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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78회
위나라 대부 원헌(元咺)이 위성공(衛成公)에게 말했다.
“지난날 晉侯가 망명길에 올라 우리나라를 지나갈 때, 선군께서는 예로써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길을 빌려달라고 하니, 주군께서는 그 청을 들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먼저 우리 위나라를 공격한 다음 조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제62회에, 문공이 적나라를 떠나 위나라를 지나갈 때, 위문공은 성문을 닫고 문공을 거절하였다. 제76회에, 위문공이 훙거하고 세자 정(성공)이 즉위하였다.]
위성공이 말했다.
“과인은 조나라와 함께 초나라에 복종하고 있소. 만약 조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길을 빌려준다면, 晉나라의 환심을 사기 전에 먼저 초나라의 노여움을 받게 될 것이오. 晉나라를 노하게 하면 그래도 초나라에 의지할 수 있지만, 초나라를 노하게 하면 어디에 의지하겠소?”
마침내 위성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사신이 돌아가 진문공(晉文公)에게 복명하자, 문공이 극곡(郤縠)에게 말했다.
“원수의 요량을 벗어나지 않는구려!”
진문공은 명을 내려 길을 우회하여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황하를 건너 오록(五鹿) 땅에 당도하자, 문공이 말했다.
“아! 여기가 개자추(介子推)가 허벅지살을 베었던 곳이로다!”
[제62회에, 오록 땅에서 문공이 굶주렸을 때 개자추가 허벅지살을 베어 국을 끓여 바쳤다.]
문공은 자신도 모르게 슬픔이 복받쳐 눈물을 흘렸다. 여러 장수들도 감동하여 함께 슬퍼하였다. 위주(魏犨)가 말했다.
“우리는 속히 성을 함락하여 지난날 주군이 받은 모욕을 설욕해야 하거늘, 어찌 탄식만 하고 있습니까?”
선진(先軫)이 말했다.
“무자(武子; 위주)의 말이 옳습니다. 신이 혼자 본부병을 거느리고 가서 오록 땅을 취하겠습니다.”
문공은 그 말을 장하게 여겨 허락했다. 위주가 말했다.
“나도 그대의 한쪽 팔이 되겠소.”
두 장수는 병거를 타고 전진하였다. 선진은 군사들에게 명하여 많은 깃발을 내걸게 하고, 높은 언덕을 지날 때마다 깃발을 휘날려 쉽게 눈에 띄도록 하였다. 위주가 선진에게 물었다.
“내가 듣건대, ‘병행궤도(兵行詭道)’라고 하였소. 그런데 이처럼 깃발을 휘날리며 적이 미리 알고 준비하도록 하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궤도(詭道)’는 속이는 수단이다. ‘병행궤도(兵行詭道)’는 군대가 움직일 때 적을 속여야 한다는 뜻이다.]
선진이 말했다
“위나라는 평소 제나라에 신복(臣服)하다가, 근래에는 다시 초나라를 섬기고 있소. 하지만 백성들은 순종하지 않으며, 중국이 토벌하러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소. 우리 주군께서 제환공의 뒤를 이어 패업을 도모하려는 이때, 우리의 약함을 보여서는 안 되오. 기선을 제압해야 하오.”
한편, 오록 땅 백성들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晉軍이 나타나자 성 위로 올라가 바라보니, 온 산에 깃발이 가득 휘날리고 있는데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성 안팎을 막론하고 백성들은 다투어 달아나 버렸으며, 성을 지키는 장수도 막을 수가 없었다.
선진이 도착해 보니, 성을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선진은 일고(一鼓)에 성을 점령하였다. 승전보를 받은 진문공은 희색이 만면하여 호언(狐偃)에게 말했다.
“외삼촌께서 땅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늘 그 말이 맞았습니다!”
