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서는 제후들 第 一 回 周宣王聞謠輕殺 주선왕은 길거리의 노래를 듣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杜大夫化 鳴寃 두대부는 무서운 소리로 울어대는 원귀(寃鬼)가 되었다. 道德三皇五帝(도덕삼황오제)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에는 도덕으로 功名夏后商周(공명하후상주) 하은주(夏殷周) 삼대에는 공과 명으로 천하를 다스렸으나, 英雄五覇鬧春秋(영웅오패뇨춘추) 영웅오패(英雄五覇)가 춘추를 어지럽게 하자 傾刻興亡過手(경각흥망과수) 순식간에 흥망이 무상하게 되었다. 靑史幾行名姓(청사기행명성) 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얼마며, 北邙無數荒丘(북망무수황구) 북망산(北邙山)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덤은 얼마인가? 前人田地後人收(전인전지후인수) 앞서간 선인들의 땅을 후세사람들이 차지하려고 싸우니 說甚龍爭虎鬪(설심용쟁호투) 이를 용쟁호투(龍爭虎鬪)라 하지 않았는가? 주나라는,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의 주왕(紂王)을 정벌하여 천자(天子)에 즉위하고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이 그 뒤를 이었다. 이 두 왕은 주나라의 기업(基業)을 지킨 임금이 되었다. 또한, 주공(周公), 소공(召公), 필공(畢公), 사일(史佚)등 여러 현명한 신하들이 정치를 보좌하여 문화를 일으키고 전쟁은 억제하여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 결과 재화가 넉넉하게 되어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 주무왕(周武王)으로부터 10대인 이왕(夷王)때 이르러 제후(諸侯)들의 천자에 대한 예절이 해이해 지고 또한 그 세력이 점차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이왕의 뒤를 이은 11대인 려왕( 王)은 포학무도(暴虐無道)하여 국인(國人)들에게 쫓겨나 체( )라는 곳으로 도망가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이 일이 1100년 간 계속된 변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두 사람이 함께 협력하여 태자 정(靜)을 옹립하여 왕으로 세웠다. 이 사람이 주선왕(周宣王)이다. 이 천자가 또한 영명유도(英明有道)하여 현신(賢臣)들 즉, 방숙(方叔), 소호(召虎), 윤길보(尹吉甫), 신백(申伯), 중산보(仲山甫) 등을 등용하여 문왕(文王), 무왕(武王), 성왕(成王), 강왕(康王)의 치세를 다시 세워 주나라 왕실을 찬란하게 중흥시켰다. 이것을 노래한 시가 있다. 夷 相乃政不綱(이려상내정불강) 이왕과 려왕의 정치는 진실로 옛날의 강령을 따르지 못했다. 任賢圖治賴宣王(임현도치뢰선왕) 슬기로운 신하를 등용하여 치세를 이룬 것은 선왕 때였다. 共和若沒中興主(공화약몰중흥주) 공화 연간(年間) 이후에 만약에 선왕과 같은 중흥주가 없었다면, 周歷安能八百長(주력안능팔백장) 어찌 주나라의 역사가 팔백 년을 갔겠는가? 그러나 주선왕(周宣王)이 비록 정사에 부지런했으나, 역시 무왕의 단서수계(丹書受戒)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집집마다 창문에는 공덕을 새겨 중흥을 이야기했으나, 역시 성왕(成王), 강왕(康王) 때의 교화와 큰 치세에는 미치지 못했다. 변방 지역과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왕명을 전할 때는 통역을 세워야 했으며, 먼 변방의 나라는 주나라에게 진귀한 공물을 바쳐야만 했었다. 이어서 선왕 재위 39년인 기원전 789년에 강융(姜戎)이 반하여 천자가 친히 정벌에 나섰으나 천무(千畝)에서 패하여 전차와 병졸을 크게 잃었다. 군사를 다시 동원하여 정벌할 계획이었으나 군사의 수가 충분치 않아 천자가 몸소 태원(太原)으로 가서 그곳의 백성들을 징발하였다. 태원은 현재 고원주(固原州)로 바로 융적(戎狄)의 땅과 이웃해 있다. 징발한 백성들은 태원의 호구들인데, 호적을 대조한 후에 한곳에 모이게 하였다. 이어서 징발한 백성들을 사열하고, 그 인원의 다소(多少)와, 또한 거마(車馬)와 양식 및 마초(馬草)의 많고 적음을 확인한 후에, 인원과 물자를 징발하여 출정하였다. 태재(太宰) 중산보(仲山甫)가 이를 중지하라고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후세 사람이 시를 지어 노래하였다. 犬 何須辱劍 (견체하수욕검망) 개나 돼지를 잡는데 어찌 검망(劍 )을 더럽히려 하는가? 隋珠彈雀總堪傷(수주탄작총감상) 수나라의 귀한 구슬을 던져서 참새를 잡으려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로다 皇威褒盡無能報(황위포진무능보) 천자의 위엄이 다해 원수를 갚을 수 없다고 枉自將民料一場 (왕자장민료일장) 망녕되이 스스로 백성들을 징발하여 소란을 피우는가? 주선왕(周宣王)이 태원(太原)에서 백성을 징발하여 되돌아오던 중 날이 저물었으나, 어가를 멈추게 하지 않고 계속 길을 재촉하니, 밤중이 되어서야 성안에 들어서게 되었다. 거리에서 어린아이들 수십 명이 무리를 지어 박수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한 목소리였다. 주선왕이 곧 어가를 세워서 노래를 들었다. 노래말은 다음과 같았다. 月將升(월장승) 달이 뜨고, 日將沒(일장몰) 해가 진다. 弧 (염호기복) 뽕나무 활과 풀로 엮어 만든 전통(箭筒)은 幾亡周國(기망주국) 주나라가 망할 징조로다. 주선왕(周宣王)이 그 노래를 듣고 그 노래말이 불길하다고 생각햐여 시종으로 하여금 그 연유를 묻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을 잡아오게 하였다. 아이들은 놀라서 흩어지고 나이가 제법 든 아이와 어린 아이 두 명만을 잡아 와서 선왕의 수레 앞에 꿇어 앉혔다. 선왕이 물었다. "그 노래는 누구에게서 배워 부르게 되었는가?" 나이가 제법든 아이가 말했다. "우리들이 지어서 부른 것이 아니고, 삼일 전 홍의(紅衣)를 입은 동자가 거리에 나와 우리들에게 가르쳐 외우게 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번 가르쳐 부르게 하자 시정(市井)에 만연하여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어린아이들이 같이 부르게 되었고, 한 곳에 멈추지 않고 이렇게 널리 퍼져 부르게 된 것입니다." 선왕 " 지금 홍의동자(紅衣童子)는 어디에 있는가?" 동자 " 노래를 가르친 후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주선왕이 오랫동안 말없이 있다가 아이들을 꾸짖고 내보낸 후에 즉시 사시관(司市官)을 불러 명령하기를 거리로 나가,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감시하라고 일렀다. 만약에 어린아이가 그 노래를 부를 경우, 그 부모를 연좌(連坐)하여 죄를 주겠다고 하였다. 주선왕은 그날 밤으로 궁궐로 돌아 왔다. 다음날 조례에 삼공육경(三公六卿)이 모두 조정에 모여서 배례(拜禮)를 드리고 일어나 도열했다. 선왕이 어제 밤에 도성으로 돌아오다가 길거리에서 들은 어린 동자들의 노래 소리를 여러 신하들에게 들려주고 대신들에게 물었다. " 이 노래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대종백(大宗伯) 소호(召虎)가 말했다. " 염( )은 뽕나무의 이름이고 활을 만드는 재료가 됩니다. 그런 연유로 염호( 弧)라 합니다. 기( )는 풀이름입니다. 질겨서 화살통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화살통의 이름을 기복( )이라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나라에 궁시지변(弓矢之變)이 있을까 우려됩니다" 태재(太宰) 중산보(仲山甫)가 뒤를 이어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 궁시(弓矢)는 곧 나라의 무기인바, 왕께서 이번에 태원(太原)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견융(犬戎)에 원수를 갚으려고 하시는데 만약 군대를 해산하지 않으시면 반드시 국가에 환란(患亂)이 닥칠 것입니다." 선왕이 말없이 고개를 흔들며 다시 물었다. " 이 말은 홍의동자로부터 기인한 말인데 그 홍의동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태사(太史) 백양보(伯陽父)가 대답했다. " 시중의 근거 없는 말을 요언(謠言)이라 합니다. 하늘이 임금에게 경계(儆戒)를 주기 위하여 형혹성(熒惑星)에게 명하여, 동자로 변해 요언(妖言)을 만들어, 어린 동자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였습니다. 적게는 한 사람의 길흉을 말하며, 크게는 국가의 흥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형혹성(熒惑星)의 색은 붉은 색입니다. 그 망국의 노래는 곧 하늘이 왕께 경계를 주고자 함입니다." 