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주만유의 본원 |
우 주 --- |
신 앙 | |
제불제성의 심인 |
> |
인 성 --- |
수 행 |
일체중생의 본성 |
우주만물의 본원은 우주에 대한 것이고 신앙으로 풀고,
제불제성의 심인과 일체중생의 본성은 인성,
사람에 대한 것이고 수행으로 풀어버립니다.
우주만유를 성격적으로 나누어 말하면,
한 가지로 말하면 법신불이다.
두 가지로 말하면 천지만물(유의 세계)과 허공법계(무형의 세계)라고
말하고, 네 가지로 말하면 천지, 부모, 동포, 법률 즉 사은이다.
전체로 말하면 우주만유라 한다. 그래서 이것을 만유불萬有佛이라고
합니다. 여래의 불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을 풀어서 두 가지로,
제불제성의 심인과 일체중생의 본성으로 말합니다.
오늘 원불교를 잘 모르신 분은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들으세요. 왜냐하면 그런가보다 하면
나중에 부분에 가서 하나씩 이어집니다.
전체를 하고 부분을 하면 훨씬 수월합니다.
AT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우리 일원상 진리를 잘 하시는
석산
교무한테 배웠습니다. 그땐 학생이었습니다. 우리 동기였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컴퓨터를 배웁니다. 한 참 듣다가 교수님이
‘에이~ 일원상 진리보다 더 어렵다.’ 고 말하였답니다.
사람들이 처음 컴퓨터 강의를 들을 때는 몰라서 멍했는데
두 번째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컴퓨터 강의를 들었는데 두 번째 들을 때는
이해를 하였습니다. 처음 들을 때는 내용이 아직 정확하게 안 잡힌
것이다. 여기에 처음 오신 분들도 처음 듣는다고 걱정 마세요.
여래의 불성을 두 가지로 표현하였죠. 제불제성의 심인이다.
모든 부처님 모든 성자의 마음자리. ‘심인’ 마음자리다.
다음 일체중생의 본성이다. 이 두 개를 묶어서 여래의 불성이다.
제불제성은 정화신불 이라고 한다. 일체중생은 편화신불 이라고 합니다.
제불제성은 부처님이 확실하게 된 양반인데, 일체중생은 편화신불
입니다. 편화신불은 원래 본성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습관을 본성으로 착각 합니다. 습관 지어진 것이 자신의
본성이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본성은 일원상입니다. 그래서 일체중생이
깨달을 수 있고 성불제중 할 수 있어요. 얼마든지.. 왜?
일원상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신불은 우주만유가 법신불이요., 제불제성도 법신불이요,
일체중생들도 법신불이다. 좀 더 설명하면 우주만유의 본원이고,
제불제성의 심인이고, 일체중생의 본성이다. 본원, 심인, 본성
이 세 가지가 일원상입니다. 서로 무촌입니다. 하나입니다.
대종사님은 입체감각 공간감각 시간감각이 대단합니다.
우주만유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면서 동시에 사람의 마음자리도 신앙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주만유의 본성은 신앙으로 나머지 둘은
수행으로 했습니다.
지금 동양삼교(유.불.선)를 보면 수행위주이고, 기독교는 신앙
위주입니다. 모두 신앙과 수행, 둘 중 하나가 약합니다. 우리는 신앙과
수행을 철저하게 병진하도록 하였습니다. 대~단합니다.
불교에서도 법신이라고 하지만 그 법신도 우주만유의 본원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초월자를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주만유의 뿌리를
캐보니 서로 얽혀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처처불상 신앙이
나오는 것이다.
대종사님이 바라본 부처님은 어떤 부처님이냐?
이 현실은 전부 죄인이고, 이 현실은 전부 불안정한 존재요, 이 현실은
부처님의 어떤 것이 갊아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유 전체가 위력
있는 존재요. 죄복의 권능이 있는 존재요, 은혜적 관계로써 모두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셨다.
그래서 과거의 종적인 관계가 종. 횡으로 아울러졌다.
천지 |
>부모학렬 | |
부모 | ||
동포 |
법률 |
형제학렬 |
천지하감지위, 부모하감지위 천지와 부모는 부모학렬이고,
동포응감지위, 법률응감지위 동포와 법률은 형제학렬입니다.