[제62회에, 문공이 오록 땅에서 배가 고파 농부들에게 밥을 구걸하자, 농부들이 흙덩어리를 주면서 그릇을 만들라고 하였다. 문공이 화를 내자 호언이 말했다. “밥을 얻기는 쉬우나 흙을 얻기는 어려우니, 토지는 곧 나라의 기반입니다. 하늘이 농부들의 손을 빌어 공자에게 토지를 주시려 함이니, 이는 공자께서 나라를 얻을 징조입니다. 어찌 화를 내십니까? 공자께서는 수레에서 내려 저들에게 절을 하고 흙을 받으십시오.” 문공은 농부에게 절하고 흙을 받았다.]
문공은 노장(老將) 극보양(郤步揚)을 오록에 남겨 지키게 하고, 대군을 이동하여 염우(斂盂) 땅으로 가서 주둔하였다.
그때 홀연 극곡이 병이 났다. 문공이 친히 문병을 하자, 극곡이 말했다.
“신은 주군께 불세(不世)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간뇌도지(肝腦塗地)하여 보답해야 하지만, 천명이 다한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지난번에 수자기가 부러진 것이 이제 그 징험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죽기 전에 한 말씀만 드리고자 합니다.”
[‘불세(不世)’는 세상에 매우 드물다는 뜻이다. ‘간뇌도지(肝腦塗地)’는 간과 뇌수가 땅에 쏟아진다는 뜻으로, 참혹한 죽음 또는 나라를 위한 희생 또는 몸 바쳐 충성함을 이르는 말이다.]
문공이 말했다.
“경은 무슨 말이든 하시오. 경의 가르침이라면 과인은 무엇이든 따르리다.”
“주군께서 曹와 衛를 정벌하려는 것은 본래 楚를 물리치기 위한 것입니다. 楚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계책으로 싸워야 하며, 계책으로 싸우려면 반드시 먼저 齊·秦과 연합해야 합니다. 秦은 멀고 齊는 가까우니, 주군께서는 속히 사신을 보내 齊侯와 우호를 맺으십시오. 齊도 지금 楚를 미워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와 우호를 맺으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齊侯와 손잡으면 衛와 曹는 필시 겁을 먹고 스스로 화평을 청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다시 秦과 손을 잡으면, 楚를 견제할 수 있는 완전한 계책이 됩니다.”
“좋소.”
진문공은 즉시 사신을 제나라로 보내, 제환공과의 우호를 얘기하고 동맹을 맺어 함께 초나라를 물리치자고 청하였다.
그때 제나라에서는 제효공(齊孝公)이 훙거하고, 나라 사람들이 그의 아우 반(潘)을 추대하였으니, 그가 제소공(齊昭公)이다. 반은 갈영(葛嬴)의 소생이다.
[제63회에, 제환공의 아들은 여섯이었다. 장위희 소생의 무휴, 소위희 소생의 원, 정희 소생의 소, 갈영 소생의 반, 밀희 소생의 상인, 송화자 소생의 옹이다. 제64회에, 무휴가 역아와 수초의 추대로 군위에 올랐다가, 제65회에 국의중에게 죽음을 당하고, 세자 소(효공)가 즉위하였다. 제64회에, 옹은 秦나라로 망명했다가, 제77회에 초성왕이 제나라 양곡 땅을 점령하고 옹을 봉했다. 제64회에, 상인·원·반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제65회에 원은 위나라로 망명했다. 반과 상인만 제나라에 남아 있는데, 반이 상인보다 연장자이기 때문에 군위에 오른 것이다.]
제소공은 군위에 올라 양곡(陽穀) 땅을 탈환하기 위해 晉과 결맹하여 楚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晉侯가 염우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즉일로 염우로 가서 진문공을 만났다.
한편, 위성공은 오록이 점령당하자 황급히 영속(寧速)의 아들 영유(寧俞)를 晉나라 군영으로 보내 사죄하고 화평을 청하였다. 진문공이 말했다.
“위나라는 길을 빌려주지 않다가 이제야 두려워 화평을 구하니, 이는 본심이 아니다, 과인은 조만간에 초구(楚丘)를 짓밟아 버릴 것이다”
[‘초구(楚丘)’는 위나라 도성이다.]
