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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주와 미래권력들(미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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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권스 자유게시판 스크랩 교학사 역사왜곡 교과서 와 문창극을 두둔하는 이인호 교수.
태평양돌핀스 추천 2 조회 978 14.06.20 15:23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박근혜의 든든한 빽

교학사 역사왜곡교과서 두둔하는 이인호,이돈희,이주영 교수..


교학사 역사왜곡 교과서와 문창극을 두둔 옹호하는 서울대 명예교수 이인호

 

[포토]이인호 교수, "교학사 역사 교과서에 대한 공격 멈춰야"

 

  • 최종편집 2013.09.11 17:41:48
  •    
  • 이종현 기자
  •  

    [역사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기자회견이 
    11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역사학계 원로들은 
    [교학사] 역사 교과서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역사 교육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 주기를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역사학), 
    <돈희> (전 교육부 장관), 
    <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역사학) 등이 참석해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비판을 반박했다.

     

     

    TV조선

     

    19일 시사토크 판에는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출연했다.

    과거 교회 강연 내용으로 역사인식 논란에 휩싸인 문창극 총리 지명자에 대한 총리 자질 논란이 뜨겁다. 이와 관련해 이 교수는 "문 총리 지명자가 반민족주의 친일 인사가 되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그렇게 비난하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 교회 강연 동영상과 칼럼 글을 자세히 읽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

    "문 지명자의 칼럼을 읽어봤다. 중앙일보 주필이면 언론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 아닌가. 그리고 내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교회 강연 동영상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강연을 대하는 태도나 눈빛, 강연 준비 자세를 봤을 때 정말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강연 내용 중에는 비기독교인이 보면 오해할  부분이 약간 있다. 하지만 강연 전체를 보고 반민족주의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라고 말했다.

    더불어 이 교수는 "지금 우리나라를 보면서 한탄스러운 것은 문창극 총리 지명자가 총리가 되는 것인지 안 되는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다. 총리가 되는 것은 정치인이 판단할 문제다. 인사청문회 전에 마녀사냥 식으로 사람을 반민족주의자, 그리고 아베와 같은 사람이라고 몰아붙이는 경위 자체가 오싹하다. 지식인들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읽어보지도 않고 남의 얘기만 듣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증거 없이 몰아붙이는 건 마녀사냥"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1년 06월 15일 용산 동부이촌동 대형교회 온누리 양재 수요 여성 예배 (10:20)

    군국주의 일본 기독교 식민사관 망령에 빠져있는
    문창극 장로 강연
    영상

     민족비하 발언만 모아 강연하는 문창극.

    특히 친일파 윤치호 글을 인용

     

     

    역사의 도덕성 무시한 '뉴라이트 교과서'와 함석헌

    인간사의 도덕성을 철저히 무시한 뉴라이트교과서 집필자들의 위험한 궤변은 600만의 유대인학살을 정당화한 히틀러의 선전상 괴벨스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가난한 이웃집 아빠를 내가 때려죽인 뒤 돈을 많이 벌어다주면, 그 살인, 강탈행위가 정당화되고 '축복'이 되는가? 일제식민지정권, 박정희·
    전두환 정권
    을, "우리를 근대화시켜주고 잘 살게 해주었기 때문에 불가피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정당화하는 것은, 곧 인간생명과 존엄성을 벌레같이 짓밟으며 히틀러·스탈린이 거둔 소위 경제적 성공을 정당화하고 축복이었다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 프로젝트를 통해서, 일방적으로 조선정신을 말살시키는 상황에서, 식민지 지식인 함석헌은 무력감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조선인은 누구인가?"라는 처절한 자아발견의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민족 정체성의 위기, 자아상실의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자아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정체성, 정신의 파괴이고, 한 개인과 민족의 총체적 몰락이다. 아무리 용맹한 장수도 실성한 상태에선 전쟁터에서 제대로 싸울 수 없고 오합지졸이 될 수밖에 없다.

