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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제주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종교권력에 저항해 일어난 이재수의 난 이야기
격문.‥오호라 오늘 탐라백성이 업을 잃고 도로와 산골에 방황하야 생계의 도를 자유치 못하니 그 민폐의 근원은 무엇이뇨.
이는 곧 살생과 폭행과 늑탈을 일삼는 천주교도 무리로 말미암은 것이니 저들은 교도가 아니라 폭도요.저들이 믿는 것은 교가 아니라 미신이로다.
모여라.모여라.영웅열사여
1901년 제주 대정에서 이재수가 제주도민들의 총궐기를 외친 격문 내용이다.1901년 제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천주교에서는 천주교인들이 많이 학살되었다고 신축교난이라 부른다.역사에서는 이재수의 난으로 부른다.
대원군 시기까지만 해도 천주교는 많은 박해를 받았다.그러나 1886년 한.불 수호조약과 1896년 교민 조약 이후로는 선교의 자유를 얻어 공세적인 선교를 하였다.
당시 프랑스 신부들은 조선의 왕이 직접 내린 신표를 지니고 있었다.‥여아대.국왕처럼 대우하라.는 뜻이다.완전한 치외법권과 영사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문제는 프랑스 신부들만 아니라 조선사람도 천주교로 입교하기만 하면 위와 같은 특권을 누릴수 있었던 것이다.이런 잇점이 있었기에 신앙과 무관하게 교인들이 늘어났다.특히 제주 사회의 무뢰배들이 입교하여 특권을 행사하면서 문제의 싹을 키웠다.
제주도의 경우 1899년에 천주교가 들어 왔는데 1901년에는 1300여명의 신도가 증가하였다.
이때 들어온 천주교는 서구 우월주의적 사고가 강했다.제주 고유의 샤머니즘은 혁파되어야 할 사탄일 뿐이었다.
1897년 조선은 광무개혁을 통해 대한제국으로 거듭났다.그러나 개혁을 추진할 돈이 필요하여 세금징수관을 각 지방에 파견했다.중앙에서 파견된 세금징수관은 막강한 권한이 있었지만 손발이 없었다.그때 손발을 자임하고 나선 이들이 천주교도 들이었다.
무리한 세금을 걷으려는 천주교인들과 주민들의 갈등이 누적되어 갔다.대정 지역 사람들은 민회를 개최하여 제주 목사에게 건의문을 제출하기로 하였다.평화적인 시위에 천주교측에서 과잉대응 하면서 사태는 커져갔다.민회를 습격하여 장두 오대현을 납치해 갔다.또 민회의 본거지 대정으로 몰려가 주민을 살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처럼 사태는 발전하였다.무력도발에 대해서 무력항쟁만이 해답이라고 생각했다.본격적인 민란이 시작된 것이다.장두 오대현을 대신하여 이재수가 장두를 맡았다.5월 17일 이재수의 민군은 황사평에 진을 쳤다.
지금의 관덕정 제주성을 사이에 두고 천주교도들과 민군간의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그때 성안에 있던 무당들이 성문을 열었다.그들은 천주교를 종교침략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제주성에 입성한 이재수는 천주교도들을 직접 처형하였다.그러나 6월이 되자 프랑스 군함이 들이 닥쳤다.대한제국의 관군도 진압군으로 들어 왔다.
결국 민군 지도부는 체포되고 제주 백성들은 흩어졌다.
장두 이재수와 지도부는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 당한후에 참수 되어 동대문에 효수되었다.까마귀 한마리가 동대문 밖에 높이 걸린 이재수의 머리 위에 앉아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제주 출신 현기영 작가는 이재수의 난을 변방에 우짖는 새라는 제목으로 제주의 아픈 역사를 소설에 담았다.박광수 감독은 많은 제작비를 들여 이재수의 난을 영화로 만들었다.이정재가 이재수역을 맡고 명계남 심은하등이 열연하였다.대작을 만들수 있었으나 큰 반응 없이 지나갔다.
