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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전을 보고왔습니다..
전시명칭이 "고갱 그리고 그 이후"라고 되어 있는데 평소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작품들이 모여 있어서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약간 아쉬운 점은 after 부분에서 현대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 되었는데 물론
좋은 작품들이었고 재미있게 감상했지만 욕심 같아서는 고갱에게 직접 영향 받은 나비파(Navis) 작가들
그림 몇점 정도는 같이 있었으면 정말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욕심이 과한가?ㅋ)
익숙하면 무심해지는게 인지상정이라 이번 기회에 고갱에 대해 리뷰를 다시 해봅니다.(무지 지루하실 겁니다.)
Gauguin 은 Gogh(1853~1890)와 함께 우리에게 친숙한 화가입니다.
고갱은 고흐보다 5살 연상이었고 고흐 사후 13년간의 삶을 더 살았습니다.
작업에 임했던 기간도 고갱은 30년에 달하지만(습작기간 포함) 고흐는 1880년부터 90년까지 10년에 불과 합니다.
두사람의 공통점은 사망하기 직전까지 작업을 했었다는것 그리고 고흐의 동생 테오에 의한 후원을 받았다는것과
무엇보다 광기에 가까운 작업에 대한 욕심과 성실함 이였다고 할수 있을 겁니다.
비록 테오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두 작가의 짧은 동거가 불편한 이별로 결론나긴 했지만
이 시기 두 작가의 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현상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은 흥미 롭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작가로서의 자존심도 강하고 특별한 성격을 지닌 두사람이-어떤 책에서는 불과 물의 관계 였다고도 하던데 두사람 궁합이 어지간히 안맞았던 모양이긴 합니다 - 자신들의 작업에서는 드러나게 또는 은밀하게 서로의 장점들을 흡수 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불멸의 작가라 할지라도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나 봅니다.
1889 GAUGUIN 1889 GOGH
마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이 본격적으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전에는 금기시 되어 왔던 외곽선의 적극적인 사용과 음영의 극적인 대비는 두작가 모두에게 나타나는
중심적 표현 기법입니다. 고흐는 짧은 수련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표현 기법에 익숙했었던 작가이고
고갱도 아를에 머물렀던 기간 이후 이러한 표현을 많이 사용 하면서 그림이 이전보다 정돈 되어지며 작업의
임팩트가 강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1888년부터 89년까지 고흐는 정말이지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수많은 에스키스와 스케치 그리고 유화작업들을 하는데 본격적인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이기 직전의 이 시기는
고흐의 작품 시대에 있어서 황금기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정신분열 후 사망 직전까지도 좋은 작품들을 많이 남기긴 했지만)
10년 이라는 길지 않은 고흐의 작품제작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그의 작품수는
스케치. 수채화, 유화등을 포함해서 2,100여점 입니다. 이틀마다 한점 이상의 작업을 마무리 했다는 말이되죠.
1889 GAUGUIN 1888 GOGH
1886년 이후 본격적으로 소개 되기 시작한 신인상파 작가들의 점묘법은 색채의 혼합과정에 대한 광학적 실험외에도
하나의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화파를 초월해서 많은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창시자라고도 할 수 있는 피사로를 필두로 야수파 작가인 마티스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초기에 이러한 기법들을 이용 했었습니다.
고흐도 자신의 자화상이나 풍경화등에 일부 이러한 기법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고갱의 1889년 정물화는 고갱의 작품으로서는 아주 특이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색의 배합은 고흐의 것과 많이 닮아있고 점의 크기는 매우 세밀하게 나뉘어 져 있지만
옆의 고흐의 초상과 비슷한 분위기를 품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1888년은 특히 고갱에게도 특별한 한 해입니다.
그때까지 구사하던 인상주의적 표현법을 1888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중단하게 되는데 이미 몇년 전 부터 고갱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실험을 해 왔습니다. 그림을 시작한지 15년 만의 결단 이었죠.
9주 간 아를에서의 짧은 두 사람의 동거는 두사람에게 서로 상처를 더 많이 주었던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도 이 시기 였고 서로의 그림에 대해 품위 없게 싸운 경우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1888 GAUGUIN 1888 GOGH
1888년 고갱은 자신의 초상화를 고흐에게 헌정 합니다.
한껏 멋을 부린 수염과 화려한 벽면을 배경으로한 자화상 속의 고갱은
마치 그림을 보는 사람을 째려 보는듯한 거만하고 도전적인 표정이 가득 합니다.
