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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하늘이 높아졌다. 일요일 내내 잠에 빠져 지내고 월요일에야 눈떠 올려다본 하늘은 이틀 만에 부쩍 키가 자라 있었다. 파란 창공에서 여름도 떠날 채비를 하는 서늘한 기척이 느껴졌다. 언제부터인가 계절은 더디 가는 법이 없다.
쨍한 햇볕이 빌딩 유리에 반사되어 이리저리 사각 편린을 나부낀다. 버스 차창에 기대었던 나는 눈을 찌르는 볕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굳이 피하진 않는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잦아서 더위도 시들했다. 폭염의 기억도 이 여름에 마지막일 것 같은 기분은 아쉬움 때문일까. 이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장담은 말아야 한다고 하는가 보았다. 아무런 기대가 없던 계절이었건만 그 끝자락을 붙들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올 여름 휴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을에는 가능할까 짐작하지만 그 또한 기대가 되진 않았다. 신규 사업팀에 속한 만큼 새 제품 출시가 본격화되는 시점부터 삼 개월은 다른 여유를 부리기 어려웠다. 홍보 자료를 정리하고 팸플릿을 만들고 매뉴얼과 보도자료를 완성하고 판촉 사업을 벌이고 동시에 후속 제품을 준비하면서 정기적인 회사 브랜드 마케팅도 벌여야 했다.
올해 들어 부쩍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사주는 본래의 보안 솔루션 사업에 더해 유통 물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신규 아이템을 발굴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오가느라 바쁜 그가 간혹 보내오는 메일에는 상품에 대한 역학조사를 지시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는 가장 큰 방향만 제시하는 것이 사주의 역할이라는 경영 철학을 고수했고 회사 운영에는 무관심한 듯 실무는 상무이사 이하 실장급에게 일임했다.
내가 사주에게서 직접 메일을 받게 된 것은 올해 들어서이다. 윤이사가 승진하고 공석을 메우기 위해 정식 직급도 아닌 실장 대우로 위촉되자 사주가 직접 메일을 보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우석씨, 우보천리라고 했습니다. 소걸음에 천리를 간다는 마음이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 그런 마음으로 임해주세요. 그럼 언제 술이나 한 잔 합시다.’
메일을 받고는 한참이나 발신인을 들여다봤다. 사장, 홍인태. 분명 사주가 보낸 것이었지만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영 객쩍었다. 언제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어떤 사주가 사원에게 보내는 공문 성격의 글에 그런 식의 첨언을 달까.
아마도 그런 기질 때문이겠지만 실장급 회의 자리에서는 종종 사주의 방랑기질이 신선놀음에 비유되곤 했다. 그가 어디서 무얼 보며 어떤 궁리를 하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기에 더욱 입방아에 오르는지도 몰랐다. 메일에 보니 신규 아이템 구상하시던데, 저에게 역학조사를 지시하셨던 걸요. 내가 하는 말에 하나같이 콧방귀를 끼기 마련이었다. 신규 아이템 구상은 무슨, 골프 치러 다니다 국내에서 본적 없는 물품이 눈에 띄면 쓱 한 번 던져보는 거지.
지난 달 발송된 메일에서 사주는 전자담배 시장조사를 지시했다. 전자담배는 국내에서도 이미 선점하고 있는 브랜드가 있었지만 잠재 시장 규모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성장 가능성이 높은 품목이었다. 시장조사 및 기존 상품에 대한 면밀한 검토 내역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사주의 안목이 강태공식의 무작정 낚싯대만 드리우는 수준 이상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실제로 전자 담배는 유럽 시장에서도 이미 그 효용성이 인정받고 있었고 여러 검증제도를 통해 질적인 안정성을 확보하도록 제도적으로도 완화되는 추세였다. 대다수 중국산인 전자담배의 안정성이 문제가 되고 있을 뿐 제품이 우수하다면 유통을 장려하겠다는 포석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럽 시장에서 인정받은 제품이라면 두 말 없이 받아들여질 것이 분명했다. 시장의 장벽을 헐고 있는 유럽 한국 간 통상 정책에 비춰보더라도 장애가 발생할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이십만 원 대의 고가 상품이라는 점에서 제조 단가를 올려 고급화 전략으로 차별화를 시도한다면 브랜드 가치와 이윤의 두 가지 면에서 실익을 거둘 수도 있었다. 시장은 십년 내 연 500억 규모로 확대될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으니 30%를 선점하더라도 기존 사업 규모를 넘어서는 매출을 기대할 수 있었다.