선왕 " 짐이 오늘 강융(姜戎)의 죄를 사(赦)하고, 태원의 병사들을 해산하며, 무기 창고에 있는 활과 화살을 모두 불사르고, 다시 영을 내려 나라 안에서 활과 화살을 만들어 팔지 못하게 하면 그 화를 가라앉힐 수 있겠는가? " 백양보 "신이 하늘을 관측해 보니 그 조짐이 이미 나타나 왕궁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관(關) 안팎의 활과 화살이 아니면, 후에 반드시 여자가 있어 나라를 어지럽히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노래에 '달이 뜨고 해가 진다'에서 해는 임금을 말하며 달은 여자를 뜻하는 음(陰)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일몰장승(日沒月升)은 음(陰)이 승하고 양(陽)이 쇠(衰)하니 그 여자의 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밝게 행하여야 합니다." 선왕 " 짐은 강후(姜后)가 육궁(六宮)을 잘 주재(主宰)하고 있고, 또한 그 덕이 심히 높아 나에게 바치는 궁녀들은 모두 강후가 선택하면 내가 이를 어기지 않고 따르고 있는데 어찌 여자로 하여금 란이 일어난다고 하는가?" 백양보 "요언(妖言)에 '장승(將升)' '장몰(將沒)'이라 했으니 목전지사(目前之事)는 아닙니다. 더욱이 장(將)이라는 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뜻하는 말이니, 왕께서 장차 덕을 쌓아 정사를 돌보시어 재난에 대비하신다면 자연적으로 화(禍)가 길(吉)로 변할 것이며 활과 화살은 구태여 태워서 없앨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선왕이 백양보(伯陽父)가 아뢰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면서 어가를 출발 시켜 궁궐 안으로 되돌아갔다. 강후(姜后)가 맞이하여 좌정하자 선왕이 곧이어 군신들의 자기에게 상주한 말을 강후에게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강후 " 궁중에 이상한 일이 있어 바로 말씀드리려고 하던 참입니다." 선왕 " 무슨 이상한 일입니까?" 강후 " 지금 선왕(先王) 때부터 있었던 늙은 궁인이 있는데 나이가 오십 여 세가 되었습니다. 선왕(先王)때 아이를 밴 이래 사십 여 년이 되었는데, 바로 어제 저녁에 여자아이를 낳았습니다." 선왕이 크게 놀라 물었다. "그 여자아이는 어디에 있는가?" 강후 "첩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 이미 사람에게 명하여 가마니에 싸서 이십 리 밖의 청수하(淸水河) 가운데에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선왕이 곧 늙은 궁인을 불러서 아이를 밴 연고를 물었다. 늙은 궁인은 엎드려 대답했다. " 하(夏)나라 걸왕(桀王) 말년에 포성(褒城)의 신인(神人)이 용(龍) 두 마리로 변해 입에는 침을 흘리며 왕궁의 뜰 안에 내려앉더니 갑자기 사람으로 변해 말했습니다. ' 우리들은 곧 포성의 두 주인이다' 걸왕(桀王)이 두려워하여 두 마리의 용을 죽이려고 태사(太史)에게 점을 치게 했으나, 점괘가 불길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다시 용을 쫓아내면 어떤가 하고 점을 치게 한 바 역시 불길하게 나왔습니다. 태사가 점괘를 보고 걸왕(桀王)에게 아뢰었습니다. '신인이 하강하니 반드시 임금님께 상서로운 일일 것입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이 용의 타액(唾液)을 받아서 보관하시지 않으십니까? 용의 타액은 곧 용의 정기(精氣)라, 저장하여 두면 필히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걸왕이 태사에게 명하여 다시 점을 치게 하니 그때는 대길(大吉)로 나왔습니다. 곧이어 용 앞에다 제단을 만든 다음 비단 천으로 덮고 금으로 만든 쟁반으로 그 용의 침을 받아 붉은 궤( )에 넣었습니다. 일이 다 끝나자 갑자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더니, 두 마리의 용은 날아가 버렸습니다. 걸왕이 명하여 용의 침을 받은 궤를 창고에 보관하게 했습니다. 은(殷)왕조 640년 28왕을 거쳐서, 우리 주나라 왕조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궤의 뚜껑을 열지 않다가 선왕(先王)이신 려왕( 王) 말년(末年)에 이르러 그 궤에서 희미한 빛이 비치자, 창고를 지키는 관리가 그 일을 선왕(先王)에게 보고했습니다. 선왕(先王)께서 들으시고 물으셨습니다. ' 궤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창고를 지키는 관리가 장부를 갖다 바치면서 용의 침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선왕께서 궤를 열어 보겠다고 명하셨습니다. 심부름하는 신하가 붉은 궤( )를 깨뜨리고 뚜껑을 연 다음에 그 안에 들어있었던 금쟁반을 꺼내어 두 손으로 바쳤습니다. 선왕(先王)께서 손을 들어 받으려고 한 순간에 실수로 금쟁반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금쟁반에 들어 있던 용의 침이 뜰로 쏟아지자, 갑자기 여러 마리의 자라 새끼로 변하더니, 그 중 한 마리가 궁전 뜰 안에서 돌아 다녔습니다. 내시가 자라새끼를 뜰 안에서 쫓아내자 왕궁 안으로 도망가더니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때 저의 나이는 바로 열두 살이었는데 우연히 자라의 흔적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에 감각이 오고 점차로 배가 불러왔습니다. 이윽고 저의 몸은 애를 밴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선왕께서 천한 것이 지아비 없이 애를 밴 것을 괴이하게 생각하여 깊은 방 속에 가둔 이래 지금까지 사십 년이 되었습니다. 어제 밤중에 배에 갑자기 통증이 와 뜻밖에 여자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궁을 지키는 시자(侍者)들을 감히 속이기 어려워 부득이 왕후께 알리게 되었습니다. 왕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이 요물(妖物)은 결코 용납할 수가 없구나!' 왕후께서 즉시 시자들에게 명하여 애를 가져다 강물에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비자(婢子)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선왕(宣王)이 이야기를 다 듣고 말했다. " 이일은 선조(先朝)때의 일이라 너와는 무관한 일이다!". 늙은 궁인에게 큰 소리로 말하여 물러가게 하고 곧이어 궁을 지키는 시자를 불러, 청수하(淸水河)게 가서 여자 아기가 떨어져 있는가 살펴보라고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시자가 돌아와 보고하였다. " 이미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주선왕(周宣王)은 더 이상 의심치 않았다. 다음날 아침 태사(太史) 백양보(伯陽父)를 불러 용의 침(龍 )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 그 여자아이가 강물에 빠져 죽어 요기가 없어 졌는지 경이 점을 한번 처 보라 " 백양보가 점괘가 나오는 것을 보고 글로 만들어 바쳤다. 哭又笑(곡우곡) 곡하고 웃고 笑又哭(소우곡) 웃고 또 곡하다. 羊被鬼呑(양피귀탄) 양(羊)이 귀신(鬼神)에게 잡혀 먹히고 馬逢犬逐(마봉견축) 말이 개를 만나 쫓겨다니니 愼之愼之(신지신지) 신중하고 신중 할지어다 弧 (염호기복) 뽕나무 활에 풀로 엮어 만든 전통(箭筒)이로다. 선왕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백양보가 아뢰었다. " 십이지간(十二支干)으로 미루어 보건대 양(羊)은 미(未)이고, 마(馬)는 오(午)입니다. 곡하면서 웃는 것은 희비의 상입니다. 그것은 응당 오미년(午未年) 간에 있을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 미루어 요기가 비록 궁 밖으로 나갔다고는 하나 아직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 주선왕은 백양보(伯陽父)가 아뢰는 말을 듣고 앙앙불락(怏怏不樂)하다 곧바로 영을 내렸다. 성안이건 성밖이건 집집마다 방문하여 여자아이를 찾게 했다. 생사에 관계없이 찾아서 갖다 바치는 자는 상으로 비단 300 필을 준다고 했다. 거두어 기르면서 고하지 않는 자를 발견하고 신고한 자에 대해서는 같은 상을 줄 것이며, 그 죄에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그의 전 가족을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선왕은 이어서 상대부(上大夫) 두백(杜伯)에게 그 일을 책임지고 맡아서 하게 했다. 또 점괘에 염호( 弧) 기복(箕 )이라는 말이 있어 하대부(下大夫) 좌유(左儒)로 하여금 사시관(司市官)들을 지휘하게 하여 성안의 시정(市井)을 순행하여, 뽕나무로 만든 활과 풀로 엮어 만든 전통(箭筒)을 만들거나 팔지 못하게 하고, 위반자는 사형에 처하게 했다. 