벽면에 보이는 벽지의 무늬인듯한 패턴은 고갱의 다른 그림들에서도 가끔 다른 형태로 등장 합니다.
거칠고 다이내믹한 고갱의 그림에서 조미료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이러한 패턴들은 마티스 같은 야수파 작가들의
장식적 표현 기법중 하나인데 마티스의 작품과 비교해 볼때 고갱의 이러한 장식적 패턴 사용법은 마티스 보다 약 15년 이상
빠른것입니다.
같은 해 고흐 역시 자신의 자화상을 고갱에게 선물 합니다.
고갱이 한쪽 화면에 치우치며 자신을 일부 잘라내면서 까지 만들어낸 실험적인 대담한 구도와는 달리
고흐는 전형적인 초상화의 구도를 유지하며 안정감을 중요시 하는듯한 인상이고 무엇 보다도
고갱이 보내준 그림과는 완전히 반대 되는 분위기인 차갑고 단조로운 배경과
얼음같은 표정의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고흐. 무엇보다 감상자의 시선을 무시하는듯 다른 곳을 쳐다보는
그림속의 고흐는 고갱의 도발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시하는 의도가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고갱이 그 답지 않게 꼼꼼하고 치밀한 붓터치로 나름 성의를 보인 것에 비해
고흐는 이목구비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은 대충 그리는(특히 옷)것으로 고갱에게 나름 소심한 복수를 시도 합니다.
1889 GOGH
고갱의 자화상을 받아본 고흐는 이듬해 지금까지 그렸던 자신의 수많은
자화상들과는 사뭇 다른 한점의 초상화를 완성 합니다.
강렬한 외곽선과 음영의 대비 그리고 실험적인 채색의 실험이 엿보이는
이작품은 강렬한 인상과 채색의 밀도가 일년전 고갱에게 받았던 그의
초상화와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1888 GAUGUIN 1888 GOGH
아를 시기 두사람이 그린 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탐구 정신이 약간 결여되면 어떤 그림이 고갱의 작품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로 비슷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이 작품들은
결국 두작가의 정서적 교감을 나타내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savage
그는 스스로를 야만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야만이라는 호칭은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이자 훈장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Paul Gauguin, ca.1891-1893, Tehura (Teha'amana), polychromed pua wood (Perfume Flower Tree), H. 22.2 cm. Realized during Gauguin's first voyage to Tahiti. Musée d'Orsay, Paris
half-Peruvian인 고갱의 외할머니는
유럽 근대 초기의 사회주의 평론가이자 행동가 였고 특히 초기 페미니스트의 선두주자였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남부 페루의 막강한 권력가 였으며 그녀의 작은 아버지는 페루 총독까지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프랑스인 이었으니 고갱은 증조 할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혈통을 이어 받은 4대째 유럽인
이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의 외척에 관한 설명을 지루하게 하는 이유는
그가 어린시절 페루라는 어머니의 멀고도 먼 고향에서
유년(3세~7세까지)을 보내면서 형성 되었을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 입니다.
페루에서의 어린시절. 그의 몇년간의 생활에 관해 자세히 알려진 자료는 없지만 그가 겪어야 했던
(가장 문화적, 사회적 학습 성취도가 강하고 예민한 시기) 남미 특유의 환경에 대한 감수성의 흡수또는 이국적인 풍토와 환경에서
형성 되었을 자아와 다시 프랑스로 돌아 왔을때 그가 감수 해야 했던 문화적 충격같은 면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발표한 2008년 보고서에서
심리학자 미를 맥그로의 아동 발달 연구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아동 발달 연구에서 만 세 살에서 다섯 살 사이가 가장 중요한 학습기간 이라는 것인데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 시기이며 뇌의 가소성이 가장 높은 시기이자
뇌가 신경세포의 발달 속에서 쉽게 변화를 수용하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또한 아동의 초기 경험은 주로 삶의 최초 5년 동안에 일어나고, 이때의 경험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남아 있게될
궁극적인 뇌의 배선을 결정 짓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특히 사회성 발달의 중요한 초석이 되는 3 세~7 세 사이의 중요한 시기를 페루에서 보내게되는 고갱을
이해 하는데 있어서 대부분의 비평가 들이나 감상자들이 이 부분을 가볍게 지나쳐 가는것은 고갱에게 개인적으로
억울한 측면 일뿐 아니라 그의 작품을 이해 하는것에도 중요한 부분을 놓쳐 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망명길이나 다름 없던 페루행 배에서의 부친의 사망이 없었더라면
어린 고갱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를 배에서 잃고 중요한 시기에
머나먼 남미에서 성장했던 아이가 성장하여 외항선원이 되었던 것이 그저 우연이었을까요.