유통은 기존의 대리점을 통하고 정식 의약품으로 지정된 뒤에는 약국을 이용하면 될 것 이었다. 판촉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만큼 여성지와 포털을 이용해 아내들에게 먼저 어필하는 게 효과적일 듯 싶었고 건강 박람회에 참여하여 신규 브랜드 런칭을 공식화하는 것도 적절할 것이었다.
그런 개략적인 구상안을 정리해 사주에게 메일로 발송한 것이 지난 일주일 전이었다. 만약 사주가 힘을 싣기 시작한다면 그야말로 본격화된 신규 사업을 안정화시키기까지 몇 년이나 매달리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일단 사주가 진지한 자세로 검토하느냐가 문제였다. 세간의 평가대로 그가 강태공의 현신이라면 곧은 낚시 바늘에 미끼를 끼운 격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생각이 거기 미치고 보니 이번 신규 상품 출시를 앞두고 부산 지사의 정실장이 빈틈없는 기획안을 완성한 덕분에 얼마간 짬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올해는 유일한 기회일 수도 있었고 기획안 작업으로 고생했을 정실장이 보란 듯이 휴가를 가는 것도 일종의 복수가 될 듯했다. 윤이사는 성품이 유연한 편이어서 업무상 영향이 없다면 기꺼이 보내줄 터였다. 딱히 문제 될 게 없다는 판단이 서자 아예 결정이라도 된 것처럼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다시 고개 들어본 하늘이 쾌청하다. 이제 가을인가 싶던 섭섭함도 조바심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문득 하늘가로 양각처럼 도드라지는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파란 눈동자 때문일까. 부산에 놀러오면 꼭 연락해요,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잔잔한 바람결처럼 귓가를 스친다. 존. 그의 이름을 발음하자 볕에 데인 듯 뒷목이 홧홧해졌다. 대학시절 벗을 그리며 목적지를 정하던 여행길처럼 휴가를 기대하는 순간 그를 먼저 떠올리게 된 것이다. 부러 머리를 내저으며 그에 대한 상념을 떨치려 들지도 않았다. 차라리 서류 가방을 깊숙이 껴안고는 턱을 괴인 채 그의 모습을 찬찬히 그려보고 있었다. 깊은 눈자위와 높은 콧날, 덥수룩한 수염에 묻힌 얇은 입술이 윤기를 내며 머릿속에 선명한 영상을 비쳤다. 그리고 가슴이 뛰었다. 마치 그의 손길이 가슴을 도드락거리기라도 하듯.
지난 주말 자정이 지난 시간, 집 앞에 도착하자 존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다음날 식사라도 같이하자고 권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길로 부산에 내려가겠다는 것이었다.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갈 길이 멀기도 했다. 더욱이 동행도 없는 장거리 운전이라니 생각만 해도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그러지 말고 인근에 모텔에서라도 잠깐 쉬고 가라고 방을 잡아 주겠노라 했으나 그는 기어이 내려갈 기세였다. 생각해 보니 그가 부산에서 올라오느라 들인 수고에 비하면 한 시간 남짓 종로의 빠를 접한 보상이 고작이었다. 날이 새도록 흥청거리는 이반 문화를 접할 곳은 허다했으나 잠시 쉬어갈 곳은 어디에도 없는 이곳. 도시는 사람이 깃들어야 존재하면서도 사람을 소외시키는 배반의 속성을 지녔다.
끝내 차에 올라타는 그를 그대로 보낼 수 없어서 운전석으로 다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내려앉는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창틀에 턱을 괴는 양이 특유의 장난기가 발동한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음을 새다가 집에 올라가 간단히 술 한 잔 하고 수면을 취한 다음 가라고 권했다. 그제야 솔깃한 듯 그래도 되느냐 묻던 그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은 골목을 두리번거리며 차를 댈 곳부터 찾았다.
