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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을 서신을 해석하는 관점)
창17:10~14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성경에서 처음 할례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이지요.
그러나, 할례의 기본은 피의 언약입니다.
피의 언약은 창세기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 이 부분에서 가죽 옷만 보이시나요? 동물의 피로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한 부분이 있는겁니다.
노아의 방주 이후에 창9:8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인간의 수명은 줄어 들고 그때부터 동물을 잡아 먹게 된거라고 합니다.
주 후49년 예루살렘의회에서 노아의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지켜야할 최소한의 규범을 정할 때 기초가되고 그안에 6번째가 피를 먹지말고 길에서 찢겨 죽은 동물을 먹지 말라.입니다.
피는 생명을 나타내므로 할례를 하면서 하나님과의 언약 백성이 되었고, 아담의 원죄로 태어난 인간들의 죄를 동물 희생제로 이스라엘이 선택되어 드렸던 것입니다.
그 부분을 예슈아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희생되시는 부분을 바울은 롬15:7~8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육체적 할례를 받는 것의 무효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예슈아께서 그 할례를(피의 언약을) 몸소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셨다는 말인데 그래서 그 피의 언약이 이방인까지 복음이 퍼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을 할례가 필요 없다! 무할례다! 등등의 표현을 쓰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만을 보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바울과 예슈아가 동일하다고요?
마5:17~19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바울의 배경을 제대로 알고들 하는 말인가요?
로마서에 관한 제임스 던(D G Dun)의 논문의 서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대화는, 이방인들에게 보내는 이 사도가 정확히 '히브리인의 히브리인'이자 열성적인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왜곡은 그의 유대인성의 왜곡과 뒤섞여 있다."라고.....
그의 유대인 종교, 사고방식, 양육, 교육, 삶의 맥락 안에서 말이다. 요컨대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삶의 경험만을 아는 유대인이었고, 그는 이방인의 삶을 경험한 이방인도 아니었고, 어느 순간 이방인과 동일시하게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약성경에 쓰여진 모든 주석에서 결여된 한 가지에 대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누락된 것이 바로 1세기의 유대인 사회의 맥락이며, 바로 제2성전이라고 불리는 시기입니다. 그것은 유대인 율법인 할라카를 바탕으로 탄생부터 죽음까지 이어진 유대인 사회였습니다.
로마서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경이 아니며, 바울이 창조한 자기 자신이 속한 체계적인
언어는 그리스어였고, 로마의 유대인(믿거나 말거나)은 그리스어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바울이 전했던 모든 역사와 신학, 성경 구절과 사유 양식은 순전히 히브리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이러한 히브리 사상이 반드시 그리스어로 전래되고 있었을 뿐이입니다.
바울이 누구였는지 기억해 봅시다. 비록 디아스포라계 유대인이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주류 유대교와 동일시(그림을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랍비 유대교라고 부르자)했습니다. 왜냐하면 성지에 사는 평범한 보통의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계 유대인들은 실제로 랍비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연관성은 주로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종교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 발생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을 어떤 특정한 유대인 당사자와 동일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의 유대인들이 자신을 바리새파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사실 바울은 라브비 유대교의 특정한 한 분야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가말리엘 선생님의 지지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특별히 가말리엘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탈무드는 가말리엘 선생님이 특별히 소질과 헌신이 있고, 언젠가는 랍비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보여준 학생들만 데려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을 어떤 식으로든 추측할 필요가 없으며, 그는 스스로를 바리새파라고 부르고, 가말리엘 학교에서 그가 수련한 것은 기록된 사실입니다. 그가 수련을 마친 후에, 그는 이 특정한 유대교의 한 분야에 대한 철학과 뉘앙스를 터득한 사람으로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내내 랍비였습니다.
