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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시를 향해 돌출한 태안반도의 초입에는 충남 서북단의 중심지를 이루는 서산시가 위치한다.
서산시와 홍성읍 중간지점에는 여촌, 여미 등으로 불렸던 해미면이 있다.
해미면에는 사적116호로 지정된 해미읍성이 있어 해미읍으로 잘못 불려지기 일쑤이다.
주민들 간에는 해뫼라고도 불리는 해미 고읍은 고려 때 감무가 있던 곳으로
조선 초기 태종 때 행정구역상 처음으로 현이 되고 병영이 설치되었으며 효종 때는 호서좌영이 들어서기도 했다.
옛기록에 이곳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 간 근무한 것으로 전한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위치한 일명 탱자성으로 불리던 해미읍성은
조선 성종 22년(1491)축성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퇴락하여 성곽을 무너지고 일부는 철거되어 학교와 민가가 들어서는 등 옛모습을 거의 잃었다.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해미읍성은 1973년부터 1981년까지 복원 사업을 실시하여 성곽을 보수 복원하고 성내에 있던 초등학교와 민가 141동 등이 철거되었다. 또 남문인 진남문을 비롯 동문, 서문, 객사 옹루, 망루, 포루 등이 복원되었다.
해미읍성은 성벽 높이가 약 5m, 둘레가 2천m에 달하며 북문을 제외한 동, 서, 남문 등 3문과 옹성 2개소, 객사2동, 포루 2동, 동헌1동, 수상각 1개소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한다.
해안방비를 목적으로 세워졌던 해미읍성은 조선말기 1790년 경부터 1886년 사이에 있었던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등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때 수천명으로 추정되는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잔디가 뒤덮인 구릉지형의 성내에는 당신 신도들을 가두었던 감옥터와 고문할 때 매달아 두었던 호야나무가 남아있다.
서문 밖에는 신도들을 밀어 죽이던 수구와 신도들을 메치어 처형했던 자리개돌이
도로변에도 보전되어있다.
당신 관헌들은 거의 매일같이 감옥에 있던 신도들을 나무에 매달아 뭇매를 주고 고문을 했으며 서문 밖으로 끌어내어 교수 참수 돌형 백지사형 등 갖은 방법으로 처참하게 처형을 하여 시신이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천주교해미무명순교자성당 성지관리소는 성내의 감옥터에 순교기념비를 세우고 신도들이 끌려가던 감옥터 앞에서 서문까지의 장터길을 순례의 길로 정해 순례자들이 순교자를 기리며 걷도록 하고 있다.
성에서 다소 떨어진 서쪽 들판에는 박해 당시 산도들을 구덩이에 산 채로 묻어 처형하던 생매장 순교지가 남아있다.
이곳은 순교자들의 '예수, 마리아'란 기도와 외침소리가 '여수머리'로 잘못 전해져 여숫골이라는 지명으로도 불린다.
이곳에서는 일제침략시대인 1935년 서산본당의 범베드로 신부에 의해 강제로 생매장되었던 신도들의 유해들이 대거 발견되었다.
생매장순교성지는 서산본당과 해미 본당으로 이어진 순교성지 확보운동에 따라 성지 일부를 매입하고 1975년에는 진둠벙으로 불리는 생매장터에 높이 16m의 철근콘크리트 순교탑을 세워 놓았다.
해미읍성은 문화유적지일 뿐 아니라 여숫골과 함께 해마다 순례자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천주교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다.
<해미읍성>
▲위 치 :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지정번호 : 사적 제116호
▲지정연도 : 1963년
▲시 대 : 조선시대 1491년(성종 22) 축조
▲크 기 : 둘레 1800m, 성 높이 5m, 성안넓이 6만 4350 ㎡
▲종 류 : 읍성
▲개요 :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 읍성
<해미읍성 안내판>
성(城)이란 무엇인가?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신들의 재산과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방어시설이 필요했다. 자연지형을 이용하거나 인공적인 방법으로
방어시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성이다.
성을 쌓을 때 나무로 울타리를 둘러 세우는 방법이 목책(木柵)인데 백제의
몽촌토성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또 흙으로 쌓으면 토성인데 견고하지 못하여 돌로 고쳐 쌓았으므로 석성이라 한다.
