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그 당시의 인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의 하나가 바로 어둠이었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불을 켜지 않는 한 깜깜한 밤에 할 일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결국 일찍 자야 했다.
빈촌에서 사는 아이들은 낮에는 신나게 놀고, 그 피곤으로 저녁밥 수저를 놓기가 무섭게 밥상머리에서도 잠이 쉬 들었다.
머리통이 여물어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등잔불을 켜 놓고 교과서를 읽고 싶어도 책을 오래 볼 수가 없었다.
숙제가 끝난 것을 확인한 어머니가 ‘지름 단다. 일찍 자거라’라고 말씀하시면 이를 거역할 수 없으며, 어린 소견에도 기름값이 수월찮다는 것을 익히 알았다.
'지름'은 '기름'의 방언이며, 지금도 충남 서해안 사람들은 'ㄱ'을 'ㅈ'으로 발음한다.
산골 아이들은 나름대로 기름을 아끼는 지혜를 가졌으며, 돈이 없어도 불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한 길 정도의 왕대나무 막대로 얼기설기 엮는 사립문 틈새로 내다보이는 황 씨네 종산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오래된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았다. 왕솔밭에 몰래 들어가서 붉은 색의 밑잔등 뿌리가 있는 나무만을 골라서 괭이로 흙을 파내고 붉은 뿌리만을 골라 톱으로 흠집을 내고 다시 자귀(도끼보다 작아서 작은 나무를 쪼개거나 깎는 연장)로 찍어냈다. 이 나무뿌리를 땅 위로 곧게 세운 뒤 자귀로 살짝 내리찍으면 나무뿌리는 곧게, 직선으로 잘 빠개졌다. 붉은 송진이 제대로 총총히 밸수록 자귀날이 잘 먹혔다.
왕솔뿌리를 '광솔(관솔이 표준어)'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낱개로 태워 불을 지피며 이 불빛으로 어둠을 조금은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송진 타는 냄새와 그을음은 밀폐된 방안에 있는 아이들의 코와 눈을 맵게 하였기 때문에 방문을 열어 놓지 않은 한 오래 태울 수는 없었다.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들기름을 종재기(종지 표준어)에 담고, 한지(문종이)로 손끝으로 꼬아서 길게 만든 심지에 불을 붙으면 들기름 타는 냄새와 함께 어둠을 몰아내기도 한다.
제사상을 준비하는 날의 밤에는 부엌 '살강' 위에 올려놓은 작은 종재기에서 불을 밝혔다.
어둠을 몰아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등잔불을 켜는 것이다. 등잔은 한 손으로 쥘 정도의 작은 크기 - 흰색 사금파리- 로 물을 담는 그릇이며 또 뚜껑이 있다. 등잔은 백토를 불에 구워서 만들며, 그 뚜껑 가운데에는 가느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 이 구멍에 헝겊을 잘게 찢은 뒤 손가락으로 돌돌돌 말아 꼬아서 만든 심지를 힘들여 박았다. 뚜껑 구멍 위로 심지가 조금만 겨우 나오게 한 뒤 불을 붙었다. 석유(등유) 타는 냄새와 함께 검댕이 그을음이 방안에 서서히 퍼졌다.
새장터 면사무소로 나가는 길목에는 삼거리가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구장터(충남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로 불렀는데 도로변에는 기름집이 있었다.
모친은 장날(2일장, 7일장)에는 십리 길의 읍내 새장터(웅천읍 대창리)에 걸어 나가서 장을 봤다.
돌아올 때는 기름집에 들러서 기름(석유) 한 병을 샀다.
구장터 도로변에 있는 기름장수는 커다란 드럼통 속에 함석으로 만든 '자새'를 깊숙이 넣은 뒤 가느다란 쇠줄로 만든 고리(손잡이)를 위아래로 잡아당기거나 밀어서 공기의 압력으로 펌프질 했다. 자새 구멍을 통해서 석유가 조금씩 퍼 올려졌다. 자새를 빠르게 잡아당길 때마다 삑삑! 쇳소리와 함께 석유가 쏟아져 내렸다.
기름장수는 한 방울이라도 땅에 흘릴세라 조심스럽게 비루병(맥주병)이나 대두병(큰 술병)에 부었다.
대두병의 무게는 만만치 않았다.
당시에는 기름이 귀하고 비쌌다.
마을 사람들은 맞돈 내고 사 온 석유를 아끼려고 등잔불은 작게, 잠깐만 켰다.
등불은 방안에서도 약한 바람에도 불꽃이 흔들리며 쉽게 꺼졌다.
더욱이 바깥으로 볼 일을 보러 갈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등잔불을 이용했다. 심술 사나운 바람이 훼방을 놓지 못하도록 한 손으로 등잔을 들고 한 손바닥으로 바람막이를 해 주여야 불을 꺼뜨리지 않고, 겨우 수십 보행을 이동을 할 수 있었다.