어떤 한 가지만 아니라 전부 처처불상의 대상입니다.
일원상 신앙을 제대로 하는 것은 종적인 관계뿐 아니라,
횡적인 관계에도 죄.복의 권능이 있다는 것을 신앙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직장인들이 윗사람에게만 잘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종적이
시각입니다. 옆 동지들과 아랫사람에게 잘하는 것이 비로소 일원상을
신앙하는 사람이다.
대(大) |
|
소(小) | |
유有. 무無 |
많은 분들께서 일원상을 헷갈려 하신다. 대(大)는 (일원)을 말한다.
소(小)는 에 들어있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을 말한다.
유무(有無)는 의 안에서 온갖 것들이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가 자식도 되고 자식이 아버지도 됩니다. 직업도 바뀌면서
얼마든지 변화합니다.
우주만유 |
> |
영(靈) |
대(大) |
법신 法身 |
우주만물 | ||||
우주 --------– 성주괴공 |
> |
기(氣) |
유.무(有無) |
보신 報身 |
사람 – 흥망성쇠, 생노병사 | ||||
우주 |
질(質) |
소(小) |
화신 化身 |
우주 전체를 영으로 보면, 영에서도 대령과 소령으로 나눌 수 있다.
대령은 우주만유를 말하고, 소령은 우주만물을 말합니다. 질은 우주를
말합니다. 기운도 우주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바뀌고 사람은 흥망성쇠 하기도 하고 생노병사 하기도 합니다.
또 이것을 법신, 보신, 화신이라고 표현합니다. 불교의 삼신불을
공부하면 알 수 있다.
타종교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유교에서는 무극, 태극이다.
도가에서는 도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다. 알고 보면 다 같은
소리입니다. 이름만 다를 뿐이다.
일원상의 진리를 보면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다.’ 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무극이 따로 있고, 법신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일러서 하나님이라 이름 지었고, 법신불이라고
이름 지었고 일원이라고 이름 지었을 뿐입니다.
엄마를 자식은 ‘엄마’라고 부르고 친구는 ‘야’라고 부르고 남편은
‘어이’라고 하고 학교 갔더니 ‘선생님’이라고 하고, 회사 가니
‘사장님’이라고 하잖아요. 사장님, 엄마, 야 모두 따로 있어요?
그 양반이 그 양반이죠. 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이
다 따로 있는 줄 압니다. 또 다 다른 줄 압니다. 각자 따로 있다면?
서로 다르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일원을 보고 만유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다 품어 안아주고, 다 낳는다.
그 안에서 다 나오는 것이다.
일원과 사은(우주만유)을 설명해드리면 서로 얽혀있는데 대와 소로
나누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일원과 사은, 이것을 본원이라고 표현했다.
일원을 대라고 하고, 사은을 소라고 했다.
그런데 사은은 보면, 일원의 속 내용이다. 부분부분이다.
정산 종사님께서 제일 쉽게 일원과 사은을 표현해주셨다.
사은하고 일원이 헷갈리냐?
‘눈을 감아봐!’ – 여러분 눈을 감아보세요. –
‘그것이 일원이다.’
‘눈을 딱 떠봐라. 다 보이지? 그것이 사은이다.’
이렇게 쉽게 얘기해 주셨습니다.
그럼 일원 자리 따로 있고, 사은 자리가 따로 있습니까?
그것이 그것이지요. 분별을 탁 닫으니 전체를 하나로써 일원을 설명한
것이고 딱 떴더니 낱낱이 차별되고 구별되고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사은이다. 얼마나 쉽게 표현해 주셨는지.
사은 | |
천지만물 |
허공법계 |
사은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했더니 천지만물, 허공법계로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것 전체로 묶어서 우주만유다. 이렇게 표현했다.
사과 하나만 봐도 우주 만유, 전체 덩어리입니다. 사은이 서로 기가
막히게 서로 얽혀진 것입니다.
참. 안경이 없으면 어떨까요? 안경도 사은이 똘똘 뭉쳐져 있다.
그리고 이것이 위력을 발휘합니다.
