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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훈 시집, < >, 푸른사상, 2024년
성선(性善)의 시학
맹문재
1
윤재훈 시인은 자신의 항심(恒心)을 심화 및 확대하는 시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시인이 인식하는 항심이란 사람은 착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맹자의 성선설을 토대로 삼는다. 맹자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가엾고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남에게 사양할 줄 아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참으로 이른바 본성이란 선한 것이다. 만약 무릇 사람이 불선을 행한다면 이는 본성 바탕의 죄는 아닌 것이다. 슬퍼하고 불쌍해한다는 마음 그것은 사람에게 다 있고, 부끄럽고 싫어한다는 마음 그것은 사람에게 다 있으며, 공손하고 공경한다는 마음 그것은 사람에게 다 있고, 옳다 하고 그르다 한다는 마음 그것은 사람에게 다 있다. 슬퍼하고 불쌍해한다는 마음이 인이고, 부끄럽고 싫어한다는 마음이 의이며, 공손하고 공경한다는 마음이 예이고, 옳다 하고 그르다 한다는 마음이 지이다. 인과 의와 예와 지는 밖으로부터 나를 녹인 것이 아닌 것이고, 내가 본래부터 그것을 지닌 것임을 생각해내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구하면 곧 그것을 얻고 버리면 곧 그것을 잃는다.”.
맹자는 사람이 악을 행하지 않고 본성을 유지하거나 진전시키려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항산(恒産)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항산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재산이나 생업이다. 항산이 있어야 항심을 잃지 않게 되어 경제가 안정되고 사람들 간에 다툼이 없고, 항산이 없으면 항심을 가질 수 없어 생계에 얽매여 타락하고 범죄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맹자는 항산을 왕도정치를 이루는 근본이라고 역설했다.
윤재훈 시인의 시 세계에는 맹자의 사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인의예지의 마음이 작품 세계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시인은 사람의 성(性)은 선(善)하다고 인식한다. 그리하여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작품들에서 구체화한다.
2.
딱, 딱, 딱,
겨울 산을 깨우는
딱따구리 한 마리
햇빛도 들어오지 않은
후미진 건물 사이
비닐 대충 얽어 놓고
깡통 속 촛불 하나에
온몸을 녹이는 할머니
몇 년째 오지 않는
아들이라도 생각하는 걸까
할머니 지나온 세월이
비닐 속에서 어른거리는데
더욱 몸을 오그리는 할머니
굽은 허리는 더욱 굽어지고
고치라도 되고 싶은 것일까
옹송거리는 그 모습이
한없이 작아진다
― 「겨울 산」 전문
위의 작품에서 화자는 “햇빛도 들어오지 않은/후미진 건물 사이/비닐 대충 얽어 놓고/깡통 속 촛불 하나에/온몸을 녹이는 할머니”를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이 여실하다.
화자는 노인을 바라보며 “몇 년째 오지 않는/아들이라도 생각하는 걸까”라고 유추한다. 화자의 측은지심이 가족주의로 확대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삶의 근거지가 촌락이 아니라 도시로 바뀌면서 가족 공동체가 사라져 가고 있다. 따라서 가족주의를 무조건 부정할 것이 아니라 긍정할 필요가 있다. 마치 민족주의가 세계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민족의 자존을 지키는 것처럼 가족주의 역시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가족주의는 한국 사회에 형성된 고유한 가치로 가족 구성원들의 유대감 형성은 물론 사회 통합을 이루는 토대가 된다. 따라서 가족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사회 구성원의 공동 이익과 보편적인 윤리를 확립하는 가족주의가 필요하다.
