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가서 그곳의 백성들에게 예의(禮義)와 전잠(田蠶), 직작(織作)을 가르쳤다. 낙랑과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있었다. -범금팔조에 대해서는 형지(刑志)에 나온다.- 이 때문에 그곳의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는 일이 없어서 집의 대문을 걸어 잠그는 일이 없고,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다. 그곳의 백성들은 음식을 먹을 때 변(籩)과 두(豆)를 사용하며, 도읍에 사는 백성들은 자못 관리나 내군(內郡)의 장사꾼들을 본받아서 왕왕 잔[杯]이나 그릇[器]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는다. 군(郡)을 세운 초기에는 요동(遼東)에서 관리를 뽑아다가 썼는데, 관리들은 백성들이 문을 걸어 잠그지 않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장사꾼들이 오가면서 밤중에 도둑질을 하니, 풍속이 점차 각박해졌다. 이에 지금은 점점 범금(犯禁)이 늘어나서 60여 조나 되었다. 그러니 귀한 것은 어진 이의 교화이다. 그러나 동이족은 천성이 유순해서 다른 세 변방의 오랑캐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공자가 중국에서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 구이(九夷)의 땅에서 살고자 한 것은 대개 그 까닭이 있는 것이다.
《한서》 ○ 《수경(水經)》 주(註)에, “조선은 옛날 기자의 나라이다. 기자가 그곳의 백성들에게 예의(禮義)와 전직(田織)과 신후(信厚)를 가르쳤으며, 팔조의 금법을 시행하였다. 이에 아래 백성들이 드디어 예의가 있는 풍속을 이루게 되었다.○ 요동은 기자의 교화를 거친 나라로서, 풍습이 순박하고 아름답게 물든 것은 멀리 그 단서가 있는 것이다. 그곳 사람들은 성품이 유순하고 공손하며, 빌려 준 것은 다 받아들인다. 의복과 음식이 검소하여 옛날의 유풍(遺風)이 남아 있다.
《요동지》 ○ 《명일통지(明一統志)》에, “요동은 기자가 봉해진 지역으로, 풍속이 점차 교화되어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한나라 이후로 동이(東夷)의 지역으로 편입되어서 유민(流民)들이 뒤섞여 살게 된 탓에 풍속이 점차 각박해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화를 받았으므로 자못 중국의 풍습이 남아 있다.” 하였다.
이상은 기자조선(箕子朝鮮)에 관한 것이다.
○ 부여(夫餘) 사람들은 체구가 크고 성품은 굳세고 용감하다. 그러면서도 근엄하고 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 음식을 먹고 마시는 데에는
조두(俎豆)를 사용한다. 회동(會同)을 할 때에는
배작(拜爵)과 세작(洗爵)의 예가 있고, 출입을 할 때는 읍양(揖讓)의 예가 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래하기를 좋아하여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후한서》 ○ 《진서(晉書)》에, “회동을 하면서 읍양하는 의식은 중국과 비슷하다.” 하였다.○ 부여의 백성들은 토착 생활을 한다. 읍락(邑落)에는 호민(豪民)이 있고,
민(民)과 하호(下戶)들은 모두 노복(奴僕)이 되었다. 제가(諸加)
-삼가 살펴보건대, 관직이 있는 자에게 붙이는 칭호이다.- 는 별도로
사출도(四出道)를 주관하는데, 높은 자는 수천 가(家)를 주관하고, 낮은 자는 수백 가를 주관한다. 통역하는 사람이 말을 전할 때에는 모두 꿇어앉아서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조용조용히 이야기한다.
음란한 짓을 한 남녀나 투기를 하는 부인은 모두 죽이는데, 특히 투기하는 것을 미워하여, 죽인 뒤에는 그 시체를 나라의 남산(南山) 위에다가 내버려서 썩게 한다. 친정집[女家]에서 시신을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만 내준다. 그들에게는 가축을 잘 기르는 풍속이 있다. 전쟁을 하게 되면 소를 죽여서 그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여긴다.
-왕굉(王宏)의 《복기(卜記)》에는, “동이(東夷)는 소의 뼈로 점을 치고, 부여는 소의 발굽으로 점을 친다.” 하였다. 또 양방(楊方)의 《오경구침(五經鉤沈)》에는, “동이족 사람들은 소의 뼈를 가지고 일에 대해 점을 쳐서 길흉을 내보이는데, 맞지 않는 것이 없다. 소는 지혜가 있는 동물이 아닌데, 이와 같이 영험이 있다.” 하였다.- 적군이 침입하면 제가(諸加)들이 직접 전투를 하고, 하호(下戶)들은 양식을 날라다가 음식을 만들어 먹인다. 옛 부여의 풍속에는 홍수와 가뭄이 들어서 오곡(五穀)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로 돌려서 혹 “왕을 바꾸어야만 한다.”고 하거나, 혹 “왕을 죽여야만 한다.”고 말한다.
《삼국지》
이상은 부여(夫餘)에 관한 것이다.
○ 동옥저(東沃沮)는 읍락(邑落)에 장수(長帥)가 있다. 사람들의 성품과 기질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창[矛]을 잘 다루고 보전(步戰)을 잘한다. 언어(言語), 음식(飮食), 거처(居處), 의복(衣服)은 고구려와 유사하다.
《후한서》
이상은 동옥저(東沃沮)에 관한 것이다.
○ 예(濊)는 스스로 일컫기를,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다.” 한다. 그들의 언어와 법제,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비슷하다. 그곳 사람들의 성품은 우직하고 진실하며, 기욕(嗜欲)이 적어서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그들의 풍속은 산천(山川)을 중요시하는데, 산과 내마다 각기 부계(部界)가 있어서 서로 간에 함부로 간섭하지 않는다. 꺼리는 것이 많아서, 사람이 병을 앓거나 죽으면 옛집을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지어서 산다.
《상동》○ 예의 사람들은 성품이 조심스럽고 진실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다. 그곳의 풍속은 주옥(珠玉)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삼국지》
이상은 예(濊)에 관한 것이다.
○ 마한(馬韓)은 사람들이 읍락(邑落)에 뒤섞여 살며, 역시 성곽(城郭)이 없다. 궤배(跪拜)할 줄을 모르며, 장유(長幼)와 남녀(男女)의 구별이 없다. 금, 보석, 비단, 모직물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소와 말을 탈 줄 모른다.
-《삼국지》에는, “소나 말을 탈 줄 모르므로, 소와 말을 모두 장례용으로 써 버린다.” 하였다.- 해마다 5월이면 농사일을 마치고서 귀신(鬼神)에게 제사 지내는데, 밤낮없이 술자리를 베풀고 떼 지어서 노래하고 춤춘다. 춤을 출 때에는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줄을 서서 땅을 구르며 장단을 맞춘다. 10월에 농사의 추수가 끝나면 또다시 이와 같이 한다. 그 나라의 남쪽 경계는 왜(倭)와 가까우므로 역시 문신(文身)을 한 자도 있다.
