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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 복구를 미루고 있는 북한, 언론은 왜 숨기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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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의선 복구작업 중 군사적 합의서에 서명을 계속 미루고 있는 북한.
> 군사적 합의서란 복구작업 중 군사적 충돌에 대비하는 중요한 문서로서
> 이 합의서 없이는 복구작업이 불가능하다. 북괴의 남침시 우리만
> 어이없이 길을 열어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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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북한은 계속 합의서 서명 연기를 통보하고 있다.
> 정부는 휴전선 지뢰제거와 콘크리트 방벽을 헐어 서둘러 4차선 길을 내주고 북은 아직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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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말로 언론장악이 끝난 후라서 그런 것인가?
> 정부는 분명한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더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직결된 문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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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요! 군사적 합의서요? 북한에서는 평화협정을 계속요구하고 있는데, 그게 체결되면 다 해결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 언론에서 평화협정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키지 않는 것이 더 문제 아닌가요?
> *** 국정원이 황장엽 비서의 밥에 독극물을 넣을 수 있다. (시스템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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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한국정부에 제보하고싶어하는 그야말로 몸값이 나가는고위직 탈북자들이 중국에 많이 숨어있다. 이들은 기대를 걸고 주중 한국대사관 등에 제보를 하지만 주중 한국대사관에는 이들을 박대하거나 북한에 역제보하는 직원들이 배치돼 있는 것 같다.
-- 과연 탈북자들의 대북정보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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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3일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의 모임" 사람들 다수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생생한 소식을 들었다. 우선 땅굴에 관한 무서운 아니 소름끼치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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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북한의 병사들은 땅굴 파는 일 이외에는 거의 하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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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여단급 마다 하나의 땅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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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제3,4땅굴은 김부성과 신중철로 하여금 남한의 신임을 얻고 땅굴 탐사를 저지케 하기 위해 만들어낸 위장용이다. 남굴사가 이제까지 도출해낸 결론을 생생한 목소리로 재 확인하며 남굴사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
> 4. 땅굴이 거의 다 완료돼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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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땅굴은 길따라 물 따라 파여져 있다. 길과 물에는 민간 우물 시추자들이 시추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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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거의 정확한 땅굴 지점 또 하나를 제보받았지만 앞으로는 땅굴 정보를 절대로 공개하지 않는다. 남굴사는 현재의 군당국을 우군으로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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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굴!!! 오래전에 월간조선에서 우려 먹었던 문제를 뒤늦게 들고나오셨군요. 요즈음 같이 첨단장비가 발달한 시대에 수십년전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군요.
> 7. 5.18 광주사태때 대규모의 공작대원들이 침투했다. 광주 사태는 북한이 주도했다.
>
-- 이부분은 정말 심각한 유언비어에 해당합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못하는 것도 아마 이런 부분 때문인것 같습니다. 아래의 글들은 정말 답변할 가치도 없는 것들이군요
> 그 이외의 정보를 들으면서 남굴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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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J정부가 존재하는 한, 특히 고급정보를 가진 탈북자들일수록 절대로 한국에 오지 못할 것이다. 북한의 실상, 김정일의 남침 준비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면 DJ의 적화 햇볕정책이 탄로 나기 때문이다.
>
> 특히 광주사태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이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면 정권은 치명타를 입게 된다. 하지만 정권이 바뀐 후에는 북한 고위급에 있던 탈북자들이 속속 귀환할 것이고 이에 따라 광주사태에 대한 정보가 입수되리라 본다. 그때의 DJ와 광주사태를 미화시킨 사람들의 입지는 매우 어려워 질 것이다.
>
> 2. 국방부와 육군본부에 땅굴 정보를 차단하는 친북/간첩들이 배치돼 있듯이 주중 한국대사관에도 북한 정보, 남침 정보, 화생방 무기 정보 등 귀한 정보를 가진 사람을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직원들이 배치돼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귀한 정보를 가진 사람을 북한에 제보하는 직원도 있을 것이다.
>
> 3. "고급 정책정보"를 가지고 있는 황장엽씨와 김덕홍씨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이다. 현정권이 끝나면 이 두 사람들이 입을 열 것이고, 입을 열면 최소한 김대중, 임동원 등은 국민들로부터 돌팔매를 맞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
> 현정권이 끝나감과 동시에 이들의 건강도 악화될 것이다. 생명을 단축시키는 극약이 음식물에 첨가될 수 있다. 수지김 등 저간의 사건들을 보면 국정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들을 빨리 구출해 내야 한다. 지금 이 두 사람의 건강이 이유 없이 악화돼가고 있다는 소문이 여러 쏘스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
>
>
> *** 김대중은 빨갱인가, 간첩인가
>
>
> 김대중이 단순한 빨갱이인지 아니면 간첩인지는 우리 대한민국의 운명을
>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이를 분석 검토해
> 보겠다.
>
> * 월남 패망시 월남 대통령의 비서실장은 월맹의 간첩이었다.
> * 레바논의 전 대통령 제마일은 대통령 당선되기 전까지 미국 CIA로 부터
> 매월 봉급받는 미국 첩자였다.
> * 냉전 시절 영국,독일,프랑스등의 안보담당 장관급들 여러명이 구 쏘련의
> 첩자였다. 이들은 민족이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 * 핵무기등 각종 고급 군사과학 기술이 냉전 시절 고급 학자들에 의해 상대
> 적국으로 넘겨졌다 .
>
> 상기 사항들을 염두에 두고 현 정권을 분석해 보자.
>
> * 냉전 시절 쏘련과 중공은 모두 공산국가였지만 한치의 땅이라도 상대에
> 넘겨주지 않기위해 국경선을 놓고 군사충돌을 서슴치 않았다.
> 김대중 정권은 우리의 국경선을 김정일의 요구대로 조정하여 주려하고
> 있다. 특히 중장비 무기를 상륙시킬 수 있는 대형 상선을 자유로이
> 통과 시키겠다는 것은 김정일에게 언제던지 원할 경우 나라를 송두리 채
> 넘겨 주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다.
> * 남침용 장거리 땅굴이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입증되고 실제
> 주민에 의해 신고 되었고 확인되었다. 이를 SBS가 시리즈로 방송하는 중
> 김대중이 SBS 회장을 불러 박지원,임동원을 배석시킨 가운데 임동원,
> 박지원으로 하여금 SBS회장을 위협하여 땅굴관련 방송을 즉시 중단케
> 했다.
> * 지난번 보안사 대공 처장이 이례적으로 해외 출장중 교체되었다. 당시
> 대공처장은 청와대내의 적성세력을 감지하고 비밀리에 수사중이었다고
> 한다.
> *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 북괴가 낚시 밥으로 던저주는 간첩 이외는 단
> 한 명의 간첩도 체포되지 않했다.
> * 김대중은 김정일의 답방을 목매어 기다리고 있다. 이유인즉 김정일이
> 남한 통치를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에 이를 불식 시키고자 함이다.
> 김정일(김일성)이 조총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일이 있다고 한다.
> "남조선을 점령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나 이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 수 백만명을 죽여야 하는데 이것이 어려운 일이다."라고 실토 했다고
> 한다. 김대중은 우익에게 다음 정권을 넘겨 주기보다는 김정일에게
> 넘겨 주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하다고 생각 할 것이다. 노벨평화상
> 수상자에 통일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당연한 논리다.
> * 재래식 무기 감축 협상을 미북간의 협상에서 남북협상으로 끌어왔다.
> 핵무기,장거리 유도탄등은 남한을 김정일이 점령하는데 도움되는 것
> 이 아니다. 김정일이 남한을 점령하는데 필요한 것은 재래식무기와
> 군사배치 상황이다. 특히 북괴는 현재 휴전선에 공격 대형으로 부대를
> 배치해 놓고 있다. 이로써 김대중은 김정일에게 남한을 점령할 수 있는
> 수단과 방법을 마음대로 제공할 수 있게 됐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 는 두고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은 휴전선에 공격 대형으로 배치
> 된 북괴군을 결코 뒤로 물리라고는 안할 것이다. 이것은 북괴가 남침할
> 의사만 없다면 가장 쉽게 응할 수 있는 군사적 긴장완화 방법임에도
> 불구하고. 김 대통령 임기말 이전에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
> 상기에 열거된 내용과 월간조선,한국논단,김대중과 김정일(일본인 작가가
> 씀)등에 실린 사실들을 종합해 볼때 김대중은 단순한 빨갱이가 아니라
> 북괴의 간첩이었음이 입증된다.
> 간첩이 아니라면 전두환 시절 간첩죄로 사형선고 받았을 때의 판사논고에
>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하라. 그 반론이 입증될 때까지는 법적으로도
> 간첩이다.
>
>
> *** DJ말 믿었다가 알거지 신세 되간다
>
> “민족주의”는 즉 “공산주의”의 위장 용어입니다.
> 민족주의는 씨족주의입니다. 민족주의를 가장 소리높이 외치는 현 정권과 그 홍위병들이 끼리끼리 뭉쳐서 펄벅 세계의 메뚜기 떼처럼 이 나라를 파먹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민족주의요 씨족주의요, 김정일 도당처럼 사회적 부를 모두 독점해 보려는 공산주의인 것입니다.
>
> “민중”, “민주화” 라는 낱말 역시 공산주의자들의 위장 용어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좋은 낱말들을 선점하여 그 낱말에 무임승차함으로써 정치공작의 효과를 상승적으로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말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작품을 보아야 합니다. 사기꾼일수록 말을 얼마나 잘 합니까. 말 잘하는 DJ 믿었다가 우리 모두 알거지 신세가 되 갑니다.