고군산 열도에서
청자가 발견되었다
수백 년 바다에서 수장되었던 것들
파도에 쓸리고, 진흙이 쌓이고
고기들이 집을 짓고, 해파리가 붙고
여여(如如)한 침묵의 세월
가족들은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낙은 사립에 서서 얼마나,
오랫동안 지아비를 기다렸을까
차곡차곡 포개진 채 깊은 어둠 속에서
도대체 누굴 기다렸을까
원혼처럼 고요히 잠든 고려청자들
푸른 표피마다 배여 있는 도공의 심성
어디로 싣고 가다,
그 풍랑 속에서 난파되었을까
간짓대처럼 사립문에 서서 기다렸을
고려의 아낙이 바닷물에 씻기며,
서럽게 운다
― 「고려청자」 전문
2006년 서해 고군산 열도(古群山 列島)에 딸린 야미도(夜味島) 부근 바닷속에서 12세기의 고려청자들이 무더기로 나왔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해역 부근을 조사해 접시, 대접, 청자, 항아리 등을 끌어올렸다. 대접은 40점 이상씩 포개진 채 펄층에 묻혀 있었다. “수백 년 바다에서 수장되었던 것들/파도에 쓸리고, 진흙이 쌓이고/고기들이 집을 짓고, 해파리가 붙고/여여(如如)한 침묵의 세월”의 모습이었다. 전시관 측은 “서남 해안 부근 가마에서 생활용품으로 쓰려고 만들어 배에 싣고 가던 중 가라앉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화자는 발굴한 고려청자나 항아리 등 유물보다도 “가족들은 얼마나 기다렸을까/아낙은 사립에 서서 얼마나,/오랫동안 지아비를 기다렸을까”라고 가족들을 안쓰러워한다. “어디로 싣고 가다,/그 풍랑 속에서 난파되었을까”라는 안타까움과 “간짓대처럼 사립문에 서서 기다렸을/고려의 아낙”의 서러움을 나눈다. 도공과 그의 가족에 대한 측은지심은 “차곡차곡 포개진 채 깊은 어둠 속에서” “원혼처럼 고요히 잠든 고려청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측은지심은 「지하철에서― 부부」에서도 볼 수 있다.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는 팻말을 앞에 놓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내와 그 뒤에서 목발을 짚고 선 남편이 있다. 화자는 밤 지하철 통로를 지나가는 그 장애인 부부를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앞길을 응원한다. 측은지심은 도살장 벽 쪽 구석에 주저앉아 있는 개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는 「도살장을 지키는 개」에서도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인(仁)의 실마리이다. 예(義)와 의(禮)와 지(智)가 우러나오는 것이다.
3.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날마다 먹여
불임을 유도하고,
쏟아지는 폭염 아래
더러운 똥밭으로 친구들을 몰아넣어
서로 몸이 닿을 정도로 밀집 사육을 시키는데,
내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몸집을 빨리 살찌우기 위해
코뚜레를 꽉, 조여 캄캄한 곳에 묶어 놓고
저절로 눈이 멀게 하는데,
어제도 사람들은 우리 앞에 모여
사료값을 걱정하며
소값이 떨어진다고 혀를 차고,
정육점 사장은 우리를 그윽히 바라보며
안심, 등심 부위를 나누느라 열을 올리는데,
―「우유 한 잔」 부분
동물 학대란 인간의 고의적 혹은 부주의로 동물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말한다.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날마다 먹여/불임을 유도하”거나, “쏟아지는 폭염 아래/더러운 똥밭으로” 소들을 몰아넣고 “서로 몸이 닿을 정도로 밀집 사육을 시키는” 것이 그 모습이다. 태어난 새끼의 “몸집을 빨리 살찌우기 위해/코뚜레를 꽉, 조여 캄캄한 곳에 묶어 놓고/저절로 눈이 멀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잔인한 학대를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우리 앞에 모여/사료값을 걱정하며/소값이 떨어진다고 혀를” 찬다. “정육점 사장은 우리를 그윽히 바라보며/안심, 등심 부위를 나누느라 열을 올”린다.
화자는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수오지심(羞惡之心)을 갖는다.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동물 학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수오지심은 의(義)의 실마리로 화자가 동물 학대를 고발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현행 동물보호법이 동물 학대에 대한 법적 책임과 처벌을 가하는데 한계가 있지만, 나름대로 개선하는 역할을 한다. 수오지심의 마음이 모일수록 동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질 것이다.