아직도 원불교에 다니는 사람이 우주만유의 본원이라고 하면 우주만유의
초월적 존재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우주만유를
초월하는 것이 본원이 아니라 우주만유를 전체로 묶었을 때 본원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또는 뿌리를 계속 추구해 나가는 것의 표현으로써
본원이다. 그래야 처처불상 신앙이 된다. 그러면 현실 속에서 어떤
대상도 함부로 할 대상이 없다.
그러면 천지는 이용물인가? 모험의 대상인가? 정복의 대상인가? 탐험의
대상인가? 뭐죠? 법신불입니다. 부처님입니다. 천지가 나와 둘이 아니다.
이것이 원불교 신앙이다. 종적인 초월적 존재로 말한 것이 아니라.
횡적으로 종적으로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 바로 일원상의 세계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앙해야 합니다. 이것이 처처불상 신앙입니다.
우주만유 대상 어떤 존재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왜?
위력이 있으니까. 죄.복의 권능이 있습니다. 그러니, 불공을 불상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대상에 상황에 맞게, 속성에 맞게, 그 일의
특성에 맞게, 특성 따라서 불공하라. 모두가 위력적이 존재이지만
불공을 할 때는 그 사람 그 일의 특성에 맞게 불공을 하라.
그것이 삼학입니다.
그 동안의 종교적인 것은 허공법계 즉 보이지 않는 영계의 세계, 무형의
세계, 이런 세계를 위한 기도, 불공, 천도재를 주로 많이 해 왔습니다.
천지만물을 무시하거나 그냥 이용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체, 허공법계, 천지만물을 포함해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며 불공의 대상이다. 전체를 다 생물과 무생물 그리고 영계까지도
전부 다 포함된 것이다.
이것도 정산종사님이 이야기 하신 건데,
내 손가락 끝에 상처가 났습니다. 붉은 피가 나옵니다.
그럼 ‘어.. 너 상처 났니? 아프냐? 내가 바쁘니까 나중에 치료해줄게.’
이렇게 말하고 나서 치료해 준 뒤에 손가락보고 얼마 내라고 합니까?
상처가 나면 바로 약을 찾고 지혈을 합니다. 그렇죠? 왜 그래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아니고 따로면 첫 번째와 같이 그렇게 얘기 합니다.
‘아.프..겠.네에~.’ 그래서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계산 할 것도 원망할
것도 흥정할 것도 없습니다. 나중에 하는 것도 없습니다.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이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눈만 뜨고 산다.
가끔씩 눈을 감아야 합니다. 천지만물만 보고 살면 안되고 천지만물과
허공법계를 같이 보아야 한다. 눈을 감았다 떴다. 양면을 다 봐야 한다.
다음은 제불제성의 심인입니다. 도장 인자는 틀림없다는 소리다.
변화가 없다. 확실하다, 믿을만하다. 도장이 날씨 따라, 기분 따라 상황
따라 바뀝니까? 도장은 항상 정확하게 일치하고 똑같습니다.
제불제성의 마음은 똑같다.
예를 들면 대종사님이 성질이 나서 제자를 혼낼 때 그 마음은 일원상에
벗어난 마음 아니에요? 어떤 마음일까요? 그 때도 일원상의 마음이다.
우리는 성인이다. 또는 성자다. 아니면 깨달은 사람이라고 하면 목석
같은 도인을 생각한다. 그래서 웃지도 않아야 하고 똥도 안 싸야 하고,
성질도 안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 불(佛)자는
‘참인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심(心)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각(覺)이라고도 합니다. 표현 따라서 다릅니다.
그러니까 법위등급이 인간의 법위등급입니다.
대종사님이 얼굴이 불으락푸르락하며 제자를 막 혼낸 것과 제가 성질
내며 화 낸 것과 어떤 차이가 있어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일본 경찰이었던 황이천 선진님이 대종사님께 보고를 하러
만나러 갔는데 때마침 대종사님이 제자에게 ‘…나~가아~’ 하면서 혼내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속으로 ‘큰일 났네..’ 이 상황에서는 말 하는 것은 안될 것
같아서 경찰서로 돌아가자니 혼 날 것 같고, 다시 들어가자니
대종사님이 성질이 나 있고 갑갑해 하다가 ‘어차피 혼 날 바에는 일단
안으로 들어가보자’하며 들어갔는데, 대종사님이 언제 화 냈냐는 듯이
‘어~이.^^ 이천이 왔는가?’ 하더라는 것이다. 진짜 이중인격이죠?