술은 둘째 치고 텅 빈 냉장고에서 안주거리를 찾을 수 없어 난감했다. 어쩔 수 없이 야채 통에 묵었던 야채를 꺼내 채를 치고 햄을 썰고 참치까지 얹어 참기름과 간장으로 드레싱을 한 국적 불명의 샐러드를 내놔야 했다. 그러고 나니 또 포크가 문제였다. 혼자 사는 살림이라 이사할 때마다 짐을 줄인다고 살림을 축만 냈을 뿐 새로 들인 건 없어서 포크도 없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존은 젓가락질에 능숙했고 안주도 게걸스럽게 먹었다. 그는 세 병 뿐이던 소주를 거진 혼자 비우고 샐러드 한 조각도 남김없이 먹고도 여전히 허기가 드는지 입맛을 다셨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먹성을 생각하면 허기를 달래기보다 오히려 자극이나 했을 터였다.
이번엔 아쉬운 대로 얼마 남지 않은 김치통을 털어 마찬가지로 참치와 햄을 넣어 찌개를 끓이고 라면을 삶아 사리로 곁들인 후 약주삼아 조금씩 마시라며 집에서 챙겨준 복분자주를 통째 꺼냈다. 이토록 자극적인 매운 찌개와 달디단 술을 동시에 들이켠 적이 있기는 할까. 처음엔 그저 신기하기만 하더니 연신 입바람을 후후 불면서도 수저를 내려놓지 못하는 그를 무심코 지켜보던 나는 더럭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 낯선 이국의 사내와 더운 음식을 차려 놓고 마주 앉은 그 순간에 언제 실감했던지 기억도 나지 않는 감정이 새삼스러워서. 혹여 행복을 느끼는가 자문하다 흠칫, 가슴 한 켠이 서늘했던 것이다.
혹 사람과 삶은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단어가 아닐까. 이 사람으로 하여금 부산에서 서울까지 차를 달리게 한 것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 보다는 혹여 잃어버린 삶에 대한 갈증 때문은 아니었을지. 사람으로 인한 외로움보다 긴 세월 뿌리 없이 살아온 상실감이 그를 허기지게 하고 잠 못 들게 하는 건 아닌지.
나도 게이에요.
나는 묻지도 않은 말에 답했다. 존이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숨지었다. 존이 술잔을 들어 권했다. 그는 치어스, 라고 말하고는 술잔을 비운 뒤 수염을 훔쳤다. 그의 숨은 입술이 감쪽같이 감춰졌다고 생각했을 때 보이지 않는 입술을 열고 비밀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고 있었어요.
난 뜻밖이었으나 놀라진 않았고 그저 담담히 사과했다.
미안해요, 거짓말해서.
괜찮아요.
우리는 여행에 대해 한동안 긴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나 역시 동남아의 몇몇 국가를 다녀본 경험이 있었고 그는 백과사전적인 지식으로 엉성한 내 여행기에 살을 붙였다. 나 또한 유난히 태국에 정이 가더라고 말했을 때 그는 거기 사람들은 욕심이 없어서 그럴 거라고 답을 주었다. 부산은 지내기 좋은가요, 물었더니 그는 고심하듯 한 곳을 길게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진 좋아요.
다음날 그는 기척도 없이 떠났다. 죽은 잠들었다 해가 이울 무렵에 일어난 나는 고마웠다는 간결한 인사가 적힌 메모 한 장을 발견했을 뿐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식욕도 없이 잠이 쏟아져 다시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뜬 것은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미 울리고 있었는지 마침 울리기 시작했는지 모를 벨소리에 핸드폰을 더듬어 귀에 붙였을 때 배경에 파도소리가 넘실대는 가운데 존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산에 놀러오면 꼭 연락해요. 그의 목소리는 조금 들뜬 듯 느껴졌고 여운처럼 감도는 파도소리는 꿈결인 듯 귓가에 흘렀다. 네, 그럴게요.
버스가 거칠게 정차하는 통에 돌아본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서둘러 차를 내려 사옥으로 다가서는 길에 나는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그를 보러 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이 여름이 조금은 느긋하게 흘렀으면 바랐다.