>
> -- “제가 대통령이 되면 자식들 한테는 좀 안된 이야기이지만 무재산 가족을 선포할 것입니다. 모든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겠습니다. 제게 공을 쌓은 사람에게는 돈을 주고, 공직은 능력있는 사람에게만 나눠줄 것입니다”. DJ의 말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눈시울을 적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
>
>
> ** 북괴의 간첩이 정부 요직에 엄청나게 많다.
>
> * 발견자 : 나는 군 고위층 경호대장으로 근무후 전역, 쉬고 있던 중 75년
> 도에 한 거물 간첩단이 접근해 오자 그들에게 포섭된 것 처럼 행동을
> 취했다.
> * 동 간첩단은 서울시청 앞 쎈터빌딩에 버젓이 사무실을 차려놓고 있엇다.
> 간첩단 두목은 나에게 한반도 지도상에 표시된 남침 땅굴 현황을 보여
> 주면서, - ㅇㅇㅇ 동지가 수령님을 배알하고 난 후에는 원하는
> 보상을 해주고 - 서울시내 땅굴 기지내에 설치된 무기고도 보여
> 주겠다. - 중앙정보부는 김일성 수령님의 기관이 되었다. 보안사와 치안
> 본부도 요소요소에 우리의 동지들이 다 들어가 있다는 등의 엄청난
> 내용을 이야기 했다.
> * 그 후 동 간첩단과 접촉하면서 그들이 제공한 자료들을 확인한 결과
> 간첩단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국내 정계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 포진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 * 종래 간첩단은 점조직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한 간첩단의 일원이면서도
> 서로가 신부등을 전혀 알수가 없었는데 73녀 경부터는 조직원간에 "연합
> 내지는 협조체제"로 활동방법을 바꾸는 바람에 서로 신분을 알수있게
>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자연히 간첩단내의 조직원들을 파악하게 된
> 것이다.
>
> ** 간첩단 신고 사례(1)
>
> * 전 외무부 장관 최덕신, 해군 참모차장 이용운등 유력인사들로 구성된
> 간첩단 정보를 당시 중앙정보부 지부장인 친지에게 직접 신고했다.
> * 신고할 때, 나는 중앙정보부 내에도 고정 간첩단이 있다고 전제하고는
> "나는 포상금도 필요없다. 제보자인 내 이름을 빼달라"고 부탁했다.
> 이에 대해 부장의 단독수사 약속까지 받았다.
> * 신고한지 3 일후 새벽 1 시, 나의 집으로 "ㅇㅇㅇ! 조직을 배반하고도
> 살 수 있을것 같으냐? 공동묘지에 갈 준비나 해라."는 등 소름이
> 끼치는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 * 수사가 진행되자 정관계 유력인사들의 압력행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수사가 계속됨에 따라 위험을 감지한 최덕신등은 박대통령과의 불화를
> 빙자하여 해외로 도주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에 압력을 행사한
> 유력인사들은 밝혀지지 않은 간첩집단의 조직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 * 얼마 후 신고자 본인은 중정 수사관들에 의해 두 차례나 정신병원에
> 입원케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다. 이 조치는 제보자를 정신병
> 환자로 모략하여 수사를 종결시키려는 음모로써 중정내에서 암약중인
> 간첩 수사관들의 소행으로 판단된다.
> * 나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도피 생활을 한 적이
> 있는데 한 경찰관이 도피처인 계룡산까지 추적하여 동향감시를 했다.
> 후일 그 경찰관은 나에게 자신에게 지시했던 상사가 이상하다면서 그
> 사실을 서면으로 확인해 주었다.
>
> ** 간첩단 신고사례(2)
>
> * 88년 당시 카도릭 농민회장이고 평민당 국회의원이던 서경원이 나를
> 최초 접근한 간첩과 밀회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청와대 김ㅇㅇ 수석
> 비서관에게 신고했다.
> * 청와대 지시로 치안본부 특수대에서 내사결과 간첩단으로 확인되어 동
> 간첩단 수사를 보안사에서 전담 수사했다. 그 후 안기부에서 "서경원
> 간첩단 사건" 전모를 발표했다.
> * 그러나 신고자인 본인이 발표내용을 보았을 때 범증이 드러난 서경원
> 등 일부 하부조직만 검거해 명분만 세웠을 뿐 실제 핵심 간첩등은 제외
> 시키는 등 수사가 미진 되었거나 은폐시킨 것으로 판단되었다.
>
> ** 간첩단 신고사례(3)
>
> * 본인과 동조하는 인사들이 90 년도 노태우 대통령에게 "과거 ㅇㅇㅇ이
> 신고했던 간첩단 수사에서 핵심 거물 간첩들을 제외시킨 점과 안기부
> 내의 대공수사관(간첩) 포진 실태에 대한 내용"의 탄원서를 이현우 경호
> 실장을 경유하여 직보토록 했다.
> * 청와대의 특명으로 보안사령부는, - 서경원 간첩단 수사시 핵심 간첩을
> 빼돌린 경위, - 75 년도 중앙정보부 지부장에게 신고했던 최덕신 일당
> 거물 간첩단 사건, - 신고자인 본인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킨 문제
> 등에 대해 수사를 개시했다.
> * 수사가 개시된지 29 일만에 수사중이던 보안사내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 이른바 윤석양 이병 양심선언이다. 윤 이병은 보안사 서빙고 수사
> 분실에서 보관중이던 정치인 사찰 디스켓을 절취하여 언론에 폭로했던
> 것이다. 이로 인해 "어떻게 군 기관이 정치인까지 사찰하느냐 ? " 며
> 압력을 가하는 정치인, 언론인, 기관원 등의 농간으로 보안사의
> 수사는 전격 중단되었다. 그 때 압력을 행사했던 자 등은 간첩단
> 조직원일 가능성이 높다.
> * 그 후 보안사는 "기무사"로 기관 명칭까지 바뀌게 되고 대공수사 기능은
> 극도로 약화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 * 당시 수사 책임자였던 보안사 대공처장 우종일씨는 "빨갱이 부하들에게
> 당했다"고 탄식했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보안사내 수사관(간첩)들이
> 자보책으로 음모를 꾸몄던 것으로 사료된다.
>
> ** 동 간첩단 사건 조사 참여 민간인
>
> * 전 중앙정보부 수사과장 진광학과 전 육군 헌병차장 인복수씨는 내가
> 제공한 간첩단 정보를 토대로 수년간에 걸처 내사했다. 간첩단의
> 규모는 내가 신고한 내용보다도 규모가 크고 위력이 강해 감히 "간첩
> 정부"라고 불리울 정도라고 진단했다. 인복수씨 일행은 동 실태를
> 보고서로 작성, 이현우 경호실장을 경유하여 노태우 대통령께 보고
> 했다. 언급한 바와 같이 관철이 않되자 그는 이민을 갔다. 진광학씨는
> 의문사를 당했다.
>
> ** 간첩단 암약 또 다른 증언
>
> * 황장엽씨는 "남한에 간첩은 5 만명 가량이고 권력 깊숙한 곳, 각 기관에
> 북쪽 사람있다."면서 간첩색출을 촉구했다.
> * 이어 황씨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발언한 수석비서관 이름이 거
> 명된 보고서가 그 이튿 날 김정일 책상위에 놓여있다."라고 증언했다.
> * 기무사는 지난 3월 "좌익 세력 대군투쟁 실상"이란 책자를 전 군에 배포
> 했다. 동 책자에는 군 내에 침투한 적성 세력이 1000 명이 넘고
> 청와대와 권력 핵심부에까지 김정일 추종세력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 * 그런데 동 책자를 만든 책임자인 방첩처장 염완표 준장은 갑자기 행임,
> 전역됐다. 기무사는 일부 간첩단 조직을 파악해 놓고도 의법조치를
> 염두도 못내는 실정이고 오히려 좌익세력에 의해 제거되는 상황이
>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 * 이로써 암약 중인 간첩단의 조직이 방대하고 위력이 막강하여 국가
> 수사기관들이 제구실을 못 하고 있다는 실상이 입증된 것이다.
> * 88 년도 부터 문제 제기된 남침 땅굴 문제도 역시 간첩단의 방해로
>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 끝 -
>
> 여기에서 "나" 또는 "본인"으로 표시된 사람은 당시 수사관으로이 문제에
> 깊숙히 개입, 조사한 바 있으며 위의 모든 기술내용은 본인 판단으로는
> 사실이거나 사실에 매우 가까운 내용입니다.
>
>
> *** 보안법 철폐는 절대 안된다 !
>
> 북괴는 주적을 대한민국으로 `노동당 규약`에 분명히 명시하고 남한에 동조하면 극형으로 다스린다.
>
> 그런데 우리만 보안법을 개정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 국민들의 안보경각심은 더욱 이완될 것이다.
> 지금도 우리사회에 준동하고 있는 침투간첩, 고정간첩, 좌익세력들은 때를 만난 듯 활개칠 것이다.
> 그리고 머지않아 국보법 철폐주장으로 이어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
> 그때는 누가 그것을 책임지며 어떻게 감당해 나갈 것인가?
> 국가안보에 시행착오란 있을 수 없다. 7천만 국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모험을 할 수는 더욱 없다.
>
>
>
> *** 수도권일대를 거미줄처럼 뚫어놓은 북괴남침땅굴을 은폐하는 정부 !
>
> 현정권은 친북 좌익 정권입니다. 정지용님이 국정원 요원에 의해 앰배새더 호텔로 잡혀가서 2박3일간 고문을 당하고,앞으로 땅굴은 찾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나왔습니다.