    "불의와 편법이 강물처럼" 융성했고, 국가폭력이 난무했던 20세기 한국역사는 한국인들을 허무주의나 기회주의로 젖어들게 한 면이 강하다. 한평생 옳은 일을 추구한 의인의 끝은 결국 자기희생과, 풍비박산이라는 냉소주의적 풍토를 초래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합천 '
    일해공원'이나 '박정희기념
    ' 소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생명을 지렁이처럼 밟아버리는 독재자들을 여전히 수용하고 향수에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 닭 같은 감상주의가 이 땅을 지금도 휩쓸고 있다.

    기본적 도덕성마저 상실한 탈세한 억만장자가 선거에 압승하는 철저한 처세술과 도덕의 공동화가 오늘 한국인의 성공신화와 바람직한 가치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른바 '엘리트'들의 상당수는 일신과 가정의 행복을 위한 가치를 사회정의나 진리추구를 위한 가치보다 더 '숭고하다'고 여기며, 철저하고 이기적인 기회주의자로 자리 잡았다. 저지른 범죄에 대한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잃은 지 오래고 오히려 당당하고 뻔뻔하다.



    ▲함석헌 선생.

    ⓒ 김성수

     

    그래서 함석헌은 고민했을 것이다. "군사력, 무력, 돈이 없는 개인이나 민족은 과연 열등한 존재일까?"

    그리고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사명감·문화·역사의식 없이는 한 민족의 자의식·정체성이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역사의 도덕성을 강조한다. "우주보다 귀한 한 인간의 생명"을 도구화하고 마음대로 빼앗은 것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고, 정당화되어서도 안 된다.

    인간사회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하나도 도덕성, 둘도 도덕성, 셋도 도덕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성의 가치를 경멸하고 이른바 실용성의 가치만 내세울 때 제2·제3의 뉴라이트교과서는 언제고 다시 우리 앞에 등장할 것이다.

     

     

     

     

     

     

     

     

    일본이 키운 이병도의 후예들.

    조선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대사를 삭제한 식민사관을 심어 놓고간 대표적인 인물이 일제의 하수인 이병도이다.

    이병도는 서인과 노론의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인 우봉 이씨의 후예로 태어났다. 보광학교와 일본인이 운영하던 불교고등학교에 다녔고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와세다대학 사학및 사학과를 졸업한 국내 최초의 대학출신 역사학자다.

     

    이병도는 일본의 요시다도고, 소우키치, 이케우치 히로시에 영향을 받았으며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은 요시다이다.


    요시다는 일한고사단을 쓰고 조선국권 강탈 이전부터 식민사학을 준비하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한 인물이다.그는 일본이 한국을 동화시키는 데는 단시일에 안되고 50년이 되면 동화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병도는 요시다의 후임온 쓰다 소우키치 밑에서 강의를 듣고 쓰다의 지도아래 역사 연구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쓰다의 소개로 동경제국 대학 교수인 이케우치히로시를 만나 사적지도를 받았다.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는 실증사학을 창시한 랑케의 제자 리스를 초청하여 창설하였다.

    이케우치는 만주를 일본 손에 넣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만철조사부라는 기관에 학문적으로 참여한 제국주의 사학자였다.

    그는 이병도를 조선사편수회에 참여도록 추천하였다.

    이병도는 192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로 학문적 연구를 시작하여 이마시류 (금서룡)과 함께 고려 이전의 시기를 담당했다.

    그는 한사군 이전은 미개사회이고 한사군이 우리나라에 철기문화를 전래한 한 후 국가가 성립하였다라 하였고, 우리나라 문명이 중국의 식민지를 받으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라고 보았다.

     

    이병도는 1934년 와세다대학 동창, 경성제대 출신 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를 만들었다.


    그 주요 구성원은 조선사편수회 활동도 함께 하였다.

    해방 후에도 이들이 국사학계를 주도하였고, 백남운, 안재홍, 정인보 등은 납북되자 이병도와 그의 제자들은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시켜 한국 역사학계를 좌지우지하였다.

    일본은 물러가고 이 땅에 들어선 미군정은 친일파 관리와 학자를 기용하였다. 미군정 3년 뒤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숙청을 묵살하고, 심지어 반민족 행워자 처벌을 위해 설치한 반민특위의 활동도 무산시켰다.

