파(安興大君派)) (함녕대군파(咸寧大君派)) (함창대군파(咸昌大君派)) (함원대군파(咸原大君派)) (함천대원군(咸川大院君)) (함릉대군파(咸陵大君派)) (함양대군파(咸陽大君派)) (함성대군파(咸城大君派))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 (완원대군파(完原大君派)) (완천대군파(完川大君派)) (완성대군파(完城大君派)) (완풍대군파(完豊大君派)) (의안대군영(義安大君泳)) (진안대군파(鎭安大君派))
(익안대군파(益安大君波))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 (선안대군파(宣安大君派)) (의평군파(義平君派)) (순평군파(順平君派)) (선성군파(宣城君派)) (종의군파(從義君派)) (진남군파(鎭南君派)) (수도군파(守道君派)) (임언군파(林堰君派)) (석보군파(石保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임성군파(任城君派)) (도평군파(桃平君派)) (장천군파(長川君派)) (정석군파(貞石君派)) (무림군파(茂林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효녕대군파(孝寧大君派)) (성녕대군파(誠寧大君派))
(경녕군파(敬寧君派)) (함녕군파) (온녕군파(溫寧君派)) (근녕군파(謹寧君派)) (혜녕군파(惠寧君派)) (희녕군파(熙寧君派)) (원녕군파(原寧君派)) (익녕군파(益寧君派)) (임영대군파(臨瀛大君派))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금성대군파(錦城大君派)) (영응대군파(永膺大君派)) (화의군파(和義君派)) (계양군파(桂陽君派)) (의창군파(義昌君派)) (한남군파(漢南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수춘군파(壽春君派)) (익현군파(翼峴君派)) (영해군파(寧海君派)) (담양군파(潭陽君派)) (덕원군파(德源君派))
(창원군파(昌原君派)) (월산대군파(月山大君派)) (계성군파(桂城君派)) (안양군파(安陽君派)) (완원군파(完原君派)) (회산군파(檜山君派)) (봉안군파(鳳安君派)) (견성군파(甄城君派)) (익양군파(益陽君派)) (이성군파(利城君派)) (경명군파(景明君派)) (전성군파(全城君派)) (무산군파(茂山君派)) (영산군파(寧山君派)) (운천군파(雲川君派)) (양원군파(楊原君派)) (해안군파(海安君派)) (금원군파(錦原君派)) (영양군파(永陽君派)) (덕양군파(德陽君派)) (봉성군파(鳳城君派))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임해군파(臨海君派)) (신성군파(信城君派)) (순화군파(順和君派)) (인성군파(仁城君派)) (의창군파(義昌君派)) (경창군파(慶昌君派)) (경평군파(慶平君派)) (인흥군파(仁興君派)) (영성군파(寧城君派)) (능원대군파(綾原大君派)) (능창대군파(綾昌大君派)) (소현세자파(昭顯世子派)) (용성대군파(龍城大君派)) (숭선군파(崇善君派)) (연령군파(延齡君派)) (은언군파(恩彦君派)ㆍ은전군파(恩全君派)) - 중앙일보 프리미엄 성씨의 고향 [출처] 전주이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