>
>
> 제6땅굴과 기타 수도권 일대 20여개소의 땅굴 징후 실상
>
> 화성군 송산면 지화리에서 발견된 제6땅굴은 1999년 10월 14일 민간 시추업자가 화성군으로부터 주민 상수도용 지하수 개발하청을 받아 밭 가운데 구경 8인치의 시추기로 관정을 파 들어 가던 중에 지하 30-40m 지점의 암반에서 3m 높이의 지하공간을 발견하자, 수상히 여긴 나머지 콤프레샤를 수시간 동안 가동시켜 압축공기를 계속 주입시켜 보았으나 무한대로 유입 흡수되는 지라 폐광이나 거대한 동굴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민간 땅굴탐사자들에게 제보하게 됨으로 알려진 것이다.
>
>
> 10년 이상 땅굴 탐사에 종사해온 민간 전문탐사자들은 현장에 임하여 다우징(dawsing)탐사를 실시한 결과 땅굴과 같은 공간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고 1999년 11월 1일 이 지하공간을 따라 약 100m 서측의 야산 하록에 지하 70m까지 뚫고 내려간 다음 특수녹음기를 갱내에 설치하여 청음하던 중 11월 4일부터 11월 7일까지의 기간 중 수차에 걸쳐 기계진동소음과 고압전기 유도음이 시추공 근거리에서 포착 녹음된 것이다.
>
>
> 동 민간 탐사자들( 예비역 육군 소장으로서 제2땅굴을 발견한 정명환 사단장과 국방부장관 과학보좌관을 지낸 윤여길 박사, 대공수사관출신의 예비역 육군 준위 정지용 외 6명의 땅굴전문가들)은 이를 좀더 과학적으로 확인하고자 그 후 동 발견지점을 감시 관찰하면서 다우징 탐사를 계속하여 땅굴의 징후를 확증하는 한편 동지점에서 1.5km 동측의 논과 도로가 마주치는 곳이 다우징 탐사결과 지하 공간 두 군데가 맞닿는 지점임을 알아내고 여기에 2000년 2월 12일부터 18일까지 지하 40m까지 시추공 4개를 뚫고서 청음기를 설치해 놓은 결과 2월 14일 야간에 기계소리 및 충격 마찰음과 함께 “대감께서 총리 되십니다”란 사람목소리가 청취되어 긴장케 했던 것이다
>
>
> 이 쯤 되면 제1,2,3,4땅굴을 발견 탐사할 할 당시의 징후에 비하면 거의 100% 신뢰성과 정확성이 보장되고 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상세한 발견경위와 시추현장 사진 그리고 녹음테이프를 첨부한 완벽한 “서해안 장거리 남침 땅굴 징후 발견 신고서”를 2000년 8월 23일 국가정보원에 우체국 내용증명으로 보낸 것이다.
>
>
> 이 시기가 6.15선언 직후로서 김정일에게 마취되었는지 당국은 이 같은 중차대한 정보를 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강원도 포수나 다름없이 무소식이었다는 것이다. 동년9월 2일 민간 탐사자들은 독촉장을 보냈다. 그래도 무소식이라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이들은 9월 19일 부득기 국가정보원장 임동원을 이적행위로 서울지검에 고소하자, 다급해진 국정윈은 9월 18일자로 문서를 소급 작성하여 국방부에 이첩했다는 회신을 보내고는 “난 몰라”하는 태도를 취하였던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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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부가 국정원으로부터 이를 통보받고 연천 땅굴 식으로 탁상공론으로 판단처리 할 것이 .예상되는 바, 이들 민간탐사자들은 서둘러 서울지검 담당검사(임권수 부장 검사)에게 신중한 조사를 촉구하는 탄원서를 12월 9일 발송하였던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한심한 국방부는 현장조사결과 땅굴이 아니란 결론을 얻었으니 계속관심을 가져달라는 형식적인 회신을 12월 29일 보내왔다 그 회신 요지는 북한으로부터 너무 장거리이고, 해저공사시의 해수누수 가능성, 녹음한 기계음과 육성음의 조작 가능성 등을 전제할 때, 땅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가안보의 대들보라는 군이 이 모양 이 꼴로 사명감이나 공익사상이 결여되어 있다면 국가운명이 가히 풍전등화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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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민간 탐사자들은 2001년 1월 15일 명명백백한 땅굴 징후를 무조건 부정한 땅굴관련 직에 종사하는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담당관을 직무유기 및 특수 이적죄로 국방부 검찰부로 정식 고발을 했다. 현제 피소된 자는 국방부 정보 본부 소속 대침투정보과 대령 1명과 군무원 1명 그리고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탐지과 소속 대령 1명과 군무원 1명 모두 4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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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게 왠 일인가? 2001년 1월 16일자로 서울지방검찰청은 국정원장 피소건에 대하여 국방부에서 현장을 탐사한 결과 직무수행을 거부하거나 유기한 사실을 인정 할만한 자료가 없으므로 법리오해 및 사실오인으로 인한 것인바 공소부제기 이유를 아래와 같이 고지한다는 내용으로 사건종결처리 회신을 보내온 것이다.
> 이제는 검찰마져 압력을 받아 사건에서 손을 뗄려는 것이다. 이에 고소자들은 다시 1월 22일 서울 지방검찰청에 불기소결정에 대한 불복항고장을 제출해 놓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 항고장에는 화성 땅굴의 징후 추가 자료와 국방부관련자 허위 판단에 따른 고소장 그리고 청와대 남침땅굴 침투 가능성에 대한 탄원서 까지 첨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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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장과 국방부 및 육본의 땅굴 담당자에 대한 사직 당국의 법적처리가 주목되는 가운데 고소인은 일단 조서를 받은 바 있으나 피고소인은 지금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고소자들은 가산을 탕진하고 가정파탄지경에 생존권 마져 위협받으면서 고소를 취하하라는 당국의 직접 간접 협박과 회유를 받고 있으나 목숨을 걸고 국가안보를 위해 법정투쟁을 할 각오를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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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거대한 국가정보원과 군의 기무사, 정보사 그리고 통신정보부대와 국방부 및 합참 정보본부는 물론 각군 작전정보참모부 등에서 전략정보와 전투정보를 위해 해마다 쓰는 돈이 수조원인데 단돈 몇 억원이 아까워서 인지, 아니면 고위층의 지령인지는 모르지만, 과학적인 확인절차도 없이 탁상공론으로 독안에 던 쥐나 다름없는 결정적인 땅굴 정보를 부정 묵살하는 것은 반국가적 이적행위임에 틀림없다. 2개 여단 규모의 육군공병대를 투입하여 당장 불필요한 경의선 개설을 위한 기반공사 및 지뢰제거작업을 하고 몇 십억원을 드려 지뢰제거기를 긴급공수까지 해왔으나 사용불가품이라서 방치해 놓고 있으면서, 비예산사업으로 또는 몇 억원의 대민발주 공사로 간단히 땅굴을 절개하여 의혹을 투명하게 공개 할수 있음 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이를 회피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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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땅굴은 연천과 화성에서만 발견 된 것이 아니고 수도권 전지역에 걸쳐 현재까지 20여 개소가 민간인의 신고로 시추 확인된 바 있다. 이들 대부분은 시추공에서 기계음과 인간의 육성을 청취 녹음한 증거까지 확보 하고 있으며 민간 탐사자들은 지하음을 녹음한 테이프 200여개를 증거로 확보하고 있다. 그 동안 당국에 무수히 신고했으나 “ 또 땅굴이냐?,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 고 하면서 외면한다. 이들은 지금 보상금을 노린 사기꾼이나 정신병환자로 취급받거나 오히려 무고죄로 고소당할 위기에 몰리기도 하는 딱한 처지에 놓여있다. 그러면 수도권의 대표적인 땅굴 징후 사례와 당국의 무성의한 대응을 이하에서 소개한다.
> 역시 이와 관련한 가장 큰 관심 꺼리는 청와대 인근에 땅굴 징후가 포착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01년 1월 3일 민간탐사자들이 청와대 비서실장(한광옥) 앞으로 “청와대에 남침땅굴이 침투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란 제하에 그 가능성을 입증하는 자료와 설명서를 보낸바 있으나 현재까지 무반응이란 것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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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1993년에 어떤 젊은이가 김포반도와 행주산성 및 세검정을 경유한 남침 땅굴이 청와대에 침투했다는 도면을 제시하면서 청와대에 이르는 땅굴 지상루트를 조석으로 순찰하는 불순분자까지 있다는 제보를 모 국회의원에게 하였던바 그가 관할 3군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통보함으로서 3군사령부의 모 대령이 진상을 규명코자 ,그 제보자를 수차 만난 다음 어느 날 그제보자가 자신의 부친 묘소에서 의문의 시체로 발견된 미스테리 같은 사건이 이었다는 것이다.