《후한서》○ 마한은 백성들이 토착 생활을 하며 곡식을 심는데,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서 살며, 성곽은 없다. 그들의 풍속은
의책(衣幘) 입기를 좋아하며, 기강(紀綱)이 없다. 국읍(國邑)에는 주수(主帥)가 있으나, 읍락에 뒤섞여 사는 탓에 백성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 그들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官家)에서 성곽을 쌓을 경우에는,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들이 모두 등가죽을 뚫은 다음 큰 밧줄로 꿰고, 다시 또 한 발쯤 되는 나무 막대를 꽂고 온종일 소리를 지르면서 일을 하는데,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하며, 또 이를 강건한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귀신(鬼神)을 믿는다. 그 북방의 군(郡)과 가까운
-살펴보건대, 한(韓)은 대방군(帶方郡)에 속하였다.- 여러 나라들은 그런대로 약간의 예속(禮俗)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흡사 죄수나 노비들이 모여서 사는 것과 같다. 별다른 진귀한 보배는 나지 않고, 짐승과 초목은 대략 중국과 같다. 그곳 남자들 가운데는 가끔 문신을 한 자도 있다.
《삼국지》○ 마한은 비록 남과 다투거나 전쟁을 하더라도 굴복한 상대에 대해서는 서로 존중해 준다.
《진서》○ 진한(辰韓)은 누에치기를 할 줄 알고
겸포(縑布)를 짠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니며,
-살펴보건대, 마한(馬韓)과 풍속이 다르다.- 혼인을 할 때는 예의에 맞게 하고, 길을 가는 사람들은 서로 간에 길을 양보한다.
-《삼국지》에는, “그들의 풍속은 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모두 길을 양보한다.” 하였다.- 그들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고 비파[瑟] 타기를 좋아한다.
《후한서》○
진한은 혼인하는 예법에 남녀의 구별이 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돌로 머리를 누르는데 -살펴보건대, 《후한서》에는 압(壓) 자가 압(押) 자로 되어 있다.- 이는 머리 모양을 납작하게 하려는 것으로[欲其褊] -살펴보건대, 편(褊) 자가 《후한서》에는 편(扁) 자로 되어 있다.- 지금도 진한 사람들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 남자와 여자 가운데에는 왜(倭) 지역과 가까운 탓에 역시 문신을 한 자가 있으며, 보전(步戰)을 잘한다. 《삼국지》
진한(秦韓)에서는 특이한 미녀[異姝]가 나는데, 교태롭고 연약하여 사람의 혼을 녹이고 정신을 잃게 한다. 이웃 나라에서 이 미녀를 사려고 하면 천금(千金)을 주더라도 팔지 않는다. 《여홍여지(女紅餘志)》
○ 변진(弁辰) 사람들은 진한 사람들과 뒤섞여서 사는데, 성곽과 의복은 모두 같으며, 언어와 풍속은 차이가 있다. 그곳 사람들의 모습은 체구가 장대하고 머릿결이 아름답다. 그 나라가 왜국과 가까이 있는 탓에 자못 문신을 한 자들이 있다.
《후한서》 ○ 살펴보건대, 왜국과 가까워서 문신을 한 것은 삼한이 모두 같다.○ 변진은 진한과 더불어 법제와 습속이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방식은 차이가 있어서, 조신(竈神)을 모두 문(門)의 서쪽에 모신다.
《삼국지》
이상은 삼한(三韓)에 관한 것이다.
○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아 사람들이 그에 따라서 산다. 토지가 적은 탓에 힘써 농사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므로, 그 풍속이 음식을 아끼며, 궁실(宮室)은 잘 지어 치장한다. 동이(東夷)들이 서로 전하기를, “부여(夫餘)의 별종(別種)이다.”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언어와 법제는 부여와 대부분 같다.
-《삼국지》에는, “그들의 언어와 여러 가지 일들은 대부분 부여와 같고, 그들의 성품이나 의복은 차이가 있다.” 하였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펴서 끌며[跪拜曳一脚]
-살펴보건대, 《양서(梁書)》에는 예(曳) 자가 신(申) 자로 되어 있다.- 걸을 때에는 모두 달음박질치듯 빨리 간다. 그들의 풍속은 음탕하고, 모두들 스스로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한밤중에는 남녀가 서로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 부른다.
-《삼국지》에는, “그곳의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국중(國中)의 읍락(邑落)에서는 한밤중에 남녀가 무리 지어 모여서 노래하면서 논다.” 하였다.- 그곳 사람들의 성품은 흉포하고 급하며, 기력(氣力)이 있고, 전투에 익숙하여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후한서》○ 그 나라 안의 대가(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 그러므로 놀면서 먹는 자들이 1만여 구(口)나 되는데, 하호(下戶)들이 먼 곳에서 쌀, 고기, 소금 등을 운반해다가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그 풍속은 음란하며, 남녀가 결혼을 하면 곧바로 죽어서 입고 갈 수의(壽衣)를 미리 지어 놓는다.
《삼국지》○ 풍속은 오경(五經)을 읽을 줄 안다.
《남제서(南齊書)》○ 그 나라의 풍속은 음란하여, 남녀가 서로 야합(野合)하는 일이 많다.
《양서(梁書)》○ 백성들은 모두 토착 생활을 하여 산골짜기를 따라서 거주하며, 포(布), 백(帛) 및 가죽[皮]으로 옷을 해 입는다. 토질이 척박하여 양잠(養蠶)과 농사를 자급자족할 수가 없으므로, 그곳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남녀가 떼 지어서 노는데, 귀천(貴賤)의 구별이 없다. 쪼그리고 앉기를 좋아하고, 밥 먹을 때에는 조궤(俎机)를 사용한다.
《후위서(後魏書)》○ 고구려는 토지가 척박하여, 일상생활에 있어 절약하여 검소하게 한다. 그러나 몸을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속임수가 많은 편이고, 말은 속되고 야하다.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고 한 냇물에서 같이 목욕을 하며,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데, 풍속이 음란하여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유녀(游女)가 있는데, 그에게는 일정한 남편이 없다. 불법(佛法)을 공경하여 믿으며,
음사(淫祀)를 아주 좋아한다.
《후주서》○ 고구려는 매년 봄가을로 사냥 대회[校獵]를 여는데, 이때에는 왕이 반드시 친림한다. 매년 초에 패수(浿水) 가에 모여서 놀이를 하는데, 왕이 요여(腰轝)를 타고 나가 우의(羽儀)를 펼쳐 놓고 이를 관람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이 옷을 물에 던진다. 그러면 군중들은 좌우 두 편으로 나뉘어서, 물과 돌을 그 옷에다 뿌리거나 던지면서 소리 지르고 쫓고 쫓기기를 두세 번 되풀이하고 그친다. 풍속이 쪼그리고 앉거나 걸터앉기를 좋아하며, 청결한 것을 좋아한다. 종종걸음 치는 것을 공경하는 것으로 여기고, 절을 할 적에는 한쪽 발을 끈다. 서 있을 때에는 뒷짐을 지고, 걸을 때에는 반드시 손을 흔든다. 성품은 속임수가 많고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부자간에 같은 냇물에서 목욕을 하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잔다. 부인들은 음란하며, 세속에는 유녀(游女)가 많이 있다. 귀신을 공경하여 음사(淫祠)가 많다.
