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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69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불가능해 보이는 줄타기를 시작했다.
냉전의 최전선에 선 총리로서 그는 좌우 양쪽 모두에게 배신자 취급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브란트는 사회민주당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나치에 저항했고 망명까지 했던 그의 이력은 진보 진영에게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는 총리가 되자마자 동방정책을 밀어붙였다.
동방정책은 동독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는
정책으로 접촉을 통한 변화라는 원칙 아래 적대 관계를 대화로 풀어가려는 시도였다.
그것은 단순한 유화책이 아니라 힘의 균형과 서방 동맹을 전제로 짜인 냉혹한 현실주의 외교였다.
동독과 소련을 향해 손을 내민 건 맞지만 그것은 이념적 연대가 아니라 접근을 통한 변화를 노린 장기전이었다.
“적과 대화하되 굴복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브란트는 동독과의 관계를 제도화하고 교류를 확대했다.
서독은 헌법상 한 민족 두 국가라는 특수관계를 유지했지만 1972년 기본조약을 통해 동서독은 사실상
서로를 인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급진 좌파 일부는 그를 동독 지도부를 인정함으로써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현상 유지를 도모하는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또 보수 진영의 상당수는 공산주의에 나라를 팔아넘긴다며 분노했다.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를 찾은 브란트 총리는 유대인 게토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독일 총리가 나치의 만행에 대해 몸으로 사죄한 순간이었다.
국내 보수층은 발작하듯 반응했다.
“왜 우리가 또 무릎을 꿇어야 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브란트는 흔들리지 않았다.
과거를 직시하지 않으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폴란드와의 국경선을 사실상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하면서도
서방 동맹과의 관계에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나토의 테두리 안에서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극우에 가까운 세력은 그를 빨갱이라 불렀고 급진 좌파 일부는 그를 체제 순응주의자라 조롱했다.
정치적 고립은 점점 심각해졌다.
1974년 측근 비서가 동독 스파이로 밝혀지는 기욤 사건이 터지면서 그는 결국 총리직을 내려놓는다.
그러나 그가 뿌린 씨앗은 오래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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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정책은 냉전의 긴장을 누그러뜨렸고 동서독 사이의 인적·사회적 교류를 눈에 띄게 늘렸다.
20년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많은 이들이 브란트의 선택이 통일과
냉전 종식의 토양을 다지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다시 보게 되었다.
브란트의 중용은 좌우를 기계적으로 섞어 평균을 내는 계산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진짜 중용 즉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을 마땅한 방식으로 행하는 데 가까웠다.
과거를 직시하고 책임을 지려는 진보의 용기와 국가 이익과 안보
구조를 끝까지 지키려는 보수의 현실주의를 동시에 품으려 했다.
적과 대화하되 원칙은 지켰고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양쪽 모두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끝까지 걸어갔다.
그것이 오늘날 유럽 최강국 독일의 부활로 이어졌다~
/ SNS 글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