> 실제로 청와대에서 불과 1km지점인 서대문 교도소 뒷산에 하록 민가에서 지하 굴착음을 청취했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에 간 민간탐사반이 사실임을 확인 한바 있는데, 육군 탐지요원은 아직도 북한이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여 굴착한다는 한심한 소리만 하고는 가버리더란 것이다. 현재 북한이 300대 가량 보유한 자동굴착기(TBM: tunnel boring machine)은 고압전기로 작동되고 매연이 없으며 암석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럭으로 나오므로 이를 해상에 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 김포반도 북단 해수가 한때 이유 없이 뻘탕물로 뒤덮힌 것을 해병초소에서 관측하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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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김포반도의 애기봉 입구에 거주하는 민간인이 방밑에서 땅굴굴착소리 및 진동음을 1988년부터 빈번히 청취한 것은 해안초소 해병대 초병들도 같은 기계음을 근무 중에 수차 청취하고 보고했으나 묵살되었다고 한다. 이 위치에서 한강을 따라 후방으로 내료와 한강 하류인 김포군 하성면 후평리의 지하 시추공 110m 깊이에서 녹음한 음성을 일본 음향분석가인 스즈끼 마스미 박사가 분석한 결과 “이거 만지면, 일만 일천, 감전되지, 예 예”란 두 사람의 대화가 북한 억양임이 판별되었는데 일만 일천 볼트는 북한에만 쓰는 송전방식이란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89년 9월 11일 후평리 지하 시추공에서 채취한 양생중인 세멘트를 분석한 결과 북한제 임이 확인되었고, 이 곳을 당장 시추절개토록 육군 참모총장(이종구)에게 요청했으나 묵살되자 1990년 6월 11일 노태우대통령에게 진정서로 호소했으나 결국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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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 후에도 수차에 걸쳐 한강 하류인 김포군 고촌면 향산리 지하 100m에서 갱차 통과음과 자동굴착기 소리가 녹음되었으며, 행주산성 인근 민가에서는 한밤중에 방안에서 땅속의 큰 진동음을 수 차례 들었고 시추공 옆 농수로에서 갑자기 물이 치솟기도 하였던 점을 미뤄보아 김포반도 건너에서 한강 하저 밑을 통해 행주산성을 거쳐 서대문 쪽으로 땅굴이 뚫린 것이 확실시되나 이 모든 사실을 신고 받고도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과학적인 사실확인을 하지도 않고서 무조건 수용치 않으려 하는 것이다. 심지어 민간 시추작업을 방해 중단시키고 땅굴존재를 부정하고서 지금도 덮어두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월간 조선에 1992년 5,6,7,8,12월호에 연제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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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관심지역이 주한 미군 기지인데, 의정부와 동두천 미군기지 주변까지 1994년에 이미 땅굴 징후가 발견되었으니 지금쯤은 미군기지 내 외진 곳의 지표면 직하에다 출구를 안에서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 의정부 가능2동 미군기지 바로 앞에 사는 이국진씨는 1994년 9월부터 방 구둘 밑에서 요란한 착암기 굴착소리가 나서 3번이나 국방부 당국에 신고를 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민간탐사자에게 제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우물물이 갑자기 말라버린 사실도 민간 탐사들과 함께 확인 하고는 지하음 청취를 위해 잠복근무를 하여 밤새 현장에서 청취녹음하였다. 1994년 12월에 뒤늦게 육본 탐지과에서 나와서는 민간인들이 보상금을 타려고 하는 수작이라고 일언지하에 확인작업을 거부하고 돌아가 버린 후에도 몇 주간 동안 이 집 밑에서 지하음은 더욱 선명하게 계속 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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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후 1995년 1월 27일 이국진씨 집 우물에 청음기를 설치해 놓았는데 궤도차 소리가 나더니 이상한 음성이 들려, 청진기를 갖다 데어 들어보니 “밥 먹으러 가”하는 육성이 청음되었다. 민간 탐지팀은 땅굴 출구를 만드는 과정의 근거리 음성이란 판단을 하였다. 2월 4일부터 민간탐사자들이 이 집에서 30m 이격된 곳에 28개의 시추공을 뚫었는데 드디어 2월 8일 한 시추공에서 시추기 파이프가 지하에서 부딛히는 강한 금속성 충격음이 들리었다. 지하 땅굴에서 지상으로 박아놓은 쇠 말뚝을 시추공이 건드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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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 되면 시각을 다투는 위급상황이라 당시 이 작업에 참여한 제2땅굴 발견 사단장인 정명환 예비역 장군이 안기부에 절개작업을 정식으로 긴급 요청했는데 그 때가 1995년 2월 19일이었다. 이에 앞서 1월 4일 충현교회 모 장로를 통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 “대통령께 드리는 고언과 국방부의 땅굴징후 오판 실태”란 제목으로 된 장문의 진정서를 전달하였다. 이 내용을 알게 된 김영삼 대통령은 자기가 직접 감독하여 현장을 서둘러 절개 확인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사실을 그 후 연락받아 민간 탐사자들은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리하여 국방부를 제쳐놓고 안기부에 대통령이 특명을 하달하여 절개하도록 함으로서 공사가 안기부 감독하에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인지 현장에 나온 안기부 요원이 현장에서 시추만 하지 절개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상황을 오도해가고 있음은 물론이고 민간 탐사팀의 별도 시추를 방해하면서 지연전술을 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민간 시추자들을 서울로 강제 연행하여 땅굴탐사작업에서 손을 데도록 3일간 연금 협박하여 각서를 쓰도록 하고는 ( 현정권은 친북 좌익 정권입니다. 이 과정에서 정지용님이 국정원 요원에 의해 앰배새더 호텔로 잡혀가서 2박3일간 고문을 당하고,앞으로 땅굴은 찾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나왔습니다 )당시까지 입수된 모든 자료를 무시하라고 강권하였다.
> 이어서 서둘러 작업을 종결하면서 ,민간업자들이 보상금을 타기위한 노름이라고 허위로 작성된 보고서를 만들어 대통령에게 안기부장(권영해)이 보고함으로서 의정부 땅굴은 절개확인 직전에 미궁에 빠지게 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권영해의 농간에 넘어가 1995년 3월 15일 땅굴확인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 때가 6년 전 일이니 지금쯤 만약 그 땅굴이 사실이라면 미군부대는 물론 서울까지 연결되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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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격분한 민간 탐사자들은 일단 냉각기를 둔 후에 1997년 11월 14일 권영해 안기부장(당시)과 불법연행한 수사관 6명을 공갈협박, 직권남용, 명예훼손, 직무유기, 이적행위 등으로 서울지검에 고소했으나, 오영성 담당 검사는 1999년 8월 11일 공소부제기 이유 고지를 고소인에게 보내고는 사건을 불기소처분하고 말았다. 물론 그동안 직접간접으로 협박과 공갈도 수없이 받은 것은 불문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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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정부 땅굴이 이렇게 일단락 될 무렵인 1995년 후반기에 동두천 미군부대 정문 앞인 동안동과 광암동 일대에 겨주하는 민간인들로부터 자하 굴착음 청취 신고를 받고 현장 답사를 하여 사실을 확인한 동안동 파출소장은 파출소 밑바닥에서도 같은 지하음이 들린다는 근무자의 보고를 재확인한 다음 의정부 경찰서에 보고했더니 민간 탐사자들에게는 골치 아프니 얘기하지 말라는 핀잔만 듣고 더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후일 이 사실을 안 민간탐사자들이 다우징탐사법으로 이 일대를 확인 한 결과 땅굴 진로가 미군부대임을 확인하였으나, 시추비용 마련이 불가능함은 물론 당국의 방해로 굴착을 해보지 못한 체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는 굴착음이 들리지 않고 있는데 이는 공사가 완료되었거나 굴착진로가 바뀌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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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에 남침용 장거리 땅굴 문제를 국제사회와 미국에 호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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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침용 장거리 땅굴 의혹을 그동안 조목조목,논리정연하게 설명하고, 의혹을 제기해도 들어쳐먹어주지 않는 관계자들에게는 더이상 상대를 하지 말고, 이문제를 객관적으로 판단가능하고, 합리성과 과학기술과 과학적 판단을 잘하는 서방 선진국 나라들에 호소하고, 문제점을 제기해야 한다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 또한 미국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 보고서로서 작성하여, 주한 미 대사관, 주한 미군 사령관, 주한상의 의장, 직접 백악관, 미 국무부, 미 국방성에 전달해야 한다라고 본다.
> 국민의 말을 폄하하고, 신뢰하지 않는 바에는 더이상 의협심과 충성을 발휘하지 말고, 그냥 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 지대한 영향력과 한국을 권력층을 실제로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 미국에 부득이 요청하고, 힘을 빌릴 수 밖에 없는 이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지 않고는 완강하게 아니, 요소요소에 퍼져있고, 암약하는 불순불자들과 고정간첩들의 방해공작과 방해책동으로 인해 정상적인 남침땅굴 발견작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당장에라도 영어로 번역해(약 100부 정도 인쇄작업을 해서)
> 인터넷으로 발송하든가? 아니면 직접 미국으로 우송해라(반드시 미국인을 통해 인편으로 발송하라) 그냥 우편으로 발송하면 중간에서 가로채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 그래서 미국 굴지의 건설회사나, 한국에 소재한 미국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찬조금이나 기부금을 받거나, 미국 정부로 부터 땅굴 탐사 작업비용을 받아서라도 남침땅굴을 발견해내는 일을 한국의 민간탐사자들로만 제한할 것이 아니라, 국제적 연대와, 국제적 관심사항으로 돌려놓고 국제적 정치군사 역학관계로 설정해 놓고, 과단성 있게 이 작업을 신년 2002년도에 진행시켜야 한다.
>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 모임의 저명인사 한분이 미국 의회에 나가 한국의 남침땅굴 문제에 대한 청문회에 나가서 증언을 하든가, 미국 신문사나, 미국 방송사에 출연하여 이것에 대한 의혹이나 그간의 사정 , 진행상황, 남북관계 동향등을 면밀히 소개하여, 이 문제가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 진출한 미국 거대 기업들과 상사원들과 주한미군부대와 주한미군 군속 가족들 더 나아가 미국안보와 미국 이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것에 대해서 미국이 관심을 가져주고, 영향력 행사를 해줄 것을 바라마지 않는 다는 기자회견이라도 해야 한다.