영유는 돌아가 위성공에게 보고하였다. 그때 초구성에는 晉軍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헛소문이 퍼져 백성들은 하룻밤에도 다섯 번이나 놀랐다.
영유가 위성공에게 말했다.
“晉侯의 노여움이 지금 대단하고, 백성들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잠시 성을 떠나 피신하십시오. 晉侯가 주군께서 이미 성을 떠난 줄 알면, 필시 초구까지 쳐들어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晉侯에게 화평을 청하면 사직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위성공은 탄식하였다.
“선군께서 불행히도 망명한 공자에게 예를 잃었고, 이제 또 과인이 미련하게도 길을 빌려 주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소. 화가 백성들에게까지 미쳤으니, 과인이 무슨 면목으로 나라 안에 있을 수 있겠소?”
위성공은 대부 원훤과 자신의 아우 숙무(叔武)에게 국사를 맡기고 양우(襄牛) 땅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대부 손염(孫炎)을 초나라에 보내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염옹(髯翁)이 시를 읊었다.
納姬贈馬怪紛紛 다투어 여인과 말을 바치는 것을 괴이하게 여겼으니
患難何須具主賓 환난에 처한 사람을 어찌 손님으로 대접하려 했겠는가?
誰知五鹿開疆者 누가 알았겠는가, 오록 땅을 빼앗아 간 사람이
便是當年求乞人 예전에 구걸하러 다니던 사람일 줄이야!
[제61회에 적후(翟侯)는 중이(문공)에게 계외를 시집보냈고, 제62회에 제환공은 중이에게 제강을 시집보내고 수레 20승을 주었다. 제69회에, 송양공은 중이에게 말 20필을 주었다. 제70회에, 초성왕은 秦나라로 가는 중이에게 황금과 비단, 수레와 말을 후하게 내주었다. 제71회에, 진목공은 晉나라로 돌아가는 중이에게 백벽 열 쌍과 말 4백 필 및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 주었다.]
때는 봄 2월이었는데, 그 달에 극곡이 군중에서 세상을 떠나자, 진문공은 애도해 마지않았다. 극곡의 시신을 귀국시킨 후, 진문공은 오록 땅을 점령한 공으로 선진을 원수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서신(胥臣)을 하군 부장에 임명하여 선진의 자리를 보충하였다.
[제77회에, 진문공이 조쇠를 하군 대장으로 임명하려 하자, 조쇠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은 신중함이 난지보다 못하고, 계략은 선진보다 못하며, 박식함은 서신보다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서신을 선진의 자리에 임명한 것이다.]
진문공이 위나라를 멸망시키려 하자, 선진이 간했다.
“본래 楚가 齊와 宋을 공격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위급을 구하러 왔습니다. 이제 齊와 宋이 아직 구원되지 못한 상황에서 먼저 한 나라를 멸한다는 것은, 망하는 나라를 존속시켜 주고 작은 나라를 구원해 주는 패주(覇主)의 義가 아닙니다. 衛가 비록 무도하다 하나 그 군주는 이미 도성을 떠났으니, 그를 폐위시키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우리 손에 달렸습니다. 차라리 군사를 동쪽으로 이동하여 曹를 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면 楚가 衛를 구원하러 달려왔을 때, 우리는 이미 曹에 가 있게 될 것입니다.”
문공은 그 말에 따랐다.
3월에 晉軍이 조나라를 포위하자, 조공공(曹共公)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책을 물었다. 희부기(僖負羈)가 말했다.
“晉侯가 이번에 쳐들어온 것은 지난날 주군께서 그의 변협(騈脅)을 구경하신 원한을 갚고자 함입니다. 그 원한이 깊으니, 힘으로는 겨룰 수 없습니다. 신이 사신으로 가서 사죄하고 화평을 청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변협(騈脅)’이란 갈비뼈가 서로 붙어 있어 마치 한 개의 뼈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제69회에, 중이(진문공)가 조나라에 갔을 때 조공공이 변협을 구경하려고 목욕탕을 침범하였다.]