    이병도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제2세대, 제3세대, 제4세대를 양성하고 있다. 한국 사학계는 식민사관과 일제의 조선침탈에 협력한 노론사관에 젖줄을 대고 있다.

    이병도는 1986년 10월 9일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닌 우리국조라고 민족앞에 고백을 하였다.

    이것은 와세다대학 동창생인 최태영이 3년간의 설득의 결과이며, 두 사람은 한국 상고사 입문을 공저하고, 공개강연회를 며칠 앞두고 사망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노인네가 나이가 들어 망령이 났다하여 아직도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를 가르치고 있으니 양심까지 내버린 한국사의 교육이 진정한 것일까?


     

    일본이 키운 이병도와 그 후예

     

     이병도의 학문 과정

     

     

    근대적 역사 서술과 조선사 편찬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우리 고대사를 삭제한 일제는 도처에 식민사관의 독버섯

    을 심어 놓고 물러갔다. 그 치명적 독버섯 중의 하나가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이병도李丙燾이다.

     

    이병도는 서인과 노론의 대표적 가문의 하나인  우봉牛峰 이씨李氏의 후예로 태어났다.  보광학교와 일본인이 운영

    하던 불교 고등학교를 다녔고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 후 와세다대학 ‘사학 및 사회학과’를 졸업한 국내 최초의

    대학 출신 역사학자였다. 일본 유학은 이병도의 역사관 정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병도에게 영향을 준 일본학자들

     

     

    이병도에게 영향을 준 일본학자는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쓰다 소우키치律田左右吉 ,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廣이다.

    이병도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준 사람’ 으로 요시다를 꼽았다.  이병도가 서양사를 전공하려다가 한

    국사로 방향을 바꾼 계기는 바로 요시다가 쓴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 이었다. 요시다는 일본이 조선 국권 강탈 이

    전부터 식민사학을 준비하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한 인물이다.

     

     이병도는 요시다 후임으로 온 쓰다 소우키치 밑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국사를 연구해 보겠다는 뜻을 굳히고, 쓰다의

     지도 아래 역사 연구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쓰다의 소개로 동경제국대학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를 만나 사적인 지도

     를 받았다.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는 실증사학을 창시한 랑케의 제자  리스L.Riess를 초빙하여 창설한 학과이다. 그래서 자연스

     럽게 실증사학이 일본 사학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케우치는 만주를 일본 손에 넣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만철조사부라는 기관에 학문적으로 참여한 제국주의 사학자이고,  이병도를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도록 추천하였

     다. 이병도가 제국주의의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 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데에서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의 비극이 시

     작된 것이다.

     

     

                 <쓰다 소우키치, 이마니시 류  그리고  친일식민사학의 뿌리 식민사관 역사학자 이병도...>

     

     ? 쓰다 소우키치.

    만주철도주식회사와 조선사편수회 출신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등의

    식민사학 이론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이마니시류의 참혹한 한국 상고사 조작극

     석유 환인 昔有 桓 因

    민족혼을 없애버 림으로써 영원히 조선을 지배하려 한 일제는 역사 학자 이마 니시 류 金 西?

    를 하수인으로 내세웠다 가 . 이마 니시 류는 삼국유사 , 정덕 본의 " 석유 환국 昔有 桓 ?의 " 국 ?이 "" " 자로 를因를

    조작하고 이것을 삼국유사 경도 제대 영인본으로 배포 하였다 가 . 즉 , "" 는에 환국이 있었다 를 옛적

    내용을 "은 에 환인이 있었다 가 " 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한 국가의 실존 역사를 한 인물의 신화로 뒤집 옛적

    혀 버린 것이다 .

     

     

     

     

     이병도의 어처구니없는 연구결과

     

     

    이병도는 192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修史官補로 학문적 연구를 시작했다.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함께 고려 이전 시기를 담당했고 자연히 주로 고대사를 연구했다.