>
> 그렇지 않고는, 남굴사를 폄하,평가절하하고
> 북한 김정일이 내려보낸 고정간첩이 날뛰고, 곳곳의 불순세력들이 한통속이 되어 북한을 돕는
> 일을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에 장거리 남침용 땅굴 찾아내기가 그토록 어렵고 힘든 것이다.
> 방해공작이 저토록 치열하고, 방해협박, 방해세력이 저토록 존재하는 것 보면, 반드시 장거리
> 남침용 땅굴이 존재한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확실한 증거가 또 어디에 있다던가?
>
> 동해안 수중 밑으로 침투하는 잠수정,잠수함만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 휴전선 땅밑 깊숙이 뚫고 들어오는 아니, 수도 서울 곳곳까지 다다라있는 남침 땅굴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마음 한구석에 몸에 암 덩어리를 품고 살아가는 시한부 인생과 마찬가지 인 셈이다.
> 그러함에도 정신나간 정치권 인사들과, 책임감 없는 공무원들은 독한 양주나 채꿰고 쳐먹을줄만 알지 이런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분석적으로, 과학적으로 문제점을 도출하고, 결론을 내려는 자세는 없이 일단, 부정, 불신만 일삼고 있으니 이 나라는 또다시 한방 크게 당해야 정신차릴 것인가!
>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공산화 후 베트남의 킬링필드를 기억하라 !
>
> 이런 나라를 믿고 ,내가 이 나라에 산다는 것이 너무도 서글프고 부끄럽다.
> 이런 더러운 나라에서 사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순결하게 사는 길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
> 제발 제 나라 시민들,국민들 말을 안듣고 거짓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국가와 정부를 믿고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
> 보라, 98년도에 동해안으로 침투한 잠수정을 최초 발견하여 신고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 철통경계 태세를 완비했다던 군이었던가? 천만에 만만에 말씀이다. 무지랭이 어부가 신고하여 그 잠수정을 끌오오지 않았던가? 안보는 군만 믿고는 안심할 수 없는 허점이 너무도 많다. 시민 한사람이 100만명 상당한 군보다도 훨씬 나은 것이 증명되지 않았는가?
> 또한 96년도에 침투한 잠수함도 최초 발견 신고한 자가 군이었던가? 이것도 민간인 택시운전자가 신고하여 출동이 된 것 아닌가?
> 이처럼 우리 군은 여러군데에서 허점투성이이고, 이런 일은 지금이라고서 다를게 없을 것이다. 군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안보란 뚫을려고 하면 어디든지 뚫리게 돼 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신고정신을 존중하고 100% 받아들여 그들의 애국충정과 신고정신을 높이사서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애국적이고 위대한 것이었나를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 도대체 믿어주지는 못할 망정 정신병자라느니, 보상금 타먹기 위해 수작부린다느니 하는 몰상식한 말은 해야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
> 제발 부탁하노니!
> 남침 장거리 땅굴은 반드시 존재하므로 !
> 전국민이 들고일어나 서울시내에서 약 1만명 정도 광화문 네거리에서 집회를 하며 시위를 하며, 남침 땅굴을 지금 당장 탐사,탐색 해달라고 극렬 가두 시위를 해야 그때서야 움직임을 보일까, 그전에는 눈 하나 움직일 기미가 없으니 이거야 통탄할 일이다.
>
> 앞으로 남침 땅굴(장거리 땅굴 작업에 직무유기하고, 업무소홀하고), 고의적 방해를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국민의 이름으로, 그 자는 빨갱이이거나, 김정일이가 내려보낸 고정간첩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적시해 놓지 않을 수 없다.
>
> 남굴사(www.ddanggul.org)에 힘쓰시는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 올 2002년에는 반드시 장거리 남침 땅굴을 포클레인을 동원해서라도,아니 곡갱이와 삽자루를 가지고서라도 절개확인 작업을 해서 반드시 찾아내는 쾌거를 만들어 냅시다 !
> 2002년에 북한 남침용 장거리 땅굴 발굴 원년으로 삼아 올해안에 1, 2개 정도 찾아내고 해마다 3,4씩 찾아내어 국가안보와 김정일이에게 속았던 것을 되갚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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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다가 공산화가 된다면 누구에게 간곡히 호소하고 누구에게 머리에 띠두르고 투쟁한단말인가요. 조용하기엔 이미 때가늦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 이미 전쟁은 우리 목전에 와 있다는 사실을 우리모두가 깨달아야 되며 국민불안을 미끼로 장거리땅굴을 묵인 또는 비밀에 부친다면 평화는 물론 제2의 6,25는 또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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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굴은 군고위층이나 위정자들만의 문제가아닌 우리모두의 일인 것입니다.
> 그러기에 땅굴은 군사1급비밀이 될수 없으며, 우리의 적 북괴가 우리땅 깊숙히 파들어온 땅굴을 찾는 일이기에 군만의 문제가아닌 우리모두가 관심을 갖고 감시하여야될 문제이기에 비밀에 붙여선 더더욱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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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안보는 위정자나 군만의 문제가아닌 우리의 일이기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정부에선 장거리땅굴을 소홀히 여기지말고 대대적인 감시및 탐사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
> 어차피 겪어야될 문제라면 국가는 묵인만 하지말고 더 큰 혼란을 사전에 방지하기위해서라도 사실을 투명하게 밝혀 정면돌파 하는것이 선량한 국민을 위한 배려이고 남북이 같은민족으로서 전쟁을 방지하기위한 유일한 길임을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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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라당은 식물정당 : 한나라당도 대안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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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당은 숫자만 많지 속을 들여다보면 보수, 진보, 친북 등이 얽히고 설킨 다세대 주택이다. 김만제 정책위 의장이 지적했던 바대로 정체성이 없는 한시적인 당이다. 한때 "이회창밖에 대안이 없다"라는 뿌리 없는 전설에 도취된 이회창 총재는 그야말로 과대 포장된 누에고추와 같은 사람으로 전락하고 있다. 대쪽이라는 말도 허명으로 귀착되고 있다. 이름을 세우는 데는 일생이 걸리지만 이름을 지우는 데는 순간이다. 바로 이회창의 이름이 추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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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게는 소신이 없어 보인다. 단지 아주 예민한 엷은 귀가 있는 것 같다. 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듣느냐에 따라 어제의 소신 다르고 오늘의 소신이 다른 모양이다. 스스로 하는 일은 거의 없는 모양이다. 여론과 인기에만 영합하는 해바라기성 식물의 모습이 최근 그가 보여준 모습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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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 인사의 말을 듣고는 대북 지원금을 통제하는 입법을 추진하다가 진보의 말을 듣고는 이를 취소했다. 보수의 말을 듣고서는 DJ의 북한 퍼주기를 비난하다가 진보의 말을 듣고서는 농촌 쌀 200만 섬 1조원어치를 북한에 보내주자고 DJ에게 상신 까지 했다. 보수의 말을 듣고서는 공적자금을 추적하다가 진보의 말을 듣고서는 중단시켰다. 김대중 이들의 조폭 비리를 공격하다가 이회창 아들의 약점이 노출되자 서로 문제삼지 않기로 하자며 야합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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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당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오직 하나, 김대중 정권이 친북 좌익의 색깔을 띄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얻는 반사이익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임승차로 슬쩍 대통령이 되려는 파렴치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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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국민이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것 같으니까 그는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나 같이 수도권 촌락에서 밥 먹는 걱정을 하는 서민의 눈에도 연방제 적화통일 시도로 보이는 그 햇볕정책을! 나 같은 촌부의 눈에도 보이는 김대중의 수상한 방북간 행동을 그는 오빠부개의 일원을 자처하며 박수를 쳐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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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L기 납치와 폭파·아웅산 만행·자폭간첩 남파의 총지휘자로 뉴욕과 팬타곤을 강타한 자살테러의 시범을 보여준 반인류적 반문명적 테러의 원조이며 `인류역사상 가장 완벽한 독재체제`로 주민을 탄압해 온 주적의 괴수를 이회창은 만나자고 했다 그의 서울방문을 환영한다고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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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 때 어려운 국민경제를 아랑곳하지 않고 금강산 유람선을 띄우고 9억 4천 6백만 불이라는 엄청난 현금과 달러를 퍼주기로 약속한 명백한 이적행위를 이회창씨는 방관 했다. 유엔의 결의로 대한민국을 건립한 5·10총선거를 반대하여 적화통일의 기지로 삼으려고 남로당이 일으킨 4·3 폭동을 합법화하는 소위 `제주 4·3 사건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을 여당과 손을 잡고 통과시켰다. 이회창의 색깔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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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이 10 여 일간 북구를 방문한 것에 대해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국민은 의혹을 제기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가장 앞에 나서서 이를 탄핵해야 할 이회창은 약아빠지게도 김대중의 악행(?) 시기를 이용하여 러시아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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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러시아 무명용사 묘지에 헌화 했다는 사실이다. 레닌-볼셰비키 혁명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한 이래 1억 6천여만 명의 인류가 공산치하에서 죽어갔고, 6·25를 스탈린-김일성의 만행으로 생각한다면 러시아 무명용사에 헌화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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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치하에서 연속적으로 터져 나온 권력형 부정비리의 책임을 물어 신승남 검찰총장을 탄핵하자는 안에 대해서 마저 자민련과의 공조를 살리지 못한 것은 지도력 상의 문제다. 방송법개정안, 교원정년연장안 처리를 당론으로 정하고도 슬그머니 철회했다. 표를 의식하는 들쥐 같은 눈치근성이다. 리더십 자질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일엽편주 이상으로 요동을 칠 것이다. 나는 그가 대통령이 될까 매우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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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창의 족적을 보면 김일성 조문론에 찬성, DJ의 햇볕정책지지, 국가보안법을 폐지 쌍수환영, 황장엽 북한 송환 등 시대착오적인 반국가적 주장을 펴는 친북세력들과 별로 다르지 않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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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선데이타임스)
>
> 워싱톤에서 는 상원 청문회가 끝난 후 주한 미군 사령부가 경의선이 개통 될 것에 대비 비상 작전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는 소리가 나돌고 있다. 주한 미군이 비상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은 북한군이 남한을 침략 한다는 가상 아래 세운 전략으로 판단하고 있다.