그러니까 황이천 선진님이 놀라버렸습니다. 대종사님은 화를 냈지만
화를 낸 이면에는 성품자리. 본래의 온전한 정신을 놓지 않은 상태에서
방편으로써 화를 냈던 것입니다.
대종사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제가 삼산 법사님에게 들었는데,
대종사님이 저녁에 일기를 쓰다가 이렇게 얘기 했다고 합니다.
‘나도 인간적으로 오늘 하루 참 아쉬운 것도, 좀 섭섭한 것이 있다.’
대종사님 같이 새부처님으로 오신 분도 낮에 활동을 하시다가 때로는
약간의 치우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대종사님을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아! 얼마나 인간적이신가?’
저도 처음에 원불교에 들어와서 대종사님을 주세불이라 하고, 여래위라
하고, 새부처님이라고 하고 처다 보지도 못했다고 하니까?
저는 대종사님이 너무 대단한 양반이어서 대종사님 말 한 마디면
사람들이 다 듣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답니다. 대종사
당대 제자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대종사님이 아주 유머스럽고,
너무 인간적이시고, 제자가 돌아가면 울기도 하고, 화도 내셨습니다.
구타원
기록하는 일을 꼼꼼히 잘하니까 너무 너무 맘에 들어 하였습니다.
어느 날 대종사님이 훈타원님을 가만히 불러서
‘너는 가만히 있어라. 내가 뭐라고 하던 간에..’
이렇게 말하고는 대종사님이 그 곳에 한 번 오셔서
‘공주선생. 요새 마령도 지부를 새로 세워서 사람들이 불어나고,
또 어디도 불어나고 저기 남원에서는 교무를 요청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렇게 말하고는 그냥 가셨습니다.
그리고 대종사님이 구타원님에게 두세 번 더 얘기를 합니다.
‘자꾸 교무를 요청하네 남원지부에서.. 어디도 요청하고 이제는 요청하는
데가 많아지네..’
대종사님이 세 번째 오니까 구타원님이 눈치를 채고는
‘안돼요.. 못 줘요!.’
훈타원님이 일 잘하고 부려먹을 만 하니까. 못 준다고 한 것입니다.
대종사님이 ‘어이 이렇게 하소!’
/ ‘네!’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가가 잘못하면 교주를 숭배하고
신비화하고 장엄화해서 우리 스스로 허상과 우상을 만들어냅니다.
어떤 소설가가 우리 선진님과 대종사님의 일화를 쓰려고 했는데 너무
평범하고 인간적이고 사실적이고 생활적이어서 쓸 것이 별로 없었답니다.
제불제성의 마음자리를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마음자리가 아니라
인간적이면서 온전한 정신을 놓지 않은 상태에서 희로애락애오욕을
적극적으로 응용하셨다. 때로는 크게 잘못한 사람을 품어 안아주시고
좋은 길로 안내도 해주셨습니다. 우리들 마음은 조금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미워합니까? 보통 사람의 마음은 그렇습니다.
우주만유로 바라 볼 때는 서로 위력적인 관계요,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요, 죄복의 권능이 있는 관계로써 신앙으로 풀어주시고 동시에 내
마음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을 제불제성의 심인이요.
일체중생의 본성이라 한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을 일체중생의 본성으로 놓고 볼 때는 본래 뿌리가
일원상이기 때문에 나도 제불제성의 심인으로서 수행을 해서 닦아갈 수
있고 성불제중 할 수 있구나, 즉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지리도 원불교 다니면서 하는 얘기가 뭐냐?
‘저는 재가예요. 저는 기도만 하렵니다. 제가 깨닫겠습니까?
저는 교무님만 믿고 따라가겠습니다. 저는 신심만 내면 되죠.’
이것은 원불교를 만드신 대종사님의 본의에서 아주 많이 벗어난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을 내놓고 ‘네가 바로 성불제중 할 수 있다,
네가 일원상이다. 우주만유의 부처님이 저기 따로 초월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대상 대상이 다 부처님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나는 재가이니까. 아직 초입교도이니까. 나는 늦게 입교해서.