사원카드를 꺼내 출입센서에 대고 들어설 때였다. 누군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는 애교 있게 슬쩍 비켜 정면에 섰다. 정아. 그녀는 입사 동기로 천사 송과장으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천성이 선한 사람이라 누구나 좋아하기도 하지만 여성으로서 기술 영업 사원으로 입사해 기록적인 실적을 달성하고 영업부 과장에 오른 성공담의 주인공이어서 한층 호감을 샀다. 그녀의 경력이 말해주듯 오로지 성실하고 세심한 대인관계로 성장해왔기에 관료주의적인 태도는 전혀 없었다. 과장이면 열 명 단위의 팀을 거느리므로 다른 팀과 비교가 되기 쉬운데, 그녀의 팀은 실적뿐 아니라 결속력도 좋아서 그러한 분위기만으로도 그녀의 인간미와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분기도 너희 팀이 탑이라면서?
3/4분기 실적을 두고 내가 대견하다는 투로 말하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과장된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군다.
예상했던 바 아니겠어? 그나저나...
그녀가 흥미를 보이며 반짝 눈을 밝힌다.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그녀의 장점이자 단점일 터였다.
미스터 존 도우씨는 만나봤어?
어째서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야?
몰라서 물어? 신규 사업 총책이 된다잖아.
뭐?
나는 우뚝 멈춰 섰다.
어디서 나온 정보야?
인사과에서 나온 거니까 믿을만 할 걸?
신규 사업이라니, 아이템이 뭔데?
그건 잘 모르겠네...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가 되레 눈을 흘긴다.
그건 자기가 알고 있어야 하는 정보 아니야?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녀가 무심히 덧붙였다.
오늘 종일 회의라니까 답이 나오겠지.
종일 회의?
송과장이 실망이라는 투로 추궁하는 눈빛을 쏘아내며 말했다.
너 요즘 연애하니? 사장님 어제 입국해서 메일 쐈던데 어디 정신 팔고 다니느라 체크도 안했대?
아... 자느라고.
자기도 늙나보다.
길게 대거리할 시간이 없어서 바쁘게 자리로 향했다. 컴퓨터부터 부팅을 시키고는 회의 일정이 적인 팀 게시판을 확인했다. 모든 일정이 취소되고 종일 회의라는 손글씨가 덧써져 있었다.
사장이 워낙 소리 소문 없이 입출국을 반복하는 일이 잦다보니 주초의 회의 일정을 체크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실장급 미팅에 직접 참석하기는 처음이지만 윤이사가 실장을 하던 때에 회의 자료 등을 준비하느라 습관처럼 챙기던 일을 하필 지번 주에 지나친 것이다.
무엇보다 무슨 내용으로 종일 회의를 하려는 건지 예상이 되질 않으니 회의 준비 자료를 어떻게 갖춰야 할지 막막했다. 모니터에 윈도우 화면이 떠오르자 메일부터 확인을 하느라 자판을 급히 두드렸다. 그러나 막상 확인된 메일 상에는 화면이 뜨다 만 것 같은 두 줄 메모만 남겨져 있었다.
‘내일 종일 회의 합니다. 신규 사업 들어갑시다.’
마우스 휠을 돌려보지만 화면이 내려가진 않았다. 더 이상의 내용이 없음은 물론이고 형식적인 문서 하나조차 첨부되어 있지 않았다. 허탈해져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고 있던 나는 책상 옆 캐비닛에 맨 밑 서랍을 새삼스럽게 주시했다. 그 동안 메일 상으로 지시받은 아이템관련 자료를 모아둔 곳이었다. 반사적으로 서랍을 열어 서류 뭉치를 들어냈다. 최근의 것은 기억이 또렷이 남았지만 나머지 정보들은 뒤섞인 채였다. 일단 시장 조사와 사업 타당성의 결론부만 검토할 생각으로 급히 서류를 넘겨봤다. 겨우 십여 분 남은 시간을 쪼개어 수십 장의 자료를 검토한다는 것이 애초에 무리였다. 별 수 없이 자료를 싸안고 회의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회의실에 이미 자리한 각부 실장들은 아예 허탈한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도 회의 내용을 예상치지 못했고 신규 사업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걸맞는 아이템은 전혀 짐작 못하는 분위기였다.