좌유는 감히 일을 태만히 할 수 없어 사시관들로 하여금 일반 노역들을 데리고, 한편으로는 알리게 하고,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돌아다니게 하면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안의 백성들은 기꺼이 좌유(左儒)의 지시하는 바를 기꺼이 따랐다. 그러나 성밖 향촌(鄕村)의 백성들은 아무도 선왕의 명령을 알지 못했다. 다음날이 되어 좌유가 성안을 순행하던 중에, 풀로 엮어 만든 전대 몇 개를 품에 안은 여자가 앞서고, 뽕나무로 만든 활 십여 개를 등에 맨 남자가 그 뒤를 따르며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부부 두 사람은 성밖 멀리 떨어진 향촌(鄕村)에 사는 촌사람들인데 낮 동안에 성안의 시장에 가지고 온 물건을 팔 목적으로 온 것이었다. 두 부부는 미처 성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성문 앞에서 사시관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사시관이 보고 뒤따라오고 있던 노역들에게 두 사람을 잡으라고 소리 쳤다. 먼저 여자는 잡았으나 남자는 미처 사시관의 눈에 띄지 않아서, 재빨리 등에 맨 활을 길거리에 버리고 나는 듯이 도망쳤다. 사시관은 여자에게 칼을 씌우고 뽕나무 활과 풀잎으로 엮어 만든 전대와 같이 하대부 좌유(左儒)가 있는 곳까지 압송하였다. 좌유 " 노래에 상응하는 두 가지 물증을 얻었고, 더욱이 태사가 말하기를 여인으로 하여금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으며, 그리고 이제 여자를 이미 잡았으니 마땅히 왕에게 알려야겠다." 좌유는 곧이어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숨기고 단지 여자가 금령을 어기고 활을 만들어 팔려고 했다고 왕에게 보고했다. 선왕이 명하기를 여자는 참하고 그 뽕나무 활과 전대를 저자거리에서 불태워서 버림으로써, 활과 전통을 만들어서 팔려는 사람에게 교훈이 되도록 했다. 후세 사람이 시를 지어 노래하였다. 不將美政消天變(불장미정소천변) 선정을 베풀어 하늘에서 내린 변란을 없애려고 하기는커녕 却泥謠言害婦人(각니요언해부인) 오히려 요언을 믿고 죄 없는 부인을 죽였다 漫道中興多補闕(만도중흥다보궐) 중흥으로 가는 길은 멀고 더딘데 此番直諫是何臣(차번직간시하신) 이번에는 어찌하여 직간(直諫)하는 신하조차도 없는가? 한편 뽕나무 활을 버린 남자는 급히 도망을 하면서도 도무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 관리들이 내 부인을 잡아간 것은 도대체 무슨 연유인가" 그 남자는 자기 부인의 소식을 듣기 위해서 성문 밖 십리 되는 야산에서 밤을 새웠다. 그 다음날 아침 지나가는 사람이 소식을 전해 주면서 말했다. " 어제 북문에서 한 여자가 뽕나무 활과 풀로 엮어 만든 전통을 만들어 팔지 말라는 왕의 영을 어겨 즉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 그 남자는 자기 부인이 이미 죽은 것을 알자,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로 달려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기는 화를 면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여 발길 닫는 대로 걷다 보니, 십여 리를 걸어서 당도한 곳이 청수하(淸水河) 강변(江邊)이었다.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저 멀리서 많은 새가 울며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바라보니 어린 갓난아이가 풀로 엮은 바구니에 담겨 물위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갓난아이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여러 마리의 새들이 부리로 물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소리를 내 울면서 강변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하고 있었다. 그 남자가 보고 소리쳤다. " 참으로 괴이한 일이구나!" 그 남자가 새들을 쫓아 버리고 물 속에서 바구니를 건져내어 풀밭이 있는 언덕으로 옮겨 아기를 꺼내어봤다. 갑자기 아기가 울어서 살펴보니 그것은 갓난 여자아이였다. 그 남자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말했다. " 이 여아를 누가 버렸는지 모르겠으나, 많은 새 들이 부리로 물고 물가로 끌고 나온 것을 보니 이는 필시 큰 귀인임에 틀림없다. 내가 오늘 데리고 가 성인으로 키울 경우 소득이 있을 것이다" 곧이어 상의를 벗어 이 여아를 가슴에 싸안고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한 끝에,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살고있는 곳이 낫다고 생각하여 포성(褒城) 쪽을 바라보고 홀홀(忽忽)히 사라졌다. 염옹(髥翁)은 이 여아가 목숨을 구한 것은 오로지 기이한 운명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시를 지어 노래했다. 懷孕遲遲四十年(회잉지지사십년) 임신한지 장장 40년인데 水中三日尙安然(수중삼일상안연) 물 속에서의 삼 일간이 위험할 리가 있겠는가? 生成妖物殃家國(생성요물앙가국) 요물이 생겨나서 나라에 재앙을 안기는데, 王法如何勝得天(왕법여하승득천) 왕법은 무슨 방법으로 하늘의 뜻을 헤아리겠는가? 주선왕(周宣王)은 뽕나무 활과 풀로 엮어 만든 전통을 팔려고 했던 부인을 잡아서 처형하고 나서, 동요에 나오는 내용에 부응하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여 편한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태원(太原)의 백성들을 동원하는 것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로 몇 년간은 무사히 지내게 되었다. 선왕 43년 즉 기원전 785년에 선왕이 종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재궁(齋宮)에 묵게되었다. 밤이 이경이 되어서 사람의 인적이 끊어 졌을 때, 홀연히 아름다운 여인이 서쪽으로부터 한들한들 걸어와 바로 궁궐의 뜰에 도달했다. 선왕은 그 여인이 재궁(齋宮)의 금도(禁道)를 범한 것을 괴이하게 여겨, 소리를 크게 질러서 좌우의 시자(侍者)들로 하여금 잡아오게 했으나 한 사람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여자도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주왕실의 위패를 모시는 태묘(太廟)에 들어가 크게 세 번 웃고 또 크게 세 번 울고 난 후 당황하거나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주나라의 칠묘(七廟)의 신주(神主)를 묶어서 들고 동쪽으로 가 버렸다. 선왕이 몸을 일으켜 쫓아가려고 하는 순간에 정신이 드니 바로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선왕은 심신이 노곤하였으나 부득이 태묘(太廟)에 들어가서 예를 행했다. 구례를 올린 후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재궁(齋宮)으로 돌아 와서 태사(太史) 백양보(伯陽父)를 아무도 몰래 조용히 불렀다. 선왕이 꿈에서 본 이야기를 하자 백양부가 아뢰었다. " 삼 년 전의 동요(童謠)를 왕께서는 어찌 잊으셨습니까? 신이 말씀 드렸기를 여자로부터 화가 생기고 요기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노랫말의 곡소(哭笑)라는 말은 왕께서 이번에 꾼 꿈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 선왕 " 전에 한 여자를 죽인 것만으로는 염호기복( 孤箕 )의 참(讖)을 없애는데 부족하다는 이야기인가?" 백양보 " 하늘의 뜻은 너무 높아 이제 그 효험이 바로 나타나려고 하는데, 어찌 일개 아녀자로 천도(天道)의 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선왕이 신음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삼 년 전에 상대부(上大夫) 두백(杜伯)에게 명하여 사시관(司市官)들을 지휘하여 요녀(妖女)를 찾아내게 했었으나 그 후로 아무 보고를 받지 못했음을 생각해 냈다. 제사를 지낸 후에 그 음식을 먹고 조당(朝堂)에 돌아와, 백관들에게 제사를 지낸 고기를 나누어주고 두백에게 물었다. " 요기(妖氣)가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있는데 경은 어찌하여 오랫동안 보고를 하지 않았는가?" 두백(杜伯)이 아뢰었다. " 신이 그 여자아이를 찾았으나 발견할 수가 없었고, 요부(妖婦)를 잡아서 죄를 주어서 동요의 효험이 이미 밝혀졌고, 그리고 쉬지 않고 수색작업을 하면 백성들이 놀랄까 걱정하여 중지하게 된 것입니다. " 선왕이 크게 노하여 말했다. " 일을 이렇게 명백하지 못하게 처리하니 이것은 임금의 명령에 태만하여 멋대로 행한 것이 아닌가? 이런 불충한 신하를 어디다 쓰겠는가?" 