다섯이나되는 자녀를 남기고 홀연히 떠돌다 결국 타히티에서 자신의 마지막 열정의 불꽃을 불사르고
스러져간 타히티는 고갱에게 자신의 정신적 고향인 페루의 또 다른 요람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가 사랑 했었던 그를 사랑했었던 폴리네시아 여인들은 그의 유년기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었던 인디오 여인들의 다른 투사는 아니었을까.
이러한 부분 외에도 고갱을 고갱으로 만들지 않을 요소는 그의 인생 곳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증권거래소에서 안정적으로 직업을 유지 했었더라면 그는 그저 평범한 일요화가
또는 소박한 미술품 소장가로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가 인상파 그림이 아닌 다른 화파의 그림들을 좋아 했었다면 그는 피사로와 친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그가 미래가 불투명한 전업화가의 길로 자신의 인생을 걸만큼 고무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만약 그가 불안한 직장 생활을 청산하고 전업 화가의 길을 선택 했었어도
세쟌이나 아르망 특히 고흐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는 그저 이름 없는 평범한 인상파 화가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가 야심차게 준비한(무려 19점)그림들이 마지막 인상파 전시회에서 호평을 받아 많은 작품들이 판매가 되었더라면
어쩌면 그는 피사로와 비슷한 인상파 화가로서 안주 하며 여생을 제법 편안하게 살며 안주 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쇠라를 비롯한 신인상파의 그늘에 가려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고흐의 동생인 테오로 부터 고갱의 새로운 시도였던 원시주의적 작품에 대한 고무를 받지 않았다면
그래서 테오와의 아주 작은 거래가 성사 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시시한 인상파 잔류파로 생을 마감 했을지도 모르죠.
만약 고갱이 고흐와의 짧은 동거기간중에 고흐가 귀를 자르는 극단적인 행위가 없었더라면 그는 테오의 지원 아래
그런대로 안정적인 생활에 만족하며 타히티까지 가지는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이 외에도 그의 인생이(또는 작품이) 변화할 수 있는 기회는 수 없이 많았지만
그는 결국 타히티로 가서 계속 그의 작품을 만들었고 결국 그 곳에서 사망합니다.
되돌아보면 고갱의 인생은 결국 지금의 고갱의 인생이 될 수 밖에 없이 흘러 갔습니다.
인생에서 '만약'이란것은 비겁한 자의 변명이고 패배자의 백기 투항입니다.
타히티에서 심혈을 기울인 그의 역작들이
파리의 전시회에서 판매에 참패를 하자 그는
기차역 앞 광장에서 트렁크 위에 걸터 앉아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는 아무것도 없는 타히티로 돌아가서 그의 그림을 계속 그립니다.
아무도 사주지 않는 그의 그림을.
무엇이 그를 죽는 순간까지 그림 그리게 했을까.
무엇이 그를 타히티로 돌아가게 만들었을까.
어릴적 그의 뇌에 각인 되어 있었던 유럽 이라는 거만한 문명에서 비켜난 남미의 향수 때문 이었을까.
아니면 그를 기다리던 어린 고갱을 보살펴 주던 인디오 유모를 닮은 나이어린 폴리네시아 여인 때문은 아니었을까.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는지 자존심 때문 이었는지 아니면 창조자로서의 책임감 때문 이었는지 아직도 그를 잘 모르겠지만
그는 결국 그가 말한대로 폴리네시아의 유럽인 야만인으로 생을 마감하고 그가 남긴 야수적인 그림들은 지금 우리앞에
그렇게 놓여 있습니다.
ps)
당신은 기대했던 낙원을 만났을까요.
철부지 화가의 돈키호테 같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고행을 비웃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록 가난하고 병들어 죽은 그곳이지만 단신에게 타히티는 이상향에 들뜬 유럽인의 허구속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살아가고 사랑했고 이루어 냈던 진정한 유토피아였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비겁한 우리가 감히 욕심내어 보지도 못하는것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친애하는 미스터 고갱씨.
Art is either plagiarism or revolution. ”
- Paul Gauguin
1873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첫 해의 작품입니다.
선생이 그려준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안정적인 구도와 색감인 수작입니다.(분명히 누군가 그려준것 같음..ㅎ)
색감이나 붓 터치가 초보자에게서 이 정도로 나온다는것을 절대로 인정 못하겠음.ㅎ
1884
작업 11년차 되는해에 작업한 작품입니다.