바울로의 학교에서 성경의 율법과 예언자들을 공부하는 것은 분명 그의 훈련의 일부였지만, 실제로 가르친 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에 관한 가말리엘의 신학적 관점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이 따랐던 이 랍비 유대교의 특별한 한 갈래는 우리가 흔히 유대교 율법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교리 안에서 작동했습니다. 이를 히브리어로 할라카라고 부릅니다. 이 유대교 율법들은 히브리어로 미츠봇에서 말하는 율법(모세의 율법)과 다른 것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유대교 율법들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참된 해석을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진 근본적으로 인공적인 판결과 교리(예화는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판결과 교리들은 가말리엘 랍비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바오로와 같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신학적 기대와 행동과 관습의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수 세기 동안 (현대에는 더욱 그러하지만), 기독교의 미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훈련 센터는 이 고대의 랍비 학교들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어 왔다. 우리는 보통 이러한 기독교 훈련 센터를 신학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기독교의 각 계열(종파라고 불리는)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교리들이 있기 때문에 각각 그들의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 자신만의 지정된 학교가 있다. 신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성경이 확실히 가르치지만, 그러한 교리들이 성경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고 그 교파가 어떤 종류의 주제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지를 정의하기 때문에 신학교를 운영하는 특정 교파의 교리와 관습, 신학적 기대에 더 중점을 둡니다.
성경은 그 교파의 교리를 통해 보는 것는 가능하나, 그 교파의 교리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은 성경을 완전히 의식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결국 얻게 되는 것은 종교학자들과 장로들이 오래 전에 결정했던 방식에 대한 가장 큰 지식이자 헌신입니다. 이런 방식들을 기독교에서는 교리라고 부르고, 유대교에서는 할라핫(할라핫의 복수형)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의 신학은 바리새파의 할라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사실은 가말리엘이 주장하는 바리새파의 특정 브랜드의 할라하였습니다. (기독교처럼 수많은 바리새파의 다른 브랜드의 할라하와 항상 일치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이 생각하고 말하고 쓰고 지시할 때, 그는 가말리엘의 발치에서 배웠던 할라하의 근본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그의 메시아를 만난 이후, 나사렛의 예슈아가 가르친 할라하를 새로운 할라하로 동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할라하는 성경에 대한 특정 집단의 해석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말리엘이 가르친 그의 기성 할라하와 엮이게 될, 예슈아의 성경 해석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슈아가 할라하로 가르친 많은 부분이 바리새파의 할라하와 일반적으로 일치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딜레마는 이러했습니다. 예화는 그에게 자신이 이 새로운 할라카의 선교사가 되어 이방인들에게 인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할라카의 핵심은 복음이었습니다. 문제는 예슈아가 지금 천국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메시아 유대교가 너무 어려서 학교를 세우기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이것을 가르칠 학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 역사에서 하나님이 히브리인들과 맺은 언약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제공한 전례는 없었습니다. 즉, 바울의 관점에서 보면, (랍비로서) 그는 메시아 예슈아의 등장과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포함하는 '메시아적 할라카', '할라카'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에는 많은 토론과 정보 처리가 수반되었고, 예루살렘에 있는 '길'(예루살렘 총회: 초대교회아니고 예루살렘 총회가 맞음!)을 이끈 예슈아의 형 야고보(예루살렘 총회의 초대 수장)의 의견에 반드시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야고보는 훈련된 랍비가 아니라, 우연히 예슈아의 형이 된 시골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장 명망 있는 두 학교 중 한 곳에서 훌륭한 정식으로 훈련된 랍비였기 때문에, 랍비처럼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랍비로서 배운 모든 것과 모든 것을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이방인 기반의 종교를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자들(그리고 다른 편지들에서도)에서 주장할 점이 있을 때, 랍비의 스타일과 프로토콜과 사고 과정에서 그렇게 합니다.
바울이 편지에서 즐겨 사용하는 용어 중 일부를 랍비들이 탈무드에 나타나듯이 그들의 논쟁과 토론에서 사용하는 것과 함께 참고했고, 유사점들을 있습니다.