수오지심은 「죄」에서도 확인된다. 화자는 “돌멩이 하나 주워/물속으로 던진” 뒤 자기의 행동을 부끄러워한다. “수만 년 전/우주의 지각 때,/간신히 물 밖으로 빠져나온/돌일지도 모르는데”, 그가 던져 넣음으로써 “다시는 물 밖으로/나오지 못할”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앰뷸런스 소리가 나면
그 자리에 서서
기도를 한다
이 밝은 날 아침에
누군가 아무 이상이 없기를
어린이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윤리가 돈으로 환치되는 무서운 세상
기형적인 부모들이
너무나 기형적으로 아이들을 기르고
사이코 같은 어른들이 수시로 양산되는
수상한 시절
극도의 패거리로,
숙성되지 못한 사람들 고성만 난무하는
하, 수상한 시절
다시 눈과 입이 오염되려 하면
그 자리에 서서 기도를 한다
그대 편안하기를, 아무 일 없기를
어느 무인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것처럼
다시 고요해지기를
저 붉은 앰블런스 소리가 멈추고
다시 세상이 안온해지기를
―「기도를 한다」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앰뷸런스 소리가 나면/그 자리에 서서/기도”한다. 위급한 환자를 신속하게 병원으로 실어 나르는 구급차 앞에서 그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화자는 “이 밝은 날 아침에/누군가 아무 이상이 없기를/어린이 마음으로/기도”한다. 앰뷸런스에 탄 환자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을 측은지심으로 헤아리는 것이다.
화자는 “어린이 마음”으로 예를 갖추고 있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시인은 향락과 권태에 빠진 채 명상하고 거짓말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에 비해 아이는 이 세계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진지하게 관심을 가진다고 보았다. 아이를 시인이 본받아야 할 거울로 내세운 것이다. 노자(老子) 역시 무위자연을 추구하면서 그 본보기로 아이를 들었다. 아이는 세속에 오염되지 않았기에 도(道)의 실현에 가장 부합한다고 보았다. 아이도 욕망체이기에 니체나 노자가 주장한 대로 완전 무욕의 존재는 아니지만, 그의 고유성은 분명하다. 아이가 어른의 소유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화자는 “윤리가 돈으로 환치되는 무서운 세상”에서 “기형적인 부모들이/너무나 기형적으로 아이들을 기르”는 상황을 비판하고 있다. 화자는 “사이코 같은 어른들이 수시로 양산되는/수상한 시절”에 특히 아이의 “눈과 입이 오염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화자가 앰뷸런스를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것은 측은지심은 물론 사양지심이 우러나온 모습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그대 편안하기를, 아무 일 없기를” 바라는 기원이기도 하다. 위급한 환자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진심으로 희망하는 것이다.
4.
당장 봉지 쌀을 사야 가족이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아무도 돌아보는 이 없는 추운 겨울날, 그 사람의 돈으로 쌀을 사고,
돌아서는 저녁,
전봇대 귀퉁이에 펄럭이는 광고지 마냥 초라해지는 가장의 어깨
계약금이 없으니 월세만 엄청 높은 집으로 떠돌고, 밀리다
500만 원에 35만 원 내는 서민 아파트 월세가 계약금에 달하도록 밀려, 본전마저 쥐에게 맡겨둔 쌀독처럼 날아가는, 아슬아슬한 시절
악순환에, 악순환만 지속되는, 고단한 계절
어제도 그제도 며칠 전에도, 주인은 전화가 와서, 나가라고 한다.
이 추운 겨울날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평생 푯대처럼 그나마 요행히 챙겨오던 윤리도 도덕도, 가족의 생계 앞에서는 힘을 잃고 마는,
이 초라한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나면
당장 거리로 나앉아야 할 판인데,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만약 당신이 내게 물으신다면- 어느 가난한 시인의 항변」 전문
작품의 화자는 “당장 봉지 쌀을 사야 가족이 저녁을 먹을 수 있는” 형편에 놓여 있다. “계약금이 없으니 월세만 엄청 높은 집으로 떠돌고, 밀리다/500만 원에 35만 원 내는 서민 아파트 월세가 계약금에 달하도록 밀려, 본전마저 쥐에게 맡겨둔 쌀독처럼 날아가는, 아슬아슬한” 상황도 그러하다.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는 화자의 궁핍한 삶이 여실하다. 생존에 필요한 양식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생활이 넉넉하지 않아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생존 자체가 위협받기에 “평생 푯대처럼 그나마 요행히 챙겨오던 윤리도 도덕도” 힘을 잃고 마는 것이다.
