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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이 글 강은주
첫 아이... 그 단어 하나만으로도 나의 가슴이 설레고 떨린다. 나의 첫아이는 이름이 '새나'다. 두 차례의 유산 끝에 어렵게 얻은 딸로, "(살아서) 새로 나왔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내 인생의 분신과 다름없었다. 나와 내 가족의 행복과 불행, 사랑과 기쁨, 슬픔과 절망, 그리고 희망의... '새나'를 생각하면, 내 머릿속에 천 가지 만 가지 상념이 번개처럼 바람처럼 스쳐지나간다.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나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다. 문득 내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짤막한 필름처럼 떠오른다. 때는 바야흐로 1960년대, 그 당시 우리 집은 큰 부잣집이었다. 신설동에 큰 집을 가지고 살았는데,'동대문밖 부잣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집에는 꽤 많은 식구들이 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과 고모에 오빠 셋, 여동생 하나 등 모두를 다 합치면 15명이나 한 집에서 사는 대가족이었다. 그러나 집은 늘 넉넉하고 풍요했다. 도대체 부족함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나에 대한 사랑도 차고 넘쳤다. 특히 나는 집안의 온갖 사랑을 독차지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세 명의 오빠를 낳고 맞게 된 첫 딸이었기에, 나를 향한 아빠의 사랑은 대단했다. 항상 나를 끼고 사셨다. 아침 출근길에 아빠가 까칠한 수염을 내 볼에 부비시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면 나는 “싫어 싫어 따가워요!” 하며 냅다 소리를 질러 까탈을 부렸고, 그 모습에 아빠는 오히려 큰 행복을 느끼셨다. 그렇게 까탈을 부리다가도 정작 아빠가 손목을 풀고 집을 나서면 아빠의 등을 향해 엉엉 울면서 “아빠 가지마~” 하고 더 크게 울어댔다. 그러면 또 그 모습이 더 사랑스러웠는지 아빠는 다시 돌아서 나를 안고 내 볼을 보드랍게 쓰다듬고 나가셨다.
나는 유독 군만두를 좋아했다. 아빠는 여러 식구의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퇴근길에는 거의 예외 없이 내가 좋아하는 군만두를 가슴팍 깊이 감추고 들어오셔서, 다른 식구들 몰래 나에게만 건네 주셨다. 아마도 그 모습이 나를 유난히 사랑하셨던 아빠의 마음을 가장 예쁘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이런 '최상의 조건'을 가지고 보냈기에 정말이지 세상에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당시 내 별명은 '깍쟁이'였다. 별명처럼 사실 깍쟁이 노릇을 꽤 많이도 했던 것 같다. 그렇듯 천방지축 동네방네 놀러 다니며 밝고 명랑하게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사춘기를 맞고부터는 스포츠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운동선수나 체육학과 진학을 목표로 삼은 것도 아닌데 스키, 테니스, 탁구, 오토바이 경주 등에 빠져 들었고, 전국 스키대회에서는 '대학부 1등'의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어 오니 제 잘난 맛에 나의 남자 보는 눈은 꼭대기에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그러니, 대학 시절 웬만한 남자는 만나도 눈에 차지가 않았다.