탈무드는 본질적으로 유대교의 종교적 판결과 전통, 관습을 담고 있는 방대한 양의 유대인 글입니다. 하지만 이는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탈무드에 자신의 생각이 포함된 랍비들은 할라카(유대인 율법)의 특정 문제에 대해 언급할 때 특정한 표준 문구를 사용했는데, 이는 앞서 다른 랍비의 판결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탈무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핵심 문구들의 삽입이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논의 중인 중요한 문제와 랍비가 어떤 주장을 하는지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즉, 탈무드는 특정한 문학적 관습과 규칙, 특히 랍비들에게 적용되며, 유대인 학생들은 그들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가장 좋아 하는 문구 중 하나는 "그럼 우리는 뭐라고 말할까요?"입니다. 이것은 바울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라 토론할 문제를 소개하기 위해 탈무드에서 사용되는 표준 랍비 용어입니다. 나중에 토론할 때 이 문제에 대해 앞선 랍비가 결정했다는 결론(종교적 판결)이 인용되고, 그 다음에 이 랍비는 그 판결이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박합니다. 그래서 "그럼 우리는 뭐라고 말할까요?"라는 말이 나온 다음에 검토 중인 특정 문제에 대한 토론이 올 것입니다. 증거는 보통 성경 구절의 형태로 생산됩니다. 조만간 (즉, 랍비가 그 문제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된 판결) 결론이 내려지지만, 그러면 지금 그것에 대해 논평하고 있는 랍비는 그것을 신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랍비가 이전 랍비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문구는 "신이 금지한다" 또는 "하늘이 금지한다" 또는 "절대 그렇지 않기를"입니다. 그래서 전체 논의는 "그럼 우리는 뭐라고 말할까요?"로 시작하고, "신이 금지한다"(혹은 그에 해당하는 것과 동등하다)로 끝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서에서 바울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한 열정적인 토론을 9장 30절부터 시작한다. 바울은 랍비이고 이 토론(혹은 논쟁)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에 대한 이방인의 참여와 관련하여 적절한 판결(올바른 할라카 확립)에 도달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바울은 당연히 훈련된 랍비들이 하는 것처럼 토론을 시작한다:
로마서 9:30-10:2 CJB
30 그래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이방인들이 비록 의를 위해 애쓰지는 않았지만 의를 얻었으니, 이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의입니다!
31 그러나 이스라엘은 정의를 베푸는 토라를 계속 추구했지만, 토라가 베푸는 것에는 이르지 못했다.
32 왜일까? 그들이 의로움을 신뢰의 근거로 추구한 것이 아니라 법적인 일을 하는 데 근거가 있는 것처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돌을 우연히 발견했다.
33 타나크인이 말하기를, "보아라, 나는 사람들을 비틀거리게 할 돌, 그들을 무너뜨리게 할 돌, 그러나 그 위에 그의 믿음을 의지하는 자는 굴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서 10장 1절 형제여, 내 마음의 가장 깊은 소망이며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열정을 내가 증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이해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로마서 10장을 거쳐 로마서 11장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이방인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지의 여부와 이것이 이스라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논의일 뿐입니다.
로마서 11:11
11 "그러면, 내가 말하기를, 그들(이스라엘)이 그들이 영원히 떨어져 나간 결과를 가지고 비틀거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늘이 금지한다! 오히려 그들이 그들을 질투하게 하려고, 그 인도를 받은 것은 그들의 장애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로마서 9장 30절부터 11장 11절까지를 하나의 단위로 하고, 우리는 그 문제를 제시하고, 그 다음에 로마서 9장 30절에 이어지는 논쟁을 한다. 본질적으로 바울은 이 논쟁을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데, 그는 짚신을 세워 놓고 그와 논쟁을 벌인다. 이 단위의 시작은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는 문구와 함께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어느 시점에서 결론이나 판결이 내려질 것이고, 그러면 이 논의를 주도하는 사람(바울)은 "하늘이 금지한다"는 말로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에 강하게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바울이 (자신과) 싸우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은, 만약 이스라엘이 정말로 비틀거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포함시켰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 잘못된 결론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하늘이 금지한다! 그리고 나서 다음 문장에서 그가 올바른 판결이라고 생각하는 것(올바른 할라하)을 진술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인도가 이방인들에게 걸림돌로 다가왔음을 의미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 모두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제2성전 유대교나 유대교 문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신사적인 신약성경 해설자들은, 이스라엘이 영구히 사라졌다는 로마서 11장의 잘못된 결론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이제 막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끔찍한 결과에 경악하고 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동료 유대인들에게 고통스러워하며 소리칩니다. 이제 막 제가 여러분께 보여드린 것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 시대에 유대인 사회와 문화와 종교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 성경의 등장인물들과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이 말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1세기경 그 당시 랍비의 눈으로 바울의 편지를 읽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마음을 열어놓고 배워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글을 쓸 때, 그는 자신의 편지를 읽을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의 문화나 유대교도 히브리 성경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단이 별로 없는 이방인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방인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용어, 즉 자신이 전달하려는 것과 정확히 맞지 않을 수도 있는 용어를 사용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그 용어들은 낮은 수준이거나 전혀 맞지 않는 용어들이 있습니다.