선왕이 무사들에게 소리쳐 명했다. " 조문(朝門) 데리고 나가 참수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라!" 여러 백관들의 안색이 변하여 흙빛으로 되었다. 갑자기 문반 대열 중에서 한 사람의 관원이 뛰쳐나와 무사들에게 끌려나가는 두백을 황급히 잡으면서 외쳤다. " 절대로 불가한 입니다." 선왕이 보니 곧 하대부(下大夫) 좌유(左儒)였다. 좌유는 두백의 친구로서 두백의 천거에 의해 벼슬길에 나온 사람이었다. 좌유가 머리를 조아리며 상주했다. " 신이 듣기에, 요(堯) 임금께서는 구 년 홍수에도 황제로서 실덕한 일이 없었고 탕(湯) 임금은 칠 년 가뭄에도 왕의 위엄을 손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의 변괴를 아직도 막지 못하고있어, 백성들이 요언을 오히려 믿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또한 왕께서 두백을 죽이신다면 백성들이 요언을 퍼뜨려 변방 오랑캐가 전해 듣고 쳐들어 올 것이 우려됩니다. 원컨대 두백(杜伯)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선왕 " 그대는 친구를 위하여 왕의 명을 거역하니 왕을 친구보다 더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좌유 " 왕이 옳고 친구가 그르면 마땅히 친구를 버려 왕을 따라야 하고 친구가 옳고 왕이 그르다면 마땅히 왕을 버리고 친구를 따라야할 것입니다. 더욱이 두백이 지은 죄는 사형에 처할 만큼 중한 죄가 아닙니다. 왕께서 두백을 죽이신다면 천하가 왕께서 어질지 못하다고 할 것이며, 신이 만약 간하여 중지시키지 못한다면 천하가 신이 불충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왕께서 그래도 필히 두백을 죽이신다면, 신도 두백과 같이 죽여주시기 바랍니다. " 선왕의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말했다. " 짐이 두백을 죽이거든 처형장으로 나가 장광설(長廣舌)을 늘어놓아라." 선왕이 무사에게 소리쳐 빨리 두백을 끌고 나가 참수하라고 했다. 무사가 두백을 궁궐 대문 밖으로 끌고 나가 목을 베었다. 좌유(左儒)가 집에 돌아와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좌유를 찬미했다. 賢哉左儒(현재좌유) 슬기로운 좌유여! 直諫批鱗(작건비린) 직간하다가 용의 비늘을 건드렸구나. 是則順友(사죽순우) 옳은 것이라면 친구의 말일지라도 따르고 非則違君(비즉위군) 옳지 않은 것은 임금의 명이라도 따르지 않았으니 呑冠誼重(탄관의중) 벼슬아치들이 중요하다고 크게 이야기한 것을 刎頸交眞(물경교진) 목을 찌름으로서 진실을 보였도다! 일어서는 제후들 第 一 回 周宣王聞謠輕殺 주선왕은 길거리의 노래를 듣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杜大夫化 鳴寃 두대부는 무서운 소리로 울어대는 원귀(寃鬼)가 되었다. 道德三皇五帝(도덕삼황오제)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에는 도덕으로 功名夏后商周(공명하후상주) 하은주(夏殷周) 삼대에는 공과 명으로 천하를 다스렸으나, 英雄五覇鬧春秋(영웅오패뇨춘추) 영웅오패(英雄五覇)가 춘추를 어지럽게 하자 傾刻興亡過手(경각흥망과수) 순식간에 흥망이 무상하게 되었다. 靑史幾行名姓(청사기행명성) 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얼마며, 北邙無數荒丘(북망무수황구) 북망산(北邙山)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덤은 얼마인가? 前人田地後人收(전인전지후인수) 앞서간 선인들의 땅을 후세사람들이 차지하려고 싸우니 說甚龍爭虎鬪(설심용쟁호투) 이를 용쟁호투(龍爭虎鬪)라 하지 않았는가? 주나라는,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의 주왕(紂王)을 정벌하여 천자(天子)에 즉위하고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이 그 뒤를 이었다. 이 두 왕은 주나라의 기업(基業)을 지킨 임금이 되었다. 또한, 주공(周公), 소공(召公), 필공(畢公), 사일(史佚)등 여러 현명한 신하들이 정치를 보좌하여 문화를 일으키고 전쟁은 억제하여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 결과 재화가 넉넉하게 되어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 주무왕(周武王)으로부터 10대인 이왕(夷王)때 이르러 제후(諸侯)들의 천자에 대한 예절이 해이해 지고 또한 그 세력이 점차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이왕의 뒤를 이은 11대인 려왕( 王)은 포학무도(暴虐無道)하여 국인(國人)들에게 쫓겨나 체( )라는 곳으로 도망가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이 일이 1100년 간 계속된 변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두 사람이 함께 협력하여 태자 정(靜)을 옹립하여 왕으로 세웠다. 이 사람이 주선왕(周宣王)이다. 이 천자가 또한 영명유도(英明有道)하여 현신(賢臣)들 즉, 방숙(方叔), 소호(召虎), 윤길보(尹吉甫), 신백(申伯), 중산보(仲山甫) 등을 등용하여 문왕(文王), 무왕(武王), 성왕(成王), 강왕(康王)의 치세를 다시 세워 주나라 왕실을 찬란하게 중흥시켰다. 이것을 노래한 시가 있다. 夷 相乃政不綱(이려상내정불강) 이왕과 려왕의 정치는 진실로 옛날의 강령을 따르지 못했다. 任賢圖治賴宣王(임현도치뢰선왕) 슬기로운 신하를 등용하여 치세를 이룬 것은 선왕 때였다. 共和若沒中興主(공화약몰중흥주) 공화 연간(年間) 이후에 만약에 선왕과 같은 중흥주가 없었다면, 周歷安能八百長(주력안능팔백장) 어찌 주나라의 역사가 팔백 년을 갔겠는가? 그러나 주선왕(周宣王)이 비록 정사에 부지런했으나, 역시 무왕의 단서수계(丹書受戒)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집집마다 창문에는 공덕을 새겨 중흥을 이야기했으나, 역시 성왕(成王), 강왕(康王) 때의 교화와 큰 치세에는 미치지 못했다. 변방 지역과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왕명을 전할 때는 통역을 세워야 했으며, 먼 변방의 나라는 주나라에게 진귀한 공물을 바쳐야만 했었다. 이어서 선왕 재위 39년인 기원전 789년에 강융(姜戎)이 반하여 천자가 친히 정벌에 나섰으나 천무(千畝)에서 패하여 전차와 병졸을 크게 잃었다. 군사를 다시 동원하여 정벌할 계획이었으나 군사의 수가 충분치 않아 천자가 몸소 태원(太原)으로 가서 그곳의 백성들을 징발하였다. 태원은 현재 고원주(固原州)로 바로 융적(戎狄)의 땅과 이웃해 있다. 징발한 백성들은 태원의 호구들인데, 호적을 대조한 후에 한곳에 모이게 하였다. 이어서 징발한 백성들을 사열하고, 그 인원의 다소(多少)와, 또한 거마(車馬)와 양식 및 마초(馬草)의 많고 적음을 확인한 후에, 인원과 물자를 징발하여 출정하였다. 태재(太宰) 중산보(仲山甫)가 이를 중지하라고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후세 사람이 시를 지어 노래하였다. 犬 何須辱劍 (견체하수욕검망) 개나 돼지를 잡는데 어찌 검망(劍 )을 더럽히려 하는가? 隋珠彈雀總堪傷(수주탄작총감상) 수나라의 귀한 구슬을 던져서 참새를 잡으려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로다 皇威褒盡無能報(황위포진무능보) 천자의 위엄이 다해 원수를 갚을 수 없다고 枉自將民料一場 (왕자장민료일장) 망녕되이 스스로 백성들을 징발하여 소란을 피우는가? 주선왕(周宣王)이 태원(太原)에서 백성을 징발하여 되돌아오던 중 날이 저물었으나, 어가를 멈추게 하지 않고 계속 길을 재촉하니, 밤중이 되어서야 성안에 들어서게 되었다. 거리에서 어린아이들 수십 명이 무리를 지어 박수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한 목소리였다. 주선왕이 곧 어가를 세워서 노래를 들었다. 노래말은 다음과 같았다. 月將升(월장승) 달이 뜨고, 日將沒(일장몰) 해가 진다. 弧 (염호기복) 뽕나무 활과 풀로 엮어 만든 전통(箭筒)은 幾亡周國(기망주국) 주나라가 망할 징조로다. 주선왕(周宣王)이 그 노래를 듣고 그 노래말이 불길하다고 생각햐여 시종으로 하여금 그 연유를 묻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을 잡아오게 하였다. 아이들은 놀라서 흩어지고 나이가 제법 든 아이와 어린 아이 두 명만을 잡아 와서 선왕의 수레 앞에 꿇어 앉혔다. 선왕이 물었다. "그 노래는 누구에게서 배워 부르게 되었는가?" 나이가 제법든 아이가 말했다. "우리들이 지어서 부른 것이 아니고, 삼일 전 홍의(紅衣)를 입은 동자가 거리에 나와 우리들에게 가르쳐 외우게 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번 가르쳐 부르게 하자 시정(市井)에 만연하여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어린아이들이 같이 부르게 되었고, 한 곳에 멈추지 않고 이렇게 널리 퍼져 부르게 된 것입니다." 선왕 " 지금 홍의동자(紅衣童子)는 어디에 있는가?" 