그런데, 대학 3학년 어느 날이었다. 연세대학교 대학신문인 '연세춘추' 편집국장을 맡고 있는 남학생이 축제 파트너를 찾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연세대를 다니던 내 사촌여동생이 그 남학생을 소개해 주겠노라는 전갈을 보냈다. "이게 웬 떡이야" 하며 집 대문을 나서던 때가 기억난다. 그러나 그 기쁨의 순간도 잠시, 미팅 장소에서 만난 그 남학생이 어찌나 못생긴 남자였는지, 나는 실망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 남학생을 소개한 사촌여동생에게 당장 전화를 걸었다. "야 이년아~ 네가 나를 뭘로 보고 그렇게 못생긴 남자를 소개한거야!!" 그러나 뜻밖의 응답이 돌아왔다. "언니, 그러지 마. 걔가 그래도 연대에서 난다 긴다 하는 애야. 잘해봐~" 지금의 남편, 곧 새나 아빠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자는 귀가 얇다 했던가! 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대학 캠퍼스에서 난다 긴다 하는 남학생이라 하니 다시 안 만나 볼 수도 없잖은가? 다음날 축제 파티에서 다시 만난 그는 정말 소문처럼 날고 기었다. 분위기를 손에 넣고 좌지우지하면서 어찌나 거침없이 행동하고 어찌나 잘 놀던지... 게다가 기타를 치며 송창식의 '딩동댕 지난여름'을 부르는 순간 나는 뿅 가버렸다. 내 앞에 '못생긴 남자'의 얼굴은 사라지고,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의 한 남자가 나의 가슴을 휘어잡고 점점 내 마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을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하나 ‘금상첨화’라고 해야 하나... 때마침 축제가 끝나자마자 첫눈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 첫눈을 함께 밟으며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하면서 우리 둘은 결국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보름에 걸친 '에브리데이 데이트(Everyday Date)'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오래 가지 못했다. 연세춘추 편집국장이던 그 남학생이 몇 차례 필화사건을 겪더니만(당시는 유신시절로 헌법의 'ㅎ'자만 활자화해도 사형선고가 내려지던 시절이었다) 마침내는 긴급조치 9호로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고, 수배와 구치소 생활을 거쳐 급기야 군대에 강제 징집되는 일이 벌어졌다. 울며불며 3년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일곱 번 헤어졌다.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를 계속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고통이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어디 한 군데 뚫린 곳이 없는 깜깜한 미래를 내다보며 수많은 절망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는 헤어졌다. "너라도 희망을 찾아 떠나라"며... 그렇게 몇 날 며칠 몇 달을 보내다가 우리는 다시 만났다.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며...그렇게 일곱 번을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났다. 주변 여건도 만만찮았다.
시골교회 목사를 아버지로 둔 그 남자의 가정에서는 우리 집이 불교집안이라는 이유로, 우리 집에서는 그 남자가 '미래가 없는 제적학생'이라는 이유로,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결혼에 반대했다.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결혼을 한 우리 둘은 어렵사리 서울 아현동 386번지 산꼭대기에 위치한 집을 전세 내고 전기밥솥 하나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파헤쳐 나가야 된다는 생각에 '행복의 문'이라는 간판을 건 웨딩드레스 가게를 열어 생활전선에 첫 발을 디뎠다. 나는 행복했던 유년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이내 이를 깨물며 그 행복했던 기억들을 지워냈다. "내 지금은 비록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열심히 일해서 알뜰살뜰 돈 모아 집도 사고, 예쁜 옷도 사고, 맛있는 것도 사먹겠노라" 나의 소박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 소박한 꿈마저 처음부터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해 시골에서 올라와 오갈 데가 없었던 시동생, 시누이가 코딱지만한 산꼭대기 우리 신혼 방에 보따리를 들고 찾아온 것이다. 나의 투정과 불만이 며칠 동안 이어지면 남편은 "조금만 서로 견디면 다 잘 될 거야"라는 말로 나를 위로했다. 그러면 바보 같은 나는 그 남편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아침 일찍부터 시동생 시누이의 도시락 챙기기에 급급했고, 이어 웨딩드레스 장사 준비에 부산을 떨곤 했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일말의 각오 하나로 애써 웃음 지으며 웨딩드레스 가게를 운영해 갔지만, 사실 그 삶은 삶이 아닌 고난의 연속이었다. 웨딩드레스 장사는 '대여', 곧 '한 번 빌려주고 돌려받는 것'이 비즈니스의 중심이다. 그렇게 대여를 해주고 나서 예식 직후 다시 돌려받으면, 나는 그 길고 치렁치렁한 웨딩드레스를 빨아 다시 '새 것'으로 만들어 가게 윈도우에 걸어놓아야 했다. 그런데 그 일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치렁치렁한 옷을 혼자서 겨우겨우 들고 빨아 널고, 약간 마를라 치면 풀을 엷게 타서 먹이고 다시 말리고, 다 마르면 다리미로 또 다려야 했다. 이 일은 내가 해야 할 당연한 몫이건만, 순간순간 숨이 막힐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하얀 색만 봐도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러나 그보다 나를 진정 더 힘들게 했던 것이 또 있었다. 대로변 '행복의 문' 가게에서 아현동 산꼭대기 전세집까지, 하루에 적어도 예닐곱 번은 오르락거려야 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신체적인 부담이 계속 누적되고, 게다가 시동생 대학 등록금 마련하랴, 용돈 마련하랴, 정신적 물질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어느 날 시아버님이 아프셔서 입원하면 병원에 가서 간호해 드리는 일도 몽땅 내 몫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돈은 모이는 족족 다 새어 나가니 제 아무리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 체질이라 한들 소용이 없었다. 사람이란 게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마음이 지치면 몸이 지치고, 몸이 지치면 또 마음이 괴롭고, 그러다 보면 주변사람도 힘들고, 이러한 악순환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되풀이 되어졌다.
