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2
1922년 12월 헤밍웨이를 만나기 위해 제네바로 가던 해들리는 리옹역에서 헤밍웨이의 원고로 가득 찬 여행 가방을 잃어버리게 되고, 이 사실을 안 헤밍웨이는 큰 상실감을 얻는다. 1923년 10월 10일에는 아들 잭 헤밍웨이가 태어난다. 그 사이 헤밍웨이의 첫 책인 《세 편의 단편과 열 편의 시》가 출판된다.
헤밍웨이와 해들리는 1924년 1월 파리로 돌아와 노트르담 데샹 거리(rue Notre-Dame des Champs)에 위치한 아파트로 집을 옮긴다. 미국의 평론가들은 헤밍웨이 특유의 간결한 문체를 통해 단편이라는 장르를 새로이 되살아나게 하였다는 평을 하였다.[ 여섯 달 뒤 헤밍웨이는 F. 스콧 피츠제럴드를 만나게 되고, 이내 서로 ‘적대적이면서도 존경하는’ 우정 관계를 맺게 된다. 같은 해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출판되었는데, 작품을 읽고 감명받은 헤밍웨이는 자신의 다음 작품을 장편 소설로 정하게 된다.
1926년 오스트리아 슈룬스에서의 헤밍웨이와 해들리, 아들 잭. 몇 달 후 부부는 이혼하게 된다.
헤밍웨이는 투우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고,[50] 또한 이 때부터 ‘파파’(Papa)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헤밍웨이는 축제가 끝나고 며칠 뒤 자신의 생일날을 기점으로 작품 초안을 쓰기 시작하고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완성한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전쟁 직후 해외에서 떠도는 이들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헤밍웨이의 대표작이다. 이혼한 헤밍웨이는 그해 5월에 파이퍼와 재혼을 한다.
파이퍼는 아칸소의 부유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보그》의 편집자로 일하며 파리에서 머물렀다. 결혼하기 전 헤밍웨이는 파이퍼를 따라 개종을 하게 된다.
그해 말, 아이를 갖게 된 파이퍼는 미국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파리를 떠난 이후 헤밍웨이는 다시는 대도시에서 살지 않게 된다.[69]
키웨스트에 머물렀다.
봄이 끝나갈 무렵 헤밍웨이와 파이퍼는 캔자스시티로 여행을 떠나고, 1928년 6월 28일에는 아들 패트릭이 태어난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살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헤밍웨이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12월 키웨스트로 돌아온 이후부터 이듬해 1월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까지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초고 작업에 집중하였다. 헤밍웨이는 4월 말까지도 결말 부분을 정하지 못하여 17번이나 수정을 거듭하였다. 완성된 작품은 9월 27일 출판되었다.
1933년 헤밍웨이와 폴린은 케냐의 사파리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10주 간의 경험은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과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의 주요 소재가 된다. 1934년 초 키웨스트로 돌아온 헤밍웨이는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를 쓰기 시작해 1935년에 출판하게 된다.[84]
1934년 헤밍웨이는 낚싯배 하나를 사들여 필라 호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 이후 카리브 제도로 항해를 시작하였다.
1937년 헤밍웨이는 폴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아메리카 신문 연맹(NANA)의 스페인 내전 보도를 맡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다.
1939년 봄, 배를 타고 떠나 쿠바에 도착한 헤밍웨이는 아바나에 위치한 암보스문도스 호텔에 7년 동안 살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헤밍웨이는 마사와 외도를 하는 동시에 폴린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 헤밍웨이는 와이오밍에서 폴린과 아이들을 다시 만나게 되고, 그해 여름 폴린은 아이들과 함께 헤밍웨이를 떠나게 된다. 폴린과의 이혼이 성사된 이후 헤밍웨이는 1940년 11월 20일 샤이엔에서 마사와 결혼식을 올린다.
해들리와 이혼하고 난 이후부터 헤밍웨이는 계절에 따라 장소를 바꾸며 살기 시작했다. 여름에는 주로 아이다호주 케첨으로 가 선밸리의 휴양지 근처에서 살았으며, 겨울에는 쿠바에서 대부분을 보내었다.