동자 " 노래를 가르친 후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주선왕이 오랫동안 말없이 있다가 아이들을 꾸짖고 내보낸 후에 즉시 사시관(司市官)을 불러 명령하기를 거리로 나가,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감시하라고 일렀다. 만약에 어린아이가 그 노래를 부를 경우, 그 부모를 연좌(連坐)하여 죄를 주겠다고 하였다. 주선왕은 그날 밤으로 궁궐로 돌아 왔다. 다음날 조례에 삼공육경(三公六卿)이 모두 조정에 모여서 배례(拜禮)를 드리고 일어나 도열했다. 선왕이 어제 밤에 도성으로 돌아오다가 길거리에서 들은 어린 동자들의 노래 소리를 여러 신하들에게 들려주고 대신들에게 물었다. " 이 노래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대종백(大宗伯) 소호(召虎)가 말했다. " 염( )은 뽕나무의 이름이고 활을 만드는 재료가 됩니다. 그런 연유로 염호( 弧)라 합니다. 기( )는 풀이름입니다. 질겨서 화살통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화살통의 이름을 기복( )이라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나라에 궁시지변(弓矢之變)이 있을까 우려됩니다" 태재(太宰) 중산보(仲山甫)가 뒤를 이어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 궁시(弓矢)는 곧 나라의 무기인바, 왕께서 이번에 태원(太原)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견융(犬戎)에 원수를 갚으려고 하시는데 만약 군대를 해산하지 않으시면 반드시 국가에 환란(患亂)이 닥칠 것입니다." 선왕이 말없이 고개를 흔들며 다시 물었다. " 이 말은 홍의동자로부터 기인한 말인데 그 홍의동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태사(太史) 백양보(伯陽父)가 대답했다. " 시중의 근거 없는 말을 요언(謠言)이라 합니다. 하늘이 임금에게 경계(儆戒)를 주기 위하여 형혹성(熒惑星)에게 명하여, 동자로 변해 요언(妖言)을 만들어, 어린 동자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였습니다. 적게는 한 사람의 길흉을 말하며, 크게는 국가의 흥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형혹성(熒惑星)의 색은 붉은 색입니다. 그 망국의 노래는 곧 하늘이 왕께 경계를 주고자 함입니다." 선왕 " 짐이 오늘 강융(姜戎)의 죄를 사(赦)하고, 태원의 병사들을 해산하며, 무기 창고에 있는 활과 화살을 모두 불사르고, 다시 영을 내려 나라 안에서 활과 화살을 만들어 팔지 못하게 하면 그 화를 가라앉힐 수 있겠는가? " 백양보 "신이 하늘을 관측해 보니 그 조짐이 이미 나타나 왕궁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관(關) 안팎의 활과 화살이 아니면, 후에 반드시 여자가 있어 나라를 어지럽히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노래에 '달이 뜨고 해가 진다'에서 해는 임금을 말하며 달은 여자를 뜻하는 음(陰)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일몰장승(日沒月升)은 음(陰)이 승하고 양(陽)이 쇠(衰)하니 그 여자의 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밝게 행하여야 합니다." 선왕 " 짐은 강후(姜后)가 육궁(六宮)을 잘 주재(主宰)하고 있고, 또한 그 덕이 심히 높아 나에게 바치는 궁녀들은 모두 강후가 선택하면 내가 이를 어기지 않고 따르고 있는데 어찌 여자로 하여금 란이 일어난다고 하는가?" 백양보 "요언(妖言)에 '장승(將升)' '장몰(將沒)'이라 했으니 목전지사(目前之事)는 아닙니다. 더욱이 장(將)이라는 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뜻하는 말이니, 왕께서 장차 덕을 쌓아 정사를 돌보시어 재난에 대비하신다면 자연적으로 화(禍)가 길(吉)로 변할 것이며 활과 화살은 구태여 태워서 없앨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선왕이 백양보(伯陽父)가 아뢰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면서 어가를 출발 시켜 궁궐 안으로 되돌아갔다. 강후(姜后)가 맞이하여 좌정하자 선왕이 곧이어 군신들의 자기에게 상주한 말을 강후에게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강후 " 궁중에 이상한 일이 있어 바로 말씀드리려고 하던 참입니다." 선왕 " 무슨 이상한 일입니까?" 강후 " 지금 선왕(先王) 때부터 있었던 늙은 궁인이 있는데 나이가 오십 여 세가 되었습니다. 선왕(先王)때 아이를 밴 이래 사십 여 년이 되었는데, 바로 어제 저녁에 여자아이를 낳았습니다." 선왕이 크게 놀라 물었다. "그 여자아이는 어디에 있는가?" 강후 "첩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 이미 사람에게 명하여 가마니에 싸서 이십 리 밖의 청수하(淸水河) 가운데에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선왕이 곧 늙은 궁인을 불러서 아이를 밴 연고를 물었다. 늙은 궁인은 엎드려 대답했다. " 하(夏)나라 걸왕(桀王) 말년에 포성(褒城)의 신인(神人)이 용(龍) 두 마리로 변해 입에는 침을 흘리며 왕궁의 뜰 안에 내려앉더니 갑자기 사람으로 변해 말했습니다. ' 우리들은 곧 포성의 두 주인이다' 걸왕(桀王)이 두려워하여 두 마리의 용을 죽이려고 태사(太史)에게 점을 치게 했으나, 점괘가 불길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다시 용을 쫓아내면 어떤가 하고 점을 치게 한 바 역시 불길하게 나왔습니다. 태사가 점괘를 보고 걸왕(桀王)에게 아뢰었습니다. '신인이 하강하니 반드시 임금님께 상서로운 일일 것입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이 용의 타액(唾液)을 받아서 보관하시지 않으십니까? 용의 타액은 곧 용의 정기(精氣)라, 저장하여 두면 필히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걸왕이 태사에게 명하여 다시 점을 치게 하니 그때는 대길(大吉)로 나왔습니다. 곧이어 용 앞에다 제단을 만든 다음 비단 천으로 덮고 금으로 만든 쟁반으로 그 용의 침을 받아 붉은 궤( )에 넣었습니다. 일이 다 끝나자 갑자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더니, 두 마리의 용은 날아가 버렸습니다. 걸왕이 명하여 용의 침을 받은 궤를 창고에 보관하게 했습니다. 은(殷)왕조 640년 28왕을 거쳐서, 우리 주나라 왕조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궤의 뚜껑을 열지 않다가 선왕(先王)이신 려왕( 王) 말년(末年)에 이르러 그 궤에서 희미한 빛이 비치자, 창고를 지키는 관리가 그 일을 선왕(先王)에게 보고했습니다. 선왕(先王)께서 들으시고 물으셨습니다. ' 궤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창고를 지키는 관리가 장부를 갖다 바치면서 용의 침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선왕께서 궤를 열어 보겠다고 명하셨습니다. 심부름하는 신하가 붉은 궤( )를 깨뜨리고 뚜껑을 연 다음에 그 안에 들어있었던 금쟁반을 꺼내어 두 손으로 바쳤습니다. 선왕(先王)께서 손을 들어 받으려고 한 순간에 실수로 금쟁반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금쟁반에 들어 있던 용의 침이 뜰로 쏟아지자, 갑자기 여러 마리의 자라 새끼로 변하더니, 그 중 한 마리가 궁전 뜰 안에서 돌아 다녔습니다. 내시가 자라새끼를 뜰 안에서 쫓아내자 왕궁 안으로 도망가더니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때 저의 나이는 바로 열두 살이었는데 우연히 자라의 흔적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에 감각이 오고 점차로 배가 불러왔습니다. 이윽고 저의 몸은 애를 밴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선왕께서 천한 것이 지아비 없이 애를 밴 것을 괴이하게 생각하여 깊은 방 속에 가둔 이래 지금까지 사십 년이 되었습니다. 어제 밤중에 배에 갑자기 통증이 와 뜻밖에 여자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궁을 지키는 시자(侍者)들을 감히 속이기 어려워 부득이 왕후께 알리게 되었습니다. 왕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이 요물(妖物)은 결코 용납할 수가 없구나!' 왕후께서 즉시 시자들에게 명하여 애를 가져다 강물에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비자(婢子)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선왕(宣王)이 이야기를 다 듣고 말했다. " 이일은 선조(先朝)때의 일이라 너와는 무관한 일이다!". 