그런 삶이 계속 이어지던 그 때에, 어느새 나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아이가 들어선 것이다. 전심을 다해 태교를 했어야 하는데,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 자신을 관리했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재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나에게 여유란 사치에 불과했다. 임신 중에도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산동네에서 이사를 수차례 경험해야 했으며, 남편이 목숨처럼 아끼는 소중한 책들을 매번 내손으로 직접 날라야만 했다.
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한 일인데 뱃속의 아이는 너무나 힘들었는지,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었는지 결국 유산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8개월만의 늦은 유산이었다. 자궁 경부가 하중에 못 견뎌 일찍 열리는 바람에 양수가 밑으로 터져 쏟아지면서 발생한, 고통스러운 유산이었다. 8개월 된 태아의 유산은 '출생신고'와 '사망신고'를 해야 비로소 화장 처리 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 자식을 사망신고하고 하늘나라로 보낸 부모의 마음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슬픔 가운데에서도 현실은 냉정했다. 내가 다시 생업에 뛰어들지 않으면 여럿이 굶게 될 처지였다. 더 큰 절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생긴 나의 삶의 철학이 "차라리 죽었다 치자"였다. 나하나 죽은 셈 치고 열심히 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 그것이 뱃속에서 곧바로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내 자식을 위한 도리이겠지... 당시 이따금 친구들이 같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면 나처럼 삶에 지쳐 있거나 생활고를 겪고 있는 친구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내 상황이 어려워서인지 다른 친구들은 하나같이 넉넉해 보였고 여유롭게 보일 뿐이었다. 이런 친구 모임이 있는 날이면 돌아오는 발걸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날은 여지없이 남편 앞에서 눈물을 쏟고 불만을 토로하고 소리를 높였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요지부동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 더 좋은 일이 있을거요." 그러면서 내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감싸며 위로해 주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괴로워도, 한 여인이 한 남자에게 진정으로 위로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조건 하나만으로도 살아갈 이유가 되고, 살아갈 힘을 다시금 얻을 수 있음을 나는 수없이 경험했다. 우리는 사랑했다.
그리고 다시금 아이가 뱃속에 생겨났다. 그러나 삶은 결코 나에게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두 번째의 유산을 다시 경험하고 내 인생은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어갔다. 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건지, 난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가는 건지, 정말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건지, 깊은 우울증이 가슴에 파고들어 또아리를 틀었다. 삶을 비난하고 회의하는 생각들에 사로잡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옛 말을 되살려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직도 나에겐 더 감당해야할 고난들이 남아 기다리고 있었다.
시아버님이 목회 일선에서 정년퇴직을 하시면서 당신이 소장하시던 산더미 같은 책들이 우리 집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말이 책이지, 나에게 있어서 책은 무겁기만 하고 득이라곤 될 게 없는 골칫덩어리에 불과했다. 하루는 이사 중에 너무 힘들고 억울해서 "여보, 이 오래된 거지같은 책들 좀 제발 버립시다!" 라고 윽박질렀다. 책이 싫었다기보다는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그랬을까? 나의 눈에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또 한 번 힘없이 무너진 나를 일으켜 세운 것도 남편이었다. "그건 내 아버지의 유산이요."