나는 업장이 두터우니까, 나는 학벌이 안 좋으니까, 나는 어쩌니까..’
시간과 공간 간에 나라는 관념은 다릅니다. 이게 일원상 진리의 자리를
가늠 잡으면 ‘나 없는 나’ 입니다. 보통 사람은 ‘나 있는 나’ 입니다.
모든 걸 판단할 때 내가 있고, 네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원상에 바탕 한 나는 ‘나 없는데, 나도 있고 너도 있습니다.’
일원상에 바탕 한 시간은 ‘시작과 끝이 없는데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일반 사람은 악착 같이 시작과 끝만 있습니다. 악착 같이 선후배 따지고,
죽으면 끝나버리고, 태어나면 너무 기뻐합니다. 태어났어도 태어난 바가
없고, 갔어도 간 바가 없는 것이 일원상의 시간관념입니다.
그래서 겨우 수행한다는 것이 ‘내가 수행을 한다.’, ‘나 있는 나가
수행한다.’ ‘나 있는 나가 너에게 불공을 한다.’ 내가 좀 가졌으니까
도와주고, 내가 좀 더 배웠으니까 베풀어주고..’
이렇게 되면 원불교 교리의 최종 귀결인 무아봉공과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절대 무아봉공이
안됩니다. 기분 좋을 때 봉공이고, 돈 있을 때 봉공이고, 교무님이
칭찬해 줄 때 봉공이지. 무아봉공이 안 된다.
일체중생은 유정물입니다. 유정물은 사생입니다. 사생은 출생방식으로
‘태란습화’입니다. 유정물은 살아있는 사람뿐 아니라, 살아있는 일체
동물, 생명, 그리고 죽어서 아직 몸을 받지 못한 영혼을 포함합니다.
심(心) : |
정(靜) - |
묘유 |
성(性) : |
동(動) - |
진공 |
좀 전에 일체중생의 본성(本性), 제불제성의 심인(心印)이라고 했습니다.
심은 동적인 개념이고, 성은 정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성에서 심이
나온다. 정은 ‘진공’이라고 하고, 동은 ‘묘유’라고 한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의 본성은 일원상인데, 동적으로 마음을 쓸 때는 일원상을
벗어나기 쉽다. 그래서 제불제성이 되기 전에 마음은, 자기 마음을
자기가 믿을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내가 있습니다. 제불제성은 내 안에 내가 있는 줄 알아요.
그런데 범부, 중생은 내 안에 내가 따로 분리되어 희노애락에 끌려
다닙니다. 그런데 왜 일체 중생에는 심인이라고 쓰지 않았을까요?
제가 오늘 강연을 하려고 2-3년 전 강연 동영상을 봤습니다.
그 영상에서 그때 있던 사람들을 비춰주었는데 그때 그곳의 얼굴이
이 자리에도 많습니다만, 사라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다시 보니 내가 그 때 강의를 겁나게(무척)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중앙일보 기자가 나를 취재해 갔는데 그 영상을 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때 강연을 정말 정성을 들여서 수십
년간의 엣센스essence (정수)를 넣어서 했는데, 그때 그곳의 사람들도
‘야! 좋다’고 느꼈을 것이다.
제불제성의 마음은 신심과 공심이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중생의 마음은
그때는 아주 아주 좋다고 했지만 어느새 뭣에 걸려서 사라졌습니다.
대종사님도, 인연 없는 중생, 자기가 안 하려는 중생은 어떻게 못하셨다.
우리 중생들의 마음은 경계에 그렇게 흔들린다. 이 성품자리를 제대로
깨쳐서 믿음으로 확실하게 하는 사람은 그것을 놓치지 않습니다.
똥멍청이가 아닌 한에는 원불교 만나길 잘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오래 갑니까?
팔산님이 대종사님을 모시면서 대단하다고 느낀 것 중 하나가
‘대종사님은 어찌된 것인지 세월이 갈수록 공심이 더욱 강하다’
고 하셨다. 그러므로 대종사님은 성인의 심인이라는 말을 씁니다.