늙은 궁인에게 큰 소리로 말하여 물러가게 하고 곧이어 궁을 지키는 시자를 불러, 청수하(淸水河)게 가서 여자 아기가 떨어져 있는가 살펴보라고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시자가 돌아와 보고하였다. " 이미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주선왕(周宣王)은 더 이상 의심치 않았다. 다음날 아침 태사(太史) 백양보(伯陽父)를 불러 용의 침(龍 )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 그 여자아이가 강물에 빠져 죽어 요기가 없어 졌는지 경이 점을 한번 처 보라 " 백양보가 점괘가 나오는 것을 보고 글로 만들어 바쳤다. 哭又笑(곡우곡) 곡하고 웃고 笑又哭(소우곡) 웃고 또 곡하다. 羊被鬼呑(양피귀탄) 양(羊)이 귀신(鬼神)에게 잡혀 먹히고 馬逢犬逐(마봉견축) 말이 개를 만나 쫓겨다니니 愼之愼之(신지신지) 신중하고 신중 할지어다 弧 (염호기복) 뽕나무 활에 풀로 엮어 만든 전통(箭筒)이로다. 선왕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백양보가 아뢰었다. " 십이지간(十二支干)으로 미루어 보건대 양(羊)은 미(未)이고, 마(馬)는 오(午)입니다. 곡하면서 웃는 것은 희비의 상입니다. 그것은 응당 오미년(午未年) 간에 있을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 미루어 요기가 비록 궁 밖으로 나갔다고는 하나 아직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 주선왕은 백양보(伯陽父)가 아뢰는 말을 듣고 앙앙불락(怏怏不樂)하다 곧바로 영을 내렸다. 성안이건 성밖이건 집집마다 방문하여 여자아이를 찾게 했다. 생사에 관계없이 찾아서 갖다 바치는 자는 상으로 비단 300 필을 준다고 했다. 거두어 기르면서 고하지 않는 자를 발견하고 신고한 자에 대해서는 같은 상을 줄 것이며, 그 죄에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그의 전 가족을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선왕은 이어서 상대부(上大夫) 두백(杜伯)에게 그 일을 책임지고 맡아서 하게 했다. 또 점괘에 염호( 弧) 기복(箕 )이라는 말이 있어 하대부(下大夫) 좌유(左儒)로 하여금 사시관(司市官)들을 지휘하게 하여 성안의 시정(市井)을 순행하여, 뽕나무로 만든 활과 풀로 엮어 만든 전통(箭筒)을 만들거나 팔지 못하게 하고, 위반자는 사형에 처하게 했다. 좌유는 감히 일을 태만히 할 수 없어 사시관들로 하여금 일반 노역들을 데리고, 한편으로는 알리게 하고,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돌아다니게 하면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안의 백성들은 기꺼이 좌유(左儒)의 지시하는 바를 기꺼이 따랐다. 그러나 성밖 향촌(鄕村)의 백성들은 아무도 선왕의 명령을 알지 못했다. 다음날이 되어 좌유가 성안을 순행하던 중에, 풀로 엮어 만든 전대 몇 개를 품에 안은 여자가 앞서고, 뽕나무로 만든 활 십여 개를 등에 맨 남자가 그 뒤를 따르며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부부 두 사람은 성밖 멀리 떨어진 향촌(鄕村)에 사는 촌사람들인데 낮 동안에 성안의 시장에 가지고 온 물건을 팔 목적으로 온 것이었다. 두 부부는 미처 성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성문 앞에서 사시관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사시관이 보고 뒤따라오고 있던 노역들에게 두 사람을 잡으라고 소리 쳤다. 먼저 여자는 잡았으나 남자는 미처 사시관의 눈에 띄지 않아서, 재빨리 등에 맨 활을 길거리에 버리고 나는 듯이 도망쳤다. 사시관은 여자에게 칼을 씌우고 뽕나무 활과 풀잎으로 엮어 만든 전대와 같이 하대부 좌유(左儒)가 있는 곳까지 압송하였다. 좌유 " 노래에 상응하는 두 가지 물증을 얻었고, 더욱이 태사가 말하기를 여인으로 하여금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으며, 그리고 이제 여자를 이미 잡았으니 마땅히 왕에게 알려야겠다." 좌유는 곧이어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숨기고 단지 여자가 금령을 어기고 활을 만들어 팔려고 했다고 왕에게 보고했다. 선왕이 명하기를 여자는 참하고 그 뽕나무 활과 전대를 저자거리에서 불태워서 버림으로써, 활과 전통을 만들어서 팔려는 사람에게 교훈이 되도록 했다. 후세 사람이 시를 지어 노래하였다. 不將美政消天變(불장미정소천변) 선정을 베풀어 하늘에서 내린 변란을 없애려고 하기는커녕 却泥謠言害婦人(각니요언해부인) 오히려 요언을 믿고 죄 없는 부인을 죽였다 漫道中興多補闕(만도중흥다보궐) 중흥으로 가는 길은 멀고 더딘데 此番直諫是何臣(차번직간시하신) 이번에는 어찌하여 직간(直諫)하는 신하조차도 없는가? 한편 뽕나무 활을 버린 남자는 급히 도망을 하면서도 도무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 관리들이 내 부인을 잡아간 것은 도대체 무슨 연유인가" 그 남자는 자기 부인의 소식을 듣기 위해서 성문 밖 십리 되는 야산에서 밤을 새웠다. 그 다음날 아침 지나가는 사람이 소식을 전해 주면서 말했다. " 어제 북문에서 한 여자가 뽕나무 활과 풀로 엮어 만든 전통을 만들어 팔지 말라는 왕의 영을 어겨 즉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 그 남자는 자기 부인이 이미 죽은 것을 알자,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로 달려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기는 화를 면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여 발길 닫는 대로 걷다 보니, 십여 리를 걸어서 당도한 곳이 청수하(淸水河) 강변(江邊)이었다.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저 멀리서 많은 새가 울며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바라보니 어린 갓난아이가 풀로 엮은 바구니에 담겨 물위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갓난아이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여러 마리의 새들이 부리로 물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소리를 내 울면서 강변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하고 있었다. 그 남자가 보고 소리쳤다. " 참으로 괴이한 일이구나!" 그 남자가 새들을 쫓아 버리고 물 속에서 바구니를 건져내어 풀밭이 있는 언덕으로 옮겨 아기를 꺼내어봤다. 갑자기 아기가 울어서 살펴보니 그것은 갓난 여자아이였다. 그 남자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말했다. " 이 여아를 누가 버렸는지 모르겠으나, 많은 새 들이 부리로 물고 물가로 끌고 나온 것을 보니 이는 필시 큰 귀인임에 틀림없다. 내가 오늘 데리고 가 성인으로 키울 경우 소득이 있을 것이다" 곧이어 상의를 벗어 이 여아를 가슴에 싸안고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한 끝에,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살고있는 곳이 낫다고 생각하여 포성(褒城) 쪽을 바라보고 홀홀(忽忽)히 사라졌다. 염옹(髥翁)은 이 여아가 목숨을 구한 것은 오로지 기이한 운명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시를 지어 노래했다. 懷孕遲遲四十年(회잉지지사십년) 임신한지 장장 40년인데 水中三日尙安然(수중삼일상안연) 물 속에서의 삼 일간이 위험할 리가 있겠는가? 生成妖物殃家國(생성요물앙가국) 요물이 생겨나서 나라에 재앙을 안기는데, 王法如何勝得天(왕법여하승득천) 왕법은 무슨 방법으로 하늘의 뜻을 헤아리겠는가? 주선왕(周宣王)은 뽕나무 활과 풀로 엮어 만든 전통을 팔려고 했던 부인을 잡아서 처형하고 나서, 동요에 나오는 내용에 부응하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여 편한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태원(太原)의 백성들을 동원하는 것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로 몇 년간은 무사히 지내게 되었다. 선왕 43년 즉 기원전 785년에 선왕이 종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재궁(齋宮)에 묵게되었다. 밤이 이경이 되어서 사람의 인적이 끊어 졌을 때, 홀연히 아름다운 여인이 서쪽으로부터 한들한들 걸어와 바로 궁궐의 뜰에 도달했다. 