유대인 외에 누가 바울이 그의 편지들에서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고 나서 이방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확고하게 유대교 회당에 근거를 두고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이방 땅의 회당에 있는 유대인들을 믿는 것, 이방인들을 믿는 마음을 가진 유대인들을 믿는 것이 신앙의 대표자로 필요했다.
이방인들이 예수 운동을 지배하기 시작한 바울의 세기가 끝날 무렵,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이방인 종교로 만들기 위해 예수 운동에서 모든 유대인들을 단절시키려고 재빨리 움직였던 때에, 성경의 몇몇 영감을 받은 유대인 작가들의 메시지는 왜곡되고 우발적이며 의도적인 것으로 고통받았다. 신약성경이 존재하게 된 것은 기원후 3세기 초가 되어서였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신자로서 바울의 서간을 읽을 때 당면하는 도전이며, 그 무엇보다도 로마서가 그러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로마서를 너무 많이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긴요하며, 수세기 동안 반유대인의 편견이 성경학자들의 가르침과 성경번역을 더럽혀온 것이 분명합니다.
다행인 것은 메시아의 귀환 시기가 다가오는 우리 시대가 늦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히브리어적 맥락에서 재발견하고 성경의 참된 의미를 밝히는데 도움이 되는 유대인을 바라보는 신자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8:23
`그 때가 되면 열 사람이 손을 잡고, 온 나라의 언어를 말하면서, 유대인의 망토를 잡고, `우리는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너희와 함께 가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첫댓글 어떤분이 저한테 할례는 폐해졌다고 아무 가치도 없는것처럼 말씀하면서 바울의 주장만을 하시길래...톰 브래드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기록하였던 부분들과 같이 몇자 적어 봅니다.
오늘도 주안에서 평안하십시요~^^
그럼요
토라교도들에게는 아직도 할례가 유효하답니다.
그러나
자네님이 저주라고 소리치는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은자들은 할례는 폐한 것이랍니다
어느 하나의 율법을 버리시면 모든 율법을 버린자이지요?
님은 범죄하면 그냥 양을 잡아 제사드리시길 축복합니다
@자기자랑은 고통이다 위에 글 제도로 안 읽어 보셨군요...
짬뽕이 아니라... 한 새사람을 말하는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슈아가 메시야임을 깨닫고 이방인은 전통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 없는것을 만들어서 성경보다 교리가 더 강조되었음을 인지하고 버릴것은 버려야 할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서신서를 모두 부인하는것이 아니라 그것만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게 과연 옳바른것인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명탐정(조상민) 기독교야말로 (로마카톨릭) 유대교에 로마전통이 섞인것 아닌가요?
그리고 한새사람도 바울이 말한겁니다
엡2:15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그분 안에서 이 둘로 한 새사람을 창조해 화평을 이루게 하시고
@명탐정(조상민) 유대인과 이방인의 협력을 말하는거지요...
육체의 할례는 모형이며 구원받지 못합니다. 참된 구원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죽는것이 마음의 할례입니다.
제 글에서 분명 구약의 할례를 예슈아께서 이루셨다고 말했는데요.
@jwha 예수님은 다 이루셨는데 님에겐 아무것도 이루어진것이 없잔습니까?
@무한대 제가 올린 글은 안보고 반대를 위한 반대라....신약을 조금만 안 다는게 정말 무서운 겁니다...
@jwha 기독교가 기다리는 예수는 오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두 미래에 오실 메시야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 메시야는 말씀을 깨달은 현재에 오시는겁니다.