>
> 미군은 언제든지 북한군이 남한을 침략 한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그러한 확신이 슈워츠 사령관의 의회 증언을 통해 "남한에서 안보 상황이 변하고 있으며 전쟁이 발생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는 주장에 현지 주둔군 사령관으로써 동의 할 수 없다"는 말로 증언 하고 있다.
>
> 미군은 경의선 철로가 개통되면 그것은 남침용 철로로 사용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러한 미국의 우려를 지난해 가을 한.미 국방장관 회담 때 이미 한국군측에 전달 했다.
>
> 그런데도 한국 군부는 D.J.와 김정일의 눈치를 살피는 탓인지 서해안 북한 잠수함 침범 사실은 물론 연천 땅굴 발견 사실 조차도 발표 하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미 8 군 사령관이 한국의 안보 상황을 걱정하며 미국 정부의 주의를 환기 시키는 경고 발언과 증언을 하고 있다.
>
> 그 때문인지 최근 서울과 워싱톤에는 < 김대중 김정일의 적화 통일 시나리오 >라는 문서가 나돌고 있으며 그 문서의 내용은 군사 전문가들도 놀라울 정도의 시나리오로 받아 들이고 있다.
>
> < 김대중 김정일 적화 통일 시나리오 >문서에 담긴 북한군 작전에 의하면 김정일이 서울을 방문 했을 때 틈을 이용하여 북한군을 실은 열차가 개성을 출발 1 시간 이면 서울에 도착하며 1 시간 반이면 오산 미 8군 기지 까지 도착 할 수 있는 것으로 세워져 있다.
>
>
> 서울 점령 씨나리오
> (국군 복장 으로 갈아입고 미군기지 포위, 서울 점령)
>
> 김정일이 서울을 방문 했을 때 서울은 물론 세계 매스콤은 한국에 스포트 라이트를 비추고 있다.김정일은 청와대를 방문하며 여러 곳에서 환영을 받는다.
>
> 김정일의 서울 방문을 반대하며 민주주의 수호 체제를 바라는 국민들과 북한 지령을 받고 환영 준비를 해온 친 북한 세력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는 혼란한 틈을 타서 북한 지시를 받은 남한의 고정 스파이들이 정부 종합 청사와 기타 중요 건물에 방화를 한다.
>
> 서울이 소란해지면 동해안과 서해안 지역에 동시에 북한군이 침투하는 작전을 벌리면 한국군 병력이 두군 데로 갈라지고 경찰이 긴장하여 큰 혼란이 벌어진다.
>
> 그럴 때 이미 남한에 들어와 있던 북한군 일부 세력들이 경찰과 국군 복장으로 갈아입고 혼란을 수습하는 체 하면서 정부 공공 건물을 접수 하며 개성을 출발한 북한 열차가 인민군을 싣고 1 시간이면 서울 역에 도착한다.
>
> 또 다른 열차는 1 시간 30 분 안에 오산 미군 기지에 도착 미군 사령부를 포위한다. 세계의 모든 매스 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민군에게 포위당한 미군 병력은 국군 복장으로 갈아입은 인민군을 향해 총을 쏠 수도 없는 형편이다.
>
> 서울에 있는 미군과 그 가족들 외국인들은 대부분이 인질로 잡혀 있다.그런 때가 되면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남한 내 친 북한 세력들이 경제 침몰과 각종 세금 공격에 불만을 가진 국민들과 직장을 쫓겨난 실직자들을 흥분 시켜 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극한 상태를 만든다.
>
> 또 김대중 정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도 거리로 나와 김대중 정권 퇴장을 요구하는 프락치들의 구호에 놀아나 흥분하며 데모에 참가 한다, 그렇게 될 경우 남한의 혼란은 것 잡을 수 없게 된다.
>
> 한국엔 계엄령이 선포되고 한국군들이 출동 하지만 이미 서울에 진출한 인민군과 총격전이 벌어지며 서울은 아수라장이 된다. 세계 매스콤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와대에 김대중과 마주 않은 김정일은 통일 문제를 논의하며 김대중은 피 바다를 피하기 위해 한국군과 북한군에게 사격 전을 멈추도록 요구한다.
>
> 그렇게 해서 김정일은 남한을 힘 안 드리고 접수 하는 결과를 불러 온다는 것이 이 시나리오의 내용이다.
> 그런데 이 시나리오가 벌써부터 일본과 한국 잡지에 보도 되고 있으며 인터넷에도 떠 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
>
> *** 임기를 1년도 못 남겨 놓고서 레임덕과 부패로 몸살을 앓고 있는 김대중 정권은 지금이라도 때가 늦었지만, 일장춘몽으로 끝난 김정일 짝사랑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국민에게 햇볕정책과 6,15선언의 폐해를 솔직히 시인 사죄하고, 대북정책을 유턴하여 국가기강을 바로 잡고 국민경제를 회생시킴과 동시에 안보불감증 치유를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아직도 햇볕정책이나 찬양하면서 잠꼬대 같은 김정일 노래나 부르고 앉아 있다가는 역대 전직 대통령들 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질머지고 골고다의 언덕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 미국이 북한에 대하여 어떻게 하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이미 설정되었으니, 한미일 안보공조가 아니면 북한의 위협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심각하게 재인식해야 한다. 김정일에게 비굴한 퍼다주기식 눈가림으로는 한반도 평화와 안전이 보장될 수 없으며, 북한의 폭력행사 가능성을 제어가능한 물리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자위역량을 갖출 때 까지 한미일 공조하의 협동적 안보(co-operative security)외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
> "선무당 사람잡는다"는 격언이 있다. 지난 4년간 김대중은 선무당 짓을 하여 한미일 공조관계를 최악의 상태로 몰고 왔으며, 자주국방을 제자리 걸음으로 멈춰 놓고서 주적개념마져 마비 시킴으로서 국가안보의 총체적 위기국면을 조성하여 회복불능의 상태로 치닫게 해 놓은 것이 사실이다. 다른 한편 북한의 군사력과 그 대비태세는 대남침공을 위한 가장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도록 상대적 우위의 격차를 더 심화시켜 줌으로서, 김정일이 전쟁준비 완료를 호언장담하는 극한적인 사태가 초래되고 있다. 그 공모자가 바로 이적행위를 해온 당국이다. 그리하여 간 크게도 북한이 대량파괴무기를 믿고서 일본과 미국과도 한판 싸울수 있다는 단말마적 공갈을 치는 위험한 상황이 오늘의 한반도 군사정세임을 김대중은 알아야 한다.
> 이것도 모르고 자식들이 권력형 금융비리의 표적이 되자 1년 후 자기와 가족의 사후보장에만 골몰하지 국가안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고작 하는 말이 햇볕 때문에 전쟁이 안 일어났다는 헛소리나 반복할 정도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 그는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며, 정직이 자본인줄 모르는 인간이다. 선진국에서는 거짓말이 살인 다음으로 무거운 죄가 된다는 것은 들은 적도 없는 모양인지,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있다. 심지어 국가이익을 위해서라도 국가지도자는 결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조차 금시초문일 것이다. 이런 자를 국가지도로 선택한 국민의 어리석음이 더 문제이기도 하다 ! 기타 관련 자료는 my.netian.com/~lsh3508 에 접속바랍니다.
>
>
>
> ***월남 패망의 마지막 목격자 이대용 공사 증언록 ***
>
> - 월남 패망의 현장 목격자의 악몽 - -지금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다 ! -
>
> 이 글을 쓴 이대용 육사총동창회장은 월남 패망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 담당 공사로
> 서 월남 패망 과정을 지켜보았고, 월남 패망 후 월맹군에 체포돼 5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한
> 경력이 있다. 李회장은 『요즘 자꾸 사이공 함락 장면이 꿈에 나타난다』면서 『베트남과
> 한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란성 쌍둥이』라고 말했다.
>
> 李회장은 『대통령과 학자, 지식인들이 우리와 역사 문화적 배경이 다른 독일에서 통일의
> 교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월남 패망을 연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 李회장의 증언을 정리한 것이다.
>
>
> 월남과 한국은 일란성 쌍둥이
>
> 우리와 월남의 역사는 너무나 닮은꼴이다. 그래서 평소 나는 한국과 월남을 일란성 쌍둥
> 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역사를 표현할 때 흔히 「반만년 배달민족」이라고 하는데, 월남은
> 「반만년 황룡黃龍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국가 체제를 이룬 역사적
> 시기도 비슷하고, 중국이 팽창하면 조공朝貢을 바치다가 중국이 혼란에 빠지면 자주독립을
> 유지하는 것도 비슷하다. 중국의 주변 민족으로서 끝까지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온 점
> 역시 같다.