조공공이 말했다.
“晉은 衛도 용서하지 않았는데, 우리 曹를 용서하겠소?”
대부 우랑(于朗)이 말했다.
“신이 듣건대, 지난날 晉侯가 망명하여 우리 曹나라를 지날 때 희부기는 그에게 사사로이 음식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이제 사신으로 가겠다고 하니, 이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수작입니다. 그의 말을 듣지 마시고, 주군께서는 먼저 그를 참하십시오. 신에게 晉軍을 물리칠 계책이 있습니다.”
[제69회에, 희부기는 아내 여씨의 조언을 듣고 중이에게 음식과 백벽을 제공했는데, 중이는 음식만 받고 백벽은 받지 않았다.]
조공공이 말했다.
“희부기는 나라에 불충한 자이지만, 그가 세신(世臣)임을 감안하여 죽음만은 면하게 하고 관직을 박탈하라.”
[‘세신(世臣)’은 대대로 섬겨온 신하이다.]
희부기는 사은하고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야말로 ‘창문을 닫고서 창 앞에 달이 떠 있는 줄은 모르면서, 매화(梅花) 타령만 하고 있다.’는 격이었다.
[훌륭한 인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뜻이다.]
조공공이 우랑에게 물었다.
“어떤 계책이 있소?”
우랑이 말했다.
“晉侯는 승전한 것만 믿고 필시 교만해 있을 것입니다. 신이 거짓으로 밀서를 보내 황혼 무렵에 성문을 바치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그리고 강노(强弩)를 든 정예병을 성문 옆에 매복시켰다가, 晉侯가 성문을 들어서는 즉시 현문(懸門)을 내리고 일제히 활을 쏘면 어찌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현문(懸門)’은 아래위로 여닫게 되어 있는 문이다.]
조공공은 그 계책을 따랐다.
진문공이 우랑의 항서를 받고 성으로 들어가려 하자, 선진이 말했다
“조나라의 힘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거짓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신이 한번 시험해 보겠습니다.”
선진은 군중에서 수염이 길고 풍채가 당당한 자를 골라 晉侯의 의관을 입혀 대신 가게 하였다. 내시 발제(勃鞮)가 가짜 晉侯의 수레를 몰겠다고 자청하였다.
황혼 무렵이 되자, 성 위에서는 항기가 오르고 성문이 활짝 열렸다. 가짜 晉侯가 군사 5백을 이끌고 성문을 들어섰다. 군사들이 반쯤 들어갔을 때, 갑자기 딱따기소리가 어지럽게 들리더니 화살이 메뚜기 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晉軍은 급히 돌아서려 했지만 이미 성문은 닫힌 뒤였다. 가련하게도 발제를 포함하여 3백여 명의 晉軍은 한 덩어리가 되어 죽어 갔다.
다행히 진문공이 친히 가지 않았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곤강(崑崗)에 불이 나 옥석(玉石)이 함께 불타는’ 격이 되었을 것이다.
[‘곤강(崑崗)’은 곤륜산(崑崙山)인데, 옥이 많이 나는 곳이다. 천자문(千字文)에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는 구절이 있다. ‘옥석구분(玉石俱焚)’은 옥과 돌이 함께 불에 탄다는 뜻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는 것을 이른다.]
진문공이 예전에 조나라를 지나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조나라 사람들 가운데 진문공의 얼굴을 아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창졸간에 일이 벌어져 진위(眞僞)를 판별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랑은 晉侯가 죽은 줄 알고 조공공 앞에서 자신의 공을 떠벌였다. 하지만 날이 밝은 후 시신을 살펴보니 가짜였다.
晉軍 가운데 성중으로 들어가지 않았던 군사들이 도망쳐 와서 보고하자, 진문공은 더욱 노하여 맹렬히 성을 공격하였다. 우랑은 다시 계책을 내놓았다.
