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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말씀 :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의 전도(사도행전 14:1~18)
* 본문요약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처럼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두 사도를 돌로 쳐서 죽이려 합니다.
이에 두 사도가 루스드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킵니다.
그러자 이를 본 루스드라 사람들이 두 사도를 신으로 여기고 제사를 드리려 합니다.
두 사도는 자기의 옷을 찢으며 이를 말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권합니다.
찬 양 : 275장(새 498) 저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고
277장(새 499) 흑암에 사는 백성들을 보라
* 본문해설
1. 이고니온에서의 전도와 핍박(1~7절)
1) 이에(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핍박을 받아 이고니온에 왔으므로)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자,
그들의 설교를 듣고 유대과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나쁜 감정)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씀을 전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하여 주시니)
4) 그 성읍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서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들의 관원들과 합세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고 돌로 쳐 죽이려 달려드니
6) 사도들이 이 사실을 알고
루가오니아 지방에 속한 두 성(城)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 루스드라(6절) :
루스드라는 이고니온 동남쪽 38km 지점에 있는 전원도시로
디모데가 어머니 유니게와 함께 살고 있는 도시입니다.
- 더베(6절) :
루스드라에서 동남쪽으로 30km 더 깊숙이 들어가 있는 도시입니다.
2. 루스드라에서의 전도(8~18절)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이 사람은 바울의 설교를 귀 기울여 듣거늘,
바울이 그를 주목하여 보다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쓰스(제우스)라고 부르고,
바울은 주로 설교를 맡아 하고 있었으므로 허메(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성 바깥에 있는 쓰스(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이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성문 앞에 가지고 와서
무리와 함께 두 사도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하니
14)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 말을 듣고 자기들의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라.
16)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세대에는 이방 민족들이 자기네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방임하셨으나(묵인하셨으나, 내버려두셨으나)
17)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것이 아니니,
곧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며,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는 선한 일을 하사
먹을 것을 주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두 사도가 이렇게 말하여,
겨우(간신히)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니라.
- 구원받을 만한 믿음(9절) : 소조
‘구원받을 만한’에 해당하는 ‘소조’는
‘구원하다, 온전하게 하다, 건강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육체의 회복과 영의 회복을 모두 가리킵니다.
-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 오셨다…(11절) :
루스드라 지방에는 옛날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양으로 내려온 적이 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으로 하고
브루기아 산지를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들을 집에 들이려 하지 않았으나,
가난한 빌레몬과 바우시스라는 부부가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래서 제우스는 두 부부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홍수로 쓸어버렸다는 전설입니다.
그래서 이 전설을 믿고 있던 루스드라 시민들이
두 사도를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알고 제사를 지내려 했던 것입니다.
- 쓰스와 허메, 제우스와 헤르메스(12절) :
제우스 : 올림피아의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신(로마 신화에서는 쥬피터)
헤르메스: 제우스 신의 대변인
-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15절) : 호모이오파데이스
‘똑같은 성정’에 해당하는 ‘호모이오파데이스’는
‘같은 것을 경험하다’라는 뜻으로,
바울과 바나바도 분노하고, 질투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유혹받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방임하셨으나(16절) : 에이아센
‘방임하셨으나’로 번역된 ‘에이아센’은 ‘허락하다, 참다, 버리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인간들을 즉각 심판하지 않고 참으셨다,
그들이 행하는 대로 이제까지 내버려두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방인도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묵상 point
1. 이고니온에서의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
유대인의 박해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서 동쪽으로 120km 떨어진 이고니온으로 가서
전에 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이고니온에서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1) 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일이 일어났다(1절)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들은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악한 자들이 아무리 핍박과 고난을 가한다고 할지라도
복음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듣는 자들로 하여금 믿음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2) 도시의 사람들이 두 무리로 나누어졌다(2절)
그러나 반대로 믿음을 갖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그 마음에 악한 마음이 들어가서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믿음을 가진 자들에 대하여 나쁜 감정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도시는 유대인을 따르는 자들과 사도들을 따르는 자들로
두 무리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3) 폭력적인 반대가 있어났다(5~6절)
믿음을 갖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점차로 폭력적인 방법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 도시의 관원들과 합세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고,
급기야 돌을 던져 죽이려 했습니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는 급히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38km 지점에 있는 루스드라로 피신하여 갑니다.
4)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8~10절)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가 모욕과 반대를 받았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오래 머물며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서 그들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표적과 기사는 시련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왜 복음이 전해졌는데 도시가 분열이 되나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의 결과 도시가 두 쪽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믿음을 반대하는 무리들은
“너희가 오기 전에는 이 도시가 하나였는데 너희가 와서 둘로 나뉘어졌다”
하는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멸망을 향하여 가는 기차 안에서
평안히 있게 하는 것은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갈등과 아픔이 있더라도 사람들을 깨우쳐서
멸망으로 가는 기차에서 생명으로 가는 기차로 옮겨 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가정에서 한 사람이 먼저 믿을 때
불가피하게 그 가정에서 분규가 일어날 것이고,
잘못된 공동체를 바르게 바로잡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갈등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허물에만 빠져 있을 때에는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
아직 벗지 못한 죄의 습관과 생명의 말씀 사이에서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갈등과 아픔을 지나면서
우리는 서서히 그 말씀의 능력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싸우다 생기는 갈등은 잘못된 것이지만,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로 일어나는 갈등은
새롭게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창조적인 갈등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갈등과 아픔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시련과 핍박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내가 주님의 뜻을 바로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잘못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늘 점검하고 또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2. 치유 받은 앉은뱅이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두 발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자를 만납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전혀 없는 하반신 마비 환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하고 말하자
그가 벌떡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의사로서,
이 하반신 마비 환자가 어떻게 치유되어 건강하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증거합니다.