선왕은 그 여인이 재궁(齋宮)의 금도(禁道)를 범한 것을 괴이하게 여겨, 소리를 크게 질러서 좌우의 시자(侍者)들로 하여금 잡아오게 했으나 한 사람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여자도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주왕실의 위패를 모시는 태묘(太廟)에 들어가 크게 세 번 웃고 또 크게 세 번 울고 난 후 당황하거나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주나라의 칠묘(七廟)의 신주(神主)를 묶어서 들고 동쪽으로 가 버렸다. 선왕이 몸을 일으켜 쫓아가려고 하는 순간에 정신이 드니 바로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선왕은 심신이 노곤하였으나 부득이 태묘(太廟)에 들어가서 예를 행했다. 구례를 올린 후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재궁(齋宮)으로 돌아 와서 태사(太史) 백양보(伯陽父)를 아무도 몰래 조용히 불렀다. 선왕이 꿈에서 본 이야기를 하자 백양부가 아뢰었다. " 삼 년 전의 동요(童謠)를 왕께서는 어찌 잊으셨습니까? 신이 말씀 드렸기를 여자로부터 화가 생기고 요기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노랫말의 곡소(哭笑)라는 말은 왕께서 이번에 꾼 꿈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 선왕 " 전에 한 여자를 죽인 것만으로는 염호기복( 孤箕 )의 참(讖)을 없애는데 부족하다는 이야기인가?" 백양보 " 하늘의 뜻은 너무 높아 이제 그 효험이 바로 나타나려고 하는데, 어찌 일개 아녀자로 천도(天道)의 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선왕이 신음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삼 년 전에 상대부(上大夫) 두백(杜伯)에게 명하여 사시관(司市官)들을 지휘하여 요녀(妖女)를 찾아내게 했었으나 그 후로 아무 보고를 받지 못했음을 생각해 냈다. 제사를 지낸 후에 그 음식을 먹고 조당(朝堂)에 돌아와, 백관들에게 제사를 지낸 고기를 나누어주고 두백에게 물었다. " 요기(妖氣)가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있는데 경은 어찌하여 오랫동안 보고를 하지 않았는가?" 두백(杜伯)이 아뢰었다. " 신이 그 여자아이를 찾았으나 발견할 수가 없었고, 요부(妖婦)를 잡아서 죄를 주어서 동요의 효험이 이미 밝혀졌고, 그리고 쉬지 않고 수색작업을 하면 백성들이 놀랄까 걱정하여 중지하게 된 것입니다. " 선왕이 크게 노하여 말했다. " 일을 이렇게 명백하지 못하게 처리하니 이것은 임금의 명령에 태만하여 멋대로 행한 것이 아닌가? 이런 불충한 신하를 어디다 쓰겠는가?" 선왕이 무사들에게 소리쳐 명했다. " 조문(朝門) 데리고 나가 참수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라!" 여러 백관들의 안색이 변하여 흙빛으로 되었다. 갑자기 문반 대열 중에서 한 사람의 관원이 뛰쳐나와 무사들에게 끌려나가는 두백을 황급히 잡으면서 외쳤다. " 절대로 불가한 입니다." 선왕이 보니 곧 하대부(下大夫) 좌유(左儒)였다. 좌유는 두백의 친구로서 두백의 천거에 의해 벼슬길에 나온 사람이었다. 좌유가 머리를 조아리며 상주했다. " 신이 듣기에, 요(堯) 임금께서는 구 년 홍수에도 황제로서 실덕한 일이 없었고 탕(湯) 임금은 칠 년 가뭄에도 왕의 위엄을 손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의 변괴를 아직도 막지 못하고있어, 백성들이 요언을 오히려 믿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또한 왕께서 두백을 죽이신다면 백성들이 요언을 퍼뜨려 변방 오랑캐가 전해 듣고 쳐들어 올 것이 우려됩니다. 원컨대 두백(杜伯)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선왕 " 그대는 친구를 위하여 왕의 명을 거역하니 왕을 친구보다 더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좌유 " 왕이 옳고 친구가 그르면 마땅히 친구를 버려 왕을 따라야 하고 친구가 옳고 왕이 그르다면 마땅히 왕을 버리고 친구를 따라야할 것입니다. 더욱이 두백이 지은 죄는 사형에 처할 만큼 중한 죄가 아닙니다. 왕께서 두백을 죽이신다면 천하가 왕께서 어질지 못하다고 할 것이며, 신이 만약 간하여 중지시키지 못한다면 천하가 신이 불충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왕께서 그래도 필히 두백을 죽이신다면, 신도 두백과 같이 죽여주시기 바랍니다. " 선왕의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말했다. " 짐이 두백을 죽이거든 처형장으로 나가 장광설(長廣舌)을 늘어놓아라." 선왕이 무사에게 소리쳐 빨리 두백을 끌고 나가 참수하라고 했다. 무사가 두백을 궁궐 대문 밖으로 끌고 나가 목을 베었다. 좌유(左儒)가 집에 돌아와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좌유를 찬미했다. 賢哉左儒(현재좌유) 슬기로운 좌유여! 直諫批鱗(작건비린) 직간하다가 용의 비늘을 건드렸구나. 是則順友(사죽순우) 옳은 것이라면 친구의 말일지라도 따르고 非則違君(비즉위군) 옳지 않은 것은 임금의 명이라도 따르지 않았으니 呑冠誼重(탄관의중) 벼슬아치들이 중요하다고 크게 이야기한 것을 刎頸交眞(물경교진) 목을 찌름으로서 진실을 보였도다! 名高千古(명고천고) 이름을 천고에 높였도다! 用式彛倫(용식이륜) 신하의 도리를 세웠도다! 두백의 아들 습숙( 叔)은 동쪽의 당진(唐晉)으로 가 형옥(刑獄)을 관장하는 사사(士師)라는 관리가 되었다. 자손은 곧이어 사(士)씨가 되었고 식읍(食邑)은 범(范)에 있었다. 그런 연유로 또한 범(范)씨의 시조가 되었다. 사씨와 범씨는 당진(唐晉)의 유력한 세가(世家)가 되어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국위를 빛내게 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두백의 충성을 애도하여 두릉(杜陵)에 사당을 짓고 두주(杜主)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또한 우장군(右將軍) 묘라고도 불리며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이것은 후일의 이야기이다. 다음날 선왕은 좌유가 목을 찔러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두백을 죽인 것을 후회하며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환궁하였다. 그날 밤부터 잠자리에서 잠을 못 이루게 되었다. 곧이어 정신이 몽롱한 병을 얻게 되었다. 말의 두서가 없어지고 일을 하다가 많은 일을 잊어 먹게 되니 언제나 중간에서 정사를 중단하곤 했다. 강후(姜后)는 선왕이 병이 난 것을 알고 다시 간하지 않았다. 선왕 46년 즉 기원전 782년 7월에 임금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호경(鎬京) 밖으로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심신이 즐거워 좌우에 명을 내려 사공(司空)에게 어가를 정비하라 이르고 사마(司馬)에게는 거마꾼을 점고(点鼓)하라 하였다. 태사가 점을 쳐서 길일을 잡았다. 날짜가 되자 왕이 근위대의 호위를 받아 어가를 타고 오른쪽에는 윤길보(尹吉甫), 왼쪽에는 소호(召虎)를 거느렸다. 기치를 높이 들고 병장기로 삼엄하게 무장하게 하여 일제히 동쪽의 사냥터를 향해 출발했다. 그 동쪽 일대는 넓은 평원으로써 원래 왕의 사냥터로 사용하던 곳이다. 선왕이 얼마가지 않아 정신이 상쾌해진 것을 느끼자, 행군을 중지하라고 명한 다음 영채(營寨)를 세우라고 했다. 선왕이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했다. " 첫째 논밭의 농작물을 밟으면 안 된다. 둘째 숲 속의 나무를 태우거나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셋째 사사로이 집에 들어가서 함부로 백성들을 괴롭히면 안된다. 사냥하여 짐승을 많이 잡건 적게 잡건 모두 한곳에 갖다바쳐서 나중에 상급을 주는데 참고해야 한다. 사사로이 은닉하여 나중에 발각될 경우 중벌을 내릴 것이다. " 이윽고 시간이 되자 사람마다 용기를 뽐내어 각각 서로 앞을 다투어 사냥감을 쫓았다. 왕의 수레를 모는 자는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후퇴하고, 맴돌고 하면서 온갖 기술을 발휘하였다. 활을 가지고 있는 자는 종횡으로 활을 쏘아 그 능력을 자랑하였다. 매와 사냥개의 기세가 매서워서 여우와 토끼들이 어지러이 달아났다. 활이 향하는 곳은 혈육이 낭자하고, 화살은 마치 새의 깃털처럼 날아다녔다. 선왕이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 이번의 사냥몰이는 지나치게 소란스럽지 않아서 좋구나!" 해가 서쪽으로 이미 넘어가자 영을 내려 포위망을 풀게 했다. 여러 군사들이 각각 잡은 들짐승과 날짐승을 한꺼번에 묶어서 왕에게 갖다 바쳤다. 선왕이 어가에 타고 앞으로 나아가던 중, 삼사 리를 미처 가기도 전에 앞을 보니 갑자기 한 대의 조그만 마차가 멀리서 나타나, 마치 왕의 어가(御駕)와 부딪치기라도 하려는 듯이 앞으로 맹렬한 기세로 달려왔다. 