전체적으로 인상파 중기의 화풍이 돋 보이고 피사로의 영향 때문인지 짦고 대기를 흐르는듯한 붓의 터치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고흐가 10년 동안의 총 작품 제작 기간이라는 아주 짧은 수련기와 완성기를 거쳤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고갱 또한 순식간에 화가가 되었다는 착각을 많이들 하시는데 고갱은 제법 오랜 기간의 수련기간을 가졌던
준비된 화가였습니다.
1888
1888년은 고갱이 인상주의 화풍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는 해입니다.
이 그림은 고갱의 인상주의 화풍의 거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상단의 1884년 작품과 비교 해 볼때
인상주의적 기법이 많이 원숙해지고 세련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90
인상주의적 화풍을 포기하고 고흐와의 짧은 만남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위해 정진 합니다.
당시 수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물론 평단에서도 좋지 않은 반응을 보여 왔지만 그는 자신의 새로운 화풍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갑니다. 이 작품이 제작된 시기는 이미 고갱이 타히티로 이주한 후의 작품이며 아직 고갱 특유의
타히티시기 작풍이 드러 나지는 않지만 충분히 그 징후를 느껴 볼 수 있습니다.
1902
두명의 타히티 여인 뒤에서 고갱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걸일까요?
마술적이며 원시주의적이며 해학적이기까지한 이작품은 고갱의 또 다른 단면을 느끼게 해 줍니다.
1903
그가 사망하던 해에 그린 그의 자화상입니다.
특이하게도 구상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제작된 자화상에서
동양인인 우리는 그의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를 보는듯 합니다. 마치 자신의 영정을 스스로 제작한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세잔에게 헌정 했던 자화상 속에서의 자신감도 오만함도 사라지고 그동안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 시도했던 어떠한 실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50년 이상의 세월을 평탄하지 않게 살아왔던 한 남자의 평범한 인상을 담아냈습니다.
한창때 고갱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힘도 많이 빠지고 지쳐 보이고 관조하는듯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굳게 다문 입술과 강인해 보이는 턱의 모습에서 그의 의지를 엿보게 합니다.
그는 이 자화상을 그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혁명에 성공한자의 자신감을
그려 보고 싶었을까요?
단정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시간들을
그래서 마무리 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이 그림과 같이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것은
지나친 상상의 비약일지도 모릅니다.
Born: 07 June 1848
Died: 08 May 1903
Active Years: 1873 - 1903
Periods: Early works, Breton period, 1st Tahiti period, Paris period, 2nd Tahiti period
http://www.wikipaintings.org/en/paul-gauguin/mode/all-paintings
첫댓글 오랜만에 집중해서 읽은 듯 해요.
이 글을 읽고 고갱전을 보았다면 더 잘 보였겠죠?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많이 다루지 않은 고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 수 있어서 뭔가 공백을 메꾸는 느낌이에요.
좋은 글 진짜 감사 드려요.
앞으로도 종종 쉽고 재미진 화가 이야기... 기대해도 될까요? ^^
지루하지 않으셨나요? 블루 하트님 그림도 잘 보고 있습니다. 재주가 많으신분~ 한달에 한번 정도는 글 올려 보려고 노력 중인데 그게 어렵네요,ㅎ 감사합니다.^^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요즘 잘 읽히지 않는데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해요.
어떤분은 이글을 들었다고 하시더군요~ 대단한 칭찬이죠? 감사합니다. 가을님.
전시 관계자에게 "왜 인상주의 작품들이 마지막 파트에 구성되어있나요?" 물어봤더니
고갱이 인상주의 그림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자료와 타히티 작품들에 좀더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마지막 파트에 두었다고 들은것이 생각나네요^^
보스코님 덕분에 고갱에 대해 조금은 공부한 느낌입니다 ㅎㅎ
고갱은 인상파 화가들 아래에서 그림수업을 받았으니 그런쪽으로 흘러 갈 수 밖에 없었겠죠,,그리고 당시는 인상주의가 슈퍼 甲? 이었으니.ㅎ 인상주의 초기 화가들은 또 대부분 아카데믹한 고전주의 작품을 했었었구요..고갱 사후 젊은 작가들에게 특히 독일 표현주의 다리파나 청기사 파들에게(물론 나비파를 포함) 고갱이 슈퍼 甲이었다는~ 이런걸 보면 한 시대의 트렌드는 선구자가 분명 끌고 나가야 되는듯 합니다.(물론 선두 주자는 고생만 하고 주목 받지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요즘은 그 추세가 달라졌죠-사회 커뮤니티가 발달하면서 그 전파 속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도 없으니-요즘은 주목 받습니다,ㅋ)
글 맨 아래 링크 걸어놨으니 클릭하심 고갱의 시기별 작품들과 간단한 내용 확인이 가능합니다.