“화살을 맞고 죽은 晉軍들의 시신을 성 위에 늘어놓으면, 저들이 보고 필시 슬퍼하여 기가 꺾여 힘껏 싸우지 못할 것입니다. 며칠만 시간을 끌면 초군이 구원하러 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군심(軍心)을 요동시키는 계략입니다.”
조공공은 그 말대로 했다.
晉軍은 성 위에 시신들이 장대에 매달려 늘려 있는 것을 보고, 원한어린 탄식이 끊이지 않았다. 진문공이 선진에게 말했다.
“군심이 변할까 두렵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선진이 대답했다.
“조나라의 분묘가 모두 서문 밖에 있습니다. 군사의 절반을 묘지에 열병하여 분묘를 파헤칠 듯하면, 성중에서는 반드시 두려워하여 혼란해질 것입니다. 그 틈을 타서 공격하면 됩니다.”
“좋소.”
진문공은 명을 내려, 군중에 말을 퍼뜨렸다.
“조나라의 분묘를 파헤칠 것이다.”
호모(狐毛)와 호언(狐偃)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묘지 옆에 영채를 세우고 괭이와 삽을 준비하게 하고서, 내일 정오까지 분묘를 파서 해골을 가져오는 자에게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조나라의 성중 백성들은 그 소식을 듣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조공공은 사람을 시켜 성 위에 올라가 소리치게 하였다.
“분묘를 파헤치는 것만은 그만두시오. 이번엔 정말로 항복하겠소!”
선진 역시 사람을 시켜 응답하게 했다.
“너희들은 아군을 유인하여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찢어 성 위에 늘어놓았다. 우리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분묘를 파헤쳐 원한을 갚고자 하노라! 만약 너희들이 시신을 잘 염하여 관에 넣어 돌려보낸다면, 우리도 군사를 거두어 물러나겠다.”
조나라 사람들이 말했다.
“그렇다면 사흘만 여유를 주시오.”
선진이 응답했다.
“사흘 내로 시신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희 조상들이 욕을 당할 줄 알라!”
조공공은 성 위의 시신들을 수습하는 한편 관을 준비하게 하였다. 사흘 동안 시신들을 단정하게 염하고 입관한 뒤, 수레에 실었다.
이때 선진은 이미 계책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호모·호언·난지·서신 등에게 명하여 병거를 정돈하고 4로에 매복해 있다가 曹軍이 성문을 열고 관을 갖고 나올 때 4문을 일제히 공격하도록 하였다.
나흘째가 되자, 선진은 군사를 시켜 성 아래에 가서 소리치게 하였다.
“오늘 아군의 시신을 돌려주겠느냐?”
성 위에서 응답했다.
“포위를 풀고 5리만 후퇴하면 곧 관을 내보내겠소.”
선진은 문공에게 아뢰고, 군사를 5리 밖으로 후퇴시켰다. 잠시 후 성문이 열리면서 관을 실은 수레가 4문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삼분의 일쯤 나왔을 때, 홀연 포성이 크게 울리며 4로의 복병이 일제히 일어났다. 수레가 성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급히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晉軍은 혼란한 틈을 타서 입성했다.
위주는 조공공이 성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단숨에 뛰어올라 생포해 버렸다. 우랑은 성을 넘어 도망치다가 전힐(填頡)의 칼에 목이 달아났다. 진문공은 장수들을 거느리고 성루에 올라가 승첩을 보고받았다. 위주는 조공공을 바치고, 전힐은 우랑의 수급을 바쳤다. 여러 장수들도 포로들을 붙잡아 와서 바쳤다.
진문공이 관원들의 명부를 가져오게 하여 보았더니, 초헌(軺軒)을 타는 자가 3백 명이었는데, 그 성명이 적혀 있었다. 진문공은 관원들을 한 명 빠짐없이 모두 붙잡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그 가운데 희부기는 없었다.
[‘초헌(軺軒)’은 벼슬아치가 타는 외바퀴가 달린 수레이다.]
진문공이 까닭을 묻자, 한 관원이 말했다.