맹자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항산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일반 백성들은 항산이 없으면 따라서 항심이 없습니다. 진실로 항심이 없으면 방황, 편벽, 사악, 사치 등을 아니 하는 것이 없습니다. 죄에 빠진 뒤에 이를 형벌에 처한다면 이는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입니다. 어찌 어진 사람이 임금의 지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옛날 밝은 임금은 백성의 산업을 마련하되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넉넉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기를 수가 있으며, 풍년이 들면 한 해 동안 배불리 먹을 수가 있고, 흉년이 들더라도 죽음을 면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한 뒤에 백성들을 이끌어서 선(善)한 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따라오는 것이 수월했습니다.” 맹자가 이야기한 항산이란 백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안정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백성들이 모두 항산을 가진다면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사회에 다툼이 없고 혼란이 없으며 범죄도 없을 것이다.
맹자가 제시한 항산이 위의 작품에서 확인된다. 화자는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라고 항변하고 있다. 화자가 겪고 있는 궁핍은 생활이 성실하지 않거나, 사업이 실패했거나, 특별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화자의 궁핍은 사회의 제도 및 구조와 관계가 깊다. 따라서 화자의 가난을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그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한 개인의 가난이 해결된다면 그의 삶이 영위되는 공동체 사회 역시 좀 더 안정되고 풍요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 문제는 옳고 그름의 가치는 아니지만, 그것의 해결은 당위성을 지닌다.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쓰레기란 무엇인가
때로는 초를 다투는 기사가 되었거나,
유용한 정보가 되어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해주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책이 되어
수만 년 누군가의 혼을 흔들며
이 지상에 바람과 물과 공기가 되었거나,
그런 귀한 일을 하고
용도 폐기된 것이 쓰레기다
그런데 이건 쓰레기도 못 된다
수백 년, 때로는 수천 년
싱그러운 숲속에서 향기와 산소를 뿜어내던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내 만든 것이
사실이 아닌, 역사 왜곡에
거짓말만 잔뜩 나열한 독소가 되어
폐기 처분되어야 하는,
그런 쓰레기도 못 되는 책을 만들다니
그런 것들을 수십만 권, 이 지상에
자신의 욕심껏 만들어 내다니
그것이 꼭 너를 닮았다
부메랑이 되어
너를 다시 공격할 것이다
―「쓰레기도 못 되는 책- 역사 왜곡 교과서를 보며」 전문
작품의 화자는 “쓰레기도 못 되는 책- 역사 왜곡 교과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우러난 것이다. 책이란 “수백 년, 때로는 수천 년/싱그러운 숲속에서 향기와 산소를 뿜어내던/아름드리 나무를 베어내 만든 것이”기에 숭고하다. 그런데 “사실이 아닌, 역사 왜곡에/거짓말만 잔뜩 나열한 독소가 되어/폐기 처분되어야 하는” 책은 쓰레기조차 못 된다고 비판한다.
위의 작품에서 역사 왜곡 교과서가 어떠한 것인지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 우선적으로 일본의 교과서를 들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의 역사 교과서들은 독도를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고 기술한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 강제 동원이나 종군 위안부 등에 대해서도 축소하거나 왜곡하고 심지어 삭제한다. 역사 왜곡과 거짓 교육은 일본의 미래세대에 큰 영향을 미치기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시비지심으로 맞서야 하는 것이다.
역사 왜곡 교과서는 국내에서 간행된 것도 있다. 친일 뉴라이트 성향의 집필자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일본군 위안부, 친일 반민족 행위자,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정치, 제주 4․3항쟁과 5․18민주화운동 등을 왜곡해서 기술했다. 한국 사회에 보수주의 세력이 영향력을 미치면서 역사가 퇴행하고 있다. 화자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맞서고 있기에 참으로 다행이다.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시비지심은 「핵비가 내린다」에서도 볼 수 있다. 일본은 2021년 4월 13일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에 저장되어 있는 오염수를 방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023년 8월 24일 도쿄전력이 방류를 시작했다. 화자는 “그들은 지금 이 지구에,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가/호모 사피엔스는 과연 스스로의 터전을 멸망시키고 말 것인가”(「핵비가 내린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시비지심의 지혜는 중립이나 타협이 아니라 부정이다. 선한 본성이 이치에 따라 역동적인 기운을 내는 것이다.
멩문재|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