돌로 성을 쌓으려면 주변에 돌이 많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벽돌을
구워 전성(磚城)을 쌓기도 하였다. 수원의 화성은 부분적으로 벽돌을 쓰기도 했다.
<해미읍성의 축성숭덕비와 치>
그리고 성을 쌓는 위치와 기능에 따라 도성, 산성, 읍성, 진보(鎭堡)로 구분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산성과 진보는 전투를 목적으로 쌓는 성이고 도성과 읍성은 행정과 생활을 겸한다.
도성은 한 나라의 도읍지에 견고하고 웅장하게 쌓은 성이라면 읍성은 말 그대로
고을을 지키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조선 시대 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우리나라의 읍성(邑城)은 179개소에 달했는데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헐리고 그나마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읍성은
고창읍성과 해미읍성이다.
나는 처음으로 해미읍성을 마주했을 때 자그만치 5m에 이르는 성벽의 높이에
압도당하며 우리나라에도 이런 읍성이 남아있다는 점을 퍽 놀랍게 생각했다.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79년 병영 군관으로 10개월 동안 근무를 했다고 하며
충청도의 바닷가를 지키는 병영이 있었다고 하니 조선시대 때는 꽤 중요한 읍이었던 모양이다.
<높이 5m의 성벽>
해미(海美)는 조선 태종 7년(1406)에 정해현과 여미현을 합치면서 한 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본래 이곳에는 고려 때부터 토성이 있었는데 1407년 해미현이 설치되고 1418년에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이 옮겨 오면서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원래 충청도에는 공주와 덕산 두 곳에 병영이 있었는데 바닷가를 지키기 위하여
덕산의 병영을 이곳으로 옮겨 왔고 효종 때 북벌론을 내세우며 전국의 병영이 강화되자
해미읍성은 중심병영이 되기도 했다. 지금의 성곽은 1847년 현감이던 박민환이
성곽을 크게 고쳐 쌓은 것이다.
해미읍의 읍지에 의하면 “둘레가 6630척이며 높이가 13척, 옹성(甕城)이 둘,
우물이 여섯 개 있으며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이 둘려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성 안팎 어디에도 탱자나무 울타리는 볼 수가 없다.
남북으로 긴 타원형 모양을 한 해미읍성은 둘레 길이가 1.8km, 넓이는
대략 2만여 평쯤 된다. 또 5m 높이의 성벽이 2m 남짓의 두께로 둘려 있어
성벽을 쭉 따라 걸으면 한 시간쯤 걸리는데 주변이 평지로 되어 있어서 조망이 괜찮다.
<성벽의 둘레 길이는 1.8km쯤 된다>
해미읍성의 남문인 진남루로 들어가노라니 복원된 옛 동헌까지 쭉 뻗어있는 길이 보인다.
전에는 이 길 양쪽으로 탱자나무가 늘어서 있었다고 하는데 그 모습은 없고
주위가 온통 황량한 벌판이다.
1970년대까지는 읍성 안에도 사람들이 살았던 모양인데 이후로 모두 철거하고
1997년부터 객사와 관아 건물, 옥사와 민가들이 하나둘 복원되고 있는 중이라
그나마 볼거리가 생겨나고 있다.
<동헌으로 이어지는 길>
복원된 옥사 옆에는 600년이 넘었다는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해미의 역사를 지켜보아 온 회화나무인데 호야나무라고도 한다.
해미가 속해있는 충청도의 내포땅은 선진문물이 빨리 전파되었던 곳으로 천주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1866년 병인양요에 이은 병인박해로 이 지역의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병인박해 때 천주교인들은 해미읍성으로
끌려와서 감옥에 갇히고 심문을 받다가 처형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더러는
호야나무에 묶여 목매달려 죽기도 했다.
천주교인들을 묶었던 철사 자국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고 그 옆에
천주교 순교기념비가 있다.
<호야나무>
호야나무를 지나 더 들어가니 2층의 문루가 나온다.