     

     그런데 이병도는 “우리 사회는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철기 시대로 들어온 일종의 변칙적 발전”을 하였다고 확

     신하였다.  한사군 이전은 미개사회이고 한사군이  우리나라에 철기 문화를 전래한 이후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하였

     고, 고려 시대까지도 낙후한 도참사상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보았다. 이처럼 우리나라 문명이 중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았으니,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연구 결과를 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결과는 모두 일본 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이라는 미명하게 한국 고대사를 부정한 것을 그대로 답습

     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병도의 한국 역사학계 좌지우지

     

     

    이병도는 와세다 대학 동창, 경성제대 출신 학자들과 함께 1934년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만들었다. 그 주요 구성원

    은 조선사편수회 활동도 함께 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단학회도 일본의 논리를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해방 후 이들이 국사학계를 주도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백남운(1894~1979) 같

     은 사회경제사학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안재홍(1891~1965)과 정인보(1893~1950) 같은 민족사학의 거목이

     납북되자,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시켜 한국 역사학계를 좌지우지하였다.

     

     그런데 광복 후 국내 사학계를 이처럼 식민사학자들이 장악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치적 배경도 작용하였다. 일본이

     물러가고 이 땅에 들어선 미군정이 친일파 관리와 학자를 기용한 것이다. 미군정 3년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는 친일

     파 숙청 건의를 묵살하고, 심지어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제헌 국회에 설치한 반민특위의 활동도 무산시켰

     다. 해방 후 독립운동의 공로로 훈장을 받은 사람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뿐이었다. 이렇게 친일파가 기득

     권을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에 국내 사학계도 이병도 일파가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식민사학계의 1, 2, 3, 4세대

     

     

    이병도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이기백, 김철준, 변태섭 등 2세대 사학자를 양성하였다. 2세대는 노

    태돈, 이기동 같은 3세대를 양성했고, 3세대는 송호정으로 대표되는 4세대를 배출하였다. 송호정은 한국교원대에서

    교편을 잡아 식민사관에 물든 역사 교사를 대거 양성하고 있다.

     

     두계학파의 고대사 학계 장악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쓰다의 조선사 이론에 조선 후기의 노론사관을 가미해 만든 이론을 한국사의 정설로 만들었

    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학계는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에 젖줄을 대고 있다. 그들은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학자

    는 무조건 재야사학자로 몰아 추방하고 역사 해석권을 독점하였다.

     

     이병도의 호를 따서 두계斗溪학파라 불리는 그들의 파렴치하고도 부끄러운 일화가 있다. 1979년 충북 중원에서 고

     구려비가 발견된 적이 있다.  그런데 비석의 중요 분분이 풍상으로 마모가 심해 해석이 다양하였다. 이 해석을 두고

     학술회의가 열렸는데, 이병도는 이 비석이 건흥 4년에 세워진 것이라 주장했다. 다른 학자들이 그 논거를 묻자 이병

     도는 “내가 하도 오매불망한 끝에 꿈에 그렇게 현몽했다.” 라고 답했고, 그 자리에 참석한 제자들은 “이 학문적 집념

     을 배워야 한다” 라고 말했다.<이호영, ‘중원 고구려비 제액의 신독’> 이 이야기는 사석에서 오고간 이야기가 아니라

     학회에서 발표되어 학술지에 게재된 실제 사건이다.

     

     이것은 스승이 잘못된 주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제자들이 그것을 말릴 수 없고,  더욱이 그것이 학술지에 게재될 수

     밖에 없는 우리 사학계의 풍토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이다.   자신들의 견해에 도전하는 무리들은 재야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면서,  이병도의 말도 되지 않는 ‘현몽’ 논거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병도와 그 제자들의

     학문적 양심이다. 역사가가 정확하게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미덕이기 이전에 신성한 의무다. 그러나 한국의 국사학

     계, 특히 두계학파는 그러지 못했다.<신복룡, ‘한국 사학사의 위기’>

     

     이병도 제자들의 깡패 짓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우리나라 사학계, 그 중에서도 고대사 학계를 장악했다. 소위 명문대학이라는 곳은 거의 서울

    대학교 출신들이 교수로 들어가 있다.   자신들의 학문 범위와 실증사학이라는 테두리를 정해 놓고 거기에서 벗어나

    는 의견은 학계에서 살아남지 못하게 매도<이희진, <식민사학과 한국 고대사>>하는 것이 이 학파의 특징이다.