《수서》○ 고구려는
위기(圍棋)와
투호(投壺) 놀이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축국(蹴鞠)을 잘한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변(籩), 두(豆), 보(簠), 궤(簋),
준(罇), 조(俎), 뇌세(罍洗)를 써서, 자못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이 있다. 그들의 주거는 반드시 산골짜기를 의지하여 있으며, 모두 띠풀로 이엉을 엮어서 지붕을 덮었고, 오직 불사(佛寺)와 신묘(神廟) 및 왕궁(王宮)과 관부(官府)만은 기와를 이었다. 그들의 습속은 가난하여 남루한 자가 많다. 겨울철에는 모두 장갱(長坑)을 만들고는 그 아래에다 숯불을 지펴서 따뜻하게 한다.
-살펴보건대, 장갱은 지금 온돌(溫堗)의 제도로, 《요지(遼志)》에, “여진(女眞)의 습속은 흙을 뚫어서 상(床)을 만들고 그 아래에다 숯불을 지피고 그 위에서 침식(寢食)과 기거(起居)를 하니, 이것이 바로 갱(坑)이다.” 하였고, 고염무(顧炎武)는 말하기를, “북쪽 지방 사람들은 흙으로 상을 만들고 그 아래에다 구멍을 뚫어서 여기에 숯불을 지피는데, 이를 항(炕)이라고 한다. 《구당서》 고구려열전(高句麗列傳)에, ‘겨울철에는 모두 장갱(長坑)을 만들어서, 아래에다 숯불을 지펴 따뜻하게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토항(土炕)으로, 단지 항(炕) 자가 갱(坑) 자로 표기되었을 뿐이다.” 하였다.- 농사를 짓는 것과 누에를 치는 것은 대략 중국과 같다. 법을 적용하는 것이 준엄하여 법을 어기는 자가 드물어, 심지어는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가지 않는다.
《구당서》○ 고구려 사람들은 배우기를 좋아하여, 가난한 마을의 미천한 집까지도 서로 힘써 배운다. 길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놓고 이를
‘경당(扃堂)’이라고 부르면서, 혼인하지 않은 자제(子弟)들을 이곳에 보내어 글을 외고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신당서》
이상은 고구려에 관한 것이다.
○ 백제(百濟)는 사람들의 체구가 크며, 의복은 깨끗하다. 그 나라는 왜(倭)와 가까워서 자못 문신(文身)을 한 자가 있다.
-살펴보건대, 백제는 바로 마한의 지역이다. 그러므로 왜와 가까운 탓에 문신을 하는 것도 역시 마한의 남쪽 경계 지역과 그 풍속이 같다.- 지금의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은데, 걸을 때에 두 팔을 벌리고 걷지 않으며, 절을 할 때 한쪽 다리를 펴지 않는 것은 다르다.
《양서》○ 백제는 백성들이 토착 생활을 하는데, 지역이 대부분 낮고 습하여서 대부분 산 위에서 산다. 의복과 음식은 고구려와 같다.
《후위서》○ 백제는, 배알(拜謁)하는 예는 두 손으로 땅을 짚어 공경하는 뜻을 표한다. 습속은 기사(騎射)를 숭상하고, 겸하여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애독한다. 투호(投壺)와
저포(樗蒲) 등의 잡희(雜戱)가 있으나, 바둑과 장기[奕棋]를 더욱더 좋아한다.
《후주서》○
그곳의 사람들은 신라인, 고구려인 등이 뒤섞여 있고, 중국 사람들도 있다. 뛰어난 사람들은 자못 글을 지을 줄 알며, 관가의 사무에도 능숙하다. 또 의약(醫藥),
시귀(蓍龜)와 상술(相述),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대해서도 안다. 승니(僧尼)가 있고 사탑(寺塔)이 많다. 투호, 저포,
농주(弄珠), 악삭(握槊) 등의 잡희(雜戱)가 있다.
《북사(北史)》○ 백제는, 세시(歲時)와
복랍(伏臘)이 중국과 같다.
《구당서》○ 백제의 풍속은 고구려와 같다.
《신당서》
이상은 백제에 관한 것이다.
○ 신라는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심기에 적당하고, 뽕나무와 삼[麻]이 많아서 겸포(縑布)를 짠다. 소를 부리고 말을 탄다. 남녀의 구별이 있다. 절을 하고 길을 가는 것은 고구려와 서로 같다. 문자(文字)가 없어서 나무에다 금을 새겨서 신표(信表)로 삼는다. 언어는 백제가 통역을 한 다음에야 뜻을 소통할 수가 있다.
《양서》○ 신라는 문자(文字)와 갑병(甲兵)이 중국과 같다. 풍속과 형정(刑政), 의복은 고구려나 백제와 대략 같다. 매년 정월 초하루에 서로 하례(賀禮)하는데, 왕이 연회를 베풀어서 뭇 관원들에게 상을 주며, 이날에 일신(日神)과 월신(月神)에게 절을 하고, 8월 15일에 이르러서는 풍악을 베풀고 관인(官人)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한 다음 말과 포목으로 상을 준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경우에는, 뭇 관원들을 모아서 상세하게 의논하여 결정한다. 《수서》○ 신라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서 회의를 하는데, 이를
화백(和白)이라 하며, 한 사람이라도 반대를 하면 회의를 즉시 파한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버드나무로 만든 잔[杯]을 사용하는데, 구리 그릇이나 질그릇을 쓰기도 한다.
-《구당서》에는, “그들의 식기(食器)는 버드나무로 만든 그릇을 쓰며, 구리로 만든 그릇과 질그릇도 있다.” 하였다.- 사람을 보면 반드시 꿇어앉아 손으로 땅을 짚고 공손하게 절을 한다. 겨울철에는 집 안에다 부엌을 만들고, 여름철에는 얼음 위에 음식을 놓아둔다.
《신당서》○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김씨(金氏)와 박씨(朴氏) 두 성(姓)을 가지고 있으며, 성씨가 다른 사람과는 혼인을 하지 않는다.
《구당서》○ 7월 보름날에는 왕이 왕녀(王女)를 시켜서 6부(部)의 여자를 거느리고 넓은 뜰에서 길쌈을 하게 하고, 8월 보름에 이르러서 성적을 매겨서 진 편에서 주연을 베풀고는 서로 어울려서 춤과 노래를 하였는데, 이를
가배(嘉俳)라고 한다.
《회암집(悔菴集)》 ○ 이에 대해서는 악지(樂志)에 상세하게 나온다.
이상은 신라에 관한 것이다.