원불교를 만나 확실히 교법에 체를 잡으면, 제 생각에는 감정이 슬플
때도 있고, 짜증날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지만, 이 법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공적인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고, 개인적인 실수는 한다.
할지라도 이 회상을 떠나거나 이 교운을 뒤로 하지 않을 것이다.
우주만유의 본원은 사은.. 사은의 보은을 구체적으로 받쳐주는 것이
사요입니다. 제불제성의 심인을 만들기 위해서 일체중생의 본성자리로써
삼학수행을 하여, 그 삼학의 긍정적인 측면의 신분의성을 키우고,
부정적인 측면의 불신탐욕을 제거해서 제대로 삼학 공부를 하면,
제불제성의 심인인 일원상 자리에 내가 갈 수 있다.
즉, 내가 성불제중 할 수 있다.
여기까지 혹시 질문이 있으신가? 오늘 한 것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영상으로 보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은 게송입니다.
게송은 대종사님이 돌아가시기 3년 전에 구상을 하셨다가 돌아가시기
2년 전에 시로써 ‘게송’을 밝힙니다. 총체적인 서설로서 총서편이
나옵니다. 총서편은 두 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기와 목적이 무엇이냐?
그리고 법을 시대와 생활에 맞게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총설로써
나옵니다.
교리도의 일원상이 1장에 왼쪽의 사은이 2장, 사요가 3장입니다.
오른쪽의 삼학이 4장이고, 팔조가 5장입니다. 6장은 두 개의 관계입니다.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 7장은 네 다리의 사대 강령입니다.
교리도를 보면 정전의 교의편 순서가 들어와야 합니다.
오늘 게송은 일원상 자리 중에 마지막 6절에 내놓았습니다.
일원상 자리는 전부 대소유무로 되어 있습니다. 앞부분은 돈공한 자리,
끊어진 자리.. 이것이 대 자리를 설명한 것입니다. 공적 영지를 따라서
나타나고.. 이것이 소 자리를 설명한 것이고, 마지막에 은현 자재 하는
것이.. 이것이 유무 자리를 설명한 것입니다.
제가 대종사님에게 고마운 것 중의 하나가 진리를 보는 이치의 세계에서
대소유무라는 공식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일원상의 진리는 전부 다
대소유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게송만은 유무, 대, 소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초견성은 대 자리를 아는 것이요. 중견성은 소자리를 아는 것이요.
상견성은 대소유무 전체를 아는 것이라고 한다. 내용을 보면,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돌아 ..
이것이 대소유무의 유무자리다. 중생들이 가장 피부로 느끼는 것이
유무자리입니다. 유무자리는 현실로 말하면 몸이 있어졌다가 몸이
없어지고, 중생이 변해서 부처가 되었다. 우리의 마음도 신심이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다시 신심이 나기도 한다. 공심이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없다가 있어지기도 합니다. 마음의 세계뿐이 아니라 우주 만유가
다 그렇다.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公)이나..
이것이 바로 대 자리이다. 유와 무를 총섭하여 하나로 묶어서 말하는
것이다. 지극하다는 것은 원래자리를 말한다. 유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무라고 말하기도 그렇다. 묶어서 전체를 공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공의 내용을 봤더니 그것이 구족이다.
이것이 바로 소자리이다.
유와 무가 구족(具足)이라,
그래서 먼저 유무자리를 잘 공부하면 변화를 수용할 수 있다.
위기라는 단어가 탁 들어온다. 위기와 기회,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얼마든지 진급 할 수도 있고 강급 할 수도 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했어도 참회할 수 있다. 다시 새롭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오뚜기 같이..
이것이 유무자리입니다.
이 변화를 잘 알지 못하면, 유에 묶이던가 무에 묶입니다.
군대에서 장군을 한 사람이 퇴임 하고서도 마누라와 자식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다. 장군이 아니라는 것을 빨리 알아야 한다.
그렇게 변화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유무가 정말 중요하다.
내가 맨하탄에 가보니 강남이 더 좋다. 청량리 역사가 세워지죠?
그 옆에 몇 십층의 건물이 다섯 채가 들어선다고 합니다.
옛날에 상상했던 영화에 나왔던 장면들의 건물이 들어서는 겁니다.