정과장 뭐 아는 거 없어?
파일을 잔뜩 껴안은 모습 때문인지 최상무가 묻는다. 그는 사주의 먼 친척뻘로 형식적인 직함만 부여받은 물주였다. 경영에 관여하지 않는 편이지만 자금 유동을 유연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자금 흐름을 관리하는 능력만큼은 발군이었다. 실무 위주로 논의하는 팀장급 회의에 굳이 들어올 필요가 없는 그가 자릴 잡고 있는 걸 보니 신규 사업을 벌이긴 벌일 모양이었다. 최상무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만큼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 역시 아는 바가 없어 더듬는 사이에 문이 열렸다. 일시에 몸을 일으키는 기척에 소스라치듯 일어섰다. 사주는 머쓱한 표정으로 들어서 주위에 앉으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사주 홍인태. 서른일곱의 나이. 불과 두 살이 많은 그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외모지만 표정만큼은 친숙한 이웃의 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대면하는 것이 처음이라 그럴까. 사주보다 열 살이나 많은 최상무까지 긴장한 분위기가 어딘가 과장된 듯 느껴진다. 주위를 돌아보던 사주의 시선이 내게서 멈칫했다.
정우석 실장?
과장입니다.
나는 더운 김이라도 쏘인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주가 비죽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지었다. 멀쑥한 외모라고 생각은 했지만 미소 짓는 얼굴에 날이 서는 것 같은 매력이 느껴진다. 성공한 자의 표정이라 해야 할까. 결정권을 가진 자의 오만함이랄까. 자부심으로 이해하기에는 뉘앙스가 조금 다른 듯한 매서운 눈매에 감춰진 기묘한 유혹의 기미.
송과장이 최고 실적을 갱신하던 시기 사주로부터 특별 포상을 받느라 대면하고는 그에 대해 마력이 느껴지더라고 했다. 카리스마? 내가 되물었더니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강조해 말했다. 아니, 마력.
사주가 농담처럼 좌중을 향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미리 축하하죠. 실장으로 승진 됐습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윤이사를 향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둘 박수 소리를 보태기 시작하자 사주가 자르듯 말했다.
신규 사업은 전자 담배를 아이템으로 정했습니다. 일단 프레젠테이션부터 들어볼까요, 정실장?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 못한 채 당혹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윤이사의 눈짓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따갑게 쏘아지는 좌중의 시선도 서서히 바래며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더듬거리는 손으로 노트북에 프로젝션 잭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마른 목을 가다듬는 목청에서 가늘게 떨리는 신음이 섞여 나왔다. 대형 패널에 자료 화면이 떠올랐지만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8.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포인터를 내려놓자 사람들의 한숨이 이곳저곳에서 흘렀다.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 1시에 가까웠다. 중역들은 으레 그런 듯 사주를 대동해 먼저 나섰다. 부서간 조율은 점심 먹으면서 얘기 합시다, 사주가 말하는 걸 들으니 점심시간까지 회의의 연장인 모양이었다.
수고 했어요.
윤이사가 한마디 던지자 주위에서 인사치례를 하는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세 시간을 넘도록 떠들고서도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멍해진 정신을 겨우 수습해 근무하는 층으로 내려가니 엘리베이터 옆에 송과장이 문지기처럼 지켜서 있다.
아이구, 정실장님!
그녀는 팔팔한 성격만큼 큰 목소리로 농을 하며 축하를 대신했다.
아직 아니야.
내 어설픈 목소리를 쥐어박듯 그녀는 우레 같은 소리로 말했다.
섭섭하게 왜 이러세요, 정실장님! 승진 하셨는데 비싼 밥 한번 사시죠.
그만 해라, 좀.
달리 그녀 입을 막을 재간이 없다는 걸 아는 나는 일단 나가자며 등을 떠밀었다. 점심시간이 이미 지나 부서원들은 식사를 이미 한 뒤여서 그녀와 조촐히 마주 앉았다. 인근의 중식집으로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송과장은 메뉴도 보지 않고 이름도 낯선 음식들을 주문했다. 내가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비싼 거 아니야. 나 그렇게 모진 사람 아닌 거 알면서 그런다.