“희부기는 화평을 청하라고 주군께 권하다가, 파직되어 서민이 되었습니다.”
진문공은 조공공을 대면하여 꾸짖었다.
“그대 나라에는 단 한 사람의 현신이 있었건만, 그대는 그를 쓰지 못했구나. 도리어 불초한 소인배를 임용하여 어린애 장난 같은 짓을 하였으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진문공은 명을 내렸다.
“영채에 감금하라! 초나라에 승전한 후에 처분하겠다!”
초헌을 타고 다닌 3백 명을 모조리 죽이고, 그 가산을 몰수하여 군사들에게 상으로 나누어주었다.
희부기의 집은 북문에 있었는데, 진문공은 군사들에게 북문 일대를 호위하여 희부기를 놀라지 않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희씨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훼손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고 선포하였다.
진문공은 장수들을 나누어, 절반은 성을 지키게 하고 절반은 자신을 따라 영채로 가서 주둔하게 하였다.
호증선생(胡曾先生)이 시를 읊었다.
曹伯慢賢遭縶虜 조공공은 현신을 업신여겨 포로가 되었지만
負羈行惠免誅夷 희부기는 은혜를 베풀어 죽음을 면했네.
眼前不肯行方便 눈앞에 닥친 일을 편의대로 하지 않았는데
到後方知是與非 훗날에야 비로소 그 옳고 그름을 알 수 있었네.
한편, 위주와 전힐은 평소에 자신들의 공을 믿고 교만방자(驕慢放恣)한 뜻이 있었다. 진문공이 희부기를 보호하라는 명을 내리자, 위주는 분연히 말했다.
“우리는 오늘 군주를 사로잡고 장수를 참하였는데, 주군은 한 마디의 칭찬도 없었소. 지난 날 한 끼 음식을 대접받은 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렇게까지 마음을 쓴단 말이오? 이는 참으로 경중(輕重)을 구분하지 못하는 처사요!”
전힐이 말했다.
“희부기가 만약 우리나라에서 벼슬한다면, 반드시 중용(重用)될 것이오. 우리가 그 자에게 업신여김을 받느니, 차라리 불을 질러 그 자를 태워 죽여 후환을 없애버립시다. 주군이 알더라도 우리를 참수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 말이 옳소.”
[제71회에, 진문공이 군위에 올라 논공행상할 때, 위주와 전힐은 조쇠나 호언 같은 문신들이 자기들보다 더 높은 상을 받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원망하는 말을 자주 했는데, 문공은 그들의 공로를 생각하여 나무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면서 밤이 되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은밀히 군졸들을 이끌고 가서 희부기의 집을 포위하고 앞뒤 문에 불을 질렀다. 화염이 충천한 가운데, 위주는 술이 취한데다 자신의 용기를 믿고 문루에 뛰어올랐다. 그는 희부기를 찾아 죽이려고 불길을 무릅쓰고 지붕 위를 나는 듯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대들보와 서까래가 불에 타서 무너지는 바람에 위주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발이 대들보에 깔려 하늘을 쳐다보는 자세로 누워 꼼짝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큰소리가 나면서 큰 기둥 하나가 와지끈 부러지면서 위주의 가슴을 덮쳤다. 위주는 너무나 아파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입으로 선혈을 내뿜었다. 사방에는 불덩어리들이 난무하였다.
위주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기둥을 밀쳐내고 몸을 굴려 간신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입고 있던 옷에는 모두 불이 붙어, 찢어서 벗어버렸다. 위주는 완전히 알몸이 되었지만, 불에 타죽는 화는 면할 수 있었다. 위주가 비록 용맹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이때는 기진맥진하여 땅바닥에 쓰러졌다.
마침 전힐이 달려와 위주를 부축하여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자신의 옷을 벗어 입혀주었다. 그리고 함께 수레를 타고 거처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였다.
한편, 호언과 서신은 성중에 있다가 북문에서 불길이 오르는 것을 보고, 병란(兵亂)이 일어난 줄 알고 황급히 병사들을 이끌고 달려가 보니, 희부기의 집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급히 병사들로 하여금 불을 끄게 하였지만, 집은 이미 거의 다 타버린 후였다.