헤밍웨이는 겔혼에게 영감을 받아 자신의 역작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1939년 3월부터 이듬해 7월에 걸쳐서 쓰게 된다. 헤밍웨이의 문학적 명성을 위풍당당하게 다시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하였다.
1944년 5월부터 1945년 3월까지 헤밍웨이는 런던과 유럽 등지에 머물렀다. 헤밍웨이는 당시 《타임》에서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던 메리 웰시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된다.
노르만디 상륙작전 취재 등 1947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용맹함을 인정받아 동성훈장을 수상한다.
쿠바와 노벨상
헤밍웨이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쿠바에 머무르는 동안 스스로 말하길 작가로서의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1946년에는 메리 웰시와 결혼을 한다. 결혼 5달 이후 메리는 자궁 외 임신을 하게 된다. 전쟁 직후 수년간 헤밍웨이 일가는 수많은 사고와 건강 문제를 겪게 된다. 헤밍웨이는 그의 친구들이 점차 세상을 떠나게 되자 큰 우울감에 빠진다. 이 기간 동안 헤밍웨이는 심각한 두통과 고혈압, 비만, 심지어 당뇨병에 걸리게 되었는데, 이는 일련의 사고들과 과한 음주로 인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1946년 1월 그는 800여쪽에 이르는 장편 소설인 《에덴의 동산》을 쓰기 시작하여 그해 6월에 작업을 마친다.
《강 건너 숲속으로》(평론가의 심한 혹평을 받았다.)의 실패에 화가 난 헤밍웨이는 8주 동안 노인과 바다의 초고를 집필했다. 그는 이에 대해 ‘내가 써 내려갈 수 있는 작품 중 최고’였다고 스스로 평했다. 《노인과 바다》는 이달의 도서에 선정되었으며, 헤밍웨이는 세계적인 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1952년 5월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하였으며, 두달 뒤 헤밍웨이는 두번째 아프리카 여행을 떠난다.
아프리카 여행 중에 죽음이 다가올 만큼의 사고를 당한 후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성격이 성급해지며 쉽게 어울리지 못하였다. 이후에는 불행하게도 산불을 만나 다리와 상체 앞부분, 입술, 왼손과 오른팔에 3도 화상을 입게 된다. 어릴 적부터 일생 대부분을 술로 간신히 버텨왔던 헤밍웨이는 사고 직후 고통을 이기기 위해 술에 더욱더 의존하게 되었다.[125]
1954년 10월,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는 언론에 칼 샌드버그, 카렌 블릭센, 버나드 베렌슨이 상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의례적으로 말했지만, 결국 수상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은, 최상의 상태에서조차 고독한 삶입니다. 단체나 조직은 잠시나마 작가들의 고독을 덜어 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작가의 글을 향상시켜 줄지는 의문입니다. 작가는 고독에서 벗어나면서 명성이 높아지기도 하지만, 그러다 보면 흔히 작품의 질은 퇴보하기 마련입니다. 작가는 혼자서 글을 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며, 훌륭한 작가려면 영원한 고독 또는 영원한 고독이 주는 결핍과 매일매일 부딪혀야 합니다.
진정한 작가에게 있어 매 작품은 성취감을 뛰어넘어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다시 시도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없거나, 혹은 다른 이들이 시도했으나 실패한 무언가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 때로 행운이 따르게 되면 그는 성공할 것입니다.
(헤밍웨이 노벨상 수상 연설)
1955년 말부터 1956년 초까지 헤밍웨이는 계속 몸져누워 있었다.
1961년 7월 2일 아침, 헤밍웨이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산탄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선밸리 북쪽에 위치한 기념비에는 헤밍웨이가 세상을 떠난 친구를 위해 수십년 전에 쓴 추도문이 아래와 같이 담겨 있다.[164]
그는 무엇보다도 가을을 사랑했다.
미루나무 잎사귀는 노랗게 물들고
그 잎사귀는 송어가 헤엄치는 개울 위를 떠내려가며
높은 언덕 위로는
바람 한 점 없는 푸른 하늘만 있구나.
... 이제 그대도 자연의 하나로 영원히 남기를.
Best of all he loved the fall
the leaves yellow on cottonwoods
leaves floating on trout streams
and above the hills
the high blue windless skies
... Now he will be a part of them for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