세상은 엄청나게 빨리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당도 교화의 방향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그래서 내가 학사를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직업, 삶의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눈 등 이 변화에 대해서
빨리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같은 곳이 없다고 한다. 인터넷 환경, 또 무엇을
빨리 빨리 배우고자 하는 열정 등. 예전에 게임은 싸가지 없이 별볼 일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일본은 닌텐도를 만들어서 운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요샌 빌 게이츠가 공부 또는 수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 ‘구공’의 이치,
구공은 다 비워버렸다는 것이다. 전체를 보는 시각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이 사람이 해탈할 수 있다. 그리고 정말로 옛날의 때를
싹 벗겨버릴 수 있다. 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넜으면 배가 아까우니 지고
가야 해요? 놓아 버려야 해요? 어떻게 해요?
구공의 이치는 그것까지도 놓아버려라,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옛날 것 쉽게 놓으세요?
이번에 바자회 때 물건을 내놓았으면 알아서 하세요 해야죠.
내 놓고는 계속 쳐다봅니다. ‘얼마 받았는가?’ 하면서..
미치겠습니다. 참말.. 구공이 아닙니다. 일단 냈으면 놓아 버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놓으라는 것은 선도, 악도, 놓고 내가 했다는 것도
놓아버리라는 것이다.
내가 차장인데, 내가 과장인데, 재가 사장인데 하는 것도 놓아버려라.
내가 착한 일 했다는 것도 놓으라, ‘아 옛날이여.. ‘하는 것도 필요
없습니다. 의견을 내놓을지언정 고집 부리지는 말라, 내놓고 대중이
합의하면 그것을 따라야 합니다. 공 자리는 자기가 비워버린 것이다.
하다못해 선심도 고집하면 안 된다. 공심도 고집하면 안 된다.
그건 공자리가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을 때도, 하기 싫을 때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참으로 쉽지 않다. 기울어지지도 않고 넘어지지도 않는다.
하다못해 법에도 묶이지 않는다. 그래야 비로서 해탈이 가능하다.
마지막이 구족이다. 구족은 소자리입니다. 대종사님이 깨달으시고
다시 세상을 보았더니. 세상이 정말 완전히 다르게 보이더랍니다.
돈도 유무자리의 돈은 욕심이 있는 돈이고 변화하는 돈이지만,
구족일 때의 돈은 돈 없는 가운데 돈이고 교화에 나설 수 있는 돈입니다.
복 지을 돈입니다. 유무자리의 돈은 복도 짓지만 때로는 죄도 짓습니다.
구족을 알면 처처불상을 알게 된다.
‘아! 우주 만유의 전체가 다 일원상이구나!’
그러니까 개체 개체에게 사사불공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우주 만유가 다 진공묘유의 조화구나!’ 이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주 만유에게 불공이 제대로 가게 된다.
원불교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다름 아닌 불공 잘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불공을 누구에게 잘 하는가? 내 참마음에게도 잘 해야겠지만,
보는 데로 내 주위에게도 잘해야 한다. 맘에 든 사람, 예쁜 사람,
돈 있는 사람에게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그 사람에게 잘
하여야 한다. 게송은 내가 나중에 게송을 설명할 기회가 있을 때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면 하십시오.
===================== 질문 과 답변 ====================
Q_
동그라미라는 도형적인 모양에 기도를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다.
일원상의 내용을 기도 중에 생각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한번에
안 와 닿는다. 관한다는 말을 쓸 때 일원상을 관한다는 것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야 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한다.
A_교무님: 쉽게 이야기하겠다. 일원의 내용을 설명하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일원상은 무엇이냐? 법신불, 우주만유의 본원. 제불제성의
심인. 일체중생의 본성. 이것은 일원상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고,
일원상을 딱 보면 ‘신앙의 대상이다. 수행의 표본이다. 성불제중하는
화두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진리의 사진이라고 이야기한다. 참 나의 사진이다. 그래서 이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부모같이 숭배할 것이라고 대종사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진리의 내용을 사진을 찍었더니 일원상이다.
일원상을 기도할 때는 신앙의 대상으로 보고, 의두로써 풀어가거나
내 마음으로 지켜볼 때는 수행의 표본으로써 본다. 헷갈리죠? 그래서
원불교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고,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쉽다.