1) 첫째 : 바울의 설교를 주목하여 들음(9절)
신앙의 모든 행위와 모든 기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이 하반신 마비 환자의 치유도
그가 바울의 설교를 귀 기울여 듣는 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2)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바울이 주목하여 보고(9절)
바울은 루스드라에 있는 그 앉은뱅이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네 발로 일어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바울이 아무나 붙잡고
“네 발로 일어나라”한다고 해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환자는 바울의 능력으로 치유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단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일어나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3.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9절)
1) 구원받을 만한 믿음 : 산 믿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본문에서는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주께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 믿음과,
다른 하나는 주께서 나의 병을 고치실 능력이 있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➀ 주께서 나를 구원할 능력이 있음을 믿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란
주께서 나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음을 믿는 믿음을 뜻합니다.
주께서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믿고,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내 죄가 모두 용서되었음을 믿으며,
주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나도 부활하여 주와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됨을 믿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권세로 되는 것이니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입니다.
➁ 주께서 나의 병을 고치실 능력이 있음을 믿음
이 환자의 경우, 주께서 자기의 하반신 마비의 질병도
능히 고치실 능력이 있음을 믿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 간절함으로 환자는 바울의 설교를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나를 고치실 능력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니
한마디도 소홀히 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➂ 주님이 나의 왕이심을 믿음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면 주께서 나의 왕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나의 왕의 명령에 충성하겠다는 고백과 믿음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입니다.
2) 구원받지 못할 믿음 : 죽은 믿음(야고보서 2:19)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에서
귀신의 믿음을 구원받지 못할 믿음(죽은 믿음)의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앞에서 두려워 떱니다.
귀신의 믿음이란 단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에 대한 내용을 알고 있을 뿐,
그를 나의 왕으로 믿고 섬기지 않는 것은 귀신이 가진 것과 같은 죽은 믿음입니다.
4.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 신으로 섬기려는 루스드라 사람들
1)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걷고 뛰며 기뻐함(8절)
이고니온에서 쫓겨나듯 빠져나와 루스드라로 갔습니다.
루스드라에 가니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여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걸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울의 설교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를 주목하여 보니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바울은 즉시 그에게 “네 발로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자 그가 곧 걷고 뛰었습니다.
2)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를 헤르메스와 제우스로 알고 제사를 드리려 함(11~13절)
그러자 이 일을 본 루스드라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향하여
신이 사람의 모양으로 내려왔다며 황소 몇 마리와 화환들을 가지고 와서
그들이 우상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바울과 바나바 앞에 제사를 드리려 했습니다(위 본문해설 11절 해설 참조).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의 옷을 찢으며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며 그들의 일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리고 오직 영광 받아야 할 분은 우리를 구하신 예수님뿐이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5. 루스드라에서의 두 가지 위험한 유혹
우리는 이 사건에 담긴 다음 두 가지의 유혹에 주목해야 합니다.
1) 힘 있는 자를 의지하려는 우상 숭배의 유혹(11~13절)
바울과 바나바가 마치 신과 같은 능력을 나타내 보이니
그들은 두 사도를 신으로 숭배하려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힘이 있어 보이는 자를 의지하려는
사람들의 본능적인 욕구를 봅니다.
내가 힘이 없으니 힘이 있어 보이는 자를 높여서
그의 힘을 통하여 나를 보호하려는 욕구입니다.
이런 유혹 때문에 독일의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에게 그렇게 많은 지지를 얻으며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지금도 사교 집단의 교주들이
교인들의 엄청난 지지를 얻으며 사악한 행동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간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하나님처럼 의지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이 세상에 절대 권력을 가지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기억합시다.
누군가 힘이 있어 보일지라도
그 역시 나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2) 나를 높이려는 자기 우상화의 유혹
이렇게 힘이 있어 보이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려는 경향성과 함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나를 높이는 것을 즐기고 싶은 욕구입니다.
헤롯 왕이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가리켜 신의 목소리를 가졌다고 하자
그는 그 칭찬에 만족하며 마치 자기가 신이 된 듯 즐기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벌레에 먹혀 죽는 자가 되었습니다.
● 묵상 : 누군가 나를 높이려 할 때 그것을 즐기려는 마음을 조심하십시오.
큰 업적과 열매를 남겼다고 할지라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만 돌려야 합니다.
영광이 나에게 오는 것을 즐기려는 마음은
나를 파멸로 이끄는 무서운 마음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6. 나도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14~15절)
1) 옷을 찢으며 그들을 말리는 바울과 바나바
그들이 자기들을 신으로 섬기려 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의 옷을 찢으며
그들 무리 속에 뛰어 들어가서
우리도 당신들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들도 분노하고, 질투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유혹받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누군가를 하나님처럼 숭배하지도 말고, 나를 높이려 하지도 마십시오.
우리가 누군가를 숭배하려 할 때 그 사람은 염려도 하지 않고,
유혹도 절대로 받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누군가를 이런 마음으로 의지하거나 숭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조심하십시오.
또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에 빠진 자가 사람들에게 자기를 우상화하여
자기는 흠과 티가 없는 절대적인 순전함을 가진 자라고 과시하려 하지도 마십시오.
● 묵상 :
누군가를 하나님처럼 의지하지도 말고, 나를 우상화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이 둘은 나무나 돌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같은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나를 완전한 자로 포장하지도 말고, 누군가를 완전한 자라고 믿으려 하지도 마십시오.
* 기도제목
1. 믿음을 갖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아픔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옵소서.
2. 세상에서 힘이 있어 보이는 자들을
하나님처럼 의지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옵소서.
3.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고
나를 높이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옵소서.
4.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는
건강하고 신령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