아니, 그래서가 아니고 정신이 좀 없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다 깜짝 놀랄 일이라는 듯 물었다.
근데 사장님 정말 멋있지?
어?
사장님 말이야. 주진모보다도 잘났지?
그녀가 항시 입버릇처럼 말하는 남자연예인이 주진모였다. 그 영예로운 우상의 왕관을 기꺼이 사주에게 넘기는 걸 보니 실로 마력에 빠지긴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극성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사주의 인상은 오로지 매서운 눈빛뿐이었다.
내 보기엔 수수했어.
얼씨구. 버르장머리 없는 이목구비를 하고 누구한테 수수하데.
남자가 남자 보는 눈이 그렇지 뭐.
겸연쩍게 입맛을 다시는 내게 송과장이 밉지 않게 눈을 흘긴다.
남자들 참 웃겨. 여자들 볼 때는 복숭아뼈 생긴 것 가지고도 트집이면서 저보다 잘난 남자는 곧 죽어도 인정 안하지.
그래, 잘 났어. 잘 났더라. 황송해서 감히 눈을 못 들 정도더라.
그지, 그지? 마력이 막 발산되는 그런 아우라 못 느꼈어?
무슨 아우라까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앞에 잔영처럼 사주의 눈빛이 떠올라 있었다.
자기는 월급쟁이라 몰라. 난 일하면서 사장들 많이 만나봤잖아. 별것도 아닌 인간들이 돈 좀 있다고 남들 낮잡아 보는 건 있지만 우리 사장님 포스는 퀄러티부터가 다르다니까.
그녀가 발음을 굴리다 제풀에 히죽거리는 걸 보면 서른넷이나 된 나이가 반 토막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침 음식이 내어지자 입을 꼭 다무는 양이 개구쟁이의 표정이다. 그 순간 엉뚱하게도 수염사이로 입술을 비죽 내밀던 존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이렇게 쳐다보셔요? 부끄럽사와요, 오라버니.
그녀는 술자리 사석에서나 부르던 호칭을 꺼내며 사뭇 요염하게 얼굴을 외로 돌려 눈을 깜빡인다. 음식을 서빙하던 남자 스탭이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겨 한동안 넋을 놓는다. 언제였던가. 우리 연애나 함 해볼까? 장난스럽게 묻던 얼굴.
외모로 보자면 그녀야 말로 연예인을 운운할 만 했다. 백 명이 넘는 여직원들 중에서도 단연 빛을 내는 얼굴이었다. 고교 때부터 수영을 습관처럼 해오고 살사까지 전문가 수준으로 추다보니 몸매는 탄력으로 팽팽하고 골 깊은 가슴과 긴 다리는 여자들도 흘끔거릴 만큼 육감적이었다. 작은 얼굴에 절반은 차지하는 눈과 도톰하면서도 빚은 듯 오똑하게 솟은 콧날이 조화로운데다 동양사람 같지 않은 얇고 긴 입매는 독특한 매력을 자아내서 곧잘 웃을 때면 만개한 호란꽃처럼 이국적이고 화사한 분위기가 향기처럼 뿜어졌다. 어디를 가든 이목이 집중되곤 하지만 특히 나이트나 클럽을 가면 소위 벌떼 같다는 말이 무색하게 남자들에 둘러싸였다. 외모도 그렇거니와 춤사위가 예사롭지 않은 그녀는 조명 아래 보석처럼 빛을 내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도 한 번은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자신 없는 목소릴 낸 적이 있었다. 나도 늙나?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물었을 것이다. 다이애나 송께서 그런 말을 하다니 웬일이야? 그녀는 배시시 맥없이 웃더니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누가 나더러 여자로 안 보인다잖아. 나는 정색을 가장하고 시침을 땠다. 누가? 그녀는 눈썹을 과장되게 치켜 올리며 말했다. 누구긴, 자기지! 연애하재도 싫다며? 나는 납죽 고개를 숙이며 농을 했다. 어디 황송해서 감히 엄두가 나야 말이지. 그녀는 싫지 않은 투로 입을 비죽거렸다. 순 거짓말쟁이. 웃고 넘겼지만 그녀가 나를 두고 한 말이 아닌 걸 알았다. 아무리 뛰어난 외모를 타고 났어도 짝사랑 한번쯤이야 안 할까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맵게 볶아진 면을 동글게 말아 입에 넣는 그녀를 지켜보자니 문득 그런 짐작이 든다. 혹시 그녀가 애태우던 대상이 사주였을까.