희부기는 집안사람들을 이끌고 불을 끄려고 하다가 연기에 질식되어 쓰러졌는데, 병사들이 그를 발견하고 구했을 때는 이미 화상을 심하게 입어 인사불성(人事不省)이었다. 희부기의 아내는 불이 나자 ‘희씨의 후손이 끊기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다섯 살 난 아들 희록(僖祿)을 가슴에 안고 후원의 더러운 연못 속에 들어가 있어 화를 면하였다.
[제69회에, 희부기가 중이에게 음식을 제공한 것은 아래 여씨의 조언 덕분이었다. 현명한 사람은 위급한 순간에도 현명하게 대처한다.]
새벽이 되어서야 비로소 불이 꺼졌다. 희씨 가문의 장정 몇 사람도 불에 타 죽고, 인근의 민가 10여 채도 불에 탔다.
호언과 서신은 위주와 전힐이 방화한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그 사실을 감히 숨길 수 없어 영채로 군사를 보내 진문공에게 보고하였다.
영채는 성에서 5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그날 밤 진문공은 성중에서 불길이 오르는 것을 보긴 했지만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어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진문공은 보고를 받고서 즉시 어가를 타고 곧장 성으로 들어갔다. 먼저 북문으로 가서 희부부기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희부기는 눈을 뜨고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문공은 탄식하여 마지않았다.
희부기의 아내가 다섯 살 난 아들 희록을 안고 와서 땅에 엎드려 통곡하였다. 문공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과인이 그대를 위해 아들을 잘 보살펴주겠소.”
문공은 즉시 명을 내려 품속에 있는 희록을 대부로 임명하고 황금과 비단을 후하게 하사하였다. 희부기의 장례를 지내고 그 아내와 아들을 晉나라로 데려가게 하였다.
후에 조공공이 조나라로 돌아간 다음, 희부기의 아내가 고향으로 돌아가 성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여 조나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희록은 장성하여 조나라에서 벼슬하여 대부가 되었는데, 그것은 훗날의 얘기이다.
그날 문공은 사마 조쇠(趙衰)에게, 명령을 어기고 방화한 죄를 물어 위주와 전힐을 참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조쇠가 아뢰었다.
“이 두 사람은 19년 동안 주군을 따라 망명하였고, 근래에도 또 큰 공을 세웠으니 용서하십시오.”
문공은 노하여 말했다.
“과인이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것은 명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하로서 명령을 준수치 않는 자는 신하라 할 수 없고, 군주로서 신하에게 명령을 시행하지 못하면 군주라 할 수 없습니다. 군주가 군주 노릇을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못한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과인을 위하여 노력한 대부들이 많은데, 만약 그들이 모두 명령을 어기고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과인은 이제 다시 명령을 내릴 수 없을 게 아니겠습니까?”
조쇠가 다시 아뢰었다.
“주군의 말씀이 지극히 마땅합니다. 하지만 위주의 용력은 어떤 장수도 따를 수 없습니다.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범죄에는 주범(主犯)과 종범(從犯)이 있는 법이니, 전힐 한 사람만 처벌하더라도 사람들에게 경종(警鐘)이 될 것입니다. 둘 다 죽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과인이 듣건대, 위주는 가슴의 상처가 심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조만간에 죽을 자를 위해서 과인의 법령까지 시행하지 못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이 군명을 받들어 그를 문병하겠습니다. 만약 그가 살아날 가망이 없으면, 주군의 말씀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만약 다시 전투에 나설 가망이 있다면, 위급한 때를 대비하여 이 호장(虎將)을 살려주십시오.”
문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문공은 순림보(荀林父)에게는 전힐을 데려오라고 명하고, 조쇠는 위주의 병을 살피러 보냈다.
첫댓글 어제 저의 사정이 있어 연재하지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석촌호수에서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반가움은 만땅이었습니다.
훗날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