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준 사람은 시어머님이다. ‘분이’는 시어머님이 살아온 이야기이다. 작가는 어머님의 이야기를 자기의 수필 여기저기에 모시고 와서 흔적을 남겼다. 수필집에 ‘분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은 수필이라기보다는 전기(傳記)이다. 소설 형식에 가깝다. 나는 김아가다의 글에서 흥미를 느낀 것 중에 하나는 표현 방법에서 소설의 기법을 이용한 것이다. 소설 형식이 되면, 사건이 줄거리를 만들면서 재미를 유발하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분이’이야기로 돌아가자. 작가가 어머님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인격형성에 어머님을 동일시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억척같이 일하여 돈을 모았고, 자손도 번창했다는 것이 어머님 이야기의 큰 줄거리이다. 그와 같은 어머님의 삶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인생 모델로 삼을만한 분으로 여긴다. 그러다 어머님의 속마음을 듣는다.
“어머님의 기억이 오락가락하면서도 ‘자식들은 내 마음 다 모른다’고 하면서 저더러 외롭게 살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날 저는 충격 받았어요. 아버님 돌아가시고 마흔 다섯 해를 혼자 지내셨더군요. 혼자 사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저희만 행복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자식이 여덟이나 있었는데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과부가 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실까 하고 별 생각을 다 했지요. 어머님의 외로움을 헤아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어머님, 당신의 일생을 대하소설로 탄생시키고 싶은데 며느리의 능력이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영정 앞에서 당신을 회상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작가는 왜 어머님을 자기처럼 생각하였을까. 노년의 외로움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어머님을 모델로 생각하더라도, 자신이 겪는 노년의 외로움을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
작가는 어머니와는 다른 시어머님-며느리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이야기를 ‘우리는 이방인’을 통하여 토로한다.
우리는 이방인
김아가다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다문화를 이해하려고 ’고부열전‘은 꼭 시청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좌충우돌하며 사는 모습을 보면 지레 겁이 난다. 같은 민족끼리 살아도 고부간의 갈등으로 가정이 파탄에 이르는 소식을 자주 듣는데, 문화와 풍습이 다른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산다면 서로 이해하며 적응하고 사는데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미국에서 요리사가 된 아들이 싱가포르 아가씨와 결혼한 지 이태가 지났다. 아들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많은 이방인을 새 식구로 맞아들이면서 무척 못마땅했었다. 같은 동양인이어서 피부나 얼굴 생김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자꾸 밀어내고 싶었다. 결혼식을 치르고 돌아왔으나 며느리에 대해 눈곱만한 정도 싹트지 않았다.
말이 통해야 사랑도 표현할 수 있다. 내 시어머니가 그러셨듯이 집안 내력도 이야기해주며 마음을 나눌 수 있으련만, 무관심 할 수밖에 없었다. 금쪽같은 아들을 빼앗겼으니 성에 차지 않아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이민 비자 수속을 하려고 아들과 며느리가 한국에 돌아온단다.
내 품에 안겨야 할 아들이 식구 하나 붙어서 돌아온다는 현실이 뒤숭숭했다. 시어미 노릇이 처음이라 적잖이 긴장도 되었다. 용심보가 터졌는지 아들 부부가 쓸 침대에 시트를 깔면서 눈가에 맺힌 이슬이 굵은 눈물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여태 내 호적에 있던 아들이 세대주가 되어 영원히 품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동지섣달 얼음장처럼 몸과 마음이 시렸다.
문화와 식습관이 다른 며느리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려니 걱정이었다. 아들은 김치찌개를 준비하면 된다지만 처음 만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밥상이 소홀해서야 할까. 다행히 며느리는 한국 음식을 잘 먹는다고 하니 한시름 놓았지만, 이것저것 준비해서 냉장고를 채워놓고 보니 전부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드디어 십 년 만에 아들이 집에 돌아왔다. 고약한 시어미가 되지 말고 세련된 어른 행세를 하려고 다부지게 마음먹었다. 웬걸, 며느리부터 안아주리라 다짐 했는데 찰나의 선택이랄 것도 없이 아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아차 하는 순간 뒷덜미가 화끈했다. 못난 어른이라는 딱지가 붙을 것 같아 며느리를 향해 팔을 벌렸다. 제 딴에는 잠깐 사이에 서러웠는지 얼굴은 웃으면서 눈물을 찍어냈다. “어머니 반갑습니다. 사랑해요.”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말을 열심히 배웠다는 며느리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지만, 할 말이 없어서 갑갑했다.