이재수의 난은 우리 나라 에서 일어난 수많은 민란중에 유일하게 종교권력에 저항하여 일어난 특이한 성격을 지닌다.관에 의한 천주교 박해가 막을 내린지 20년만에 천주교인에 의한 박해가 백성들에게 내린 것이다.
거기에 저항하여 일어난 것이 이재수의 난이다.
이재수의 난이 진압되자 천주교측에서는 성당 파괴와 외국인 신부 2명의 사물훼손으로 4160원을 배상하라고 요구하였다.또 성당고용인 살해 조의금으로 1000원.총 5160원을 요구하였다.
배상금을 낼수 없는 조선정부는 제주. 대정.정의.3읍의 제주 도민들에게 균등 부담으로 도민 한 사람당 15전 6리를 거둬 바치게 하였다.
현장법사가 제주도 이재수의 난 영화촬영지 현장을 답사하고 있다..
제주 대정 삼의사비는 이재수의 난 60주년을 기념하여 1961년 대정군민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이다.
제주 대정 삼의사비에 세겨진 이야기
천주교에서는 2011년에 제주 신축 교난시에 희생자들을 복자로 추진하겠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광화문에서 시복식을 가진 124위 복자에는 제주 이재수의 난때 희생된 309명은 한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매국노 황사영 백서.친일파 뮈텔 주교와 함께 제주 신축교난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3대 흑역사로 꼽기 때문이다.
이재수의 유일한 혈육으로 여동생 이순옥이 있다.
그는 1982년 86세로 임종을 맞을 때까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오빠 이재수의 정의로움을 알리고자 노력해 왔다.
삼의사비는 이재수의 난 60주년을 기념하여
1961년 대정군민들이 세운 것이다.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 세우는 이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것이다.
1899년 제주에 포교를 시작한 천주교는 당시 국제적 세력이 우세했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 지면서 그때 까지 민간신앙에 의지해 살아 왔던 도민의 정서를 무시한 데다 봉세관과 심지어 무뢰배까지 합세하여 그 폐단이 심하였다.
신당의 신목을 베어내고 제사를 금했으며 심지어 사형을 멋대로 하여 성소 경내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생겨났다.
이에 대정고을 을 중심으로 일어난 도민세력인 상무회는 이같은 상황을 진정하기 위하여 성내로 가던중 지금의 한리읍 명월진에서 주장인 오대현이 천주교측에 체포됨으로써 그 뜻마저 좌절되고 만다.
이에 분개한 이재수.강우백등은 이진으로 나뉘어 섬을 돌며 민병을 규합하고 교도들을 붙잡으니 민난으로 치닫게 된 경위가 이러했다.
규합한 민병 수천명이 제주시와 황사평에 집결하여 수차례 접전끝에 제주성을 함락하니 1901년 5월 28일의 일이었다.
이미 입은 피해와 억울함으로 분노한 민병들은
관덕정 마당에서 천주교도 수백명을 살상하니 무리한 포교가 빚은 큰 비극이었다.
천주교측의 제보로 프랑스의 함대가 출동하였으며 조선 조정에서도 관군이 진입해 와서 난은 진압되고 세 장두는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과정을 거친 후에 처형되었다.
장두들은 끝까지 의연하여 제주 남아의 기개를 보였으며 그들의 시신은 청파동 만리재에 묻었다고 전해 오나 거두지 못하였다.
대정마을은 본시 의기남아의 고장으로 조선후기 이곳은 민중봉기의 진원지가 되어 왔다.
1801년은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란주가 유배되어 온후 딱 100년만에 일어난 이 재수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뭇 크다.
1961년 신축에 향민들이 정성을 모아 제주 대정군 삼의사비를 대정고을 홍살문 거리에 세웠던 것이 도로확장등 사정으로 옮겨 다니며 마모되고 초라하여 이제 여기 대정고을 청년들이 새 단장으로 비를 세워 후세에 기리고자 한다.
현재 대정 삼의사비는 추사적거지 바로 곁에 있다.
사진 1.2.3번 이재수의 난을 영화로 만들었다.
이정재가 이재수로 나온다.
사진 4번 현장법사가 이재수의 난 현장을 답사하고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그러한 아픈 역사가 제주에 있었군요 ..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