>
> 월남이란 지명은 중국 전국시대에 월족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 나라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全 세계에서 과거제로 관료를 선발하는 문치주의의 나
> 라는 그 제도의 본고장인 중국을 제외하면 조선과 월남이 대표적인 표본이다. 모든 역사와
> 인명人名을 한자로 기록한 것도, 중국의 주변부에서 민족이 소멸당하지 않고 생존한 것도
> 양국兩國이 비슷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한번 성립된 왕조는 그 수명이 보통 40
> 0∼500년인데 비해 월남은 120년으로 우리보다 상당히 짧다는 점이다. 그것은 월남 민족이
> 우리 민족보다도 분열이 더욱 심했다는 뜻이다. 중국의 지배권에 있다가 식민지를 경험한
> 것도 비슷하며, 식민지에서 해방될 때 남북의 허리가 잘려 분단된 사실, 그리고 북에는 공산
> 정권, 남에는 자유 민주정권이 수립된 것 역시 비슷하다. 양측이 무력을 동원한 동족상잔의
> 전쟁을 벌인 사실도 동일한 역사적 패턴을 보인다.
>
> 지역 감정이 드센 것, 식민잔재 청산 문제(한국은 친일파, 베트남은 친불·친일·친중파)
> 로 인한 정통성 논쟁, 각 정치 세력간의 끝없는 분파分派와 이합집산離合集散, 그리고 정쟁
> 政爭을 벌이는 것까지도 어찌 그리 닮은꼴인지 모른다. 1954년 7월21일 프랑스 원정군이 베
> 트남 독립군에게 패해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는 자
> 유 민주주의 정부인 베트남 공화국(월남)이, 그리고 이북에는 공산정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
> (월맹)이 수립됐다. 이후 월남은 독자적인 힘으로 자주국방을 하지 못해 미군의 도움을 받았
> 고, 결국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파병돼 공산군과 싸운 것까지 한국과 비슷하다.
>
> 청렴결백했지만 독재로 기울었던 고 딘 디엠 정권이 쿠데타로 쓰러지면서 수차에 걸쳐 군
> 부 쿠데타가 반복되었다. 이 와중에 정권은 부패와 내부 분열을 거듭했다. 전쟁에 지친 미국
> 이 월맹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에 돌입한 것은 1968년 5월10일이다. 그 무렵 미국은 직접
> 전비直接戰費와 간접전비를 합쳐 연간 495억 달러(1968년), 508억 달러(1969년)를 퍼부었고,
> 미군 병력도 53만 6,000명 선을 파병할 정도로 전쟁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미국은 밑 빠
> 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진행되는 베트남전戰에 진저리를 쳤고, 결국 수렁에서 발을 빼기
> 위해 월맹의 레둑토와 비밀 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
> 파리에서 미-월맹 간 비밀 협상이 시작되기 전 해인 1967년 9월3일에 벌어진 월남 대통
> 령 선거에는, 무려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하여 이전투구泥田鬪狗 양상을 보였다. 이 선거에
> 서 당선자인 웬반티우에게 차점次點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는, 선거 유세에서 『동
> 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外勢를 끌어들
> 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
> 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 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北爆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
> 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며
>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反戰 여론을 자극했다. 이처럼 월맹에게 호의적이던 그가 공산군
> 의 프락치였음이 밝혀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
> 한편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 평화 회담을 진행 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월남 내부
> 에서는 국론國論이 두 갈래로 갈렸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주장하며 평화회담 참여
> 거부를 주장한 반면, 야당은 앞다투어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회담 참
> 여를 지지했다. 고민에 빠진 월남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회담 테이블에 나가야 했고, 1969년
> 1월15일부터 미-월맹 2자 회담은 미-월남-베트콩(베트남 인민해방전선. 후에 베트남 임시혁
> 명정부)-월맹의 4자 회담으로 확대되었다.
>
>
> 한쪽에선 평화회담, 다른 쪽에선 대남對南공작
>
> 1973년 1월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
> 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
> 원조, 20억 달러는 국제은행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
> 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월남·월맹·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
> 했다.
>
> 미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
> 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이리 하여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 휴전감시위원단은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하게 되었다. 한편 월맹에서는 하
> 반라우 외무차관이 150명의 고문단과 함께 사이공에 체류했다. 일종의 인질 형식이었다. 하
> 지만 이것도 믿지 못한 미국은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
> 시켰으니, 파리 휴전협정은 4+4+4 즉 무려 12개국이 담보하고 보증한 값비싼 서명문서였다.
> 그리고 월남과도 방위조약을 체결, 이제 미군은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 파기破棄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굳게
> 약속했다. 더불어 주월미군이 철수하면서 그 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까
> 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하여,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전 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
> 처럼 철저한 제도와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
> 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
> 수년간 미국의 골치덩어리였던 베트남전이 휴전을 맞게 되면서 전세계에는 평화의 바람이
> 거세게 불었다. 닉슨의 데탕트 정책과 한반도에서 1972년부터 시작된 남북대화 등으로 세계
> 평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大勢라고 믿었던 것이다.
>
> 이와 더불어 파리 휴전협정의 성과로서, 미국의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는 1974년 노벨평
> 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런데 레둑토는 『나는 한 일이 별로 없다. 나보다 평화에 기여한
> 사람이 많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세계인들은 그가 월맹의 당 서열 5위였기 때
> 문에, 자신의 위에 있는 지도자들을 염두에 둔 「동양적 겸양의 표시」라고 이해했다. 결국
> 키신저 혼자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
> 그러나 결국 이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들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피폐해진 나머지
>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하자 평화회담에 나섰으나, 그것은 전략은 변함이 없은 채 전술만 바
> 꾼 셈이었다. 레둑토가 키신저와 평화 회담을 벌이는 한편에선 1950년대 중반에 수립된 대
> 남 기본전략이 더욱 공고히 다듬어졌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
> 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
> 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도 북한이 견지하고 있는 대남전략과 단 한 치의 차이
> 도 없다.
>
>
> 월남의 90%를 정부가 지배했지만…
>
>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월남 국토 44개 성省 중 12개 성의 곳곳에만 표범의 반점처럼
> 공산군 점령지가 남아 있었다. 총 인구의 90.5%는 월남이 지배하고 있었고, 나머지 중 5%
> 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競合지역, 그리고 4.5%는 공산측 지배지역
> 에 있었다.
>
> 그래서 월남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경제력 우위를 바탕으로, 공산측 지배를 월
> 남 내內에서 자연스럽게 소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휴전 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
> 으로 인해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 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은 줄기찬 대남공세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
> 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호치민이 1930년 2월에 창당
> 한 베트남 공산당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인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한 인민혁명
> 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과, 인
> 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저층底層에서 밑뿌리를 뒤흔
> 들고 있었다.
>
> 1969년 6월6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로 개편될 당시 이 정부의 법
> 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
> 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 정부의 각 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
> 내용이 단 하루 후면 상세하게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
> 었다고 한다. 1967년 대선大選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와,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
> 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관료들이 모두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 월남 패망 후의 일이었다.
>
>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對共 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
> 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아버렸다. 그들은 대對월맹 정보 수집은 말 할 것
> 도 없고, 심지어는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조차도 무기력했다. 한 나라를
> 망하도록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정보기관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 지금 우리 나라 정보기관과 대공기관이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결국
> 에는 간첩 하나 못 잡는 이빨 빠진 고양이로 전락한 사실을 나는 너무도 우려하지 않을 수
> 없다. 월남 패망 당시, 외적外敵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과 너무나 흡
> 사하기 때문이다.
>
>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
> 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대對월
> 맹 경제 원조도 중단하면, (당시)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
> 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
> 라고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 후에 온 휴전 체제에서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
> 서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혹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
> 았다. 결국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도록 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정쟁의 원인을 제
> 공한 것이다.
>
> 1975년 9월에는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
> 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을 유감 없이 연출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
> 매춘과 도박이 정치권의 혼란과 맞물리면서 마치 전염병처럼 전全 국토를 휩쓸었다. 정부의
> 부정부패는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계층 간 갈등이 조장됨으로써 공산 프락치들의 활동
> 공간은 점점 넓어져 갔다. 결국 이 선거가 최후의 자유선거가 되고 말았다.
>
>
> 정규군 58만 명 중 10만 명이 위장휴가
>
>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군내軍內 부정부패였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 명이었는데, 이 중
> 10만 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하고 있었다. 심지어
> 는 장군들이 운영하는 사私기업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이처럼 이름
> 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가리켜 당시 월남에서는 「유령 군인」, 「꽃 군인」이라 불
> 렀다.
>
> 나는 군 재직 시절,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훗날 월남 대통령이 된 티우 씨와 만난 일이 있
> 었다. 그 후 주월대사관 무관武官으로 파견됐을 때, 티우는 대령으로서 사이공 부근의 사단
> 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가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자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다시 월남으로
> 보낸 것이다. 그래서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티우 대통령과는 속 깊은 이야기를 자주
>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
> 비록 독재로 기울기는 했지만 대단히 청렴결백했던 고 딘 디엠 대통령 시절, 월남군은 용
> 맹하게 공산군과 맞서 싸워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덕택에 휴전 당시 월남은 전 인구의
> 90%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지도층의 부패였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가 군에 입
> 대했는데, 그는 이름만 군적軍籍에 둔 채 외국 유학을 떠나버렸다. 대통령 사위가 그럴 정도
> 였으니, 다른 고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월남 지배층은
>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 만능주의에 빠져 천민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였다. 반면 「국가에
> 대한 의무」라는 말에는 코웃음을 치며 등한시함으로써 체제파괴 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 제공했다. 오늘날 기회가 날 때마다 사회 지도층 인사와 그 아들들의 병역기피 사례가 언론
> 에 공개되는 모습은, 25년 전 월남에서 벌어진 바로 그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 같
> 다.