불을 꺼뜨리지 않고 오래 운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사각형 유리로 만든 네모의 나무상자 속에서는 웬만한 바람에도 등잔불은 꺼지지 않고 제법 오래 버티었다. 이 상자는 한 뼘 정도 길이의 네모진 판목에 가느다란 홈을 길게 판 뒤 이 틈새로 유리를 끼워서 만들었다. 그러나 바람이 조그만 더 세게 불면 나무 틈새로 몰려온 바람으로 등잔불은 위태롭게 견디다가는 급기야 꺼져버렸다.
다시 등장한 것이 호야등(남포등).
몸체가 둥근 원형의 유리이다. 위아래 구멍만 터진 호야등은 거센 바람이 아닌 한 불이 오래 켜졌다. 그래서 밤마실 갈 때에는 아주 요긴하였다.
또 다른 내 기억이다.
1950년대 농촌에서는 연엽초(담배)를 많이 심었다. 잎사귀가 파초잎과 같이 컸다. 담배는 긴 잎사귀를 따서 헛간 그늘에서 말렸고, 장날 지게로 지고 날라서 면내 공판장에 공출하였다.
궐련을 사 필 형편이 안 되는 머슴들은 공출하기 이전에 양질의 담배 잎사귀 몇 잎을 골라서 별도로 보관하였다. 쌈지담배가 떨어지면 별도로 보관하였던 누런 잎사귀 한 잎을 꺼냈다. 양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가면서 아주 정밀하게 돌돌돌 접어 말았다. 그런 뒤에 잎담배를 목침 위에 올려놓고 왼 손가락으로 누르고, 날카로운 주머니칼로 정성들여 잘게 썰었다. 제법 많은 양의 연엽초가 만들어졌다.
연엽초를 쌈지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입안이 궁금하면 곰방대에 연엽초를 꾹꾹 눌러 다진 뒤 화롯불이나 아궁이 잿불에 불을 당겼던 잉꾼(일꾼의 사투리)이 생각난다.
잉꾼할아버지는 바깥 사랑방의 부엌 아궁에 군불(쇠죽을 끓이기 위해서)을 때지 않을 때에는 스스로 불씨를 만들었다.
불씨 만드는 방법이 아주 특이했다. 쌈지 속에서 작은 크기의 차돌과 약간의 잘게 부순 솜을 꺼냈다. 양 손에 쥔 차돌을 서로 세차게 맞부딪치면 작은 불꽃이 튕기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끈질기게 맞부딪치면 어느새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입김을 조심스럽게 내뿜었으며, 세게 불수록 불꽃은 거짓말 같이 더욱 커졌다.
아이들은 그게 신기하여 가르쳐 달라고 해도 잉꾼할아버지는 웃기만 했다. 아이들에게 솜을 보여 주지도 않았고, 직접 만져보게 하지도 않았다.
얘들은 불씨를 만들려고 차돌팍(차돌멩이)을 주워서 차돌멩이끼리 세게 부딪쳤다. 찰나의 불꽃뿐이었다. 몇 차례 애를 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왜 목화 솜에 불이 붙지 않았나에 대한 이유를 몰랐다.
나는 최근에서야 짐작한다. 잉꾼할아버지(오서방)가 불씨를 만들었던 솜은 쑥을 말린 뒤 잘게 비벼서 만든 쑥이었으며, 얘들이 만든 솜은 밭에서 재배하는 목화솜이었다고.
쉰 살을 오래 전에 넘긴 나로서는 불씨에 관심도 없다.
더욱이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불씨가 필요치 않거니와 필요하다면 흔해빠진 가스라이터로 쉽게 불씨를 얻을 수 있다. 차돌로 불씨를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차돌멩이로 불씨를 만들던 옛날이 조금은 그립다.
2001. 8. 20.
* 추가 :
내 발음은 '잉꾼 할아버지'
일꾼 할아버지 무덤은 충남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마을의 뒷산욱굴산이라고 함, 구룡리산2번지)에 있다.
내 할아버지가 사 준 내 소유의 산.
연료가 부족하던 그 시절에는 동네사람들은 지게를 짊어지고 산으로 들어가서 갈퀴로 가랑잎을 긁어서 지게로 짊어져서 마을로 지으로 되돌아왔고, 재래식 부엌짝 아궁이에 불을 땠다.
내 아버지는 동네 일꾼들을 사서 산에서 칡넝쿨 등을 잘라서 지게로 나르게 했다. 바깥마당 아래에 있는 퇴비장에 높게 쌓아올려서 퇴비로 만들었고, 다음해 이른 봄에는 다시 일꾼을 사서, 지게로 짊어지고는 산골 다랑이논에 뿌리게 했다. 그 당시에는 비료가 없었다.
일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60년이 지난 지금.
자손이 없는 오서방 일꾼할아버지의 무덤은 구룡리산 어느 곳에 있는지를 짐작조차도 못할 게다
마을뒷산(욱굴산)에 들어가서 나무를 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
극도로 늙은 할머니들이나 몇몇 어기적거리는 산골마을로 변해버렸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