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사랑, 느낌으로
오늘은 우리(덕명동)성당 10주년 기념 배티 성지로 성지 순례 갔던 날이다. 비가 엄청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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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은 추석이 지나는데도 한 여름같이 날씨가 무지 더웠었다. 비가 많이 내려서 그런지 그다지 덥지 않다. 아침 일찍 장애인 콜택시를 불러서 덕명동 성당에 갔다. 많은 비가 내리는 중에도 황규철 사도요한형제님과 윤주용 안젤로 빈체시오회 회장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두 분은 온화한 모습으로 항상 나를 반겨 주신다. 이 두 분이 오늘 배티 성지가 있는 충북 진천으로 동행해 주신단다. 우리성당 다른 형제, 자매님들은 대절한 대형 버스로 간단다. 몸이 무거운 난 윤주용 안젤로 회장님 차로 가기로 했다. 황규철 사도요한형제님이 승용차 앞자리에 나를 태우고 출발했다. 무더웠던 여름의 끝자락에 비가 많이 내려서 날씨가 선선한 감이 있다. 비 오는 날 운전하시는 윤주용 안젤로 회장님은 힘들겠지만...
김제덕 신부님의 구성진 강론을 들으며 비속을 1시간 반을 달려 충북 진천에 있는 배티 성지에 도착했다. 비는 성지에 도착해서도 계속 내리고 있다. 우리 성당 신자들 중에 우리가 제일 먼저 왔다. 대부분의 성지가 그렇듯 배티 성지도 산골짜기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천주교를 박해하는 관군들을 피해 산골짜기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야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양반과 노비가 엄격히 구분된 세상에서 만인이 평등하단 교리는 개만도 못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겐 기쁜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관군에 쫓겨 이곳처럼 깊은 골짜기에 터를 잡고 선하신 하느님만을 믿고 바라보며 살았으리라.
이곳도 조선 시대엔 울창한 나무들로 덮인 너른 산중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400년이 흐른 지금 여기는 산을 깎아 아주 넒은 마당을 만들었다. 그 시대의 관군에 의해 돌아가신 많은 신자들의 염원 모아 성당을 성축하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은 곳이 되었다.
비가 많이 와서 차에서 내려 우의를 입었다. 성당으로 갔다. 성당은 단층으로 단아했다. 인상이 아주 좋은 신부님과 수녀님이 맞이해 주셨다. 미사 시간도 11시고 우리 성당 신자들이 도착하지 않아서 성당 옆에 있는 카페로 가서 쿠키와 음료수를 먹었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을 뒤로하고, 시원하게 내리는 비속에서 이렇게 멋진 곳에 올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했다.
우리성당 신자들이 오고 11시 미사가 시작 되었다. 인상 좋은 신부님 강론이 시작 되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오늘 같은 날 ‘우리가 여기에 모여 미사 드리는 건 우리들 뜻이 아니다.’ 라고 말씀 하시고, ‘오늘 우리들이 여기 모여 미사를 드리는 건 오직 하느님의 인도로 이곳에 온 것이라고, 강론 하셨다. 신부님 강론을 듣고 400년 전에도 오늘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해서 온 것이란 생각이 든다. 400년 전엔 사랑 하느님을 위해 소중한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여기에 모였고,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오늘 그분들을 기리기 위해 먼 길을 온 우리들도 다 하느님 뜻으로 여기에 온 것만 같다.
비는 계속 쏟아지고 있다. 점심 먹으러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식당에 무거운 나를 밀고 올라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다행히 어르신들을 위한 드 넒은 골프장에서 쓰는 전기카트를 운행하고 있었다. 비가 와서 미끄러운데다가 비좁은 카트에 뻣뻣한 나를 태우기가 쉽지 않았다. 황규철 사도요한과 윤주용 안젤로 형제님이 아주 힘들게 카트에 나를 욱여넣고 비속을 뚫고 점심 먹으러 갔다.
식당은 쇠파이프로 된 가건물이여서 그런지 군대 군대 비도 떨어져서 아주 오래된 느낌이 들었다. 식당 안은 많은 신자들로 북적 북적 했다. 점심은 뷔페였다. 황규철 사도요한 형제님이 접시에 음식들을 수북하게 가져다 주셨다. 근데 음식을 절반 밖에 못 먹었다. 10이란 세월이 느껴졌다. 유성성당에서 우리성당으로 옮겨온 10년 전엔 음식을 아무리 고봉으로 가져다 줘도 다 먹었었다. 10년 지난 지금은 이도 많이 빠지고 소화역도 많이 떨어져서 많이 먹지 못한다. 이것이 10년 세월의 무개 인 듯하다.
점심 먹고 반가운 요양원 식구들하고 이야기 하다가 소변이 마려워 우의를 입고 화장실에 갔다. 소변 보고 나와서 우리나라 2대 신부님이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기념관에 갔다. 400여 년 전 진실한 신앙으로 40년을 불꽃처럼 사시다 간 신부님의 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조선 관군에 쫓겨 미사 드릴 때 가지고 다니면서 연주 했던 작은 풍금과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일대기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한 쪽엔 신자들을 고문 할 때 썼던 무시무시한 고문 도구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내가 만약 그 시대에 살았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만으로 끔찍하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목숨을 버리면서 신앙을 지켜왔기에 지금의 신앙에 자유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인자한 얼굴에 갓 쓰고 도포 입으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대형 입간판 밑에서 사진 찍고 기념관을 나왔다.
내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소록도에 오래계셨던 신부님 강론 들으면서 생각했다. 우리의 삶은 우리네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되어 가는 구나라고... 오늘 같이 폭우가 쏟아지는 날 중증 장애인인 내가 장거리 여행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인데, 성지 순례로 풍성한 주님의 사랑을 비속에서 느낄 수 있어 참 좋았다. 그 동안 메마른 내 가슴에도 신앙의 폭우가 되었다.
우리 성당 모든 형제자매님께 행복한 성탄이시고 지극히 저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인도하심으로 큰 평화를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2024년 12월에 안형근 스테파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