해미읍성 관아의 외삼문으로 해미읍성의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2층 문루에 올라서면 멀리 바다가 보여서 읍해루(揖海樓)라고 불렸다는데
이는 ‘바닷물을 퍼낸다’ 또는 ‘바닷물을 움켜쥔다’라는 뜻이다.
<동헌 정문>
읍해루를 들어서니 깨끗하고 넓은 마당이 나오고 정면에 동헌의 모습이 우뚝하다.
효종 2년(1651) 해미현에 설치된 호서좌영은 영장을 겸한 해미현감이 해미현 뿐만
아니라 인근의 12개 군현의 병무행정까지 관장하였다.
지금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복원되어 있는데
뜰의 왼쪽에는 우물이 있고 뒤에는 책실이 자리하고 있다.
<동헌 건물>
동헌 건물의 왼쪽으로 나서니 객사인 지성관(枳城館)이 나온다.
지성관은 ‘탱자나무로 목책을 두른 성의 객관’이라는 뜻인데 탱자나무로
목책을 두른 것이 특색이 있어서 예로부터 해미를 탱자나무성 또는 지성이라고도 불렀다.
객사를 둘러보고 나와 동헌의 오른쪽으로 나 있는 계단으로 올라간다.
성내에서 가장 높은 주산이 있는데 이곳의 정자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시원하기 때문이다.
읍성의 북쪽에 위치한 이곳에는 숲 속에 장군당이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민간의 신앙지를 없애려고 신사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그 자리에 해미 인근을 조망하는 정자가 서 있다.
이 정자를 충청도읍지에는 ‘청허정(淸虛亭)’이라고 했다는데 지금은 이름이 없고
‘망루(望樓)’라고 부른단다.
<사방이 조망되는 망루>
<망루 주변의 소나무>
해미읍성은 세 개의 문이 있다. 남문은 진남루이고 객관인 지성관을 지나 서쪽에는
지성루(枳城樓)가 있으며 지성루 반대쪽인 동문에는 잠양루(岑陽樓)가 있다.
잠양이란 해미현의 옛 이름인데 원래 영조 때 세웠던 동문의 이름은 규양문이라고 했다.
읍성의 북문은 없다. 기본적으로 읍성은 북쪽으로 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
평탄한 곳을 골라 쌓았는데 험난한 북쪽에는 문을 내지 않았고 길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쪽으로는 더 이상 가보지 않고 다시 남문으로 돌아 나온다.
사방이 조망되는 망루 주변에는 소나무는 물론이고 대나무도 잘 자라고 있다.
<대나무밭>
남문으로 돌아 나오는 길에 한창 복원이 진행중인 민가를 지난다.
읍성(邑城)이라는 말 그대로 고을을 지키기 위하여 쌓은 성이 읍성이라면
예전에는 민가가 상당히 존재했을 것이다.
읍성 안에는 고을의 기본적인 건물들이 있기 마련이므로 관아와 객사, 민가,
시장, 여관 등이 있었으며 향교가 읍성 안에 있기도 했다.
해미읍성 안에 있던 관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12월에 강제로 철거되고
이후 민간 건물과 초등학교로 사용되기도 하다가 1970년대에 읍성 안의
무질서한 건물을 모두 철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다시 옛 모습을 되살려 복원을 꾀하고 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박제된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복원된 민가>
해미읍성은 역사적으로 큰 전쟁을 겪은 적은 없으나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지켜온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을 대비하여 성문에는 문루를 세워 위엄을 갖추고 성벽 곳곳에 적의 공격이
있을 때 방패 역할을 하면서 총이나 활을 쏘기 위한 구멍인 여장(女墻)과 성벽
일부를 돌출시킨 치(雉) 등의 시설을 하였다.
또 성벽 바깥에 인공으로 해자를 파서 방어시설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해미읍성에는 탱자나무 울타리로 대신했다 하며 읍성 안에도 연못과
우물을 준비하여 전쟁에 대비하고자 했다.
초등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에 여행의 형식으로 실려 있는 해미읍성은
그래서 누구나 한 번 쯤은 방문해 보고 싶은 장소이기도 하나
그리 낭만적인 관광지는 아니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의 장소로 이용되어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2009.2.12>
* 내용참조 : 답사여행의 길잡이-충남<돌베개>
한국의 읍성<대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