○ 발해(渤海)의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契丹)과 대략 같다.
《신당서》○ 금(金)나라 대정(大定) 17년(1177, 명종7)에, 발해의 옛 풍속에는 남녀가 혼인을 하는 데에 대부분 예의를 따르지 않고 반드시 먼저 약탈하여 도망쳤는데, 조서를 내려서 이를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금사》
이상은 발해에 관한 것이다.
○ 고려(高麗)의 습속은 문자(文字)를 알고 독서를 좋아한다.
《오대사(五代史)》○ 고려의 사신
곽원(郭元)이 스스로 아뢰기를, “본국의 풍속은 중국과 거의 비슷합니다. 기후는 추운 날이 적고 더운 날이 조금 긴 편이며, 승(僧)은 있으나 도사(道士)는 없습니다. 민가의 기물들은 모두 구리로 만듭니다. 정월 7일에는 집집마다
서왕모(西王母)의 초상을 그려 받들고, 2월 보름에 승과 속인들이 연등(燃燈)을 하는 것이 중국의
상원절(上元節)과 같습니다.
-원문(袁文)의 《옹유한평(甕牖閑評)》에, “고려에서는 2월 15일에 연등을 하여 천신(天神)에게 제사 지낸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국속(國俗)에는 본디 정월 보름에 연등을 하였는데, 성종(成宗)이 번거롭다는 이유로 이를 폐지하였다. 그 뒤 현종(顯宗) 원년(1010) 윤2월에 다시 연등회를 하였는데, 이후로는 으레 2월 보름에 행하였다. 공민왕(恭愍王) 23년(1374)에 이르러서 정월 임오에 연등을 하였는데, 유사(有司)가 2월 보름이 공주(公主)의 기일(忌日)이라는 이유로 다시 정월에 하기를 청한 것이다.- 상사일(上巳日)에는 푸른 쑥떡을 음식상에서 으뜸으로 치고, 단오일에는 그네를 뛰는 놀이를 합니다.” 하였다.
○ 그곳 사람들은 문벌(門閥)을 중요하게 여긴다. 풍속이 의술(醫術)을 모르다가, 왕우(王俁)가
-살펴보건대, 예종(睿宗)의 이름이다.- 의원을 보내 주기를 요청한 뒤로부터 비로소 의술에 통한 사람이 있었다. 남녀가 스스로 부부(夫婦)가 되는 것을 금하지 않으며, 여름철에는 같은 냇물에서 목욕을 한다. 마루 위에다 자리[席]를 깔고, 올라갈 때에는 반드시 신발을 벗는다. 어른을 뵐 적에는 무릎걸음으로 다니고 반드시 꿇어앉으며, 부르면 반드시 예라고 대답한다. 절을 하면 반드시 답례를 하는데, 아들이 절을 할 경우에도 아버지가 반례(半禮)로 답례한다.
《이상 모두 송사》○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일찍이 춘추(春秋)의 중월(中月)
원무일(遠戊日)을
사일(社日)로 삼았다.
○ 원종왕(元宗王) 6년 4월 경신에 태자가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어 음악을 연주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국속(國俗)에
도가(道家)의 설로 인해서 매년 이날이 되면 반드시 모여서 술을 마시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았는데, 이를 일러
수경신(守庚申)이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시속(時俗)을 따라서 한 것인데, 당시의 의논이 이를 그르다고 하였다.
《이상 모두 화한삼재도회》○ 그곳의 군민(軍民)들은 나라의 관원을 만나면 아주 공손하게 대하며, 평상시에는 조회할 때에 무릎을 꿇고서 앉는다. 관원이나 백성들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절을 하면 아버지 역시 반례(半禮)로 답배(答拜)하며, 여승(女僧)들은 맨땅에 머리를 대고 마주 대해 절한다. 그들의 습속은 도적질을 하지 않으며, 송사(訟事)가 적다.
○ 혹 남녀가 서로 부부가 되고자 하면 그렇게 하게 한다. 여름철에는 시냇물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목욕하는데, 남녀의 구별이 없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조수(潮水)가 밀려 나가서 배가 멀어지면 물속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데, 남녀가 모두 맨몸을 드러낸다. 부모가 병이 들었을 경우에는 방 안에다 가두고 구멍 하나를 뚫어 그곳을 통해 약과 음식을 주며,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는다.
《이상 모두 계림유사》○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넓은 들과 큰 내로 제도(制度)를 달리하는데, 백성들이 그 사이에 살면서 풍속을 달리한다.” 하였다. 이른바 넓은 들과 큰 내는 참으로 반드시 먼 지방이나 절원한 지역은 아닐 것이다. 대개 중국의 땅이라도 시내와 골짜기가 혹 다르면, 습속이 각기 달라서 다 같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만이(蠻夷)는 바다 밖에 있으니, 그 풍속이 어찌 한가지일 수 있겠는가. 고려는 여러 이적(夷狄)의 나라 가운데에서 문물(文物)과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문자(文字)는 해서(楷書)와 예서(隷書)에 맞춰 쓴다. 서로 주고받을 때에는 절하고 무릎을 꿇으니, 공경하고 삼가는 것은 족히 숭상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풍속이 더럽고 야박하며 잡스러워서, 오랑캐의 풍속을 끝내 다 고치지 못하였다. 관혼상제(冠婚喪祭)는 예(禮)에서 말미암은 것이 적고, 남자들이 쓰는 건책(巾幘)은 비록 당제(唐制)를 대충은 모방하고 있으나, 땋은 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리는 부인들의 머리 모양은 아직 완연히 좌수(髽首)와 변발(辮髮)의 모습이 있다. 부잣집에서는 아내를 3, 4명이나 맞이하는데, 조금만 뜻이 맞지 않으면 곧바로 이혼하고, 아들을 낳으면 다른 방에 거처한다. 병을 앓을 경우에는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약을 들이지 않으며, 죽어서 염(殮)할 때에는 관(棺)에 넣지 않는다. 비록 왕이나 귀족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만약 가난한 사람이 장사 지내는 데 필요한 물품이 없으면, 들 가운데에다 버려두고 봉분도 하지 않고 비석도 세우지 않으며,
개미나 까마귀나 솔개가 파먹는 대로 내버려 두는데, 사람들이 이를 그르다고 하지 않는다.
-《송사(宋史)》에는, “귀신을 믿고 음양설(陰陽說)에 구애되어, 병이 들어도 서로 보살펴 주지 않고, 염(殮)을 할 때에는 관(棺)을 쓰지 않는다. 가난한 자가 죽으면 들 한가운데다가 놓아둔다.” 하였다.- 음사(淫祀)에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고
-《수서(隋書)》에는, “고구려는 귀신을 공경하여 섬기고 음사(淫祠)가 많다.” 하였다.- 부도(浮屠)를 좋아하여, 종묘(宗廟)의 사당에도 중[桑門]을 참배시켜 그 사이에서 범패(梵唄)를 부르게 한다. 게다가 말이 통하지 않는 탓에 탐욕을 부려 회뢰(賄賂)가 성행하며, 길을 다닐 때에는 달리기를 좋아하고, 서 있을 때에는 허리 뒤에다가 손을 얹는 자가 많다. 부인이나 승니(僧尼)가 다 남자의 절을 한다. 이런 것들은 가히 해괴한 것들이다.