마차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데, 어깨에는 붉은 활을 메고, 손에는 붉은 화살을 들고서 선왕을 향해서 예를 취하며 말했다. " 왕께서는 무양(無恙) 하신지요? " 선왕이 눈을 크게 치켜 뜨고 바라보니 바로 상대부 두백(杜伯)과 하대부 좌유(左儒)였다. 선왕이 크게 놀라 다시 쳐다보니 순식간에 사람과 마차가 모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좌우 사람들에게 물어 봤으나, 모두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선왕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두백과 좌유가 조그만 마차를 몰고 왕의 어가 바로 앞에 다시 접근해 왔다. 선왕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 죄를 지은 귀신들이 어찌 감히 어가를 범하려고 하느냐?" 선왕은 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 태아(太阿)를 뽑아 들고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두백(杜伯)과 좌유(左儒)가 한 목소리로 꾸짖어 말했다. " 무도혼군(無道昏君)아! 스스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 올바른 정치를 펼치지 않고, 무고한 신하들을 망령(妄靈)되게 죽이니, 오늘 너의 수명이 다해 우리가 원한을 갚고자 왔으니 네 목숨을 내놔야 되겠다." 두 사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궁(朱弓)에 적시(赤矢)를 꿰어 선왕의 명치를 향해 쐈다. 선왕이 큰 소리를 내면서 옥련(玉輦) 안에서 기절해 버렸다. 윤길보(尹吉甫)는 당황하여 다리를 주무르고, 소호(召虎)는 눈언저리를 문지르고, 좌우의 일반 신하들은 생강탕을 끓여 마시게 해 정신을 들게 했다. 선왕이 정신을 차린 듯 하더니 갑자기 가슴의 고통을 못 이겨 소리를 질렀다. 좌우의 신하들이 곧바로 선왕을 모시고 어가를 재촉하여 궁 안으로 들게 했다. 그날의 사냥대회는 군사들에게 상급도 나누어주지 못하고 흩어지게 되었다. 흥겨운 마음으로 출발해서 우울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염옹이 시를 지어 노래했다. 千軍隊里氷騁輪(천군대리빙빙수) 천군의 대오 속에서 작은 마차가 내달린다 赤矢朱弓貌似神(적시주궁모사신) 적시주궁은 귀신의 짓이 아닌가? 君王枉殺環須報(군왕왈살환수보) 왕도 죄 없는 신하를 함부로 죽여 보복을 받았는데 何況區區平等人(하황구구평등인) 하물며 구구한 일반 사람들이야 말해야 무엇하겠는가? [출처] 일어서는 제후들|작성자 풀향 名高千古(명고천고) 이름을 천고에 높였도다! 用式彛倫(용식이륜) 신하의 도리를 세웠도다! 두백의 아들 습숙( 叔)은 동쪽의 당진(唐晉)으로 가 형옥(刑獄)을 관장하는 사사(士師)라는 관리가 되었다. 자손은 곧이어 사(士)씨가 되었고 식읍(食邑)은 범(范)에 있었다. 그런 연유로 또한 범(范)씨의 시조가 되었다. 사씨와 범씨는 당진(唐晉)의 유력한 세가(世家)가 되어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국위를 빛내게 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두백의 충성을 애도하여 두릉(杜陵)에 사당을 짓고 두주(杜主)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또한 우장군(右將軍) 묘라고도 불리며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이것은 후일의 이야기이다. 다음날 선왕은 좌유가 목을 찔러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두백을 죽인 것을 후회하며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환궁하였다. 그날 밤부터 잠자리에서 잠을 못 이루게 되었다. 곧이어 정신이 몽롱한 병을 얻게 되었다. 말의 두서가 없어지고 일을 하다가 많은 일을 잊어 먹게 되니 언제나 중간에서 정사를 중단하곤 했다. 강후(姜后)는 선왕이 병이 난 것을 알고 다시 간하지 않았다. 선왕 46년 즉 기원전 782년 7월에 임금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호경(鎬京) 밖으로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심신이 즐거워 좌우에 명을 내려 사공(司空)에게 어가를 정비하라 이르고 사마(司馬)에게는 거마꾼을 점고(点鼓)하라 하였다. 태사가 점을 쳐서 길일을 잡았다. 날짜가 되자 왕이 근위대의 호위를 받아 어가를 타고 오른쪽에는 윤길보(尹吉甫), 왼쪽에는 소호(召虎)를 거느렸다. 기치를 높이 들고 병장기로 삼엄하게 무장하게 하여 일제히 동쪽의 사냥터를 향해 출발했다. 그 동쪽 일대는 넓은 평원으로써 원래 왕의 사냥터로 사용하던 곳이다. 선왕이 얼마가지 않아 정신이 상쾌해진 것을 느끼자, 행군을 중지하라고 명한 다음 영채(營寨)를 세우라고 했다. 선왕이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했다. " 첫째 논밭의 농작물을 밟으면 안 된다. 둘째 숲 속의 나무를 태우거나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셋째 사사로이 집에 들어가서 함부로 백성들을 괴롭히면 안된다. 사냥하여 짐승을 많이 잡건 적게 잡건 모두 한곳에 갖다바쳐서 나중에 상급을 주는데 참고해야 한다. 사사로이 은닉하여 나중에 발각될 경우 중벌을 내릴 것이다. " 이윽고 시간이 되자 사람마다 용기를 뽐내어 각각 서로 앞을 다투어 사냥감을 쫓았다. 왕의 수레를 모는 자는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후퇴하고, 맴돌고 하면서 온갖 기술을 발휘하였다. 활을 가지고 있는 자는 종횡으로 활을 쏘아 그 능력을 자랑하였다. 매와 사냥개의 기세가 매서워서 여우와 토끼들이 어지러이 달아났다. 활이 향하는 곳은 혈육이 낭자하고, 화살은 마치 새의 깃털처럼 날아다녔다. 선왕이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 이번의 사냥몰이는 지나치게 소란스럽지 않아서 좋구나!" 해가 서쪽으로 이미 넘어가자 영을 내려 포위망을 풀게 했다. 여러 군사들이 각각 잡은 들짐승과 날짐승을 한꺼번에 묶어서 왕에게 갖다 바쳤다. 선왕이 어가에 타고 앞으로 나아가던 중, 삼사 리를 미처 가기도 전에 앞을 보니 갑자기 한 대의 조그만 마차가 멀리서 나타나, 마치 왕의 어가(御駕)와 부딪치기라도 하려는 듯이 앞으로 맹렬한 기세로 달려왔다. 마차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데, 어깨에는 붉은 활을 메고, 손에는 붉은 화살을 들고서 선왕을 향해서 예를 취하며 말했다. " 왕께서는 무양(無恙) 하신지요? " 선왕이 눈을 크게 치켜 뜨고 바라보니 바로 상대부 두백(杜伯)과 하대부 좌유(左儒)였다. 선왕이 크게 놀라 다시 쳐다보니 순식간에 사람과 마차가 모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좌우 사람들에게 물어 봤으나, 모두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선왕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두백과 좌유가 조그만 마차를 몰고 왕의 어가 바로 앞에 다시 접근해 왔다. 선왕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 죄를 지은 귀신들이 어찌 감히 어가를 범하려고 하느냐?" 선왕은 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 태아(太阿)를 뽑아 들고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두백(杜伯)과 좌유(左儒)가 한 목소리로 꾸짖어 말했다. " 무도혼군(無道昏君)아! 스스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 올바른 정치를 펼치지 않고, 무고한 신하들을 망령(妄靈)되게 죽이니, 오늘 너의 수명이 다해 우리가 원한을 갚고자 왔으니 네 목숨을 내놔야 되겠다." 두 사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궁(朱弓)에 적시(赤矢)를 꿰어 선왕의 명치를 향해 쐈다. 선왕이 큰 소리를 내면서 옥련(玉輦) 안에서 기절해 버렸다. 윤길보(尹吉甫)는 당황하여 다리를 주무르고, 소호(召虎)는 눈언저리를 문지르고, 좌우의 일반 신하들은 생강탕을 끓여 마시게 해 정신을 들게 했다. 선왕이 정신을 차린 듯 하더니 갑자기 가슴의 고통을 못 이겨 소리를 질렀다. 좌우의 신하들이 곧바로 선왕을 모시고 어가를 재촉하여 궁 안으로 들게 했다. 그날의 사냥대회는 군사들에게 상급도 나누어주지 못하고 흩어지게 되었다. 흥겨운 마음으로 출발해서 우울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염옹이 시를 지어 노래했다. 千軍隊里氷騁輪(천군대리빙빙수) 천군의 대오 속에서 작은 마차가 내달린다 赤矢朱弓貌似神(적시주궁모사신) 적시주궁은 귀신의 짓이 아닌가? 君王枉殺環須報(군왕왈살환수보) 왕도 죄 없는 신하를 함부로 죽여 보복을 받았는데 何況區區平等人(하황구구평등인) 하물며 구구한 일반 사람들이야 말해야 무엇하겠는가? [출처] 일어서는 제후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