>
> 후방이 부패와 혼란에 빠지고, 사회에 정의감이 상실되자 일선一線의 군인들은 『저따위
> 썩은 정권과 나라를 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 하며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또한 화
> 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퍼져나가자 공산군에 대한 경계심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월
> 등히 높은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졌던 월남 군대가, 식량 부족으로 고민하던 월맹군에
> 게 허수아비처럼 붕괴한 가장 큰 원인이다.
>
>
> 시민·종교단체를 좌익이 장악
>
> 한편 이 무렵 월남에서는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
> 「구국救國 평화 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운
> 동에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이 순수한 반부패 운동 조직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
> 여, 거대한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켜 버렸다는 점이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
> 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
> 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
> 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문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
> 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75년의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 무력침공과 베트공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속
> 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
> 1974년 10월, 월남에서는 유전油田이 발견되어 온 국민이 흥분에 휩싸였다. 나라 전체가
> 평화 무드에 젖어 있던 상태에서 석유까지 발견되자 사람들은 더욱 자유분방함과 안일주의
> 에 기울어 갔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월맹의 하노이에서는 극비리에 남침을 위한 비밀 회
> 의가 열리고 있었다. 레준 서기장은 당시 닉슨 대통령 사임으로 어수선한 미국이, 월맹이 남
> 침공세를 펴도 월남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남침 전쟁의 결정을 내렸다.
>
> 1975년 1월8일,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하기 위한 군사력 배치가 개
> 시됐다. 이 총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해 월맹군 육군참모총장 반띠엔둥 대장이 1975년
> 2월5일 하노이 공항에서 AN-24기를 타고 극비리에 이륙했다. 반띠엔둥 대장은 2월6일 호치
> 민 루트를 타고 중부월남 고원지대의 전략 요충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 지대에 잠입하는 데
> 성공했다.
>
> 한편 그가 중부월남으로 잠입한 사실을 기만하기 위해 하노이에서는 그와 비슷하게 생긴
> 가짜 반띠엔둥이 볼가 승용차를 타고 매일 저택에서 월맹군 총사령부로 출퇴근을 하도록 했
> 다. 반띠엔둥은 배구를 즐겼는데, 운동 시간이 되면 가짜 반띠엔둥이 나와 배구를 하는 등
> 치밀하게 철저한 위장을 했다. 그러나 이미 거덜이 난 월남 정보기관은 이 사실을 까맣게
> 몰랐다. 이 무렵 나는 월맹군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티우 대통령에
> 게 면담을 신청했다. 당시 월남군 정예부대는 공수사단과 해병사단이었다. 나는 티우 대통령
> 에게 『지금 월남은 자유라는 미명하에 게릴라들 전쟁터가 됐습니다. 아무래도 조짐이 이상
> 한데 정보기관에서는 이렇다할 아무런 보고가 없으니, 일단은 도지사 소속으로 되어 있는
> 민병대 병력을 무장시키고 공수사단과 해병사단을 각각 군단으로 강화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 까』 하고 제안했다. 그러나 티우 대통령은 허허 웃으면서 『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
> 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월맹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며 완곡히 거절했다. 티우 대통령은 확고한 반공 지
> 도자였지만 평화에 눈이 멀어 유비무환을 잊었던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월맹은 경제
> 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한 것으로, 우습게 보았
> 던 것이다.
>
>
> 우익·애국인사 암살
>
> 월남은 몇 개월 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거대 여당
> 이었던 대월당大越黨은 대통령직에 눈이 먼 인사들의 탈당으로 분열, 각개약진을 거듭했다.
> 오늘날 어떤 정당에서 공천을 못 받았다 해서 뛰쳐나가 자신이 몸 담았던 당의 지도자를 공
> 격하는 모습은 25년 전 내가 월남에서 체험했던 정쟁과 어찌 그리도 닮은꼴인가. 월맹의 구찌땅굴도 모두가 없다고 침묵했다 !
>
> 그 무렵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다
> 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연年 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티
> 우 대통령이 수상으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반공지도자 웬반흥, 사이공대학의 우익 학생
> 지도자, 그리고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면서 지식인과 중산층,
> 언론은 침묵을 선택했다.
>
> 오늘날 우리 나라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국가 안보와 반공, 국가 정통성 수호를 외치면, 말
> 과 글과 구호로 무장한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 공세를 펼침으로써 「말없는 다수」들이 침묵
> 하는 상황도 25년 전 월남과 다름이 없다. 이 와중인 1975년 3월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
> 이 중부월남에서 오래 전부터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며 총공세를
> 감행했다. 그러나 각지에 분산·고립된 채 총체적 부패와 전의 상실에 빠져 있던 월남군에
> 게는 이미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월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며 밀리기 시작했
> 다. 월맹군에게 허를 찔린 티우 대통령은 『즉각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침략군
> 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한편 국제휴전감시위원단에게 『공산군의 북
> 위 17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미국에는 방위공약의 이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들 중 어
> 느 것 하나 이행되지가 않았다. 티우 대통령의 간곡한 대국민 호소가 발표되자 「구국평화
>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의 지도자인 짠후탄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
> 『중부월남 고원지대에서 반민주, 부정부패를 일삼는 티우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중봉기
> 가 일어났다. 그곳에 월맹군은 없다. 티우는 책임지고 사퇴하라』
>
> 짠후탄 신부는 미국의 대월 방위공약을 철석같이 믿고서, 더 이상의 월맹군 공세는 불가
> 능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서 티우 대통령에게 타격을 주고 몇 개
> 월 후 실시될 대선에서 자기들이 미는 후보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 한 것이다. 다른 야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월맹
> 을 이용한다며 격렬히 비난했다. 이 와중에 웬까오끼 전前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 제거를 위
> 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
>
> 반체제 운동가들―통일 후 감옥으로
>
> 반띠엔둥이 이끄는 월맹군이 중부월남 고원 지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월남군은 지리멸렬
> 支離滅裂해 버렸다. 그들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못한 채 후퇴만 거듭하다가 결국 50%의
>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3월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유령 군인」과
> 「꽃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월남을 탈출하고 있었다.
>
> 4월21일 티우 대통령이 하야下野하고 재야在野 정치인 정반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
> 임했다. 그러나 남침 후 한 달이 지난 이때까지도 미국은 대월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 있었다.
>
> 4월29일 월맹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
> 다. 라이케에 주둔 중이던 월남군 제5사단장 레웬비 장군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
> 심, 사단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으로 진격하기 위해 월맹군 포위망을 공격했다. 그러나 수적
> 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던 월남군 제5사단은 월맹군 1군단 대병력과 결사 항전을 벌이다 궤
> 멸당했다. 레웬비 장군은 조국의 패망을 비통해 하면서 권총으로 자결, 나라와 운명을 함께
> 했다.
>
> 4월30일 정오,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월남 대통령 정반민은 포로가 됐고, 이로써 군
> 사력과 경제력에서 월맹을 압도한다고 자랑하던 월남은 월맹군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지
> 도상에서 사라졌다.
>
> 미국은 사이공 함락 직전, 월남군 장성과 그 가족을 헬기에 실어 남지나해상의 항공 모함
> 으로 철수시킨 후 미국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월남군 제2군단장 만푸 소장, 특별부대사령
> 관 반토 소장, 제4군단장 웬꼬아 남 중장, 제5사단장 레웬비 준장, 제7사단 장 웬반하이 준
> 장 등 5명은 무너지는 군대를 보면서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망명 거부, 모두
> 권총 자결했다.
>
>
> 「거지군대」에 패망한 월남
>
>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경찰은 무장 해제되고 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리고 월남의
>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도 모두 체포돼 「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다.
> 이중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공산 정권은 수많은 공무원들을 잡아넣는 형무소가
> 모자라자 과거 월남군 부대 시설을 형무소로 개조해 그곳에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를 수용하
> 기도 했다. 반정부·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도 모조리 체포·
> 처형됐다. 그들의 수감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 사회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
> 하층下層의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 피플의 숫자
> 는 약 106만 명. 이 중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이었고, 살아
> 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됐다. 나는 이 참혹한 패망의 역사를 그 현장에
> 서 지켜보면서, 강대국과 맺은 방위공약이나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정은 절대 신뢰해서는 안
> 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나는 티우 대통령이 미국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모습을 내
> 두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무질서와 공산 프락치들로 인한 국론 분열에 빠진 월맹에 고개를
가로저었던 미국은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자기 국가의 안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국가안보는 미국과의 방위공약도 아니고 공산당과의 휴전협정도 아닌, 오직
자국自國의 군사력이 담보할 뿐이다. 체제가 안정되었다거나 경제력이 우수하다는 말은, 조
국에 충성하는 국민의식과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부 잠꼬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외교관이었던 내가 체포되기 전 사이공 시내에서 직접 목격한 놀라운 사실은, 월맹 군인
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 끼 식사를 겨우 할 정도였고, 속옷은 구경조차 힘들었다는 점
이다. 월맹군은 전차 부대를 제외하고는 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월남군과 전투를 했던 것이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완전무장을 한 월남 군대를 붕괴시켰다.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
회는 최신무기를 고철로 만든다. 파리 휴전협정 체결 과정에서 외국의 몇몇 언론은 「키신
저가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휴전협정을 너무 서두르고 있다」며 걱정스럽게 지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