○ 고려는 땅이 넓지 못하나, 백성이 매우 많다. 사민(四民)의 업(業) 가운데에서 선비[儒]를 귀하게 여기므로, 그 나라에서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산림(山林)이 지극히 많고 넓고 평평한 땅이 적기 때문에, 경작하는 농민이 공장이[工技]를 따르지 못한다. 주(州)나 군(郡)의 토산(土産)은 다 관가로 들어가므로, 장사치는 멀리 나들이하지 않는다. 다만 한낮에 고을에 가서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기에게 없는 것을 서로 바꾸는데, 이것을 만족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람됨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女色)을 좋아하며,
분별없이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긴다. 남자와 여자가 혼인을 할 때도 경솔히 합치고 쉽사리 헤어져서, 전례(典禮)를 본받지 않으니,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다.
○ 고려의 옛 풍속은, 사람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아니하고 오직 귀신을 섬길 줄만 알아,
주저(呪咀)와 압승(壓勝)을 일삼는다.
왕휘(王徽) 때 사신을 보내어 들어와 조공을 바치고 의술(醫術)을 구해 간 뒤로부터 사람들이 점차 의술을 배워 익혔으나, 그 방술에 정통(精通)하지는 못했다. 중화(重和) 무술년(1118, 예종13)에 사신이 와서 소장(疏章)을 올려 의직(醫職)을 내리어 가르쳐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상(上)이 그 건의를 허락하여 마침내 남줄(籃茁) 등을 고려로 보냈는데, 두 해가 지나서 그들이 돌아왔다. 그 뒤로부터 의술에 정통한 자가 많아져서, 보제사(普濟寺)의 동쪽에 약국(藥局)을 세우고
관원(官員)을 두었다. 고려에서는, 다른 물화는 모두 물건을 가지고 서로 교역(交易)하는데, 오직 약을 살 때만은 간혹 전보(錢寶)를 가지고 교역한다.
○ 고려는 본래 귀신을 두려워하여 믿고 음양(陰陽)에 얽매여, 병이 들면 약을 먹지 않으며, 비록 부자간 같이 아주 가까운 육친이라도 서로 돌보지 않고, 오직 주저(呪咀)와 압승(壓勝)만 할 줄 안다. 전대의 역사서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그 풍속이 음란해서, 저녁이 되면 으레 남녀가 떼 지어 난잡한 노래를 하고, 귀신에게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는데, 10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동맹(東盟)이라 부른다.” 하였다. 왕씨(王氏)가 나라를 차지한 이후로는 10월에 지내던 동맹의 모임을 지금은 10월 보름에 소찬(素餐)을 차려 놓고 지낸다. 이를
팔관회(八關會)라 하는데, 예의(禮儀)가 아주 성대하다. 또 세속에서는 부처 섬기기를 좋아하여, 2월 보름에 모든 승사(僧寺)에서 촛불을 켜 놓는데, 아주 번화하고 사치스럽다. 이때에는 왕과 비빈(妃嬪)들이 모두 가서 그것을 구경하며, 나라 사람들은 길이 시끄럽도록 도로를 메운다.
○ 국관(國官)과 귀인(貴人)들 역시 큰 거리를 걸어서 지나가는데, 아전과 백성들이 그들을 보고는 모두들 길을 피한다.
○ 부인들이 출입할 때에도 역시 말과 노복을 공급하는데, 이들은 대개 공경(公卿)이나 귀인의 처로, 따르는 종자가 2, 3인에 지나지 않는다. 검은 깁으로 얼굴을 가리는 너울[蒙首]을 만들어 쓰는데, 그 끝이 말 위를 덮으며, 거기에 또다시 갓[笠]을 쓴다. 왕비(王妃)와 부인(夫人)만은 오직 다홍으로 장식을 하되,
거여(車轝)는 없다. 옛날 당(唐)나라 무덕(武德 618~626)과 정관(貞觀 627~649) 연간에 궁인들이 대개 말을 타면서 대부분
흑멱리(黑冪籬)로 전신을 가렸다고 하는데, 지금 고려의 풍속을 보니, 너울의 제도가 어찌 당나라 때 멱라의 유법(遺法)이 아니겠는가.
○ 옛 역사서에, 고구려는 그 풍속이 다 깨끗하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그러하다. 그들은 매양 중국인의 몸에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서며,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씩 목욕을 하는데, 시내에서 많이 한다. 남자 여자의 구별이 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굽이 따라 몸을 벌거벗고서도, 이를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의복을 빨고 깁이나 베를 표백하는 것은 다 부녀자들의 일로, 밤낮없이 수고롭게 일하면서도 감히 고생스럽다고 하지 못한다. 우물을 파고 물을 긷는 것도 대개 시냇물과 가까운 곳이고, 위에
녹로(鹿盧)를 걸어 함지박[槽]으로 물을 긷는데, 그 함지박의 모양새는 배의 모양과 비슷하다.
○ 민장(民長)의 명칭은 중국의 향병(鄕兵)이나 보오(保伍)의 장과 같은데, 백성들 가운데 부유한 자를 뽑아 시킨다. 그
마을의 큰일이면 관부(官府)로 나아가 처리하고, 작은 일이면 곧 민장에게 맡긴다. 그러므로 거기에 사는 세민(細民)들이 자못 존중하고 섬긴다.
-살펴보건대, 지금 주현(州縣)에는 향소(鄕所)가 있고, 이(里)에는 존위(尊位)가 있는데, 모두 고을 사람들 가운데 반호(班戶)가 하며, 마을 안의 작은 일들을 처리하니, 이것이 바로 고려 풍속의 민장(民長)과 같은 것이다.-○ 고려의 풍속은 관리(官吏)나 병졸의 기율(紀律)이 비록 엄하기는 하나, 평소에 기거하는 예에는 간혹 자질구레한 예를 일삼지 않는다. 무릇 국상(國相)이나 종관(從官)도 소속이 같은 사람과 왕래하다가 서로 만나면, 반드시 얼굴을 가다듬고 기립한다. 통할(統轄)이 없는 나머지 관원이나 이졸(吏卒)들이 오래도록 서로 보지 못했으면, 비록 네거리나 궁정에서라도 반드시 배례를 하는데, 관(官)에 있는 자도 역시 구부렸다가 펴서 답배(答拜)하는 시늉을 한다. 대저 남에게 예를 갖추었는데도 답하지 않으면 공경했는가를 반성해 보라 하고, 예를 잃으면 이를 야(野)에서 구하라 하였으니, 대략 여기에서 볼 수 있다.