부서 꾸려야겠네.
그녀가 심상하게 물었다.
위에서 알아서 하겠지.
실장이면 부서장급인데 자기 부서원들은 자기가 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IT쪽 사업이 아니라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참, 그렇지. 전자 담배라고 했던가. 그럼 신입이나 경력 충원도 하겠다. 근데 존 도우가 총책이면 이제 직속상관이 되는 건가?
어?
그러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부산지사의 지사장 격으로 있는 그가 총책이라면 본사로 올라올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부산으로 발령을 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송과장도 같은 짐작을 하고 있었던지 먼저 물었다.
그런 부산으로 가는 건가?
글쎄.
자기 없으면 나 오리알 신센데.
송과장이 시무룩한 목소릴 냈다.
무슨 소리야. 회사에서 제일 인기 있는 사람이면서. 나야 말로 미운오리 신세지.
아니야, 자긴 달라. 직장 사람들은 직장 사람일 뿐이지. 근데 자기는 친구 같아.
태어나 사람 좋다는 말은 처음 듣네.
사람 좋은 거랑은 다르지. 자기가 좀 까칠하긴 하잖아?
그 소리 왜 안하나 했다.
대신 사람이 깊잖아.
젓가락을 놀리던 내가 손을 멈췄다. 그런가? 자문하면서.
자긴 묵을수록 사람이 좋아. 은근히 의지하게 만드는 그런 게 있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인데 싶다가 형을 떠올렸다. 내가 왜 좋아요? 내가 문득 물었을 것이다. 내 잘난 구석을 자랑삼자고 꺼낸 얘기는 아니었다. 나를 좋아하긴 하는지. 정말 좋아한다면 뜨내기처럼 구는 이유가 무언지 추궁하려 했을 것이다. 스물여섯 즈음의 일이었다. 사는 일이 생각 보다 복잡하고 인생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어렵다는 걸 아직은 이해하지 못할 때였다. 그때 형은 말했다. 넌 언제든 찾아와도 날 받아주는 사람이니까. 그때도 무언가를 먹고 있었을 것이다. 체기가 든 것처럼 가슴이 묵지근해진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나는 송과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내가 왜 좋은데?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새삼스럽다는 표정도 난해한 기색도 아니다. 그저 피식 웃음을 새고는 요리를 집어 입에 넣는다. 하도 태연한 표정이어서 내가 무슨 질문을 하긴 했던가 되레 의심스럽다.
뭐야, 그게 답이야?
퉁명스럽게 채근하니 그제야 그녀는 못 말리겠다는 듯 시시한 투로 말했다.
평범해서 좋아.
평범?
응, 평범해. 여러모로.
에?
난 심통을 부린답시고 과장된 목소릴 냈다.
너무 과분한 칭찬이시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아주.
키득 거리던 송과장이 젓가락을 입에 넣고 입술을 빼물다가는 갸우뚱한다.
그게 얼마나 좋은 칭찬인데 그래?
인물이 아니면 성격이라도 좋다던가. 흔하디흔한 거짓말이 얼마나 많은데 겨우 평범이 칭찬이야?
내가 어림없다는 투로 반박하자 자신도 할 말은 있다는 듯 젓가락까지 내려놓은 송과장이 정색을 했다.
자기 오솔길 알지.
오솔길?
산에 보면 길인 듯 아닌 듯 그런 작은 숲길 있잖아.
근데?
그런 길이 한 번 접어들면 돌아서질 못하는 매력이 있다니까.
