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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방한칸
김사인(1956년 생)
세월은 또 한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이
천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아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다로니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꾸어 밥비는 재주
쫒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한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 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없고
몇일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김사인 그는 1977년 서울대 국문학과 시절 학생운동으로 첫번째 징역을 살고 나와 1980년
광주항쟁이 터지고난 후 다시 항쟁운동으로 수배령이 내려 밀려다니다 그 이듬해 또 잡혀
들어간다. 1987년이후엔 노동문학에 관심을 보이며 박노해 조정환과 함께 '노동해방문학'을
창간하여 활동하다 다시 옥고를 치룬다.
문학계에서 그는 천상병과 함께 가장 순수하고 선량한 두 시인으로 인정받아 모든이의 사랑을
받아왔는데 그 사랑에 넘치는 온순한 사람이 어떻게 중정의 막강한 압력밑에 투쟁을 계속해
올 수 있었는지 경이롭다. 사람이 순수하고 사랑에 넘치면 자연히 조국을 사랑하여 정열적으로
자신의 한몸도 바치게 되는 것일까.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 등 우리 역사에 그런 낭만적이고
정열적인 이들은 수없이 많았다.
이 시에서 주인공은 깊은 밤 밤잠을 못이루고 가족 걱정을 하고있다. 몇일 후엔 그 셋방도 비워
줘야하는데 이사할 거처는 아직 구하지도 못한 상태. 생활비를 벌 원고지 글은 아직 완성도 못
했는데 몸은 아파 잠을 이룰 수도 없고.. 가족에게 보내는 따뜻한 눈길과 가족을 지켜보며 괴로워
하는 시인의 정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감동을 준다.
김사인은 감옥을 드나드느라 필시 학교에서 제적이 되었을 텐데 어찌어찌 만학을 하여 고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나와 동덕여대에 재직하고 있었으니 삭월세 단칸방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명의 천진무구한 무욕의 시인 천상병(天祥炳 1930~1993) 그는 동료 문인들에게 가서 막걸리값
2천원을 아무 거리낌없이 뜯어냈고 동료들 모두 기꺼이 그에게 술값을 제공했으며 그를 사랑으로 아껴
주었다. 그가 입에 달고사는 말은 항상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였다.
67년 중정부장 김형욱은 동베를린 간첩사건을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천상병은 거기에 서울상대
동문인 친구 강빈구에게 연루되어 구속된다. 죄목은 강빈구를 찾아가 협박하여 5만원을 갈취한 공갈죄,
강빈구가 간첩인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은 불고지죄 반공법 등에 적용되어 6개월간 세번이나 '아이롱아래
와이셔스처럼' 전기고문을 당한다. 그는 친구들에게 막걸리값 2천원이상 요구해 본일도 없었고 강빈구가
간첩이 아니었으니 고발하지 않은 건 당연한데 그 지독한 고문으로 천상병은 온몸이 망가지고 치아가 다
상해 막걸리가 밥이 되고 정신적으로도 온전치 못하게 된다.
그 얼마 후 한 친구가 자신의 여동생을 천상병에게 주어 결혼을 시켰는데 그 동생 문순옥은 참으로 대단한
여성이었다. 천상병은 이미 몸이 온전치 못해 사람구실을 못할 지경이었는데 그녀는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사랑으로 섬기었으니..
천상병이 63세되던 '93년 드디어 '귀천'하자 친구들은 모두 교외 그의 초라한 단칸방 셋집으로 문상을
갔는데 4월이었는데도 날씨가 을씨년스럽자 한 사람이 쓰레기통 등을 뒤져 그 부엌으로 가져가 군불을
짚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순옥은 화들짝 놀라 부엌으로 달려가 불을 껐는데 사연인즉슨 친구들이
정성껒 낸 문상금을 그녀는 둘 곳이 없어 아궁이 속에 우선 숨겨둔 것이었다. 지폐들은 이미 불이 붙어
상당부분 타버렸는데 꺼내보니 총 8백만원이었던 것이 반만 남아있었다.
그로부터 3년 후 나는 친구와 인사동의 그녀가 운영하는 '귀천'다방에 가 보았는데 다방은 너무도 협소
하여 테이블은 두개밖에 없었고 창쪽으로 작은 테이블에 마주보는 의자가 두개 놓여있어 우리는 그
의자에 가 앉았다. 목여사는 다방마담이라면 최소한 약간의 분칠은 좀 해야하는데 도무지 외모엔
관심이 없는 듯 얼굴은 그늘에만 젖어 있어 안쓰러워 보였다. 그날 아궁이에서 돈이 타지 않았다면
이보다는 조금 여유로운 크기의 다방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장소를 옮겨 그 질녀가 운영하는 1,2층의 큰 까페로 옮겼으니 목여사는 아마도 그 조카로부터
생활비정도는 받고 있을 것 같다. 몇번 가보아도 그 조카는 없고 알바생만 있었는데 한번 만나면 이모는
어찌 지나고 계신지 물어봐야겠다. 천시인이 가신지도 30년이 지났으니 아마 이제 그녀도 따라가셨는지도..
중정에서 풀려나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을 때 그는 평생의 역작 '귀천'을 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세상은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그가 살았던 세상은 과연 아름다웠던가 부끄러운 우리는 우리자신을 채찍질해봐야 한다.
첫댓글 아~
착한 사람에겐 삶도 사랑도
모진가 봅니다 ㅠ
덕분에 저를 다시 돌아다 봅니다.
둥지라는 방 한칸
1986년도 나의 결혼초 개봉동에서 ,그림,이라는 찻집을 열었을때
천시인님과 각별했던 우리 부부애게 목순옥 여사님이오셔서 전통차를 제게 전수 해주셨는데
4개월도 못가서 찻집이 불이나고...
가난을 피할 수 없었던 천상병은 '내 직업은 가난'이라면서
'저승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저승에도 못가는게 아닌가'
라 노래했지.
그렇다고 그는 불만이나 원한을 품은 적이 없으며 오히려
가난이 주는 지복을 즐기는 도인같은 생을 보내셨으니
어떤 최악의 순간도 그는 해학적으로 표현하여 시 곳곳에
숨어있는 죽음의 그림자도 모두 그렇게 쓰셨지...
그분은 삶의 순간순간 이미 귀천해 계셨었구나..
정주는 그 부부 두분과 생전에 교류가 있었다니 부럽다.
내가 그 때 그분을 만날 수 있었다면 막걸리 몇되 값은
드렸을 텐데...
분명히 언니는 그리 하셨을겁니다
언니는 大人이시니까요~
사상이 높고 크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