○ 고려는 공장이[工技]의 기술이 지극히 정교한데, 그 가운데 뛰어난 재주를 가진 자는 다 관아(官衙)에 귀속된다.
복두소(幞頭所)나
장작감(將作監)이 그런 곳이다. 근래에 듣자니, 거란(契丹)의 항복한 포로 수만 명 가운데 공장이가 10분의 1을 차지하는데, 그들 가운데 정교한 솜씨를 가진 자를 택해 왕부(王府)에 머물게 하였다고 한다. 이에 근년에 들어서는 기복(器服)이 더욱 공교하게 되었는데, 다만 화려한 것이 자못 많아 전날처럼 순수하고 질박하지는 못하다.
○ 예전에는 전하기를, “창우(倡優)들이 사는 집은 긴 장대를 세워 일반 백성의 집과 구별한다.” 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그렇지가 않다. 대개 그 풍속이 귀신에게 음사(淫祀)하니, 역시 압승(壓勝)하거나 기양(祈禳)하는 도구일 뿐이다.
○ 고려 사람들은 대개 머리에
침골(枕骨)이 없으나, 중이 되어 머리를 깎으면 그것이 보이니, 자못 놀랍고 이상하다. 《진사(晉史)》에는, “삼한(三韓) 사람들은 아이를 갓 낳으면 곧바로 돌로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든다.”고 하였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대체로 종류와 타고난 자품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지, 반드시 돌로 눌러서 납작해지는 것은 아니다.
-《남당서(南唐書)》에, “고려의 풍속에는 편두(匾頭)를 중요하게 여겨, 남자 아이를 낳으면 아침마다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든다.” 하였다. 《송사》에는, “고려 사람들의 머리에는 침골(枕骨)이 없이 모두 납작하다.” 하였다.-○ 고려의 풍속에는 주산(籌算)이 없다. 관리가 돈이나 비단을 출납할 때에는 회계하는 아전이 편목(片木)에다 칼을 가지고 자국을 긋는데, 한 물건을 기록할 때마다 한 자국을 긋고, 일이 끝나면 내버리고 쓰지 않아, 남겨 두었다가 참고하는 법이 없다. 그 방법이 매우 간단하니, 이 또한 옛날에 결승(結繩)하던 유의(遺意)이다.
○ 고려는 법에 관비(官婢)를 두어 대대로 물려 내려온다. 그러므로 왕부(王府)로부터 국관(國官)이나 도관(道觀), 사찰(寺刹)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비를 지급해 준다. 그들이 일을 할 때에는 어깨에 멜 힘이 없으면 등에 지는데, 그 걸음걸이가 아주 빨라서 남자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 지거나 이는 일은 그 노고가 똑같다. 물이나 쌀이나 밥이나 마시는 것 모두를 다 구리 항아리에 담으므로 어깨에 메지 않고 머리 위에 인다. 항아리에는 두 귀가 있어서, 한 손으로는 한 귀를 붙들고 한 손으로는 옷을 추어올리고 가는데, 등에는 아이를 업었다. 경서(經書)를 상고하면 “머리가 반백인 자는 도로에 지거나 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힘을 쓰는 것이 참으로 수고로워서, 근골에 힘이 없으면 대개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마저 등에 업었으니, 이른바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살기 좋은 곳으로 찾아온다.”는 것인가?
○ 고려의 행정은 간편한 것을 숭상한다. 그러므로 소송(訴訟)의 문서 같은 것은 간략하게 하여 글로 기록하지 않는다. 관부에서 일을 처리할 때는 책상 앞에 앉아서 하지 않고 단지 걸상에 앉아서 지시할 뿐이다. 아전이 안독(案牘)을 받들어서 무릎을 꿇고 앞에서 이를 올리면, 윗사람이 듣고는 그 즉시
비결(批決)을 한다. 그런데 뒤에 상고하기 위해 문서를 보관해 두는 일이 전혀 없고, 일이 끝나면 내버려서 문서를 보관하는 창고가 없다. 오직 중국의 조명(詔命)이나 신사(信使)의 글만은 왕부(王府)에 창고가 있어서 여기에다 잘 간수해 두어서 상고할 자료로 삼는다. 음식을 공궤(供饋)하고 세숫물을 올릴 때에는, 머리를 숙이고 무릎걸음으로 가서는 손을 높이 받들어서 바치는데, 그 위의(威儀)가 아주 공손하다. 무릇 오랑캐이면서도 능히 이러하니, 몹시 가상하다.
○ 고려의 풍속은 술[酒]과 단술[醴]을 중히 여긴다. 공회(公會) 때에는 다만 왕부(王府)와 국관(國官)만이 상탁(床卓)과 반찬(盤饌)이 있을 뿐, 그 나머지 관리와 사민(士民)은 다만 좌탑(坐榻)에 앉을 뿐이다. 동한(東漢)에서는
예장 태수(預章太守) 진번(陣藩)이 서치(徐雉)를 위하여 한 탑(榻)을 마련하였으니, 전고(前古)에도 이 예법(禮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고려 사람들은 탑 위에 또 작은 소반[小俎]를 놓고, 그릇은 구리[銅]를 쓰고, 말린 고기와 어채(魚菜)를 섞어서 내오되, 풍성하게 하지는 않는다. 또 순배(巡杯)하는 데에도 절도가 없으며, 오직 잔을 많이 돌리기만을 힘쓸 뿐이다. 탑(榻)마다 단 두 사람만 앉을 수가 있기 때문에, 만약 빈객이 많이 모이면 그 수에 따라 탑을 늘려 각기 서로 마주 앉는다. 나라 안에 밀[麥]이 적어서 모두 다
장사치[賈人]들이
경동도(京東道)로부터 사 오므로, 면(麵) 값이 대단히 비싸서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먹는 음식을 가지고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있으니, 이 또한 웃을 만한 일이다.
○ 고려의 풍속은 밤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데, 특히 사신을 접대하기를 더욱 삼가서 잘한다. 매번 잔치가 파할 때마다 항상 한밤중을 넘는다. 산이나 섬, 주(州), 군(郡)의 교외나 정자, 관사에서는 모두 뜰 가운데 홰를 묶어 불을 밝히는데, 산원(散員)들이 이 홰를 잡는다. 사신이 묵고 있는 관사로 돌아갈 때면 앞에 열을 지어 늘어서서 서로 나란히 간다.
○ 고려는 정치가 아주 어질며,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금한다. 그러므로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때에 맞추어서 사용하는데, 이것을 잡을 때는 네 발을 묶고 타는 불속에 던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기를 기다려서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내장을 다 자른 다음,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 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졸렬함이 이와 같다.