     

     어느 학자는 이러한 행태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복마전’, ‘지식사기’, ‘파렴치’, ‘깡패 짓’, 일반적으로 점잖은 분

     야에서  금기禁忌로 여기는 흉측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고대사 학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행각을 표현하기에는 양이

     차지 않는 말이다. 흉기나 주먹을 쓰는 것만 깡패 짓이 아니다. 정당하지 못한 수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핍박해서 이

     익을 챙기는 행각을 깡패 짓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조선 시대 당파 싸움보다 훨씬 비열하고 학자적 양심까지

     버리는 사람을 진정한 역사학자라 할 수 있을까! 식민사학자들은 아직도 대對 국민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35~540쪽>

     

     

    이병도, 이영훈, 그리고 뉴라이트

    오마이뉴스 | 입력 2008.03.26 15:23

     

    [[오마이뉴스 김성수 기자]

    일본제국주의의 한국강점은 서구의 제3세계 강점과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유럽의 아프리카 정복이 힘과 문화의 강자와 약자간의 일방적 케이오
    게임이었다면, 일본의 한국강점은 다르다. 한일관계는 오히려 전통적으로는 한국이 큰형으로서 일본을 문화적으로 '개화'시켜주었던 관계였다.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 영향으로 서구문명의 주도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근세의 과정에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뿐이다. 마치 마당쇠에게 오히려 사지를 결박당한 주인 신세처럼. 이 말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화시키는 일이 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화시키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는 말이다. 문화의 힘이 없는 무력으로만의 정복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뿐 아니라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이 출간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

    ⓒ 오마이뉴스



    그러니 일본의 한국 강점은 일본 측에서도 골칫덩어리였다. 무력 외엔 한국을 정신문화적으로 굴복시킬 수 없었던 일본은, 그래서 제갈공명이 맹획을 7번 사로잡아 7번을 놓아주니 그 때서야 복종했다는 교훈의 실천이 무엇보다도 절실했을 것이다.

    정신적인 굴복을 받아내지 않고 무력만으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계속 억압하고 그 강요된 체제를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간이란 신비한 존재는, 김구 앞에 섰던 윤봉길이나
    이봉창
    처럼, 왜장의 열손가락을 잡고 남강에 투신했던 논개처럼, 거대한 정신을 대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그저 초개(草芥)와 같이 버린다.

    '조선정신 죽이기' 앞장선 조선사편수회

    그래서 일제는 일왕칙령으로 거액의 자금과 고급인력을 대대적으로 동원, 한국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말살하고, 조선인에게 복종을 강조하는 일본 혼을 심어주는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즉 황국신민 만들기인 정신개조 작업이다. 이러한 일제의 야심에 걸맞게, 조선사편수회가 만들어지는데, 그 구성원 대부분은 동양최고의 대학이라던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를 위해 당시 일본학계의 최고두뇌들을 총동원한다. 이것은 식민지 조선을 철저히 굴복시키기 위한, 요즈음 말 많은 대운하 프로젝트보다, 더 거대하고 막강한, 일제강점기 최대국가사업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조선사료 강탈기간 중이던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발족한다. 이 위원회는
    조선인에 대한 왜곡된 역사교육을 통해 일본민족의 '우수함'을 고취하는 한편 조선인의 열등성·타율성·정체성·사대주의성 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조선전통 민족정신이나 역사의식은 배제하였다. 그러다 학문적으로 더욱 권위 있는 기구로 만들기 위하여, 1925년 6월 일왕칙령에 의해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된 관청으로 격상하면서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그 후 총 35권, 전체 2만 4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사>를 제작하는 데 일본정부의 막대한 자금과 최고 두뇌의 역사학자가 퍼부은 시간은 무려 16년이었다. 그 결과 1932년 일제는 마침 <조선사>를 마친다. 제작비용으로 100만 엔이라는 거액을 들여 편찬한 <조선사>는 이렇게 일왕명령으로 만들어지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직접관리, 운용됐던 당시 일제의 "조선정신 죽이기"를 시도한 최대국가사업이었다.