어쩌다 아들과 통화를 하다가 며느리가 영상으로 보이면 “사랑”, “어머니, 사랑해요.” 그러면 끝이었다. 고부간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밖에 없었다. 마음이 통하지 않으니 영혼 없는 말, 입으로만 할 수 있는 ‘I love you’는 세계 공통어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며느리가 달라졌고, 내가 달라졌다. 나는 영어를 못 하지만 미국 방송을 눈으로 보며 노력했고, 며느리는 일 년 동안 드라마와 ‘여섯 시 내 고향’을 열심히 방청하면서 남편의 나라 한국을 공부했단다. 대게를 먹고 싶다는 며느리를 데리고 강구항에 갔다. 킹크랩도, 랍스타도 영덕 대게 맛을 따라가지 못한다며 엄지 척을 했다. 내 팔짱을 끼고 착 달라붙는 며느리를 어찌 미워하랴. 해맞이 공원 블루로드를 걸으며 물 색깔이 너무 예쁘다며 한국의 냄새를 머리와 가슴에 담아가겠다는 며느리가 사랑스러웠다.
마침, 아이들이 도착한 다음 날이 친정어머니 기일이었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 인사도 시키고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보여 주었다. 우리나라 예절을 배우고 온 며느리가 어른들 앞에서 손을 가지런히 이마에 대고 큰절을 했다. 제사는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며, 후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식사도 하고, 친분도 쌓는다며 며느리가 더듬더듬 말했다. 귀여운 세 살짜리 아이가 말을 배워 어른들 앞에서 재롱부리듯 방글거리며 제법이었다.
소통은 언어가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된다. 느낌(feel)이 통하면 눈빛만 봐도 알아서 척척 행동하니 말이 통하지 않아도 사는데 불편한 것이 없었다. 며느리의 성격이나 성향을 몰랐을 때는 아들이 결혼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다였는데, 눈치코치로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글로벌 시대에 다문화가족이 된 나의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문화상대주의란 무엇인가. 다른 나라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환경과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날 때마다 싱가포르에 대해서 궁금한 것을 알아가는 중이다. 며느리에게 내가 이방인이고 나에게는 며느리가 이방인이지만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모니를 이룬다.
‘고부열전’을 볼 때마다 항상 조마조마 했는데 우리 집은 며느리가 시어미의 나라를 방문하면서 집안 내력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다가갔다. 다름을 같음으로 인식하면서 내 자식이 사랑스러운 만큼 가족이 된 새아기를 가슴으로 크게 안아 주었다. 며느리는 예쁜 여우다. 틈만 나면 나를 껴안고 애교를 부리다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에 우리는 많은 것을 나누었다. 아이들이 머물다간 빈 방에 그리움 한자락 드리운다.
-분이. 김아가다. 수필세계사. 2023. 우리는 이방인. p103-107.-
이 수필은 아들 내외와, 특히 문화가 다른 며느리와 가깝게 지내려는 어머니의 노력으로 읽어진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읽어보면, 외국인인 며느리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해도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속마음을 이야기한다. 노력만으로는 넘어갈 수 없는 그 무엇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음이 느껴진다고 할까. 작가가 이 수필을 쓴 의도는 ‘나는 이처럼 가까워지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썼다고 하자. 그러나 독자인 나는 또 다르게 읽는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문화의 벽은 노력만으로 허물어질까. 허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는 가까운 척 해야 한다. 이것이 바람직한 삶이다, 라고 믿는다. 작가와 독자인 나의 차이라면, 작가는 ‘노력하여 가까이 간다.’라면, 독자인 나는 ‘노력한다고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노력해야 하고, 가까운 척 해야 한다. 이다. 같은 말인 듯 하면서도 다를 것이다. 작가는 인간살이를 말하였다면, 독자인 나는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을 말하였다. 어쩌면 작가가 제목을 ’우리는 이방인‘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라면, 인간이란 근원적으로 고독을 즉 외로움을 안고 살아간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