○ 《송사》에는, “고려 사람들은 성품이 유순하고 인자하며, 죽이는 것을 싫어해서 도살을 하지 않는다. 만약 양이나 돼지고기를 먹고 싶으면 짚으로 덮어 싸서 구워 먹는다.” 하였다.○ 고려의 풍속은 양과 돼지가 있기는 하지만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하며,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 그러므로 미꾸라지[鰍], 전복[鰒], 조개[蚌], 진주조개[珠母], 왕새우[蝦王], 문합(文蛤), 붉은 게[紫蟹], 굴[蠣房], 귀각(龜脚), 해조(海藻), 곤포(昆布)는 귀천의 분별없이 잘 먹는데, 구미는 돋구어 주나 비린내가 나고 맛이 짜서 오래 먹으면 싫증이 난다. 바다 사람들은 썰물이 질 때 배를 섬에 대고 고기를 잡는데, 그물을 잘 만들지 못하고 다만 성긴 천으로 고기를 잡으므로, 힘만 많이 들고 잡는 것은 적다. 다만 굴이나 대합 같은 것들은 조수가 빠져도 바다로 나가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하여 이것을 줍는데, 아무리 주워도 없어지지 않는다.
○ 왕성(王城)의 장랑(長廊)에는 매 10칸마다 장막을 치고 불상을 설치하고, 큰 독에 멀건 쌀죽을 저장해 두고 다시 국자를 놓아두어 왕래하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떠먹게 하는데, 귀한 자나 천한 자를 가리지 않고 아무나 먹게 한다. 승도(僧徒)들이 이 일을 맡아서 한다.
○ 왕부(王府) 공회(公會)에 옛날에는 촛불을 쓰지 못하였으나, 요즘은 차차 잘 만들어, 큰 것은 서까래와 같고, 작은 것도 길이가 2척이나 되는데, 끝내 훤히 밝지는 못하다. 회경전(會慶殿)이나 건덕전(乾德殿)에서 잔치를 할 때는, 뜰 가운데 홍사(紅紗)의 초롱(燭籠)을 마련하고, 녹색 옷을 입은 사람이 띠와 홀(忽)을 잡고 있다. 이에 대해 물어보니, 말하기를, “이들은 새로 입사(入仕)한 사람이다.” 한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새로 급제한 사람이다.” 하였는데, 이제서야 다 같은 품계의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알겠다.
○ 나무꾼[樵人]은 원래 전업(專業)이 없고, 다만 일에 틈이 나면 소년이나 장년이 힘에 따라 성 밖에 있는 산에 나가 나무를 한다. 대개 성 부근의 산은 음양설(陰陽說)에 의해 구기(拘忌)가 있어서 나무를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에는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아 푸른 그늘이 아주 좋다. 사신이 관소(館所)에 머물러 있는 동안이나 배에 올랐을 때에도, 모두 공급을 맡은 자가 있어 군불을 때고 물을 끓이는 나무를 대는데, 어깨에 메는 것은 잘 하지 못하고 등에 지고 다닌다.
○ 뱃사람들은 짧은 베옷[短褐]을 몸에 걸치며, 아래에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 배 한 척마다 10여 인이, 밤에는 갑판을 울리고 삿대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서로 화답하는데, 시끄럽기가 마치 거위나 따오기가 떼를 지어 우는 것 같아, 곡조나 감정이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으니, 이는 대개 그 풍속이 그러한 것이다.
《이상 모두 고려도경(高麗圖經)》
동이(東夷)의 천성이 인자하여, 그 땅에는 군자(君子)가 죽지 않는다는 나라가 있다. 또 기자(箕子)가 봉해졌던 조선 지역에서는 본래부터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잘 알았다. 이에 그 남자들은 예의로 행동하고, 부인들은 정숙함을 지키며, 음식을 먹을 때는 변두(籩豆)를 사용하고, 길을 가는 자들은 서로 길을 양보한다. 그러니 참으로 여러 잡다한 오랑캐 족속들이 이마에 자자(刺字)하고 발에 굳은살을 지우며, 변발(辮髮)을 하고
횡폭(橫幅)을 입으며, 부자간에 서로 잠자리를 같이하고 친족이 관곽(棺槨)을 같이하는 등의 편벽되고 괴이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사군(四郡)을 설치하면서부터는 신첩(臣妾)의 나라로 내속(內屬)하여 중화(中華)의 정치 교화에 점차 물들어졌다. 비록 위(魏)나라를 거치고 진(晉)나라를 지나면서 시대의 기복에 따라 잠시 이탈했다 합쳐졌다 하기는 하였으나, 마음속에 뿌리박은 의리는 없어진 적이 없었다. 당(唐)나라 때 학교를 넓히고 사유(師儒)를 숭상하였다. 이에 신라에서는 뛰어난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어 경사(京師)에서 배우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살펴보건대, 본판(本板)의 사이사이에 빠진 글자가 있다.- 이에 바람에 휩쓸리듯 갑작스럽게 교화되어 즐겁고 공경스럽게 유학을 지켜 나갔다. 이에 비록
연한(燕韓)의 변두리 편벽된 곳에 살기는 하였지만,
제로(齊魯)의 기풍과 운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위로는 조정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舍)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자제 가운데 결혼을 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 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조금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하여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이나 도관(道觀)에서 강습하며, 아래로는 병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에게서 글을 배우니, 아아, 훌륭하기도 하다. 그리고 제후가 공을 이룩하는 것은 실로 천자의 위령(威靈)에 힘입은 것이고, 제후가 덕을 드러내는 것은 실로 천자의 교화에 따른 것이다. 고려 사람들은 중국에서 볼 때에는 바다 한구석에 사는 후백(侯伯)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 문물의 성대함이 이와 같으니, 이는 대개 좋은 감화에 물들은 소치이니, 이 또한 위대하지 않은가. 비유하자면, 해와 달을 비롯한 삼신(三辰)이 원기(元氣)를 빌어서 열(列)을 이루나, 그것들이 밝게 비추어서 드러나는 것은 하늘의 밝음이 되는 것이며, 초목의 온갖 열매들이 원화(元化)를 받아서 꽃을 피워 내나, 그 꽃들이 아름답게 피고 지는 것은 땅의 문채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상동》○ 고려의 습속은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어질고 유순하며, 죽이는 것을 싫어하여 형법(刑法)에는 참혹한 형벌이 없다. 다만 예모(禮貌)는 중국과 차이가 있다. 왕의 친족이나 귀척(貴戚)들을 만나면,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수그리고 있으며,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을 만났을 경우에는, 몸을 구부리고 고개를 수그리는 것을 예의로 여겨, 마치 중국 사람이 구적(寇賊)을 만나서 감히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한다. 이것은 오랑캐의 풍속인데, 습관이 되어서 보통으로 여긴다.
《삼재도회속집(三才圖會續集)》○ 혹자가 고려의 풍속이 좋은가라고 묻기에 답하기를, “그래도 오랑캐의 풍속이 남아 있다.” 하였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고려는 바로 기자(箕子)의 나라로, 위에는 존귀한 자가 있고 아래에는 등급에 따른 직질(職秩)이 있어서, 참으로 선왕(先王)의 유풍(遺風)이 남아 있으니, 중국에서 그들을 볼 때에는 다른 외국(外國)의 예로 말해서는 안 된다.