    일본은 현명하게도 조선인을 무력으로 굴종시키기보다는 정신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의 일환으로 이렇게 한국사를 대폭 축소하고, 한민족의 역사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항상 지배를 받는 피지배의 연속이라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역사를 당쟁으로 얼룩진 부패한 역사로 규정지으며 일본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필연성'을 내세운다.


    역사학계를 좌우한 '친일식민사관'의 뿌리



    '식민사관' 역사학자 이병도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이 당시 일제하 국가기관의 설치, 조직 및 직무범위 등을 정한 제도인 관제(官制)를 보면 일제가 얼마나 한국사 왜곡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조선사편수회 고문에 이완용, 권중현을 앉히고 박영효·이윤용을 비롯해 일본인 거물들과 어용학자들을 위촉하였다. 위원회 회장은 조선총독부 총독과 맞먹는 막강한 권력자인 정무총감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켰다. 고문·위원·간사와 편찬사무를 담당하는 수사관 3명, 수사관보 4명, 서기 2명을 두었다.

    이때 수사관 3명중엔 후일 국립서울대학교 교수를 하며 일본식민사관을 계승한 역할을 톡톡히 했던 이병도(1896~1989)가 포함되어있다. 훗날 함석헌이 '재야사학자'로 감옥 문을 드나들며 생활고에 허덕이며 갖은 탄압과 핍박을 받는 동안, 이병도는 심지어 1960년 허정(1896~1988) 과도정부 하에서도, 문교장관 등을 지냈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는 5·16민족상, 대통령 표창까지 받는 등 국사학계에 미친 그의 '공로'가 대외에 알려졌다. 이래서 함석헌이 한국역사를 "중추·등뼈가 부러진 역사"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뿐이 아니다. 1960년대 이병도는 학술원회장을 비롯하여 각종 대학의 명예교수를 독차지했다. 한국사 발전에 기여한 '빛나는 공로'로 그는
    충무무공훈장
    ·서울시문화상·문화훈장대한민국장·학술원상·국민훈장무궁화장·인촌문화상 등등을 싹쓸이하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학계의 대부로 자리를 굳혔다. 그런 이유로 이병도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숨도 쉴 수 없었고, 제대로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아니 고개를 들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병도의 정신적 제자라고 할 수 있고 뉴라이트교과서의 집필자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일제의 조선강점이 조선을 근대화시켜 주었기에, 일제의 조선지배는 오히려 축복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논리를 가진 사람을 국민들이 내는 소중한 세금으로 꼬박꼬박 월급과 연구비를 챙겨준다. 이것이 바로오늘 한국이 직면해 있는 현주소다. 얼마나 우리들의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인가! 이런 적반하장의 소리를 하고도 당당히 한국 최고의 지성이 모였다는 국립대학의 교수를 하며 넉넉한 월급, 연구비를 받고, 가장 많이 팔린다는 수구재벌 일간지에 칼럼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역사는 이렇게 반드시 오늘 현실에 독이 되어서 돌아온다. 그래서 과거사 정리가 필요 없는 일이 아니라 역사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역사를 경멸하는 민족은 반드시 그 역사로부터 경멸을 받는다. 잘못된 과거를 가지고 잘된 미래를 꿈꿀 수는 없다. 인간은 싫으나 좋으나, 긍부정에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역사적인 존재다.

    콩 심은 곳엔 반드시 콩이 난다. 이병도를 심은 곳에는 이영훈이 나오고, 박정희가 5·16을 심은 곳에는 곧 전두환의 5·17이 나온다. 이것이 역사의 필연이다.



    고려대 총학생회 산하 일제청산위원회는 2005년 3월 대학본관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인사 명단 10명을 1차로 발표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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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 14.06.20 15:28

      첫댓글 일본수꼴들과 친일파매국놈들 앵무새노릇하려고 ㅈ ㄹ 하고 자빠졌네

    • 14.06.20 15:51

      오늘 이xx들은 아침 부터 조국이 월드컵에서 이겨라 응원 했겟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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