마태복음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신말씀
입니다
이방인들은 거의 상관이 없는 내용이죠
그리고 문맥을 잘 살펴보면
십계명과 율법지키라는 말씀이 아니라
산상수훈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결과적으로 산상수훈을 안지키고
율법을 지키게 되면 율법의 모든저주가
일점일획까지 이루어 진다는 경고성
말씀인 것입니다
초림당시에는 예수님 말씀이 곧 법이요
재판관 이었던 것입니다
듣은 그대로 심판하신다고 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마태복음을 문자대로 믿게되면
실족한 두눈을 빼고 수족을 잘라야 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알면 (특히 레위기) 그렇게 말 못하실겁니다.
@jwha
레위기요?
지금은 신약시대에요...
안드로메다에 두고온 정신머리좀 찾아
가시기 바람니다...
@베냐민
신약의 반이 구약을 말하는겁니다.
그래서 구약의 기본인 모세5경 중 특히 레위기를 알면 신약이 다시 볼일텐데...하긴 모르니 알 필요가 없다고 우기지요.
@jwha
구약은 그림자에요
실체가 왔는데 그림자를 잡으려고 하는건
미련한 짓입니다
혹시 신약성경이 없나요?
@베냐민 삶에서 살아내야 하는데... 님이 하는 말투나 표현은 실체를 아는 사람이라고 보이지 않아요. ㅎㅎㅎ
@jwha
삶에서?
신약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습니다
행위는 얼마든지 속일수가 있기 때문에...
선한양심과 믿음만을 보시는 것이죠....
믿음외에 행위도 볼것 같았으면....
십계명과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셨겠죠....
그렇다고
예수믿고 살인강간도둑질을 일삼는 자들이
있습니까?
양심만 깨끗하면 죄를 지을수 없습니다
선한양심을 가지시길 바람니다
@jwha
님이 예수님과 같은 인격체가 되려면
따귀를맞고 다른편도 돌려 대줘야하고
침뱉음을 참아야하고
십자가에 빨개 벗겨진채로 부끄럼을
당해야 하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님의 삶의 기준이니까 님도 그정도
수준은 되야 하지 않겠어요?
준비 되시는 대로 연락주시면 님의 인격을
한번 시험해 보겠습니다
꼭 연락주세요 게시판에....
할례의 핵심은 육신의 정욕 이생의자랑
안목의정욕을 없애라는 뜻이지
다른뜻이 있는게 아님니다
구약은 육적할례
신약은 영적으로죠....
왜?
우린 영적으로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신부이므로 육적으로 할례하고 율법을 지키면
안됨니다
구약은 아들의영으로 오는 분들이라
엄격한 율법을 적용시킨거고
신약은 아들의영을 받는 신부이므로
율법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양심을 깨끗히 하는것이 신부들이
갖추어할 덕목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오시면 마음속 정욕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갑니다
개기고 버티면 고된 훈련과 환란과 연단을
받기 때문입니다
신랑예수님이 우리를 정결한 신부로 만드신후
장가를 드시기 위해서에요
우리와 혼인하기 위해서 우리를 큰 환란으로
넘기시고 연단을 주시는 겁니다
지조를 지키나 안지키나...
율법을 지키면 지옥이요...
인내로 버티면 천국입니다...
춘향이처럼 지조를 지키면 영생이요...
(옛남편변사또?)에게 수청을 들면...
불호수에 던져지게 됩니다...
이해되시라고 비유를 조금 썼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 여지껏 글들을 봤을때,,,, 남 가르치려 하기전에 본인의 인격부터 확인하세요.
이보세요
님을 가르치려는게 아니야...
님은 초보수준도 안되기때문에 훈수를 좀
둔것뿐이요...
그리고 인격?
믿음과 선한양심 회개만 있으면되지
무슨 인격을 따지시나?
신약은 사람 인격따지는 복음이 아니요...
베드로사도 조차도 할례자들이 두려워서
위선을 떨었다고 하질않습니까?
그런데 무슨 인격을 논하시요?
인격.... 그런건 개나 먹으라고 주세요...
이스라엘인들이 인격이 나뻐서 110만명이
로마군대에게 몰살당했을까요?
님들처럼 불법과 배교가 멸망의 원인
이었습니다
새언약은 오직 믿음만 봅니다
양심에 화인맞은 자들이나 신약시대에 폐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부인하는 십자가의원수가
되지마시고 회개하세요...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을 모르는군요....그렇다면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으므로 그만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님의 오늘 말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