《송학사전집(宋學士全集)》
이상은 고려(高麗)에 관한 것이다.
○ 오랑캐의 여러 나라 가운데 조선보다 예의가 있는 나라는 없다.
《오잡조(五雜俎)》○ 조선은 기자가 옛날에 봉해졌던 지역으로, 해외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다.
○ 조선은 바로 옛날 기자의 후예들로서,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의 제도 및 친소(親疎)와 귀천(貴賤)의 체모(體貌)가 빛나서 중국의 풍습이 있다.
○ 조선은 한해(澣海)의 동북쪽에 있는데, 기자가 옛날에 봉해진 지역이다. 풍속이 본디 군신 상하의 의리를 안다.
《이상 모두 황화집(皇華集)》○ 기자가 팔조의 가르침을 베풀어서 백성들을 다스렸으므로, 지금까지도 그 유풍이 남아 있다.
《조선기사(朝鮮紀事)》○ 조선의 백성들은 벼[禾]나 삼[麻]을 모두 움집[窖]을 파고 넣어 두어, 보관하는 법이 요동 사람들과 같다.
○ 세속에서는 재가(再嫁)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재가하여 난 자식 및 행실이 좋지 못한 부녀의 자식은 모두 사류(士流)에 들거나 사판(仕版)에 끼이지 못하게 한다.
○ 선대 때부터 일찍이 문무(文武)의 벼슬을 겸한 사람을 양반 자제(兩班子弟)라고 부르는데, 이들에게는 다만 독서하는 것만 허락되고 기예(技藝)를 익히지 못하게 한다. 혹 행실이 좋지 못하면 나라 사람들이 모두들 그를 비난한다.
○ 기국(碁局)이나 쌍륙(雙陸)과 같은 따위의 놀이는 민간의 자제들이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 국속(國俗)에 그림을 거는 일이 적다. 무릇 공관(公館)의 사면 벽에는 모두 병풍을 벌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산, 물, 대나무, 돌을 그리거나 혹은 초서를 써 놓았는데, 높이는 2, 3척가량 된다. 와탑(臥榻) 역시 그러하다.
○ 무거운 것을 끄는 데는 말을 부리는 자는 많고 소를 쓰는 자는 적다.
○ 목축(牧畜)에서는 양(羊)을 전혀 볼 수가 없다. 평안도와 황해도 두 도에서 본 것이 모두 이러하다. 관부(官府)에서라야 양이나 돼지가 있는데, 향음례(鄕飮禮) 때 간혹 이것을 쓴다.
○ 그 풍속이, 남자들은 모두 짐을 등에다 진다.
○ 그 풍속이, 사람들을 보면 구부리는 것으로 공경을 표하고, 부르는 명이 있으면 역시 구부리고 달려가서 대답한다.
○ 이마에 물동이를 이고서도 손으로 붙잡지 않는 자도 있고, 쌀자루를 머리에 이고서 걷거나 달려가는 자도 있다.
○ 내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전에는 모두들 전하기를, “그 나라에서는 청상 과부들이 관(館)과 역(驛)에서 일을 본다.” 하기에, 내가 그 풍속이 더러움을 미워하였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보니, 무릇 와서 일을 보는 자는 모두 주현(州縣)의 관리들이고, 부인네들은 역 바깥에 있는 별실(別室)에서 밥 짓는 일을 맡았다. 서로 전하기를, “그런 풍속은
경태(景泰) 때 그 왕이 습봉(襲封)한 이후로부터 변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요동(遼東)의 부총병(副摠兵) 한빈(韓斌)이 말한 것이다.
○ 시냇물에서 남녀가 함께 목욕한다는 일은 구지(舊志)에 나오는 것으로, 지금은 그런 풍속이 변하였다.
○ 무릇 일로(一路)에 물이 있는 곳에는 모두 소나무를 베어다가 다리를 놓는데, 가지는 깎아서 난간을 만들고, 솔잎은 좌우로 벽을 쌓아 흙이 새나가는 것을 막는다. 마룻대나 들보를 만들면서 또한 곧은 나무를 쓴 것이 드물며, 누대(樓臺)의 기둥 역시 각각 상단과 하단 두 단으로 하였다.
○ 가는 곳마다 흰 베[白布]로 장막을 만들었는데, 육로로 다닐 때에는 말에 싣고서 뒤를 따른다.
《이상 모두 조선부(朝鮮賦) 주》○ 조선의 풍속은, 경기(京畿)와 강원(江源)
-살펴보건대, 원(源) 자는 마땅히 원(原) 자로 써야 한다.- 은 지역이 본디 예맥(穢貊)의 지역이다. 그러므로 그곳 사람들은 신중하고 성실하며, 기욕(嗜欲)이 적고 염치가 있으며, 동성(同姓) 간에는 결혼을 하지 않고, 기휘(忌諱)하는 바가 많다. 충청(忠淸)과 황해(黃海)는 그 지역이 본디 마한(馬韓)의 지역이다. 그러므로 그곳 사람들은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할 줄 알고, 면포(綿布)를 짜며, 기강(紀綱)이 적고, 말을 탈 줄 모르고, 금은보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대부분 맨머리[魁頭]에 맨상투[露髻], 베로 만든 포(袍), 짚신[草履] 차림을 하며, 귀신을 믿고, 모여서 가무(歌舞)를 한다. 전라(全羅) 지역은 본디 변한(弁韓)의 지역이다. 그러므로 언어와 풍속이 진한(辰韓)과 서로 비슷하다. 경상(慶尙)은 그 지역이 본디 진한의 지역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편두(偏頭)이며, 남녀의 모습이 왜인과 가깝다. 평안(平安)과 함경(咸鏡)은 풍속이 활쏘기나 말 타기를 숭상한다.
-《잠확유서(潛確類書)》에, “평안과 함경은 말갈(靺鞨)과 가까운 탓에, 풍속이 활쏘기와 말 타기를 좋아하여 병졸들이 정예롭고 강건하다.” 하였다.- 충청, 경상, 전라는 지역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여 가장 부유하며, 풍속이 시서(詩書)를 숭상하는 탓에 인재의 배출이 다른 도보다 배는 된다.
《청일통지(淸一統志)》
이상은 조선(朝鮮)에 관한 것이다.
첫댓글 궐한님의 생각과 논리가 아주 분명하게 들어나는 글입니다. 이곳 카페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영토면에서 아주 흡사하네요. 물론 새로운 고증이나 증거가 발견되면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사"이기 때문에, 마지노선을 그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시도, 발상전환, 열린 사고는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정작 필요할 땐 망서리는 것이 인간들이지요. 그러나 조선사 만큼은 열린 사고,발상의 전환이 없이는 연구하기가 힘든 과목입니다. 왜냐면 조선사를 팽개친 무리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글 늘 잘 보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성원부탁드립니다.
격려 감사합니다.
먹고살 문제가 지금 시급한데도...역사란게 저에게는 마약인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