타 종교는 예수님.. 부처님.. 하고 끝나 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심인? 본성? 본원? 헷갈리죠?
타력으로 쓸 때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일원상이다.
권능과 위력 있는 대상의 부처님이다. 기도할 때도 그렇게 한다.
그런데 좌선하거나 평상시에 쳐다볼 때는 화두로써 굴리고,
내 마음 사진으로 수행으로써 바라다본다.
독경할 때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천도재 지낼 때, 특별기도 지낼 때는
독경은 수행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단어의 뜻을 생각지 않고 그대로
독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회 볼 때 아침 좌선 끝나고 아님 혼자서 할
때는 내용을 생각해야 한다. 수행할 때는 심인과 본성으로서 쳐다보고,
기도 할 때는 본원으로서 모시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과 수행을
병진한다. 수륙양용이라고 할 수 있다.
Q_신천숙: 우주만유는 한 가지로 돌아간다고 하셨는데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A_교무님: 우주 만유와 만법과 더불어 짝하는 것과 헷갈리시면 안됩니다.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것은 무형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만유는 유.무형을 말합니다. 거기까지..
Q_박원허: 교무님이 말씀하셨던 유무 자리에서 위기와 기회가 같이
온다고 하셨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위기가 올 때는 내가 잘못한 것은
다음에 고치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막상 어떤 기회가 오면 내가
힘든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싫어서 마음을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A_교무님: 집착일 것이다. 일이 어려울 때는 내 마음을 챙겨야지 합니다.
그리고 그걸 기회 삼을 수 있는데 일이 잘 풀릴 때는 그것도 공부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칭찬을 받아보면 얼마나 공부가 잘 되는가? 이러니까
도도해질 수 있구나, 교만이 나올 수도 있구나. 이런 마음을 어떻게
공부 삼을 것인가? 이것이 동정일여의 공부입니다.
어떤 사람은 칭찬만 받으려고만 해서 문제다. 충고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칭찬해주지 마세요! 하기도 한다. 다 공부거리다.
날씨가 가물었더니 나무 뿌리가 깊이 땅 속에 박힌다.
제가 오늘 교리도를 설명했는데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원불교 교리 설명하고 있네!’
제가 원불교 교리 설명했습니까? 나는 원불교 교리를 설명한 적이 없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내 마음을 말한 것이고, 우리의 마음을 말한
것이고, 사실 그대로 내 본성이 일원상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 마음 공부를 잘 한 사람이 제불제성의 심인이라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대상 대상이 우주만유로서 위력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말씀 드렸지 원불교 교리를 설명한 적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실을 말 했고, 현실을 말 했고, 이것을 잘 응용하면
원불교라는 종교를 떠나서 내 삶에 복이 되고 혜가 된다.
우주만유의 본원을 잘 신앙하고 불공하면 복이 옵니다. 그리고 일체
중생의 본성을 삼학 수행을 통하여 심인으로 만들어가면 그 안에서
지혜가 쏟아진다. 모든 사람의 소원을 모아버리면, 결국 복과 혜
두 가지이다. 그것을 하도록 대종사님이 말씀해 주시고 저는 그것을
설명했을 뿐이다. 원불교 교리를 말한 적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이야기한 것이며, 이것을 제대로 알고 쓰면 행복에
가장 빨리 도달할 것을 설명했을 뿐이다.
마치겠습니다.
타이핑: 김혜민,
편 집:
|
첫댓글 정말로 깔끔한 정리입니다. 중간에 표까지도.. 거의 완벽하게 재생하신 듯...! 감사합니다~! 김정원 교도님...~!
깔끔한 타이핑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순명 교우님도 좋은 하루 ^^
^^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애독해 주니 고맙습니다. ^^ v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긴 글 읽어주신 손대호님의 열정이 더더욱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정기구독하시는 허석교우님 항상 고맙습니다. ^^
심,성 에 대한 도표가 바로 밑 설법내용과 상이 합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요.
심 - 동 - 묘유, 성 - 정 -진공이 아닌가요?....^*^
두번째 공부입니다. 처음 공부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와 닿습니다.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