뒤늦게나마 하늘도 감동했는지, 서서히 우리네 삶에도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글쟁이'로 태어나 글쓰기를 목숨보다 소중히 하는 남편에게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사 기자로 일할 기회가 주어졌고, 거기에 박자를 맞추어 내가 운영하는 웨딩드레스 장사도 호황기를 누리는 일생일대 최대의 축복이 주어졌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는 표현보다는 재정난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는 표현이 어쩌면 더 적절할지 모른다. 그러나 재정난에서 탈출했다는 자체 하나로도 나에게는 너무 큰 기쁨이었고, 그 기쁨으로 삶에 조금씩 여유도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또 한 번 애기가 뱃속에 들어섰다. 이번만큼은 꼭 새 생명을 살아서 세상밖에 내보이리라! 깊은 각오와 다짐을 하루에도 수 십 번을 반복했다. 그 마음을 남편도 느꼈는지 내가 무거운 배를 이끌고 산꼭대기 집을 향해 오를 때마다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내 엉덩이를 밀어주고 받쳐주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삶의 한 부분일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 당연한 삶이 가장 큰 행복이었고, 가장 큰 감동이었다.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는 말처럼, 생활고를 극복하고 나니 우리네 부부가 서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더욱 자라나게 되고 미래에 꿈과 희망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1979년 5월 15일. 드디어 내 사랑하는 첫아이 '새나'가 살아서 세상에 나왔다. 아빠를 너무나도 꼭 닮아 마치 붕어빵 기계로 찍어 나온 듯한 새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웃다가 울었다. 나도 모를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마치 원숭이인양 새까만 솜털에 뒤덮여서 나온 새나의 모습이 마치 극한의 고난을 견디기 위해 따뜻한 보호막을 덮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도 남들처럼 한번 순산의 희열에, 그 감동의 시간에 오래 젖어보고자 했건만 아이는 매정하게도 나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이 아이가 어찌나 울음소리도 크고 목소리도 허스키 하던지, 마치 사내아이가 나온 듯 했다. 결국 나는 울다말고 다시 웃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첫 아이가 나를 웃기고 울리더니, 다시 울다가 웃게 만든 것이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 그렇게 세상 밖으로 태어난 내 딸 새나는, 그냥 딸이라고 하기엔 그 소중함이 너무나도 컸다. 새나는 나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너무나 큰 희망이었으며,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힘을 불어 넣어주는 원동력이었고, 내 입가에 미소를 그려주는 인류 최고의 화가이기도 했다. 새나의 존재는 무엇보다 나를, 내 삶을 변화시켰다. 나를 숨 쉬게 하고,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나로 하여금 다시 사랑하며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 위대하다는 '모성애'는 그 어떤 교육 없이도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었나 보다.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고, 깨물어 주고 싶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예쁜 그 아이는 내가 몸담고 있는 모든 삶의 현장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이 사랑하는 첫 아이 새나에게 미안한 마음도 컸다. 내가 어렸을 적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랑과 풍요 속에 자란 것에 비해, 새나는 그 어떤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인형이나 장난감을 사줘본 적이 없었고, 옷도 죄다 어디서 주워오거나 친척집에서 물려 입는 것들뿐이었다. 예전에 동네 놀이터에서 찍은 새나의 사진을 보면 궁핍과 가난에 찌들어 있는 모습이 그대로 박혀 있다. 유치원도 보낼 만한 여유가 없었다.
