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방송 원고읽기]
아상을 통해 나를 확인하려는 어리석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 바로 아상입니다. ‘나다’라고 하는 자아의 존재를 확인해 줄 무언가 특별한 상을 만들어 놓고, 그 상에 의지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무엇을 ‘나’라고 여길까요? 아상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오온이 있겠죠. 먼저 색온이 있는데요, 즉, 몸뚱이라는 육체의 모양을 나라고 여김으로써 이 몸에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매일 운동을 하고, 헬스를 다니면서, 또 육체의 건강에 좋은 음식들만 선택적으로 먹으면서 몸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바로 아상 중에서도 육신이라는 아상이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수온 즉, 느낌을 나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죠. 특별한 느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커피를 마시는 것을 매우 특별한 삶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죠. 어떤 사람은 음악 감상이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죠.
또 수행자는 과거에 느꼈던 신비체험이나 삼매 체험 같은 느낌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과거에 느껴보았던 놀라운 성취의 순간이나 사랑했던 느낌들을 떠올리며 그 느낌들을 더 느끼려고 추구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내 느낌’, ‘내 감정’이라는 아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상온 즉, 특정한 생각에 몰두함으로써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혹은 지식을 추구하거나, 과학적 이론, 논문, 독서, 공부 등을 추구하는 것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는 사람도 많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온갖 생각과 망상에 빠져드는 것 또한 생각이라는 아상에 의지함으로써 자아를 확인하려는 버릇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행온 즉 의지, 욕구, 바람, 욕망하는 것에 매달리거나 특정한 대상에 집착하고, 혹은 사람에게 집착함으로써 자아를 확인하려는 아상을 가진 경우도 많죠.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식온이라는 알음알이, 분별심의 작용입니다.
아상이 일어났다는 것은 곧 나와 상대를 구분해서 분별해 놓고, 그렇게 분별해서 만들어놓은 대상을 모양 지어 상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제 스스로 만들어 놓은 상에 스스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범부중생들은 마음으로 어떤 특정한 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의지함으로써 자아라는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끊임없이 몸에 집착하거나, 느낌을 추구하거나, 어떤 생각에 몰두하거나, 욕망에 사로잡히거나, 사람이나 일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쉬지 않고 자아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이 이 허망한 나라는 거짓된 상을 진짜 ‘나’라고 착각한 탓입니다. 이 가짜 나인 아상을 진짜 나라고 착각하게 되면, 끊임없이 그 상을 만들어놓고, 그 상을 강화하려 노력하고 애쓰는 유위의 행을 계속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성공과 실패가 나뉘어 있다보니 끊임없이 성공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아상 추구의 삶은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아상이란 곧 진짜 내가 아닌 허망한 거짓의 나이기 때문이지요.
불법 공부란 이러한 허망한 나의 모양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모양이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참된 자기를 확인하는 길입니다.
모양이 없고, 실체가 없는 무아라는 본래의 실상을 확인하고 나야 비로소 그 어떤 허상에도 의지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아상을 만들고, 키우고, 애지중지하며 그것이 진짜로 알고 살아왔던 그 모든 것이 전부 허망함을 깨닫고, 그 어떤 상도 없는, 무아를 확인함으로써 더 이상 아상 놀이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그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도 자기 자신으로 편안히 존재하게 됩니다.
글쓴이:법상
목탁소리 (moktaksor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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