물론 검색하심 다른 작가들도 가능 합니다.
우미갈 브레인이신 보스코님! 또 감사히 읽고 갑니다
마네님! 더워요! ㅋㅋ
보스코님~ 사릉해요.ㅋ
고갱과 함께 여행을 하듯 아를로 타히티로...
안주하고 편하고 싶은 제 삶의 방향이 과연 이대로 괜찮은 것인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다음에 또 좋은 글 기대할게요^^
격한 호응 감사합니다.^^
다음주에 고갱전가려구요
대림미술관에서 슈타이들전도 하는데 가까우니 함께 둘러보는것도 좋을것같아요
가시는길에 통의동 한바퀴 돌고 오심 좋으시겠네요! 좋은 시간 되시길요~ㅎ
저는 고갱 얼굴을 볼 때마다 어케 프랑스인(=서양계)의 얼굴이 없고 동양계가 느껴질까? 했었는데 오늘 보스코님 덕분에 그 의문이 풀렸네요! 외가쪽이 페루였군요!아. 그래서 유년 시절의 영향으로 타히티에서 머무는 것이 자연스러웠고요. 흠. 암튼 우미갈 똑똑인(?)들 덕분에 저는 행복합니다.꾸벅.^^*
ㅋㅋ지금 옆에서 파랑새님이 막~큰소리로 저에게 말하는듯 하네요! 인공조미료 듬뿍 들어간 비빔국수 생각이 막 난다는~~해물파전두~ ^^*
저, 워낙 집에서 인공조미료 안 먹기 때문에 가~~끔은 외식으로 먹어줘야해요~^^;;
잘읽었습니다. 저도 집중해서 잘 봤어요. 다음에도 좋은 글 부탁드려요 ^^
고맙습니다~ 오랜만이예요~ 준수하신 달팽이관님! ^^
잘읽었어요~머리에쏙쏙들어오네요^^
하하~감사합니다(머리에 쏙쏙~참고서 사업을 해볼까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당시 성병이나 외도등은 유럽에서 남여를 불문하고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할정도로 다반사로 일어나던 일상적인일에 가까웠습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문란 그 자체였었죠. 제국적 관점에서 고갱같은 이들이 너무 낭만적인 유토피즘에 빠져있던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리엔탈리즘이 유행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오만한 정복자들의 파행으로 인해 문화의 다양성이 나타나고 새로운 지평들이 열렸던것은 부정할 수 없는것이겠죠. 다른곳에서도 언급했지만 예술과 인생은 같이 가는것이지만 어느 한쪽에 편향된 평가는 주의를 요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인이 아닌 그들의 사고로는 오히려 우리의 시각이 신기하기도 할것입니다.^^
인류역사는 승리자가 만들어 간다는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집트, 그리스, 로마가 그랬었고 18-19세기에는 유럽 강대국이 역사의 주인공들이였죠,(물론 이는 다분히 서구 문명사회의 편향된 시각이라 다수의 이슬람 제국들이 이룩해낸 찬란한 이슬람문화는 배제된)20세기 부터 지금까지는 미국이 그 중심에 있구요. 그 승리자들이 문화도 주도해 나갑니다.
불쾌하고 정의롭지 못한 그들의 면모는 여성참정권 인정(미국-1920/영국-1928),흑인참정권 인정(미국-1965),병인양요-1866/신미양요-1871등을 통해 전 인류와 우리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우리는 그 영향력 아래 놓여 있죠.
역사는 승리자가 만들고 기록합니다.
이번 휴가 때 보고 올 예정인데 많은 도움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미술관람이 될 것 같아요
방학시즌이면 학생들이 많이와서~ 오전에 일찍 가시는게 좋을듯 해요,^^
우와 자세한 설명(?)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한편의 강의를 들은 기분이네요
감사합니다. ^^
뒤늦게 고갱전을 보고 와서 보스코님의 후기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좀더 정리가 되네요,,,,
그리고 중간의 같은 여인을 그린 그림은 정말 탐구적이지 않으면 잘 모르겠네요....ㅋㅋ
소중한 글과 감성을 전해주셔서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