그녀 설명에 문득 나는 목이 메인다. 떠날 때 마다 다신 찾지 말아야지 결심한다, 말하던 형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떠돌았다. 무슨 얘기를 하다 형은 그 말을 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갈 데가 있어서 형은 참 좋겠다, 내가 이죽거렸던가. 현관을 나서며 형은 또 말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다시 찾게 되는 이유를. 나는 형의 말을 사랑한다는 뜻의 다른 표현이라고 믿었다.
아직도 모를 일이다. 어차피 헤어진 이의 마음을 짐작해 본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 뿐인 것만 같아서.
소리 알지?
송과장이 느닷없이 묻는다.
응?
나는 얼른 알아듣지 못한 일음을 혀에 굴려봤다.
소리... 박소리?
부산 지사에서 진통제를 챙겨 주던 아가씨다. 얼굴이 붉던 과꽃 같던 여자.
걔도 자기 괜찮다고 하더라.
그랬어?
미덥지 않다는 투로 되물으니 송과장도 눈을 반짝 뜬다.
내 말이. 나도 신기해서 물었다니까. 어데가? 어데가 좋은데? 하고.
얼씨구?
꺄르르 웃던 송과장이 입을 가린 채 덧붙였다.
근데 걔도 참 웃겨.
거기서 말을 끊어 놓고는 딴 청이다. 그것도 능란한 화술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침묵을 지키곤 한다.
뭐가?
호기심을 참지 못해 물으니 못이기는 척 슬쩍 말을 던진다.
귀엽대.
뭐?
자기 귀엽대. 정과장님 귀여우시잖아요, 그러더라니까.
쑥스러워진 내가 접시 위로 시선을 떨구고 음식을 삼키자 기다렸다는 듯 송과장이 콧김 같은 웃음을 뿜는다.
왜그래, 부끄러워? 그러고 보니 정말 자기 귀여운 구석이 있네?
손을 급히 내젖다 면이 말리며 입가로 양념을 묻히자 송과장이 냅킨을 집어 닦는다. 하는 양이 자연스러워 나도 모르게 그대로 두다가는 문득 그녀의 여자다운 구석이 새삼스러워 빤한 시선을 던진다.
그렇게 볼 거 없어. 조카 같아 그러니까.
어린애 어르듯 하던 그녀가 냅킨을 내려놓고 젓가락질을 하며 지나가는 양 말했다.
소리 한 번 키워보지 그래. 걔 정말 괜찮은 앤데.
나는 실없는 웃음을 짓고는 묵묵한 채 고개를 저었다. 송과장이 제법 묵직한 목소릴 낸다.
결혼 안 할 거야?
생각 없어.
그러지 말고 해라. 여자면 몰라도 남자는 나이 들수록 추레해져. 우리 사장님 정도로 멋있으면 또 몰라도.
우리 사장님? 그 말에 저절로 그녀에게로 시선이 들렸다. 그녀에겐 친밀한 이에 대한 호칭을 발음하는 특유의 억양이 있다. 그것을 깨달은 나는 설마하면서도 표정이 굳어졌다. 방심하던 그녀의 얼굴에 문득 긴장감이 떠올랐다. 내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곧 평정심을 되찾는 기색이지만 허점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그녀를 잘 알기에 나는 확증을 얻은 듯 공격적으로 시선을 주시한다.
너, 혹시...
혹시 뭐?
발끈하듯 되묻는 그녀가 제풀에 무너지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 나 사장님 좋아. 사람 좋은 게 죄야?
그게 다야?
내 목소리가 사무적으로 변해 있다.
다지 그럼. 나 미친년 아니야. 어디 유부남을...
젓가락을 쥔 그녀의 손에 핏줄이 솟아 있다. 난처할 때면 긴 머리카락을 쥐듯이 손으로 감싸 어깨 뒤로 넘기는 행동도 눈에 띈다. 눈을 맞추지 못하고 테이블 위를 겅중거리는 그녀의 시선이 올가미에 걸린 듯 잔뜩 움츠린 채 이내 내게로 향한다. 애교를 부린답시고 어색하게 방긋거리던 그녀가 딤섬을 하나 집어 내 접시위로 놓는다.
자기 먹어라. 난...
그녀의 손을 붙든 내가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다시 물었다.
정말 그게 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