친구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가르치며 자랑할 때, 나는 그저 새나를 등에 업은 채 생활을 꾸려나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미의 마음을 새나도 이해했는지 어딜 가도 기죽거나 풀이 죽어서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너무나도 활달하고 구김살이 없어 마치 "우리가 지금은 가진 것 없어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선언이라도 하는 듯 산동네 방방곳곳을 휘젓고 다녔다. 추운 겨울이 되면 장롱 깊숙이 넣어 둔 여름옷들을 꺼내 입고 '패션쇼'를 당당히 벌이는가 하면, 무더운 여름에는 또 거꾸로 겨울옷들을 잔뜩 껴입는 그 '튀는' 모습으로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아이였다. 이따금씩 동네 어귀에 목마를 태워주는 아저씨가 나타났다 하면 네 발로 혼자 기어나갈 정도로 장난감 목마타기를 좋아했던 우리 새나. 그 밝음이, 그 활발함이, 그 당당함이 나에겐 한없는 감사와 기쁨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새나에게 준 것도 하나 없고, 큰 자랑도 되지 못한 것 같은데, 새나는 늘 나에게 기쁨을 안겨다 주었고, 때마다 고비마다 큰 자랑이 되어 주었다. 이 사랑스러운 딸이 어느덧 장성하여 작년(2005년)에는 의젓한 사위를 만나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고, 또 얼마 전에는 예쁜 공주님을 낳아서 너무나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나 없이도 잘할 수 있겠지. 새나라면 잘 해낼 수 있겠지. 나에게는 여전히 너무나 큰 희망인 새나를 향한 편지로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사랑하는 딸 새나야. 너를 하늘의 선물로 받은 지도 어느덧 28년이란 세월이 흘러갔구나.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하면서 지내왔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숨 가쁘게 앞만 보며 달려왔던 것만 같구나. 조금 더 너에게 잘해줬어야 했는데, 조금 더 너를 사랑해줬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늘 엄마 가슴에 맴돈단다. 사랑하는 내 첫아이 새나에게 불행이 아닌 행복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궁핍과 가난이 아닌 풍요와 여유를, 그리고 물질의 풍요와 여유만이 아닌 마음의 풍요와 여유를 안겨주고 싶었던 어미의 마음을, 그로인해 앞만 보며 달려왔던 내 모습을 이제는 새나도 이해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 비록 너에게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이나 물질로 채워주진 못했지만, 내가 살아왔던 모습들을 통해 너의 삶에 지침이 되고 그로인해 축복이 가득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남편을 존경하고 서로 사랑하거라. 요즘같이 쉽게 헤어지고 자기 자신만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세상의 흐름에 휩싸이지 말고 어려울수록 서로를 의지하고, 미워질수록 서로를 사랑하는 지혜를 가져야만 한다. 극도의 어려움 가운데 지쳐있던 네 엄마의 손을 따스히 보듬어주었던 아버지의 손길이, 지금도 나의 가슴을 촉촉이 적시고, 무한한 사랑의 시발점이 되었듯이 너희들도 서로를 그렇게 사랑하고 위로하고 존경하기를 바란다. 나에겐 한때 골칫덩어리였을 뿐이었던 그 수많은 책들이 지금은 네 아버지의 영혼의 샘물이 되어서 180만 명 가족의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거듭난 것처럼, 너희도 어려움을 견디며 참고 인내하다 보면 기적 같은 열매들을 맺을 것이라 확신한다.
사랑하는 새나야. 항상 남들을 위해 베풀며 살아가거라.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이며 목적인 것을 깨닫길 바란다. 엄마가 없는 가운데에서 어렵사리 부양했던 시동생, 시누이들이 20년이 지난 지금은 훌륭하게 성장하여 사랑을 베푸는 목사님이 되시고, 또 미국으로 진출해 사업에 성공한 모습을 보면 더없이 흐뭇하단다. 너보다 가난한 이웃들을 항상 사랑으로 섬기고 씨앗을 뿌리다 보면 그것이 무럭무럭 자라나 언젠가는 너의 삶에도 기름진 축복으로 보답될 것임을 엄마가 약속한다. 엄마가 살았던 모습보다도 더 멋지게, 더 아름답게 살아서 이 아름다운 세상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자랑스러운 내 딸이 되길 바란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또 사랑한다.
엄마가...
- 출처: 샘터사 발간 '첫 아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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